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식민화된 집단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글쓰기는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원시적 사고방식과 문명화된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서구 신화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해왔고, 더 최근에는 일신론적·남근적·권위주의적·단독적인 작업, 즉 유일하고 완벽한 이름을 경배하는 서구의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를 공격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거쳐, 문제의 이분법들이 붕괴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글쓰기의 의미가 걸린 씨름은 현대 정치 투쟁의 주요 형식 중 하나다. 글쓰기 놀이의 해방은 더없이 진지한 문제다. 미국 유색인 여성의 시와 이야기들은 글쓰기, 곧 의미화의 권력을 쟁취하는 문제와 반복적으로 관련되지만 이때의 권력은 남근적이거나 순수해서는 안 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 곧 언어 이전, 글쓰기 이전, (남성)인간의 등장 이전, 옛날 옛적의 총체성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p.72)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의 시작, <사이보그 선언>을 읽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의 주제는 아마도 도나 해러웨이가 쓴 문장에서 그대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p.69 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및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서구 로고서의 체현인 (남성)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는게 그것.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특히나 '유색인 여성'이 과학 산업에 선호되는 노동력임을 얘기하며, 앞으로 과학과 결합되는 세상과 그리고 인간은 기존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도나 해러웨이의 전망이다. 그런 우리들, 주류가 아니었고 또 저쪽,'남성 인간'이 아닌걸로만 퉁쳐졌던 우리는, 기존의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을 도나 해러웨이는 얘기하고 있다. 아직 읽지 않은 <반려종 선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은데, 얼마전 들었던 팟캐스트에서는 여기에서 말하는 반려종은 반드시 '개'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 외에 인간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 이를테면 미생물까지도 포함한다고. 그리고 '반려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개 이상의 종이 함께여야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속에 존재하고, 우리의 개별적 존재는 개별적보다 관계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는 거라고.
그런 도나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건 여성의 '글쓰기'이다.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쓰기 전에도, 그러니까 도나 해러웨이가 이 모든 선언들을 하기 전에도, 그녀는 동물학, 철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문학 역시 전공했다. 그녀에게는 문학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그녀도 얘기하고 있고, 또한 그녀가 생각하는 건 과학적 상상력을 가진 글쓰기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일전에 읽었던 '디 그레이엄'의 《여자는 인질이다》에서도 언급됐었다. 디 그레이엄은 우리가 상상력을 가져야 여성혐오 사회, 페미사이드 사회에서, 그리고 이성애에 인질로 사로잡힌 세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얼마전 SNS를 통해 본 '창의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창의성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니라, 한 분야에 대해 공들여 알려고 노력하고 난 다음에 가능해지는 거라고, 창의성 뚝딱이 되는게 아니라 그 전에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나는 상상력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우주에 집을 짓는 생각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전에 우주라는 존재를 인지하는 게 필요하다. 더 많은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내 안에 쌓여야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축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문학을 읽는게 아니겠는가. 도나 해러웨이는 문학을 읽고 상상력을 얘기하고 그리고, 글쓰기를 강조한다. 여자들아, 글을 쓰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이분법들이 붕괴되고 권력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여자들아, 글을 쓰자!
오늘 아침 이 글쓰기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해왔던 글쓰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좋아서 글을 쓴다고 말해왔는데, 글을 쓰려면 당연히 읽기가 먼저여야 했다. 그러므로 내게 글쓰기와 읽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고, 나에게는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이었다. 언제나 잘 쓰고 싶었고 잘 쓰기 위해서는 읽어야 했다. 읽는 것은 내 안에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으며, 그 생각은 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과정이, 단순히 '좋아서' 쓴다고 했던 이 모든 과정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겠구나, 하는 것을 도나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거다.
