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놀랍게도 일이 도움이 되었다.
하루쯤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고 주변에서 다들 그러라고 했지만, 그런데 쉴 수 없어 나온 일이었다. 회사에 사정이 있어 내가 출근을 해야만 했다. 아 나도 하루 쉬고 싶은데 지금은 내가 쉴 수가 없네, 하고 출근한 것이었다. 출장에 입원에 임원들이 자리를 비워, 보쓰에게 보고를 해야 할 사람이 이번주 내내 나여야 했던 거다. 그래서 가야해, 하고 출근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게 도움이 되었다. 보쓰는 나를 재차 불렀고 나는 거기에 대응해야 했다. 거래처에서 전화가 오거나 다른 부서에서 나를 찾으면 또 거기에 대응해야 했다. 대응하는 순간들에 나는 답을 찾거나 혹은 짜증을 내거나 하면서, 어쨌거나 그 순간만큼은 힘들게 하는 생각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혼자 걷는 그 길에서 또 눈물이 주루룩 나와서, 아, 나 집에 있었으면 안됐겠구나 했다. 집에 있었다면 쉼 없이 내 눈앞에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을 것이고, 나는 계속 그 장면들에 따른 생각을 했겠구나. 와, 놀랍게도 일이 도움이 되었다. 일은 평소대로 짜증나고 빡치고 힘들었는데,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
예상 외로 일이 도움이 되었어. 이건 일에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일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일이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조금씩 나아졌다. 일이 나를 돕고 있어.
그제밤에 잠들기 전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나는 강한 사람이니까 잘 이겨낼 것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그런데 그게 될까, 나는 억지로 이겨내려다가 탈이 나는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강한 사람이니까 이 일로 인해서 바닥으로 가라앉기만 하지는 않을거야, 라고 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 나를 압박하는 건가 했다. 나는 괜찮아질까 괜찮아야 해 그런데 안괜찮으면 어떡하지 아냐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뭐든 스스로 극복해낼 힘을 가지고 있지 라고 오락가락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의심하고 답을 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건, 일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일이 나를 도왔다. 일이 나를 돕고 있어. 일이 나를 돕는다는 걸 또 내가 깨닫고 있어. 그것은 내게 정말로 큰 위안이 되었다. 일이 나를 돕고, 일이 나를 돕는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것. 나는 내가 나를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돕고 있었다. 내가 일을 함으로써 나를 돕고 있었어.
집에 가서는 저녁을 먹고 신경안정제 한 알을 먹었다. 도배로 어질러진 집을 조금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책을 좀 옮기고, 그리고 빼두었던 앨범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제자리에 꽂는 과정에서 겉표지가 낡아서 찢어져버린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보았다. 그렇다. 초등학교 아니라 국민학교. 맨 앞장에 교장선생님 얼굴이 보였다. 아, 그래 기억난다. 길에서 보면 못알아보겠지만 그 때 이 교장 선생님이었지. 이게 벌써 얼마전이야, 하고 앨범을 넘겼다. 아무래도 6년을 다니다보니 다른 반 아이들 중에도 아는 아이들이 여럿 보였다. 그래, 얘도 알고 얘도 알고... 하다가 내가 있는 반을 열었다. 첫장은 남자애들이었고 뒷장이 여자애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나를 찾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나를 찾았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 어차피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이 사진만으로 아무도 지금의 나를 알아볼 수 없을 터라 올려둔다.
이게 국민학교 6학년 졸업사진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흑백이 세월을 말해주고 흑백이 내 연령을 짐작케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보고 너무 웃겨서 엄마 보여주면서 엄마 이것봐, 했다. 엄마도 같이 웃었다. 세상에, 엄청나게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보는데 딱 나 같고 또 나 같지 않기도 했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지금은 저기에서 많은게 아주 많은게 변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적지 않기로 하겠다. 그것은 슬픔의 새드니스로 향하기에..... 이거 보고 누구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가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 어린 시절의 나야.. 너에게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준다고 말해준다면 너는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그거 아니, 너는 시간이 흘러 어느 지점에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어른의 너에게 갑자기 웃음을 준단다. 너는 너 자신에게 웃음을 주는 아이란다. 내가 나를 웃게 했다! 아무튼 세상 다 뽀개버릴 작정을 먹은 똑순이 같구나. 실제로 국민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은 나를 똑순이라고 불렀다. 몇학년 때였지, 책 잘 읽는다고 선생님이 나한테 자꾸 일어나서 책 읽는 거 시키기도 했다.
이 똘똘하고 야무진 국민학교 시절의 내 사진은, 어제 나의 글에 함께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려고 했던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바칩니다. 반사는 받지 않습니다.
이만 총총.
덧. 맨 위에 올려둔 책은 페이퍼 내용과 무관합니다. 그냥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