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당한 독일 여자를 봤어. 여자는 알몸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어. 다리 사이에 수류탄이 박힌 채……지금은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걸 보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어. 하지만 감정은 변하는 거잖아. 며칠은 이런 감정이다가 또 며칠은 저런 감정이고……몇 달 후에…… 우리 대대로…독일인 아가씨 다섯 명이 지휘관을 찾아왔어.
흐느껴 울더라고……산부인과 의사가 아가씨들을 검진했더니 여자들 그곳이 많이 상해 있었어. 심하게 찢겨 있었지. 팬티는 온통 피로 물들고…… 밤새 성폭행을 당한 거야. 병사들이 줄을 서서 그 짓을 한 거 지……
이 이야기는 녹음하지 마…… 녹음기 좀 꺼…… 하지만 다 사실이야! 전부 다! 우리 대대 전체가 나와 정렬한 가운데…… 독일 아가씨들에게 지시가 떨어졌어. ‘가서 당신들한테 몹쓸 짓을 한 놈들을 찾으시오.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시켜버릴 테니.' 부끄럽더라고. 하지만 아가씨들은 앉아서 그저 울기만 했어. 원하지 않는다면서……더이상 피를 보는 일은. 그 아가씨들이 한 말이야…… 그리고 각자 커다란 빵을 한 덩어리씩 받아 돌아갔지. 물론 그건 다 그놈의 전쟁 때문에…… 당연히……용서하는 게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멀쩡하고……… 새하얀……… 벽돌지붕의 집들을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 같냐고…… 장미가 탐스럽게 핀 집들……나는 그들도 고통스럽기를 바랐어. 당연히……
그들의 눈물을 보고 싶었지……한순간에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 지금 당신처럼 그런 훌륭한 사람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까지 나는 수십 년이 걸렸어…….."
A. 라트키나, 하사, 전화교환수 - P517~518
세상에 강간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없을 것이고, 강간 피해에 대해 듣게 된다면 가해자를 욕할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에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수차례 언급했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자신의 소설 《골든 슬럼버》에서 '성폭행은 명분이 없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과 어떤 남자들)이 강간피해 여성에게 연대하고자 하면서도, 그러나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대의 앞에서는 여성의 성폭행이 '그렇다면 뒤로 미뤄두어도 될 것'이 되거나,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되어버리는게 나는 겪을때마다 당황스럽다.
몇해전 한 남자 연예인의 성폭행 소식에는 '그렇게 생긴(잘생긴) 남자가 성폭행을 왜하겠냐'며 피해자를 의심하는 댓글도 있었고, 나중에 사과하긴 했지만 집단내에서의 성폭행 사실이 폭로되자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을 순 없다고 말한 정치인도 있었다. 한 여성이 당한 성폭행이 '어떤' 대의들 앞에서 혹은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집단' 앞에서는 갑자기 조개 줍는 일로 다뤄지는 것을 나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되는거야? 그것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이 여성의 성폭행 피해를 폭로하고 처벌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민주당 내에서 박지현이 그렇게 욕먹은 건, 내부의 남자들이야 뭐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치더라도 여성들조차도 더 중요한 건 선거에 이기는 것이지 성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박지현을 지지하고 박지현의 의견에 동의하고 박지현의 뜻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나는 성범죄가 절대 있어서는 안되며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대의 앞에서 뒤로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어떤 남성 정치인(그간 그동안 선했다는 이유로 혹은 당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이유로)의 성범죄는 일단 그냥 넘어가도 되는게 되는걸까? 어떻게 그게 가능한걸까? 왜 여성의 성폭행 피해는 '그 다음', '나중에'가 될까. 한 여성의 삶을 파괴해버리는 일에 대한 것이 어떻게 그 다음이 될까? 그게 뭐가 됐든 어떻게 그것에 앞서는 대의가 있을까? 나는 이럴때마다 번번이 그런 일들을 보는게 아파서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내가 나를 다독이곤 하지만, 애써 이해하려고 할 뿐 아직 진심으로 이해되는 건 아니다.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서도 너무 힘들었다. 강간이 벌어진 일도 힘들었지만, 강간이 벌어졌으나 적국의 여성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아닌 상대편 여성들이 내 편의 남성들로부터 강간을 당했지만, '너네들도 우리처럼 불행해져야 해' 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대해서, 눈앞의 파괴를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 한편, 전쟁이라는 상황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고 수많은 죽음과 부상, 피와 파괴등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나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저 사람도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되는게 있는거야 이놈들아! 했을테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그녀의 선한 면을 뒤로 미루고 다른 여성을 향한 성폭행이 잘못됏다는 판단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의 앞에 너의 성폭행 폭로는 좀 입다물어 줄래? 가 되는건 정말 나를 미치게 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를 읽는 일은 즐겁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았다. 어떤 여성학 책이든 기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게 있겠냐마는, 참전했던 여성들의 그간 침묵했던 일들을 읽노라니 너무 괴로웠다. 그런 한편 이걸 모르고 살았다는 것도 역시나 괴로웠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는 정희진 쌤의 말은 참진리이고, 그래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 공존하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번달에도 무사히 완독했다.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 P272
