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탄광이 없어질까봐 데모를 하는 아버지가 있고, 쓸데없이 데모는 왜 해 어차피 없어질 걸, 하고 술을 마시며 중얼대는 부르조아 아버지가 있다. 전혀 다른 이 두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게 될까?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아낌없이 모든걸 다 해주고 싶을 것이다. 최상의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고, 최고의 옷을 입혀 주고 싶고,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중 어떤 부모들은 실제로 이 모든게 가능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며칠전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 역시 그랬다. 최고의 것들을, 더 많은 다양한 것들을 내 아들에게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그랬다. 

"그치. 그렇겠지, 당연히. 근데 h야, 니 자식에게 최고의 경험들을 주는 것도 중요한데, 반드시 그런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좀 같이 알려줘. 얘야, 나는 너에게 좋은 것들을 잔뜩 해주지만, 어떤 아이들은 이것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단다. 니가 누리고 있는 이것들이 모두에게 당연한 건 아니야, 라고 말야." 

 

 

 

 

이 책속의 제이미는 친구가 없다. 스쿨 버스에서도 언제나 혼자이고 교실에서도 언제나 혼자. 아이들은 제이미를 '똥꾸멍'이라 놀리고 선생님은 윽박지르기에 바쁘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학교에 와야 하는 날에도 제이미는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개떡같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사실 제이미의 마음속엔 엄청난 비밀과 상처가 쌓여있는데, 친구들도 선생님도, 알지도 못하면서 제이미를 자꾸만 자꾸만 몰아붙인다.  게다가 이 책속의 밀러 선생님은 정말이지 엉망이다. 제이미의 이름을 언제나 제임스라고 잘못 부르면서 괜찮은 어른의 모양새를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유명한 작가를 초대해 글쓰기 강의를 듣는데, 그 작가가 묘사하는 글을 써서 제출하라고 한다. 제이미는 어떤 것을 써야할지 몰라 백지를 낸다. 밀러 선생은 짜증을 냈지만 작가 아저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란 앞으로 멋진 일이 일어날 징조거든요."

그런데 멍청한 밀러 선생은 이따위로 행동한다. 

"나라면 기대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그러고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종이를 구겨서 작은 뭉치로 만들더니 책상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PP.90-91) 

나는 가끔 내가 어렸을 때 내 주변에 괜찮은 어른이 있었다면, 나 역시 지금보다 더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정도의 인간밖에 되지 못한 것은 나 스스로의 문제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주변 환경의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원망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계속 자라고 있을 때, 누군가 '지금 니가 아는게 다가 아니야' 라거나 '그것말고 이런 방법도 있지' 라던가 '너는 이걸 한번 해보는게 어떻겠니' 라고 얘기해 주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 어떤 누구도 넌 어느쪽에 재능이 있으니 그 쪽으로 가보렴, 너는 이런 전공을 선택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에게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다른걸 선택할 것 같다. 내게 더 나은것, 내가 그나마 조금 더 하고 싶은것이 뭔지는 어렴풋이 알게 됐으니까.  

물론,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그 때가 오기는 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그런 때가 말이다. 나랑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렇지만, 괜찮은 어른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고 도와준다면 그 시기는 조금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 아이는 조금 더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해 갈 수도 있다. 

사실 이 책 『기억의 빈자리』는 '괜찮은 어른'에 대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상처받은 소년의 이야기다. 자신이 당했던 것을 완벽하게 잊고 싶어하는 소년의 이야기. 이 소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것도 어른이고, 이 소년에게 끊임없는 자책을 심어준 것도 어른이다. 그러나 이 소년을 위로하는 것도 어른이고 이 소년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어른이다. 그래서 이 소년 제이미는 '완전히 다른 어른' 이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제이미가 완전히 자신의 상처를 잊을 수는 없을것이다. 그렇지만 괜찮은 어른들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진심으로 제이미를 포옹해주고, 제이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조금 아주 조금쯤은 제이미의 상처가 아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망만 가득한 제이미의 가슴에 한가닥 희망이 자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치유는 불가능하다 해도 어떤 부분만큼은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소년을 괜찮은 어른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괜찮은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다. 상처받은 소년을 괜찮은 어른이 되게 도와주는 것, 그게 바로 괜찮은 어른인 것이다.  

금세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나는 이런 책을 써준 작가와, 이런 책을 번역해준 번역가, 그리고 이런 책을 편집해준 편집자와, 이런 책을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출판해준 출판사에게 고맙다. 그들은 대부분 괜찮은 어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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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괜찮은, 썩 괜찮은 어른을 만났다는 것
    from ............ 2009-10-15 12:01 
    실제 <기억의 빈자리>라는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원제인 <Jumping the scratch>와 비교할 때 고개를 꺄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의 빈자리>라는 제목은 치매를 연상시키며 청소년의 알츠하이머질환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년의 끔직한 체험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동화작가와 친구의 도움
 
 
레와 2009-10-0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어른보다, 안좋은 나쁜 어른들이 먼저 기억나요. =.=


'어른'이란 두글자에 포함된 책임이 무겁습니다.

