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오브 러브>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주연이 심지어 '샘 클라플린'이다. 어머 이건 봐야해!
이 영화의 존재는 여동생으로부터 알게 됐다. 여동생이 출발 비디오여행을 보다가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됐는데,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초딩조카가 '엄마, 이모랑 저거 보면 좋겠다 그치?' 했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뭔데뭔데 하고 검색했더니 똭-
사실 북 오브 러브 라는 제목 만 듣고 탕웨이 나오는 그 영화 말하는 줄 알았다. 같은 제목으로 탕웨이 나온 영화가 있고 그것도 내가 보았는데 별로 안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헨리(샘 클라플린)는 고지식한 남자 작가이며 사랑에 반드시 섹스가 따라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그런 생각은 그가 써낸 책에도 드러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런던에서 팔리는 책이 아니다. 6개월간 두 권 나갔어요, 그런데 한 권은 헨리 자신이 사갔죠. 이정도의 처참한 수준. 작가 낭독의 시간에도 찾아오는 독자가 없다. 한 권 사면 세 권은 무료로 준다는 광고까지 붙어있을 정도. 그런데 그런 헨리의 처참한 책이 멕시코에서는 베스트셀러라는 게 아닌가. 그는 작가와의 대화를 하기 위해 멕시코로 날아간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멕시코에 도착하니 자신의 책 표지가 에로틱한 것으로 바뀌어 있고, 편집자에 의해 강압적으로 가입하게 된 SNS 에는 은밀한 사진이나 영상이 담긴 메세지들이 도착한다. 이게 대체 무슨일인가, 하다가 그를 맞으러 나온 이 책의 번역가 '마리아 로드리게즈(베로니카 에체구이)'가 그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예 작품을 새롭게 써버렸다는(rewrite) 것을 알게 된다. 헨리는 이에 분노한다. 자신의 책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섹스를 포함하여 레즈비언 게이 로맨스, 등장인물 모두와 섹스하는 남자까지. 자신이 만든 캐릭터과 완전 다른 캐릭터로 변한 완전 다른 작품이 탄생했던 것. 그런 책을 쓴 게 아니었던 헨리는 너무 당황하고 런던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고 남은 방송도 있다. 하는수 없이 남은 일정을 진행한다.
나는 헨리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보인다. 나 역시도 그런 입장이었다면 분노했을 것이고 내 나라로 돌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쓴 책이 안팔려도 나는 '내가 쓴 안팔린 책'이 '내가 쓰지 않은 내 이름의 잘팔리는 책' 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든 편집자든 누가 됐든 건드려놔서 내용이 바뀌어버린 내 책, 그것이 정말 내 책일까? 바탕은 내것이었으되 남들이 고쳐놓은 것, 그게 내 것일까? 그렇게 남들이 새로운 캐릭터로 바꾸어버려 잘 나가는 책, 그걸로 나는 괜찮을까? 나는 싫다. 나는 싫다. 다른 노동을 찾아 하면 되지, 돈이 잘 들어온다고 그런 상태의 책을 참고 넘어가 줄 수가 없다. 그건 내 책이 아니에요. 내 이력에 그런 걸 넣고 싶지 않다.
헨리도 싫었는데, 편집자는 말한다. "너 월세 내야 하지 않아?" 헨리는 어쩔 수 없이 마리아와 다음 작품을 함께 쓰기로 약속하기까지 한다.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리아의 삶이 있었다. 남편과는 헤어진지 오래이고 이제 남편이 아이를 볼 차례인데도 남편은 아이에게 선물만 남기고 '약속 못지켜, 나 사정이 있어~' 하고 도망가 버린다. 늙어버린 아버지 어린 아들 그리고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고단한 삶이 마리아에게 있다. 마리아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글을 쓸 시간이 없다. 왜? 남자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자들을 돌봐야 해서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그것이 마리아의 삶이었다. 어쩌다 짬이 나면 자신이 쓸 소설에 대해 메모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전부였는데, 그런 그녀에게 번역 일이 들어왔던 것. 그녀는 그렇게 헨리의 소설을 만나 번역하면서 지루한 부분을 다 고쳐버리는 거다. 이건 재미 없어, 이건 지루해, 이건 필요없어! 결국 그녀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에로틱 로맨스가 탄생한 것.
음, 사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말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저렇게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번역을 독자들이 허락한다고? 말도 안된다. 멕시코에는 잘 나가는 책을 원서로 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 알라딘만 해도 원서를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원문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심지어 원문을 각 출판사마다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나 바꾸어버린 내용과 캐릭터라면 금세 들통나서 공론화 될 터. 그런데 방송에도 불려갈 정도로 잘나간다고? 특히나 그렇게 베스트셀러라면 어디서든 누구나 들고 일어날 수 잇는 문제일텐데, 모두가 싸인을 받기 위해 줄 서있다는 것은 너무 과장이 심하다. 이건 멕시코 독자들을 좀 무시하는 것 같은데? 라고도 나는 생각했다.
자, 그런데 이건 로맨스 영화다. 욕정과 욕망 혹은 섹스를 몰랐던 남자가 사랑을 믿지 않던 여자와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모두 홀딱 벗고 욕정으로 으르렁댈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알게 됐고, 욕망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알게 됐다. 그들은 커플이 된다. 이것이 로맨스 영화의 결말.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대체로 비슷한 이유가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다른 작은 이유들이 있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인간 관계를 보는게 정말 재미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합을 이루고 그 합이 잘 맞아가는 걸 확인하는 것 혹은 합을 이루기 위해서 어긋나기도 하는 것, 그리고 잘못을 했을 때 그 후의 태도 같은 것들을 보는 것.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는 것이 나는 정말로 즐겁다. 내가 로맨스 영화를 남자들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 로맨스 영화를 남자들이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로맨스를 결국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애인을 만들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뭐 기타등등. 로맨스 영화를 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서 부딪히고 어떤 지점에서 좌절하고 어떤 지점에서 절망하고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행복하고 기쁨을 느끼는지 좀 보란 말이다.
