3월말인데 몹시 추웠다. 외출했다 돌아와서는 씻지도 않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손도 발도 그리고 온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보일러를 틀어줬다. 잠시후 몸이 녹고, 씻고, 잠을 청하려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남동생이 맥주를 사가지고 들어와서는 같이 마시자고 했다. 나는 싫다고, 자겠다고 했다. 남동생은 정말로 진심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잤는데,
새벽에 깼다. 두시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하겠더라.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웃어넘기기엔 좀 슬픈 책.
-네 말이 맞아, 내 귀여운 것. 난 돌아왔어. 하지만 난 이제 뭘 가지고 일을 해? 톱질할 판자를 뭘로 잡느냔 말이야. 내 윗도리의 텅 빈 소맷자락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젊은이가 비웃으며 말했다.
-나도 살아 돌아왔어. 아랫도리가 마비되긴 했지만. 다리는 물론 그 나머지 것도 말을 듣지 않아. 차라리 한방에 아주 가는 편이 나을 뻔했어.
다른 여자가 말했다.
-당신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나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모두들 그러더군요.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난 살고 싶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 아내도 보고 어머니도 보고 싶어.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 입 닥쳐. 여자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궂은 일,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야지, 부상병들 돌바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 남았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병은 다쳐서 영웅. 전쟁을 일으킨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전쟁은 당신들 거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
모두들 왁자지껄 떠들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아무도 이런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 아무도, 아무도.
따뜻한 차 한잔이 간절했다. 따뜻하고 맛있는 차.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실에서는 남동생이 텔레비젼을 켜두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남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니 방 가서 자. 그리고 물을 끓였다. 따뜻하고 맛있는 유자차를 한잔 해야지. 컵을 꺼내고 숟가락을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유자차를 꺼냈는데, 그 유자차 병 속엔,
된장이 가득 들어있었다. 유자차는 없었다.
인생은 이따위다.
유자차병 속엔 된장이 가득 들어있고, 꿈 속에선 나를 들뜨게 하는 남자 대신 직장 상사가 나왔다.
유자차대신 녹차를 마셨지만, 꿈은 오늘 밤 잠자면서 또 꿀 수 있을테지만, 어쩐지 모든게 다 서운하고 쓸쓸하다.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아침이다.
종종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꼭 그 마음만큼 달에서 도로 데려오고 싶은 상대는 좀처럼 꿈에 나타나주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