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에서 주인공 '선자'는 아주 잘생기고 어른스러운 남자 '한수' 를 만나 그와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고 당연히 결혼이 수순인줄 알았건만, 그는 '나는 오사카에 아내가 있고 아이가 셋 있어, 너랑은 결혼할 수 없어' 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를 당연히 책임질 것이고 선자에게 '현지처'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지만, 선자는 거부한다. 다만 자신이 유부남에게 몸을 준 여자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알린다.
한편 오사카로 형님을 찾으러 가던 목사 '이삭'은 가는 도중 선자네 집에 하숙하러 들렀다가 몸이 너무 아파 간호를 받게 되고 선자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며 선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선자는 결혼하여 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가고 거기에서 아들 노아를 낳고 또 모세를 낳는다. 한 남자로 인해 수렁에 빠질 뻔한 선자의 인생을 다른 한 남자가 구원해주는 셈.
노아와 모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이 아니라는 차별에 시달린다.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도 차별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어린 노아는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일본인. 노아는 공부도 잘해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똑똑한 일본인 여자친구 '아키코' 를 사귀게 된다. 자신의 등록금을 대주고 자신의 뒷배경이 되어주는 한수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여자친구가 말도 없이 따라 나와 몹시 노여워하는 노아에게, 일본인 여자친구는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한다.
"대체 이유가 뭐야? 네가 조선인이라는 게 부끄러운 거야?"
"뭐라고?" 노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노아는 누가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노아는 아키코가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키코는 점점 차분해져서 조용히 말했다.
"네가 조선인이라도 난 아무렇지 않아. 네가 조선인이라서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해. 나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아. 무지한 사람이나 인종차별주의자인 우리 부모님이라면 다르겠지만. 난 네가 조선인이라서 좋아. 조선인들은 영리하고 열심히 일하거든. 남자들은 아주 잘생겼고." 아키코가 유혹하는 것처럼 노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당황한 거 알아. 내 말 들어봐. 네가 원한다면 우리 가족을 모두 만나볼 수 있게 해줄게. 우리 가족들이 훌륭한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니 운이 좋은 것 같아. 널 만나보면 우리 가족들도 달라져서 ……." -《파친코 2》, p.117
노아는 여자친구인 아키코의 이 말에 충격을 받는다. 노아가 자신을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
노아가 아키코를 노려보았다. 아키코는 항상 그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아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환상적인 외국인의 모습을 노아한테서 찾는 것만 같았다. 아키코는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어울려준다는 이유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아는 그녀가 좋은 사람이자 교육받은 사람, 자유로운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다. 노아는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도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그게 무슨 의미든 상관없었다. 가끔씩은 자신을 잊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불가능했다.
"네 짐을 싸서 너희 집으로 보낼게.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노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키코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게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조선인의 기질이야?" 아키코가 웃었다.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없어."
"왜?"
"함께할 수 없으니까."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노아는 아키코에게 자신이 몸소 습득한 불공평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키코는 자신이 그녀의 부모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테니까. 노아를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냥 조선인으로 보는 것이 나쁜 조선인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아키코는 노아의 인간성을 볼 수 없었다. 노아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되고 싶었다. -《파친코 2》, p.117~118
저 부분을 읽다가 일전에 본 영화를 떠올렸다. 백인들이 흑인을 향해 '우리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요, 오바마 한테 투표했어요." 하던 거. 그게 무슨 영화였더라.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흑인으로 먼저 보고 있다는 것의 증거였는데, 말하는 사람은 선의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친코를 다 읽고 나니 인종 차별에 대해 좀 더 읽어보고 싶었다. 마침 책장에는 사둔 지 몇개월 된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가 있었다. 나는 책을 꺼내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된다.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 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 P108
아키코는 조선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자기 부모와는 '달리' 조선인인게 아무렇지도 않다, 조선인이라서 좋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노아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셈이다.
잘 모르겠다. 나는, 나는 어떨까? 나는 모든 혐오와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얘기하는 상대가 백인이나 흑인임을 인지하지 않은 채로 대화하는 게 가능할까?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만 보면서 상대의 인간성을 자각하는 일이 가능할까?
