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티는 아주아주 가난하게 자랐고 부모님은 딸의 공부를 지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 루티는 기어코 공부를 했고 대학에 진학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토론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해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절망을 가져왔을테지만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것은 어느 순간마다 성취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머리가 좋다든가 하는 가지고 태어난 재능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마리 루티는 노력했고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좋아하는 학자가 생기고 자신만의 이론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성차별적인 세상의 부조리함을 모두 깨달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만 그러나 내게는 그녀의 '행동' 자체는 다소 온건하게 보였는데, 그러나 그녀가 어떤 지원도 없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나에게 온건하게 보이는 행동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여진다. 아니, 그래야만 했겠구나. 과격한 행동이 나는 조금 더 앞으로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과격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전선의 최전방의 있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이야기가 좀 다른 쪽으로 새려고 하니까 다시 정신 단단히 붙들고 얘기하자면, 마리 루티는 이 책,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의 처음 부분에 이런 얘기를 한다.
난 오랫동안 최고의 이론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넬슨은 시인인 아일린 마일스Eileen Myles의 말을 인용한다. "나의 더럽고 사소한 비밀은 늘 당연히 나에 대한 것(이야기)이다."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마리 루티, p.38
정말이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 아닌가. 최고의 이론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생겨나다니!
나는 얼마전에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페이퍼를 썼는데,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현실과 실제 사건들이 있었다. 작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회사 생활이 있었고 그리고 크게는 뉴스에서 매일마다 보도되는 여성대상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작게는 개인대 개인의 일이지만 크게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대한 것.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끔찍한 범죄소식을 맞닥뜨리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을 저지를까'를 생각하게 됐고 '이런 범죄가 상대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생각을 '못하는' 거구나','생각을 '안하는' 거구나', '그럴 필요조차 못느끼는 거구나' 라고 거듭되다보니 어느 순간 게으름과 무식함 그리고 악으로 이어졌던 거다. 이건 사소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불편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하게 되는 사소한 일들 앞에서,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면 어떻게 상황이 개선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누가 할거라고 생각한걸까' 를 생각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이것도 작은 게으름과 무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까지 생각에 미치게 된거다.
마리 루티의 저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만들어가는 이론이야말로 정말로 나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최고의 이론이라는 말도 그래, 틀리지 않겠어. 그렇다면, 사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론을 만들게 되지 않을까? 각자가 만드는 이론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또한 타인과 나의 이론은 어느 면에서 완전히 반대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나름의 이론을 만들 수 있겠어.
마리 루티의 책을 다 읽은 후 최재천의 책을 읽었다. 최재천은 이런 얘기를 한다.
평소에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자꾸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공부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사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채워져야 하고요. 진실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이 일반인에게 신뢰를 받아 통용될 수 있도록 사회의 갈등이 잦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위정자들이 힘써 노력해야 하지요. 갈등의 골이 깊으면 진영 논리로 사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커집니다. 저는 무엇보다 앎이 가져오는 사랑이 소중하다고 여겨요. 우리 인간은 사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엔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최재천의 공부》, 최재천 ·안희경, p.39
알면 사랑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최재천이 그간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나름 최재천의 이론일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낸 혹은 정립하게 된 최고의 이론이라는 것은, 새로운 발견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아주 없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누군가가 이미 어딘가에서 숱하게 말해왔던 것,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의 이론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다른 식으로 접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깨닫고 정립하게 된 이론은, 그 후에 세상을 둘러보면 여러가지 방식으로 마주치게 된다. 나는 게으름과 무식 그리고 악에 대해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얼라리여~ 최재천의 책에서도 만나는거다.