그런 한편, 내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에게 글을 쓰라고 말해왔던가도 떠올렸다. 나는 글쓰는 모든 여자들을 응원하고 또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한 번 써봐, 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말해왔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된 게, 베스트셀러 작가인 친구가 내게 '너는 예전부터 나에게 계속 쓰라고 했어' 라고 말하고 '내 역사엔 네가 있어'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를 글쓰라고 독려한 사람이 너다' 라는 말을 나는 곧잘 듣곤 했던 거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을 비로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도 생각하는데, 글쓰기는 도나 해러웨이에 의하면,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여자가 글을 쓰기 전에는 이분법의 세계, 권력이 한쪽으로 기울었던 세계라는 뜻도 되겠다. 그러자, 내가 얼마나 문학하는 남자를 싫어하는지가 생각났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나 책읽기를 좋아했으면서도 '문학하는 남자'를 너무 싫어했다. 보통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문학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을 가지거나 동경할 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아무리 책을 재미있게 읽고 감동해도 '문학하는 남자'를 싫어했다. 나는 남자를 정말 너무 좋아했는데도, 그럴 때도 문학하는 남자는 싫어했다. 예술하는 남자도 싫어했다. 에피톤 프로젝트 노래를 들으면서도, 역시 이런 사람은 저기 저쪽에서 노래나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그런 남자에 대한 로망을 품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문학하는 남자를 싫어했던 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의미가 있었던걸까. 이분법의 세계를 만드는 일을 나는 무의식중에 알았던걸까? 어떤 일들은 본능적으로 아닌 걸 알게 되는데, 이것도 바로 그 일에 속했던걸까? 일전에 내가 한국영화를 너무 안봐서 친구로부터 사대주의냐는 말까지 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는 한국영화를 보지 않는, 볼 수가 없는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줄 몰랐었다. 나 정말 사대주의자인가, 라고 나를 의심했는데, 나중에야 내가 보기 싫어하고 보다가 중간에 멈춘 한국영화들이 죄다 알탕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것들은, 본능적으로 꺼려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유행어를 만들어낸 폭력적인 한국 영화들을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영화들을 싫어할 거란 것도 안다. 일전에 너무 유명한 한국영화를 '나도 볼까' 했을 때, 남동생이 내게 그랬더랬다. "아니, 누나 보면 힘들어할거야, 보지마." 라고.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심지어 페미니스트는 사랑받지 못한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한심한 시절에도, 문학하는 남자와 예술하는 남자를 싫어했더랬다. 이렇게 싫어하는 남자들을 다 쳐내고 나면 남는 남자가 없는데, 나는 도대체 왜 남자를 좋아했던걸까? 어느 지점에서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던걸까? 나는.. 남자를 좋아하긴 했던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좋아했지? 뭘 좋아했지? 문학해도 싫어 노래해도 싫어 미술해도 싫어... 뭘 보고 남자를 좋아한다고 한거야? 그렇다고 딱히 운동선수들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젊은 여자를 트로피 삼는 남자들도 너무 싫었다. 당시에는 트로피란 단어를 알지 못해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그러면, 나는 대체 뭘 좋아한거야? 오늘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오는 동안, 도대체 내가 좋아한 '남자'란 어떤 존재였던가. 나는 뭘 좋아햇던건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어떤 것이었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나? 그렇지만..
전완근과 등근육은 실재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등과, 전완근.. 그것이었나? 그 단단함과 강함이 주는 육체적인 부분.. 만 좋아했던걸까? 난, 정말 그런 사람인걸까?
어제 혼자 와인을 마시면서 <어쩌다 사장>을 다시보기로 보기 시작했다. 차태현과 조인성이 지방에 내려가 커다란 마트의 사장으로 며칠간 일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손님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계산하고 물건을 사가는 걸 보는 것도 좋고, 그들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는 것도 좋고, 아르바이트로 게스트들이 왔다가 영업이 끝난 뒤에 일한 감상을 나누는 걸 보는게 좋아서 가끔 이걸 보게 된다. 그러다 얼마전에는 게스트로 김혜수가 나온다고 해서 봤는데, 김혜수가 한 번도 마트에서 일해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할 것을 찾아다니는 걸 보면서, 어쩌면 센스라는 것은 타고나는걸까, 를 생각했다. 그러다 조인성, 조인성을 다시 보게 됐는데,
조인성은 그 프로그램에서 식사를 맡고 있다. 점심과 저녁메뉴를 선정하고 요리하고 그걸 파는 거다. 지금 나오는 회차에서는 대게라면과 어묵우동을 요리해 팔고 있는데, 점심 장사를 시작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친 조인성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가지고 바깥에 나가 혼자 그걸 먹으면서 잠깐 시간을 갖더라. 근데 그걸 보는게 너무 좋은 거다. 내 할 일을 마친 뒤에 혼자임을 잠깐 즐기는 그런 조인성을 보는데, 와, 그 장면 왜이렇게 좋지? 저 가게안에 무려 김혜수가 와있는데, 조인성은 자기 할 일을 하고 나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이게 너무 좋은 거다.
어제 본 회차에서는 남자게스트가 세 명이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식사 메뉴에 카레 돈까스를 추가하자고 해서 부엌이 초토화가 되었다. 시간은 다가오고 부엌은 점점 쓸 공간이 좁아지는데, 조인성이 한 번 훑더니 '동선을 짧게 가져가' 하면서 어질러진 부엌을 정돈하는데, 그게 너무 좋은 거다. 역시..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 보면 반해버리는데, 오늘 출근길에 '나는 남자의 전완근과 등근육을 보고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던건가' 생각하다가, 조인성의 저런 면에 반한 걸 보면서, 아니야, 다른게 있을거야, 했지만, 그런데 정리정돈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건 그게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지 남자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나는..... 남자를 안좋아하나???????????????????????? 이렇게 되어버렸다. 결론은,
유색인여성인 나는, 도나 해러웨이를 계속 읽어봐야 한다는 것.
나는 유색인 여성이고, 글을 쓰는 여성이다. 나는 유색인 여성이고, 글을 쓰는 여성이고, 읽는 여성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상할 것이다. 글쓰기로 생존의 힘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 해러웨이를 읽는 것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자, 가자, 도나,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