캐시 박 홍은 미국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검열하는 일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시안이라 그런다고 하겠지? 그런 검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캐시 박 홍이 하는 말들의 어떤 부분들은 물론, '아시아인' 이라서,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 이라서 하는 말들일 것이다. 아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캐시 박 홍의 정체성 자체가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이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온전히 객관적일 수 있을까? 나 라는 사람은 이미 내가 여자라는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사람인데, 그 모든 것들을 덜어내면서 인간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 가능할까? 객관적이라는 것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할 때 쓰일 수 있는 단어일까? 내가 가진 자책, 죄책감, 피해의식. 이 모든 건 그저 나라는 인간이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진 고유한 성향일까? 그것들이 형성되는 데에는 내가 여기에서 태어나 여기에서 자랐다는 것, 내가 이런 성별로 태어나 이런 성별로 살아왔다는 것이 영향을 미친게 당연하잖아?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은 눈에 안 띄는 소녀 시절을 벗어나면 페티시의 대상으로 활짝 피어난다. 아시아계 여성이 드디어 눈에 띄게 되면 - 드디어 욕망의 대상이 될 때 - 너무 분하게도 자신을 향한 모든 욕망이 변태로 취급됨을 깨닫는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은 포르노다. 거기서 우리의 음험한 욕망은 몇가지 범주로 냉정하게 구분되는데 백인이 디폴트이고 다른 모든 인종은 성적 일탈로 취급된다. 소름 돋는 틴더 메시지(“아시아여성과의 첫 경험을 원합니다")를 비롯해 백인 친구들의 미묘한 공격적 언사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여성은 자신에게 끌리는 모든 상대가 변태임을 매일같이 상기당한다. 나는 유대인 남자가 아시아 여자를 사귀는 유일한 이유는 참견이 심한 자기 엄마와 정반대의 여성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던 백인 친구를 기억한다. 이 무신경한 불평에는 아시아 여자는 다 고분고분하고 순응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선의를 지닌 친구들도 백인남자가 나한테 반하면 아마 아시아 여자에 대한 페티시가 있을 거라고 어김없이 경고했다. 그 결과 나는 누가 나를 원하는 상태를 불신하게 되었다. 나의 섹슈얼리티는 곧 병리학적 판단 기준이었다.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뭔가 비정상이었다. - P233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살면서 다른 인종으로부터의 관심은 끊임없이 이것은 정상적인 관계, 인간성을 본 관계, 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본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설사 누군가 '너는 그런거 너무 예민해, 컴플렉스인가봐' 라고 말한다 해서 내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것이 나 하나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저놈의 포르노.. 저걸 어쩌면 좋냐. 어휴.. 무슨 문제든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포르노는 튀어나온다. 포르노, 이 쳐죽일 새끼..
영진 리는 풍자극 『용비어천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백인 남자가 아시아 여자를 사귀는 이유는 백인 여자보다 용모가 더 나은 아시아 여자를 사귈 수 있어서이다. 우리는 사귀자는 말에 쉽게 응하고 자존감도 낮기 때문이다. 저급 브랜드를 택함으로써 더 호화로운 사양을 누리는 것과도 같다. 게다가 아시아 여자는 백인 여자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백인 남자와도 데이트할 의향이 있다."
에린은 매력적이고 재능 있고 똑똑했지만, 칠면조 샌드위치 하나도 반드시 에린이 만들어줘야 할 정도로 무력한 남자를 사귀었다. 겉보기에는 그 관계에서 에린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무력한 척하는 남자들은 - 오벌린 대학에는 이런 부류가 특히 많았다 - 무능력을 핑계 삼아 하찮은 일을 여자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상남자만큼이나 여자 조종에 능했다.
제이크는 종일 에린의 침대보에 몸을 파묻고 나올 생각을 안했고 에린은 그를 무슨 결핵 환자 간호하듯 보살폈다. 그가 자신의 감정 부족에 대해 감정을 토로하는 동안 에린은 그 얘기를 몇 시간이고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 P183~184
캐시 박 홍의 친구 '에린'은 백인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무력한 남자를 환자 보듯 돌보아준다. 어쩌면 에린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특별한 성격을 가진 걸지도 모르지만, 저 관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 남자가 백인이라 그런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에린이 아시아계 여성이 아니었어도 제이크는 무력하게 샌드위치를 받아먹었을까? 심지어 제이크는 그렇게 이불 속에서 꼼짝도 안하면서 에린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가만 누워 있으니 쓸데 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거다. 밖에 나가서 걸어라, 제이크여. 무력하게 쳐자빠져 있으니까 불행한 생각만 하게 되는 거다. 나가서 광합성을 하고, 몸을 움직이고, 땀을 내고, 그래서 그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좀 더 희망적인 생각이 싹 틀것이다, 제이크여. 만약 제이크가 백인이 아니었어도 에린은 남자친구를 결핵환자 돌보듯 했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알 수 없다. 내가 나라는 '이런' 사람이어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포지션과 내 힘, 맺어가는 관계는 조금씩 다르다. 에린에게 남자친구 제이크가 백인 남자라는 사실, 제이크에게 여자친구 에린이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존재였을 수 있다. 기본적 성향이 무력한 남자이고 기본적 성향이 돌봐주는 여자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속에서 그것들이 더 극으로 발현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이크는 처음부터 아시아 여성에게 그런걸 기대하고 사귀었을지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아시아 여성으로서 피해의식을 가진 것일테다. 피해의식,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로부터 발현되는 것.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거다. 자꾸 이걸 묻게 하는 거다. 에린이 아시아인 여성이 아니었다면? 제이크가 백인 남자가 아니었다면? 관계속에서 끊임없이 이걸 묻게 하는거다, 인종주의가. 인종주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이게 얼마나 스트레스인가.
그러나 나라는 인간 자체가 온전히, 완전하게 객관적일 수 없다고 하면, 그래 우리는 객관적일 수 없는 존재이지, 하면서 이대로 살아야 하는걸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러니까 내 모든 주관성, 취향, 성향등을 가지고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없는걸까?