다락방 2009-10-09 16: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레와님. 저 역시 아직까지 기억하는 어른은 좋은 어른보다 제게 '나쁜 어른'이었던 사람이에요. 전 아마 평생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그 나쁜 어른들을.

치니 2009-10-0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이, 자기들도 어른이 되기 전의 시절을 지내왔다는 걸 항상 기억한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에요. :)

다락방 2009-10-10 12:21   좋아요 0 | URL
저는 괜찮은 어른이 어떤건지는 대충 감이 잡히는데 스스로는 아직 괜찮은 어른이 되지 못한것 같아 고민이에요. 이게 언제나 숙제 같은걸로 제게 남아있는 거죠.

2009-10-09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0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alei 2009-10-0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게도(?) 제겐 나쁜 어른들의 기억이 없어요.
나쁜 어른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나쁜 어른이 될 수는 없죠.
(그냥, 길에 똥이 있구나... 똥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은 없죠? 아마? 그런가?)

다락방 2009-10-10 12:42   좋아요 0 | URL
저에겐 나쁜 어른의 기억이 아주 강하게 있어요. 길에 똥이 있다면 상처 받지 않겠지만 그 똥이 내 몸에 묻으면 똥독 오르잖아요. 똥은 그래서 피해야 해요.

[해이] 2009-10-1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능 읽고싶네요ㅋ

다락방 2009-10-10 12:27   좋아요 0 | URL
성추행당한 제이미에게 미안할 정도로 책은 금세 읽혀요, 헤이님. 그렇지만 책을 읽고난 뒤의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지요. 해이님, 나쁜 어른들좀 혼내주세요!

2009-10-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0-1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받은 어른은 위험하지만 상처받은 아이는 위험에 처한 것이지요. 저는 정말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저 되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일이, 이제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까지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다락방 2009-10-11 20:09   좋아요 0 | URL
네, Jude님. 저 역시 정말로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상처받은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그저 사랑만 준다고 다 해결되는게 아니라는걸 알기때문데 더 답답하지요.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다짐만으로 되는거라면 정말 좋겠지만, 때로는 다짐대로 살지는 못할거란걸 알아요. 그럴때 Jude님과 저는 서로에게 격려해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로에게 괜찮은 어른이 되라고 말 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주기로 해요.

2009-10-12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2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9-10-1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아, 작가와 편집자, 출판사에게 정말 멋진 칭찬이에요. 다락님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 괜찮은 어른이 된 거예요? 응? 둘레에 백만대군으로 좋은 어른이 있었던 거야? 응?

다락방 2009-10-12 09:29   좋아요 0 | URL
아뇨아뇨아뇨아뇨. 둘레에 괜찮은 어른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다만 어른이 되고 나서 네꼬님을 만났기 때문이죠. 네꼬님하고 친구가 되었더니 제가 점점 더 괜찮은 인간이 되더라구요. 헤헷 :)

또치 2009-10-12 12:54   좋아요 0 | URL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여자사람을 만나면 괜찮은 인간이 된다는 뜻?

다락방 2009-10-12 13:04   좋아요 0 | URL
네, 그런것 같아요 또치님. 세상에는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여자사람보다 더 나은 어른은 없죠, 암요. 후훗.

기억의집 2009-10-14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너무나 감격해 갑자기 저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이 생각나 순간적으로 쓴 글인데, 끝내지를 못 했어요. 어제 저녁에 아이가 뭐 해달라고 해서 그거 먼저 처리하고 나니 애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마무리져야지 했는데...다락방님 먼댓글에는 뜨는군요. 신기^^

다락방 2009-10-14 09:17   좋아요 0 | URL
네. 제 먼댓글에는 뜨는데 들어가면 비밀글이라 먼댓글이 실수인지, 비밀로 감춘게 실수인지 뭐 하나는 실수하신게 아닐까 싶어서요. 하핫.

Kir 2009-10-1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괜찮은 어른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저도 별로 만난 적이 없네요. 실감하지 못하고 살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정말 멋진 페이퍼예요, 다락방님.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09-10-16 13:07   좋아요 0 | URL
음, 저 역시 그래요. 저 역시 실감하지 못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나는 왜 괜찮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유치한걸까, 한답니다. 그러니 Kircheis님, 우리 함께 노력해요. 그리고 칭찬 고마워요, Kircheis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