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무선 이어폰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산 적도 없다. 가지고 있는 유선 이어폰이 고장나지 않아서 계속 사용해왔는데 최근에 고장났을 때는 고민없이 또 유선 이어폰으로 샀다. 내가 달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보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도 런데이앱 재생해놓고 나는 유선 이어폰을 꽂고 달렸다.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혹은 허리에 두르는 작은 가방안에 핸드폰을 넣고, 그러나 유선 이어폰은 여전한채로 달렸다. 그런데 요며칠, 유선 이어폰이 달리는데 좀 성가신거다. 어떤 때에는 뛰던 손이 줄에 걸리기도 해서, 그게 그렇게 치명적인건 아니지만 불편했다. 아, 나도 무선 이어폰을 사볼까? 굳이 좋은거 살 필요 없이 저렴한 거 사서 달릴 때에만 꽂으면 되지 않을까? 노이즈 캔슬링은 필요없고. 그러면 2,3 만원이면 되지 않을까?
일단 아이팟은 비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패쓰, 갤럭시 버즈는? 하고 찾아봤더니 와 이것도 20만원이 넘네요? 하는수없이 러너용 이어폰 하고 검색했는데 유튜버들이 소개하는 이어폰들이 있다. 그런데 죄다 찾아보니 십만원대 후반이나 이십만원이 넘어. 다들.. 이렇게 비싼 이어폰 쓰고 있었어요? 나는 검색창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선 이어폰, 이라고 넣었는데, 그러자 해외에서 오는건데도 배송료없이 2만원대인 이어폰도 있더라. 흐음. 그런데... 왜그렇게까지 쌀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온다며, 그런데 왜 배송비도 없어? 애초에 2,3만원 짜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20만원대인 이어폰 사이에서 저혼자 2만원에 배송비도 없다니, 어쩐지 사기가 꺼려졌다.
나는 오늘 책을 샀다. 어제도 사고 그제도 샀다. 계속 샀다. 도대체 책에 얼마만큼의 돈을 들이는걸까? 그래놓고서 이어폰은 왜 못사죠? 왜죠? 네? 아 못사겠네.
도저히 이어폰에 돈을 들일 수가 없어. 유선 이어폰 그냥 계속 쓰자 하다가 아니 그런데 좀 불편하던데, 아니 그런데 무선 비싸잖아.. 이러다가 결국 동생들한테
"남는 무선 이어폰 있는 사람 나 좀 줘.."
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언니, 앞으로 계속 달릴거면 그냥 좋은 걸 사, 했고 회사 동료1도 앞으로도 달릴건데 그냥 좋은거 사시죠, 하고 동료2는 '대안이 없어야 돼요, 이게 제일 좋은거다 하는걸 사서 말이죠' 라고 했다. 궁극의 이어폰을 사둬야 후회도 망설임도 없겠지. 바로 며칠전에도 저렴한 것 샀다가 후회하고 다시 그보다 돈 더 주고 다른 거 산 경험이 있지 않나. 그래, 좋은게 답이다, 하고 애플스토어에 들어갔는데 아, 역시 못사겠네요... 갈등을 하는데 남동생이 누나 생일 선물(지금 생일 아님)로 내가 사줄게, 하는데 선뜻 답을 못하겠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답을 하지 않으니 남동생은 "생일선물로 이어폰 받기는 아깝냐?" 하고 쿡쿡쿡 웃는다. 하아- 응 어쩐지 좀... 그래? 그런데 내 돈 주고 못사겠어? 그런데 선물로 받자니 그 돈이면 차라리 다른 걸... 막 이렇게 돼? 나는 남동생한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생일까지 기다렸다 받으려면 불편한 채로 너무 오래 생활해야 하고 미리 받으면 생일때 좀 서운하지 않을까... 그리고 좋은 이어폰에 쓸 돈이면 그 돈으로 다른 걸... 아 혼란스럽다. 그렇게 이어폰을 여전히 사지 못한 채로 갑자기 빵집 가서 빵을 사왔다. 빵 사는데 고민 전혀 없는데 왜 때문에 이어폰은.. 여하튼 갓구워진 밤깜빠뉴 뜯어 먹었다. 절반은 남겼다.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하나 다 먹을 순 없지. 하아.
사람마다 돈을 쓸 수 있는 분야가 다른 것 같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어폰을 살 때 고민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 사는 돈이 아까울 수도 있다. 나는 옷 사는 돈이 아깝고 이어폰 사는 돈이 아깝다. 반면 술 사고 책 사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어...휴... 어제도 책 박스 와서 뜯어가지고 지금 내 침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창고처럼 보일 것 같다. 어제 출근하면서
"엄마, 내 방 내가 토요일에 다 정리할거니까 냅둬."
했더니 엄마가
"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 니가 봐도 너무 한심해?"
하신다.
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너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마가 막 웃으면서 덧붙이셨다.
"야 치우려고 해도 어떻게 손을 못대겠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책들로 그지경 만들어놓고 오늘 또 책 산 사람 누구?? 나다... 휴.... 이런 나를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뭘 어쩔 수가 없어. 매우 쳐랏!! 아무튼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또 아름다운 계정을 알게 됐다. 영국에 사는 중년의 여성인데 자기 집 정원에 서재를 만들어둔거다. 그녀는 매일 차나 커피를 들고 정원 서재로 가서 그곳에서 책을 읽는다. 정원에는 오리도 산다. 와- 이게 가능해? 나도 하고 싶다 나도. 나도 이렇게 정원에 서재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나도 매일 정원 서재 가서 책 읽고 싶어!!
잠깐 감상해보자.
아 너무 좋은거다.
나도 정원에 서재 갖고 싶어. 이거야말로 굿이다!! 정원의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일 너무 좋지 않나.
그러나 이런 서재를 갖기 위해서는 정원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정원을 가진 집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돈이 얼마여... 살면서 가져볼 수 없는 형태의 집 아닌가. 이 계정주는 나이가 많긴한데 그렇다한들 내가 20년 더 살아도 집과 정원과 서재를 한 번에 가질 수 있게 될까? 그러면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그저 보기만 해야 하는가!
오늘 회사 동료에게 이거 영상 보여주면서 너무 좋고 갖고 싶다, 그런데 이런 집을 어떻게 사냐.. 고 했고 서울을 벗어나면 가능할거라는 얘기를 동료는 해주었다. 그러나 이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부장님이 정원에 서재를 가지면 .. 그건 그냥 금방 창고가 될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맞아. 정말 그래. 지금 내 침실 그 작은 것도 창고가 되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정원에 있는 서재 너무 예쁘다. 너무 이상적이다. 오리가 왔다갔다 거리는 정원속의 서재라니. ㅋ ㅑ ~
그래, 어디 한번 살아보자. 미래는 예측불허, 내가 저런 정원속의 근사한 서재를 갖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 살아보는거야,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