《백인의 취약성》에서 '로빈 디앤젤로'는 배우고, 관계를 맺고, 환경을 바꾸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종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백인이 내게 인종주의와 백인의 취약성과 관련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을 때, 나는 먼저 이렇게 되묻는다. "어떻게 당신은 교양 있는 전문직 성인이면서도 인종주의와 관련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를 수 있죠?" 이것은 솔직한 질문이다. 주변 어디에나 정보가 있는 마당에 우리는 대체 어떻게 모르는 걸까? 유색인이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에게 말했는데도 말이다. 이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온갖 이유를 따져보면, 그에 맞는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나의 답변이 인종주의에 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앞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답변이 유색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라면, 유색인과 관계 맺을 필요가 있다.
나의 환경에 유색인이 없는 것이 이유라면, 편안한 영역에서 벗어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 노력하지 않고는 인종주의에 대처할 수 없다. - 《백인의 취약성》, 로빈 디앤젤로, P246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겠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 나라에서는 오로지 백인만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대다수의 비백인은 과거로 돌아갔다가는노예가 되거나, 살해되거나, 신체에 상해를 당하거나, 흉포한아이들에게 쫓길 것이다. - P40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 P111
미국의 대다수 백인은 인종적 트라우마를 구경거리로만 인식한다. 트럼프 당선 직후 언론은 증오 범죄의 증가를 보도하면서, 백인 고등학생들이 남부연합기를 망토처럼두르거나 스와스티카를 그린 옷을 입고 학교 복도를 행진하는 모습같이 뻔하고 몰상식한 증오 표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였다. 보도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런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런 사건을 예상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다. 백인의 공포 정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누적적이며, 자기혐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 P113 - P112
2011년 새뮤얼 R. 서머스와 마이클 I. 노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지된 반흑인 편견이 감소했다고 대답한 백인응답자들은 반백인 편견은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인종주의를 제로섬 게임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관점은 너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면 나에 대한 적대감이 늘어난다는 제프 세션스법무장관의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던 당시 미국 백인들은 실제로 반백인 편견을 반흑인 편견보다 더 큰사회문제로 여겼다. 오로지 한 명을 제외한 미국 대통령 전원이 백인이고, 역사적으로 의석의 90퍼센트를 백인이 차지해왔고, 백인이 보유하는 평균 순자산이 비백인보다 10~13배 높은데도 그렇게 믿었다. 사실 인종 간 소득 격차는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 P119
30년 전 중위 흑인 가구의 보유 자산은 6,800달러였으나 지금은 불과 1,700달러이며, 이에 반해 중위 백인 가구의 자산은 같은 기간 10만 2,000달러에서 11만 6,800달러로 증가했다. 자원의 축적이 너무 불균형해서 백인성이라는 인종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백인 과두체제를 뜻한다고 철학자 린다 마틴앨코프는 표현한다. - P119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대한 반격으로 흔히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 (alllives matter)라는 구호에도 저들의 망상이 암묵적으로 내재해있다. "모든 사람"(all)은 포용적이라기보다는 방벽을 둘러친 대명사, 즉 "그것을 인종 문제로 만들지 못하도록 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백인성의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고 지속되게끔하는 방어 장치이다. - P120
나는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 때면 걷잡을 수 없이 거만했다. 우리 셋 모두 그랬다. 우리는 백인 남성의 자신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감은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때 우리는 경력을 쌓는 모든 단계에서 매번 과소평가 당했기 때문에 각자 능력을 되풀이해서 증명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전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우정으로 배양된 창의적 상상력에 꾸준히 충실할 수 있었으며, 그 상상력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의식의 진실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엄밀성과 깊이에 의해 다듬어졌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예술가가 되라고 촉구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 - P203
『낯선 자들의 수직 심문』에서 저자 바누 카필은 무작위로만난 남아시아 여성들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누구의 책임입니까?"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과 더불어 "당신은 어떤 체형입니까?"라고 질문한다. 나만해도 비소처럼 남은 어린 시절의 잔여물인 신체이형장애의흔적을 노출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다. 의기양양한 페미니즘 서사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탈환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신체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큰 머리통, 어쩌면 한때는 중성적으로 깜찍한 매력이 있었을 수도 있는 아담한 몸. 하지만 이제 내 몸은 무심하게 방치되어 늘어지고 있다. 유방은 소파에 누워서 서핑할때 쓰는 노트북 받침대다. - P234
한국전쟁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며 화상 피해자를 치료했던 미국 외과 의사 데이비드 랠프 밀러드가바로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드는 쌍꺼풀 수술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수술법을 한국 성노동자들에게 시술하여 미군 병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 쌍꺼풀 수술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수술이다. 내 조상의 나라는 당신이 영구적 전쟁과 초국가적자본주의를 통해 필리핀, 캄보디아, 온두라스, 멕시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엘살바도르,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나라에서 저지른 살상과 자원 착취의 작은 예시에 불과하며, 이것은 주로 미국 국내 주식 투자자들의 배를 불렸다. - P2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