저는 2020년 내내 미국 동료들과 이메일로 논쟁하느라 참 힘들었습니다. 툭하면 우리가 마스크를 잘 쓰는 모습을 빈정거리더라고요. 한국인은 너무도 순종적이라면서요.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있는 친구는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공권력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반박했습니다. 한국인은 경찰이 내 목을 무릎으로 누를까봐 마스크를 쓰는 게 아니라고요. 덧붙여 미국 정부가 방역을 위해 집에 머물라고 했을 때 총을 들고나온 미국인이 있었는데, 이는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문제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왜 내 자유를 구속하느냐'라고 외치며 총을 들었다고요. -《최재천의 공부》, 최재천 ·안희경, p.18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는 '내가 협조해야 방역이 완성된다'라는 생각과 판단에 따라 행동했기에 서로를 지켜낼 수 있다고 최재천 교수는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 방역에 협조한 것에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다는 친구의 말에 반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 때 최재천 교수는 총을 들고나온 미국인을 향해 '무식하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나는 총을 들고나온 미국인이 무식했다는 최재천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 총을 들고나와서 그가 얻게 된 결과는 무엇일까? 무엇을 얻기 위해 그는 총을 들고나왔나? 게으름은 무식을 가져오고 무식은 아차하는 순간 범죄가 된다.
마리 루티가 공부하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너무 좋았는데, 최재천 교수가 미국에 가 공부할 때 수학도 전공하라는 제안을 재차 받는 것, 자신은 수학을 못한다 그리고 싫어한다고 생각했다가 수학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말을 교수들로부터 듣는 부분의 이야기가 진짜 너무 좋았다. 결국 하버드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아 수학도 필요하겠구나 싶어 수학 강의도 듣게 되는데, 그 때 교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업을 들어도 되는데 강의실 뒤편에 앉아 팔짱 끼고 있으면 안 되고, 무조건 맨 앞줄 가운데에 앉아야 한다. 시험도 봐야 하고 숙제도 전부 해야 한다. 학점을 받지 않는 학생의 시험지를 내 손으로 채점해야 하는데 누가 손해일까?" 그러면서 "수학은 관조하는 학문이 아니다. 직접 풀고 이해해야 하는 학문이다"라고 하시더군요. -《최재천의 공부》, 최재천 ·안희경, p.59
아 너무 재미있는 일화 아닌가.
물론 최재천은 너무 천재되시고 서울대 나오고 하버드대 나오고..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최재천의 이 책을 읽다보니, 아니 어쩌면 나도.. 사실은 수학 감각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걸 미처 모르고 여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이 들어버린다. 대한민국의 수학교육이 나랑 안맞았기 때문에... 내가 수학점수 개똥같이 나온 건 아닐까. 만약 내가 미국에서 수학 수업을 받았다면 나의 미래 수학교수.. 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고 인생을 되돌릴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 한 번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가보지 못한 길을 후회하고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어쩌면 수학천재일지도 모르는데 발견되지 못했던 나의 또다른 과거 혹은 미래.. 아쉽구먼.. 그렇다면 나에게 있을지도 모를 수학적 재능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서 수학과에 다시 들어가 ...볼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 걸로 하자.
나중에 늙으면 젊은 조카들 붙들고 얘기해야겠다. 어쩌면 너네 이모(혹은 고모)는 수학 천재였을지도 모른단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재능은 발견되진 못했지.. 삶이 아쉽구나. 다시 한 번 살고 싶구나.... 다시 태어나야지.. 수학 천재로 살게 될 미래를 위해....
내가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남들 열심히 공부한 얘기 들으면 진짜 너무 재미있고 좋다. 나는 고삼시절에도 밤 한 번 샌 적이 없어.. 하아- 졸리면 어김없이 잤는데 고3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내가 왜 공부 때문에 잠을 포기해야 해? 날 그렇게 살게 두지 않겠어' 라고 잤다가 지금 이모양 이 꼴...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아니, 그러면 깨어 있는 동안에 공부했냐 하면, 할리퀸 읽고 소설 책 읽고 그랬다. 영어 수업 시간에 할리퀸 읽다가 선생님한테 걸려가지고 큰 쪽팔림을 무릅쓴 적도 있다. 그 때 읽다 걸린 할리퀸은 <개구리 연가> .. 진짜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하아- 다시 태어나면 그 때는 열심히 공부해라, 나여...