각설하고,
자, 내가 이렇게 길게 썼지만,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제부터다.
이 영화에는 마리아의 전남편 '안토니오'가 등장한다. 어쩌다 자신이 어린 아들을 봐야할 순간이면 늦게 나타나서는 '나 급한 일이 있으니까 니가 알아서 좀 봐' 라고 말하고 다시 등돌려 떠나는 남자, 어린 아들에게 그래도 아빠랍시고 선물을 안기고 떠나는 남자. '다음 주는 네가 아이를 볼 차례야' 라는 말에도 '그건 그 때 가봐야 알아' 라며 돌봄노동으로부터는 도망가는 남자. 헨리가 마리아에게 '그 남자는 무서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헨리에게 말한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빼면요."
안토니오는 언제나 아이를 돌보는 마리아에게 아이를 더 잘보라고 윽박지르고 아이를 제대로 돌보는거냐고 추궁한다. 그러면 자기가 보면 될텐데, 자기는 돌봄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 나는 돌보지 않을 건데, 너는 더 잘 돌봐야 해. 우리 아이잖아. 그렇지만 돌봄 노노해. 네 것! 돌봄은 네 것, 나는 그러나 아버지! 정말 개같은 경우인데, 이 안토니오가 전혀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내가 영국 남자의 책을 번역해서 티비에 나온 걸 보자 돌아버린다. '그녀는 내 여자야!' 마인드가 발동해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잠든 옆에서 몰래 사진을 찍고-마치 섹스한 것처럼- 그리고 그 사진을 그 영국 남자에게 보낸다. 니 옆에 있는 그 여자 내 여자지롱~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그런데 이 남자의 한심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아내 마리아, 식당에서 그리고 호프집에서 일하면서 어찌됐든 남자들을 돌보고 살려야 하는 이 아내가, '번역'을 해서 '작가'와 같이 다닌다는 게 몹시 못마땅한거다. 안토니오는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만큼, 그녀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었는지를 안다. 그리고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었다는 것도. 그런데 작가랑 다녀? 번역을 해? 안될말이지. 그녀가 작가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었던건데, 그는 마리아가 작가가 되지 '못할'인물이라 생각하는 거다.
"너 착각하지마, 지금 영국 놈이랑 붙어 다니면서 니가 작가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넌 될 수 없어."
자, 여기에서 무엇이 잘못됐을까?
물론 책을 쓰고 잘 안팔릴 수 있다. 그리고 책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도 백지만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다음 문제고, 마리아에게는 돌봄 노동이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들어차있어서 차마 글을 쓸 시간이 없다. 돈을 버는 것도 그녀의 몫이고 늙은 남자와 어린 남자를 케어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는 글을 쓰는 일을 할 수 없었는데, 남편은 그런 그녀가 할 수 없게끔 아이를 내맡겨놓고는, '너는 못해!'라고 하는 거다. 자, 여러분 뭐가 생각나나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생각나지 않습니까?
세상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 속에 가두어 두면서도 그녀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날개를 잘라놓고 그녀가 날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만일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는 결코 현재 속에 갇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2의 성, 2권], 시몬 드 보부아르, 동서문화사, p.776
마리아에게 모든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떠맡겨놓고, 그래서 글을 쓸 수 없게끔 만들어놓고, '너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일. 오, 안토니오 여!! 당신은 멍청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내를 비하하고 있으며 여성을 혐오하고 있다.
그래놓고 아내가 다른 책도 쓰는등 잘나가니까 이제 그 아내를 되찾고 싶어한다. 내 아내야, 내 아내! 내 가족이라고!
네?
안토니오와 다시 결합하면 안토니오는 이제 가족에 충실해질까? 안토니오는 이제 자신의 아내를 뒷바라지 해줄까? 아니, 내가 장담한다. 안토니오 옆에서라면 마리아는 다시 작가의 삶을 살 수 없는, 작품을 쓸 수 없는, 결코 작가가 될 수 없는 여자가 될것이다. 내 능력이 얼만큼인지 감히 짐작도 못하고 꺾여버릴 것이다. 주저앉혀질 것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돌봄과 가사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채 자신의 능력이 어느 부분에서 어느 만큼 발휘될지 알지도 못하고 살고 있는걸까?
넌 작가가 될 수 없어.
넌 수학을 못해.
넌 운동을 못해.
얼마나 많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자신이 못하는 사람인줄로 잘못 알고 살고 있을까. 가둬진 곳에 살면서 '너는 시야가 좁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으며 살고 있는걸까. 듣고 듣고 또 들어서 '나는 시야가 좁지' 하면서 살아갈 삶들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뇨, 당신들이 시야가 좁은 이유는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작가가 될만큼의 글 쓸 시간을 착취당했기 때문입니다.
남자여, 당신 옆의 여자가 초라하고 부족해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신 옆의 여자가 초라하고 부족하다? 그건 당신이 못난 남자라는 것의 증거일 뿐이다.
한심하기는.
어젯밤에 마구 책을 샀다. 왜죠 …
어젯밤에 그렇게 마구 책을 샀는데, 오늘 아침 듣는 정희진 오디오 매거진에서 또 책 얘기를 하는 바람에 장바구니에 담는다.
어제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보고 안토니오에게 분개하면서, 그리고 오늘 아침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을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이제 정말 소설을 써야 할 때인가.'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