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꿈에는 그가 나왔다.
그는 나의 옆집에 살았고 그 집은 아주 큰 집이었다. 그도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고 집을 비웠고 그의 부모님과 그의 할아버지도 공교롭게 모두 집을 비워 며칠간 그 집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와 다정한 사이였고 그에 대한 애정이 매우 컸다. 그를 사랑했다. 그는 나만큼의 크기는 아니어도, 그 역시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들도 나를 좋아하셨고 특히나 그의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했다. 그 집이 며칠 비워지는 동안, 그 집 부모님은 내게 연락해 집을 좀 들여다봐달라 부탁했고, 나는 기꺼이 그러겠노라 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그의 텅 비고 큰 집을 나는 가끔 들여다봐주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곧 집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가 가장 먼저 돌아올거라 했으니 그렇다면 이 큰 집에 그 혼자 있을테구나, 나는 빈 집을 한 번 돌아보고 나가려는데, 대문에 그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여자가 있었고 나는 그가 왜 나에게 말도 없이 돌아왔을까, 그가 왜 여자랑 함께 있을까 갸웃하며 보는데 그는 함께 있는 여자를 보느라 아직 나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암수 서로 정다웠고, 그리고 커플 티를 입고 있었다. 커플티와 커플 바지. 가만있자, 저건 커플티인데.. 왜 다른 여자랑 커플티를 입고 있을까? 그리고 왜 저렇게 다정할까? 그는 며칠간 집에 없었는데, 그렇다면... 하다가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신혼여행을 다녀왔구나, 그는 신혼여행을 다녀온거야. 나랑 다정하게 지내는 내내, 나의 연인으로 살갑게 굴어놓고서는, 결국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한거였고, 그렇게 몰래 신혼여행을 다녀온거였어. 나는 경악하며 그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서 맞춰보는 동안,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돌려 내 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울면 안된다고,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이를 악물고 걷고 있는데, 그는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는 나를 돌려 자신을 마주보게 하고는 말했다. 그런게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신혼여행 다녀온거잖아, 너 저 여자랑 겁나 정답던데, 아니긴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야. 그러자 그는 내게 그게 아니라고, 자꾸만 그게 아니라고 했다. 너 신혼여행 다녀온거 아니야? 그건 맞아. 그런데 뭐가 아니라는거야? 그는 내게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다고,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고, 집에서 정략결혼을 하도록 강요했고 자신은 피할 수 없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신을 좀 이해해달라며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설사 네 말대로 그게 정략결혼이고 어쩔 수 없이 결혼했어도, 너 그 여자 금방 사랑하게 될거야, 너 이미 사랑하고 있어, 너 그 여자랑 있는거 내가 봤는데, 라고 대꾸했더니, 그는 아니라고 했다. 나를 놓지 않을거라고. 그런데 그렇게 나를 마주보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현빈의 얼굴이 되어있었고, 그렇게 현빈의 얼굴로 그런 말을 하노라니 나는 그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가 기억났고, 그러니까 .. 나는 그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랑 사는 동안, 그냥 예전처럼, 지금처럼, 그와 다정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내적 갈등이 찾아왔고, 이게 다 이새끼 얼굴을 보니까 그런거야, 하면서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생각해볼게' 하고 돌아서 내 집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길에 자꾸만 그의 말을 듣고 믿고 그를 계속 사랑하려는 내 마음이 튀어올라와서, 안돼, 얼굴에 현혹되지마, 내 사랑에 현혹되지마, 저 새끼는 개새끼가 맞아, 개새끼야, 안돼, 끊어버려,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 너무 가슴이 아파..