오늘 아침 트윗을 통해 오은영 쌤이 공감에 대해 한 말을 알게 됐다. 공감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그렇구나 라고 알게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똑같이 느껴야 하는게 아니라는 거다. 혹시 궁금해할 사람을 위해 영상을 첨부한다.
아이돌 가수인 '츄'는(이 영상으로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까 걱정하고 또 불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본인의 불편함이나 힘든 감정에 대해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무리의 일원일 때도 다른 누군가의 불편함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그 때 오은영 박사가 공감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면서 이야기 해주는 거다. 타인의 감정을 내가 똑같이 느껴서 흡수하는 게 공감인 게 아니라고. 그리고는 요즘 청년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혹시 본인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은 아닌지 테스트하는 일곱 문항을 보여준다. 이 중에 네 개 이상 해당되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 의심된다고. 내가 캡쳐해왔다.


나도 테스트 해보았는데 나는 하나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텐데, 그런데 나는 공감에 대한 오은영 박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자 '내가 책을 잘못 읽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이 사람은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흡수해버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흡수하는 경우가 더러 생기기도 하는데, 소설에서는 거의 매번 그래버리는 거다. 그래서 힘든 소설을 읽고 나면 녹초가 되어버리고 사랑에 빠지는 소설을 읽으면 같이 사랑에 빠져버리는 거다. 이게, 잘못된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 그러면 안되는건데 나는 그러고 있는걸까? 휴.. 현실에서 타인을 만나고 오면 녹초가 되지는 않는데(물론 어쩌다 그럴 때도 있다.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을 때.), 왜 책 읽고 나면 녹초가 되는가.. 왜.. 이건 내가 등장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흡수해버린 게 아닌가. 이 사람은 이런 감정이구나 하고 한걸음 떨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내가 되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버렸... 그런데 이 세상에, 그러니까 현실이든 소설이든 나랑 같은 생각, 같은 행동, 같은 감정, 같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지구상에 나는 유일한데. 소설속의 등장인물이라고 나랑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당연히 하지 않는 바, 그래서 등장인물이 나쁜 사랑을 하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긋나면 개슬프고, 그래서 해리 포터가 재미가 없어버려...... 왜냐면 나는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해리 포터 책 속의 인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한걸음 떨어져서 읽어야 되는데 이게 안되네. 에휴... 이걸 .. 도대체 어째야 하나...
오은영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타인의 감정을 완전히 흡수해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통제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만, 나의 스트레스의 많은 부분은 이 통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걸 깨닫고 나서는 그것을 덜어내고자 애를 쓰고 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완전하진 않고, 요즘에도 통제 욕망이 차오를라 치면 내가 나를 인지하려고 애쓰면서 다독인다.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라고 내가 내게 말한다. 내 통제 욕망은 현실에서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 내가 통제 욕망이 생겼다면, 그것은 상대가 문제를 해결하기를,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긴다는 데에 있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즈의 <에코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그 때 나는 내 통제 욕망에 대해 깨달았고 마찬가지로 잘못된 욕망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 후에 통제 욕망이 찾아들라치면 나를 다스리면서 내가 생각하는 건 나에게만 최선이다, 라고 재차 되새기고 있다. 내 스스로의 분석에 의하면, 그러나 소설속에 들어가 내가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흡수해버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좀 더 연구해볼 문제다. 아무튼, 통제 욕망을 버려야지.
오은영 선생님은 이 영상 속에서 '강박의 뒤에는 언제나 불안이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나는 일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몇 개의 강박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뒤에는 분명 불안이 존재했다. 이건 내가 자라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아주 많이 극복했지만, 그러나 어김없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건 사라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 나는 잠들기 전에 나를 다독이고 다스릴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보다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내가 나에게 얘기해준다.
아무튼 소설 읽는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이대로 괜찮은가... 그런데 뭐, 나쁠 건 없지 않나..... 내가 사랑하고 내가 헤어지고 혼자 다 하는데 뭐. 아, 섹스도.... 흠흠.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