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원서 같이읽기의 책은 '데버라 리비'의 《The Cost Of Living》, 국내번역 작품으로는 《살림비용》이다. 그간 읽었던 원서들 중에서(라고 해봤자 여덟권이 전부지만) 가장 얇고 가장 활자가 크다. 한 페이지 안에 들어가는 글자수가 가장 적다. 책이 얇고 글자가 커서인지 나는 이 책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일전에 번역본을 읽어본 적도 있던 바, 그래 바로 도전이다! 하고 오늘 출근길에 책을 펼쳤다가 아이쿠야, 번역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했다. 흐음.. 어려운데? 하긴, 책이 얇고 글자가 크다고 읽기 쉬울거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잖아? 글자 크다고 쉬워? ㅋㅋㅋ 자, 그래서 이 어려운 책을 오늘 아침 읽기 시작하는데,
제일 처음 1장 <빅 실버>에서는 작가가 해안가에 앉아 목격한 광경을 풀고 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가 옆자리에 책 읽고 있던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거는 장면.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이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걸어 책을 읽던 그녀를 방해했는데, 여자는 망설이다가 책읽기를 중단하고 대화에 참여하는거다. 어느 순간 여자는 자신이 스쿠버 다이빙을 갔다가 폭풍을 맞닥뜨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때 자신을 태웠던 보트에 사람이 있었지만 자기를 구조하러 오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이 근육질 아저씨가 듣고자 한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터, 그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He said, 'You talk a lot don't you?' -p.2
남자가 말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p.9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거는 근육질 아저씨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가 기대한게 뭐가 됐든, 자신이 겪었던 어떤 일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젊은 여성이 하는 말에는 아무런 성적인 뉘앙스도 없고 오히려 어떤 생각해야 할 지점들이 있었다. 젊은 여성은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아저씨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아저씨는 이해가 필요한 대화를 원한게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데버라 리비는 해변가의 그들 옆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목격하고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He had taken a risk when he invited her to join him at his table. After all, she came with a whole life and libido of her own. It had not occurred to him that she might not consider herself to be the minor character and him the major character. In this sense, she had unsettled a boundary, collapsed a social hierarchy, broken with the usual rituals. -p.3
합석을 제안함으로써 남자는 모험을 감수한 셈이었다. 어쨌거나 여자란 여자 딴의 삶과 성욕을 장착하고 오기 마련이니까. 남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거다. 여자가 스스로를 조연으로 치부해 가면서까지 남자인 그를 주연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여자인 그는 안정돼 보이던 경계를 뒤흔들고 사회적 위계 질서를 와해시키며 통상적인 관습에 등을 돌린 셈이었다. -p.9~10
근육질 아저씨가 생각한 젊은 여성은 그가 상상한 세상 속의 젊은 여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옆자리에서 책을 읽던 젊은 여성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 있다. (the world was her world too) 아저씨는 자신의 매력으로 어필하고 싶었을런지 모르지만, 이 젊은 여성은 자기 경험을 얘기하고 상대에게 사유를 요구함으로써 남자를 짜증나게 했다. (너 원래 그렇게 말 많니?) 나는 이 이야기가 자체만으로 좋은데,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은 내 세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의 세상이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좋고, 그렇게 우리가 타인과 교류할 때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세상이 만난다는 것도 좋다. 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 자신만의 삶과 리비도가 있다는 것도 너무 당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보통 현실에서 아저씨들은 젊은 여성들의 whole life 와 libido 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her own 에 대해서 고려하기는 커녕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을 건다.
자, 이런 이야기가 맨 앞에 실려있다. 이런 이야기가 실렸구나,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라고 다음장으로 넘기면, 굳이 작가가 이 이야기를 맨 앞에 실어둔 까닭을 만나게 되는데, 와 그게 진짜 자지러지게 좋다. 작가는 이혼했으며 자녀와 함께 사는 중년인데, 해변가의 이 젊은 여성의 보트 얘기를 듣고 자신의 삶에 대해 쓰는 거다.
Everything was calm. The sun was shining.