집에 돌아와 창밖을 보면서 나는 계속 고민했다. 나는 이제 어쩔 것인가. 그의 부모님도 뻔히 우리 사이 알면서 어떻게 저 결혼을 강제하나. 모두가 나를 속인 것인가. 무엇보다 이런 개같은 배신을 당하고서도 왜 나의 마음이 이렇게나 그를 버리는 걸 어려워하나,
떠나자, 떠나는 거다. 떠나는 게 답이다. 뭐가 됐든 그는 결혼을 했다. 끝이다. 끝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 계속 있다면 그러나 나는 질척거릴 것이다. 나를 이런 상태로 둘 수 없다. 나를 이런 개같은 경우에 놓고 수시로 자존감 박살나게 할 순 없다. 옆집에 살면서 수시로 그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 얼굴을 본다면 나는 냉정하게 돌아서기 힘들것이다. 떠나자, 어디로든 떠나자.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자. 이건 돌이킬 수가 없다. 신혼여행 갔다온 그 사람을 내가 대체 무슨 수로 받아들인단 말인가. 떠나자. 어디로든 떠나는거야. 어디로든 가자. 어디로든 가고 또 어디로든 이동하면서 그렇게 살자. 한동안 그를 보지 않는다면 마음도 조용해질 것이다. 떠나자. 그렇게 나는 짐을 쌌고, 어디로 가야할까 고민을 하는 중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서는 꿈속에서 느낀 슬픔이 그대로 내 안에 있어 당황했다. 어휴, 꿈이잖아, 왜 이런 꿈을 꾼담? 하다가, 이것은 엊그제 읽은 에바 일루즈의 책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하면서 결국 받아들이는 것,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나를 설득하고자 하는 그런 모순에 대해서 나는 그 책에서 읽었던 터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었구나, 하였지만, 바로 이런 내용의 책이 있었다, 앨리스 먼로다! 하고 생각했다. 내가 경험한 바로 그대로의 내용을 앨리스 먼로가 한참전에 이미 단편으로 써주었지!!
이 책에 실린 단편 <그림엽서>에서 여자는 남자와 연애중이다. 그와 결혼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가문으로 자신이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자를 안고,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니까. 여자에게 결혼하자는 말도 했고 그래서 여자는 언젠가는 그와 결혼하게 되겠구나, 생각했던 거다. 그녀가 온마음으로 그와 결혼하고 싶어한 건 아니었지만 그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에게 닥칠 미래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여동생 부부와 여행을 떠난 그가, 여행지에서 그녀에게 그림엽서까지 보냈던 그가, 여행지에서 다른 여자랑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신문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된다. 게다가 그는 그 결혼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여자가 있는 마을, 그가 살던 마을로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 마을로 돌아온 남자는 여자를 찾아오지도 않고 어떤 변명의 말도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남자와 여자는 연인으로 알려졌었는데, 그런데 이제 그녀는 이 마을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무엇보다 이 남자가 나에게 행한 일의 이 배신감은! 기가 차다. 도대체 여자는, 나는, 뭐가 된것이란 말인가.
여자는 배신감에 치가 떨려 참으려고 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차를 끌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가 이제 아내와 함께 사는 집. 그의 집 앞에 멈추어서 경적을 울리고 소리친다.
나는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그런 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숙이고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길고 크게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마음이 푹 놓여 한껏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이봐, 클레어 맥쿼리. 할 얘기가 있어!"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클레어 맥쿼리! 클레어 나와!" 나는 깜깜한 집에다 대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나는 또다시 경적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몇 번인지 모르게 수도 없이. 경적을 울리는 사이사이에 고함도 계속 질러댔다. 나 자신이 저쪽에 몇 발짝 비켜서서, 주먹으로 꽝꽝 내리치는지, 고함을 질러대는지, 경적을 눌러대는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리굿을 벌이는지,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째깍째깍 하는지, 보기에 따라서는 신 나는 놀이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도 거의 잊었다. 나는 리듬을 살려 경적을 울리는 동시에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림엽서>, pp. 262-263
결국 경찰이 찾아오고 그녀를 진정시킨다. 아마 이 일은 다음날 마을에 소문이 날 것이다. 그녀는 남자로부터 배신당했고, 한밤중에 남자의 집 앞에 가 행패를 부렸노라고. 여기에서 여자의 잘못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이 쑥덕임은 여자를 향할 것이다. 어휴, 남자가 자기 사랑하는 줄 알았나봐, 남자한테 이용당했네, 가서 행패부렸대, 하고.