-아이들은 전선으로 보내지 않는다. 콤소몰 당원이라고? 그거 잘됐구나 콜호스 일을 도와라. 우리는 낟가리가 썩지 않도록 삽으로 잘 흩어줬어. 그다음엔 채소도 거둬들였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입술은 갈라 터지고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어. 글쎄, 그 마을 여자애들과 다른 점이라면 내가 수많은 시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시들을 다 외워서 낭송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을 거야. 들에서 집까지 참 멀었어. 나는 그 먼 길을 시를 외우며 걷곤 했지. - P323
-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또다른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군요……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 P296
불구가 되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어. 무엇 때문에 살아? 내가 누구한테 필요하다고? 아버지도 엄마도 안 계신데, 평생 사람들 짐만 될 텐데. ‘다리도 없는 나 같은 게 누구한테 필요하다고! 목을 매자……‘ 그렇게 마음먹고, 간호사에게 작은 수건 대신 큰 걸로 갖다달라고 부탁했지. 게다가 병원에서 모두들 나보고 ‘할머니, 할머니……여기 연로하신 할머니가 누워 계신다……‘며 놀려댔거든. 병원장을 처음 만났는데 몇 살이냐고 묻는 거야. ‘열아홉이라고, 곧 열아홉이 된다‘고 얼른 대답했지. 아, 그러자 병원장이 웃으며 ‘오, 꽤 나이가많은데, 벌써 할머니네‘ 그러잖아, 글쎄. 그뒤로 사람들이 그렇게 나만 보면 할머니라고 놀리더라고. 간호사 마샤 아줌마도 나를 놀려먹었지. 큰 수건으로 바꿔달라니까 마샤 아줌마가 그러는 거야. ‘수건은 갖다줄게. 너는 곧 수술을 받아야 하니까. 하지만 내가 지켜볼 거야. 왠지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혹시 무슨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니지?‘ - P218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보니까, 정말 수술 준비가 되고 있더라고. 나는 수술이 뭔지도 몰랐고 그때까지 몸에 칼을 대본 적도 없었지만 이제 몸에 지도가 생긴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지. 베개 밑에 큰 수건을 숨기고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어. 곧 다들 잠이 들었지. 마침 침대틀이 철로 된 거였어. 그래서 수건을 침대에 잡아맨 다음 목을 매기로 했지. 다만 도중에 수건이 끊어질까봐 그게 걱정이었어…… 그런데 마샤아줌마가 밤새 내 곁을 지키고 앉았는 거야. 아줌마가 나를, 어린 나를 지켰어. 밤새 한숨도 안 자고……어리석은 나를 보호했어…… - P218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무엇을 위해? 생각해보면……그건 아마 지금 이렇게 그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 P187
- 전쟁터에서 연애도 하고 그랬나요? 내가 묻는다. -전선의 소녀병사들 중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 눈에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지. 내가 봐도 정말 멋진 여자들이었지만 말이오. 그 아가씨들은 우리를 전장에서 구해낸 우리의 전우였소. 우리를 구해내고 간호해주고 돌봐줬어요. 나도 두 번 부상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나를 구해줬지.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겠소? 하지만 당신은 형제하고 결혼할 수 있나요? 우리한테 그들은 누이였소. -그럼 전쟁이 끝난 뒤에는요? -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소. 내 아내같이 똑똑한 여자도 여자병사들을 좋게 보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그녀들이 남편감을 찾아 전쟁터에 간 거고, 그곳에서 연애질만 실컷 하다가 왔다고 믿었어요. 이왕 터놓고 얘기한 김에 하는 말인데, 실제로 소녀병사들은 대부분 정숙한 처녀들이었어요. 순결한 처녀들. - P169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더러운 오물도, 들끓는 이도, 시신들도……더이상 안 봐도 되자 뭔가 아름다운 게 그리워지더군요. 뭔가 밝고 화사한 그런게……아름다운 여인들 …… - P169
-하지만 그 여자들이 고국을 지킨 건 사실이잖아요? 조국을 구해냈다고요…… - 그건 그렇소만……그런 여자들이랑 정찰은 같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요. 그게, 그래요……우리 남자들은 여자를 엄마나 아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요. 결국은 아름다운 숙녀에게 익숙하다는 거요. 동생이 해준 이야기가 있어요. 한번은 우리 도시로 독일군 포로 행렬이 지나갔는데, 동생이 또래 남자애들이랑 어울려 포로 행렬에 대고 고무총을 쏘았나봐요. 그걸 우리 어머니가 보시고는 동생 뺨을 때렸소. 그 포로들이란 게, 히틀러가 최후 수단으로 징집한, 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들이었던 거요. 동생은 그때 겨우 일곱 살이었지만 우리 어머니가 그 어린 독일군 포로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너희 엄마 같은 사람들은 눈이 멀어버려야 돼. 세상에 어떤 엄마들이기에 이렇게 어린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보낸단 말이냐!‘ - P166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오. 그런데도 남자들 이야기는 그렇게 쓸 게 없는 거요??"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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