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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처음에는 그렇게나 장황한 묘사 때문에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나,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읽기가 그렇게까지 힘들어지진 않았다. 그건 같이 읽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는데, 연회나 파티의 지루한 묘사를 벗어나, 화자의 내면 묘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물론 그 내면은 집착과 망상이었지만, 파티에서 부자들이 모여서 족보 얘기하는 걸 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노라면, 처음에는 사교게를 비판하는 것 같다가, 그러나 화자가 비판하는 것이 사교계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계층의 인간, 집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비판을 하지만, 그러나 뒤로 넘기다보면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보이는 것만큼 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계급과 그리고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읽다보면, 어느새 화자가 개인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 그 관계속에서의 인간에 대해 읽고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는 당연히 감정이 끼어들고, 그 감정은 시기 질투 미움일 수도 있지만 사랑이고 집착이고 욕망이며 망상일 수도 있다. 화자의 소녀들에 대한 사랑과 집착 그리고 망상은 너무나 길게 이어지는데, 읽다보면 이건 진짜 미친놈 아닌가 싶어지고, 또한 이렇게나 망상을 하며 돈을 흥청망청 써댈 수 있는 화자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 아니꼬운 마음도 생기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묘한건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전장에서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러나 그 전쟁속에서도 이 사교계가 어떻게 굴러가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는 거다. 파리라는 도시에도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들, 그러나 전쟁이 아니어도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 파괴를 그리고 타인에 대한 파괴를 일삼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13권에 이르면, 비로소 '아 이래서였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끝을 맺는다. 누구는 행복해지고 누구는 불행해지고 하는 식의 결말이 아니다. 13권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의 화자가 연회에 참석하고, 피아노 연주중이라 연회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기다리다가, 그곳에서 책들을 보게 되고, 어린시절 각인되었던 책, 그리고 책이란 것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 그리고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어? 갑자기 문학 이야기가? 결국 예술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화자는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마치 '가면 무도회'에 온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실제의 가면mask 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이제 늙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그만큼 많이 변해버린 것을 의미했다. 약해져버린 몸, 늙어버린 얼굴, 주름살과 흰머리.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겠고 드물게도 어떤 사람들은 아직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 그렇다, 이야기는 마침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며, 그것은 단순히 젊은 시절임과 동시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문학이 된다.
사람들의 삶과 거기에서 오는 감정이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한 사건과 또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은 비슷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만 기록하는 것 말고, 그것들을 붙잡고 녹여내서 표현하는 것, 그 안에 담긴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며 예술이라고 화자는 얘기한다. 화자를 그토록이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고뇌하게 만들었던, 그가 젊은 시절 상실했던 연인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게 되지만, 그 때의 감정을 문장이나 그림으로 표현해 두었다면, 그것은 존재의 소멸 뒤에도 살아남는다. 결국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그리고 그 관계, 거기에서 파생되는 감정은, 오래 살아남을 예술을 위한 매개인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번역본으로는 13권이나 되는 대작인만큼, 그렇다면 이 소설을 써내기 위해 작가는 당연하게도 문학에 대해 그리고 예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 당연한 이야기가 마지막 권에서 나타나는 거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마지막 '나무다리'가 정말 인상깊다.
나는 게르망트 공작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면서 나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자기 아래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탄했지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려고 하자마자, 단단한 것이라곤 금속 십자가 밖에 없지만 주위에 젊고 활기찬 신학생들이 몰려드는 늙은 대주교의 다리처럼, 왜 그가 휘청거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는지, 또 여든세 살이라는 거의 감당 못 할 꼭대기에 놓인 나뭇잎처럼 몸을 떨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이는 마치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나무 다리(두 개의 긴 막대기 위에 평평한 발판을 붙여 그 위에 발을 놓고 걸어가는 놀이에서 사용되는 나무 다리 또는 대말을 가리킨다),* 끊임없이 자라 때로는 종탑보다 더 높아진 나무 다리 위에 놓여 있어 드디어는 걷기가 힘들고 위험해지고 그러다 갑자기 떨어진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어느 일정 나이가지난 사람의 얼굴은 가장 무지한 사람의 눈에도 젊은 사람의 얼굴과 혼동되지 않으며, 또 일종의 구름 같은 진지함을 통해서만 나타나는것은 아닐까?) 나의 나무 다리가 이미 발아래 높이 솟아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겁이 났고, 이미 그렇게 멀리 내려가 있는 과거를 오래 붙잡아 둘 힘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13권, p.330
아아, 이것은 얼마나 절묘한 비유인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내가 지탱하는 나의 나무 다리가 계자란다는 것이고, 아직 그 다리가 짧을 때에는 바닥에 있는 걸 줍기 쉽지만, 그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나는 바닥에 있는 것을 주울 수가 없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과거를 결코 되돌릴 수가 없으며,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지는 못해도 그것을 바라볼 수는 있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지켜보는 것, 그것은 내 잃어버린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읽기 힘들었지만, 그러나 읽기를 잘했다. 마지막 13권에 이르러서는 아, 이러려고 그랬구나, 이러려고 그랬어, 라고 생각할 수 있어 너무나 좋은 독서였다. 너무 힘든 독서여정이라 쉽게 일독을 권한다할 수는 없지만, 시작하신 분들이라면 어떻게든 마지막 13권까지 꼭 닿기를 바란다. 정들어버린 인물들의 나이든 모습을 만나며 동시에 거기에는 인간과 관계, 삶과 회환이 있고, 무엇보다 문학과 예술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