I was swimming in the deep. And then, when I surfaced twenty years later, I discovered there was a storm, a whirlpool, a blasting gale lifting the waves over my head. At first I wasn‘t sure I‘d make it back to the boat and then I realized I didn‘t want to make it back to the boat. -p.7
물은 잔잔했다. 해는 밝게 내리쬈다. 나는 수심 깊은 곳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년 만에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폭풍과 회오리 바람이 몰아들고 물결이 소용도는 가운데 파도가 내리치고 있었다. 처음엔 배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곧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다.-p.14
해변가의 젊은 여성이 스쿠버 다이빙을 갔다가 폭풍을 만났던 장면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 폭풍우에 보트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도. 그런데 이 장면 자체가 작가 본인의 인생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20년 만에twenty years later' 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그녀가 그간 살아온 인생은 스쿠버 다이빙 이었고 그걸 즐기고 있었는데, 물 밖으로 나오니 폭풍이 나를 때리려고 하고 있었던거다. 아니, 너무 좋지 않나요? 작가란 스쳐 지나간 얘기를 가져와서 자신 인생의 은유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When I was around fifty and my life was supposed to be slowing down, becoming more stable and predictable, life became faster, unstable, unpredictable. My marriage was the boat and I knew that if I swam back to it, I would drown. It is also the ghost that will always haunt my life. -p.8
어느덧 50줄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내 인생도 서서히 속도를 늦추어 가는 한편 생활의 안정도와 예측 가능한 범주는 차차 확대되리라 지레짐작하던 시기에, 내 삶은 정작 더 빨라지고 불안정해졌으며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그 시점에 결혼 생활이라는 보트로 도로 헤엄쳐 가거든 그대로 익사하리라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그렇대도 결혼 생활은 남은 평생 내 뒤를 밟을 유령이기도 하다. -p.15
아니, 여러분, 느껴지십니까, 이 문학의 아름다움이. 데버라 리비가 들은건 해변가 젊은 여성의 스쿠버 다이빙 경험이었는데, 그런데 데버라 리비는 그걸 가져와서 50줄에 접어들어도 인생은 안정적으로 흘러가는게 아니라고, 결혼생활이라는 보트로 헤엄쳐 가다가는 익사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니 진짜 너무 좋지 않나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나는 1장 에서 자신이 목격한 바를 풀어놓고, 2장에서 거기에 자기 인생을 넣어 얘기하는 지점이 너무 좋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 폭풍을 만난 것에 자신의 인생을 비유하는 게, 보트로 돌아가는 게 안전해 보이겠지만 실은 그러다 익사할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너무 문학의 짜릿함을 준다. 나 살림비용 번역서 작년에 읽고 좋아했는데, 이렇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보트 얘기가 인생 얘기가 되는 지점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것 같은데, 이번에 이 부분 읽으면서 화악- 세상에 하고 소름이 돋는 거다. 아아, 문학은 진짜 너무 좋아 문학 짱이야. 글 쓰는 사람들이여, 영원하세요!!
그렇지만 어렵다. 뭔가 어려워. 안어려워 보이는데 어렵다. 번역본 없었으면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어려운 읽기가 너무 기대된다. 이렇게 순간순간 짜릿함을 만날거라고 생각하면 막 설렌다. 너무 좋은데? 아름다운 글을 만나는 것은 진정 짜릿한 일인 것입니다.
그나저나 오십줄에 들어서도 인생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 인생의 참맛이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내 선택이 가져온 결과가 내 기대와 다른 일은 살면서 숱하게 펼쳐지지만, 그것이 설사 지금 나쁜 방향으로 갔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또 나를 내가 짐작할 수 없었던 어떤 찬란한 미래에 데려다 놓기도 할 것이므로. 데버라 리비에게 이혼이, 그러니까 이혼이라는 것이 그것을 겪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일' 이라고 간단하게 표현되거나 퉁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혼 같은 표면적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어떤 인생의 사건이 내게 일어나면, 설사 그것으로 고통스러워 오랜 시간 울고 흐느낀다 해도, 분명 거기에서 나는 또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될것이다. 내가 과거에 이 선택을 했을 때 어땠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는지, 내가 극복해야 할 고통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것이고, 그 시간들은 또 나를 성큼 앞으로 내보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데버라 리비만 놓고 봐도 스쿠버 다이빙과 보트, 폭풍우로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지 않나.
아 아무튼 데버라 리비의 살림비용이 1장이 끝나고 2장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너무 좋다. 제대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 문학적 아름다움과 짜릿함을 꼭 기록해두고 싶다. ㅋ 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