이 단편을 읽었던 2012년에는 내가 통쾌하다고, 한반중에 찾아가 경적을 울린거 잘했다고 페이퍼 써놨는데, 지금은 딱히 통쾌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나였다면 그 집앞으로 찾아가 경적을 울리고 소리치는 일을 하지도 못했을 거지만, 그 일은 그가 당하는 벌로써 너무나 약하다. 그게 뭐야. 그 배신감을 어떻게 한밤중의 경적울리는 걸로 퉁칠 수 있어? 안돼, 저것 가지고는 안된다. 저건 통쾌하지 않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뭐가 되는걸까. 분명 아내는 물어볼 것이다. 저여자가 한밤중에 여기서 왜 자기 이름을 부르는거야? 그렇다면 남편은 결혼 전에 나 따라다니던 여자인데 결혼한거 알고 집착하는 거야, 신경쓰지마, 미친 여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아내라면, 나는 그에게 결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다. 단순히 경적을 울린 여자가 미친 여자구나, 라고 돌아서는게 아니라, 왜 울렸을까? 어떤 여자일까? 나는 그 여자의 사정을 알고 싶다. 그러나 그 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 다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아, 이게 다 에바 일루즈 때문이여 ㅠㅠ
아침부터 꿈에 잠식당하고 있어서 이걸 어떻게 잊나 생각중이다. 일기를 쓰는게 답이다. 일기를 쓰고 풀어버려야 돼.
이게 일요일 낮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다.
꿈에서 느꼈던 아픔과 배신감이 아직도 배꼽에 남아있어.
암수 서로 정다웠던 너와 다른 여자... 휴.....
어제는 이모가 왔었다. 외할머니 댁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건데, 나는 이모가 온다는 소식에 빵을 구웠다. 이모가 도착하자 커피를 내려주고 파운드 케익을 구워 잘라주었다. 점심으로는 장칼구수를 야채 듬뿍 넣어 끓여 주었고 그걸 맛있게 먹은 이모는 울엄마를 모시고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오늘 울엄마를 우리집에 다시 데려다줄거라서 나는 이모 가져가라고 파운드케익을 새로 하나 또 만들었다. 점심 전에 출발하려고 한 이모에게 고르곤졸라 피자를 구워주었다. 이모는 고르곤졸라 피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이모가 오면 해줘야지 벼르고 있던 터였다. 고르곤졸라 치즈도 사두었었고. 그렇게 이모에게 고르곤졸라 피자를 만들어줬더니 이모는 맛있다고, 파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먹더니, 한조각 남은 것은 본인 싸달라고 했다. 집에 가서 데워먹고 싶다고. 그렇게 이모는 내가 구워준 파운드케익과 피자를 가지고 돌아갔다.
지난 주에는 여동생이 조카들을 맡기고 갔었다. 나는 오븐에 치킨을 구워주었고, 우유를 뜨겁게 데워 핫쵸코도 만들어주었고, 고르곤졸라 피자를 만들어주었고, 쭈꾸미를 볶아 주었고, 장칼국수를 끓여주었고, 소고기를 구워주었고, 따뜻한 보리차를 끓여주었고, 함께 머핀을 만들어 먹었다. 내가 내주는 음식들을 잘 먹는 조카들을 보니 너무 행복했다. 음식 만드는 내내 부엌에 서있어야 해서 고단했지만 내가 차려둔 음식을 맛있게 또 배부르게 먹는 조카들을 보는게 너무 행복이었어서, 아, 나는 진짜 이런게 너무 좋다,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내어주는 일.
조카들은 오랜만에 보는거였다. 코로나 때문에 좀처럼 만나지 못하고 있었고, 서로의 집에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으며 5인이상 모이면 안된다는 말에 만날 생각도 못하고 마냥 미루기만 하고 있었는데, 조카들이 할머니 보고 싶다고 울어버리자 여동생이 안되겠다 싶어 조카들만 우리 집에 두고 돌아간거다. 그렇게 주말 내내 조카들과 있었는데, 조카들은 내 생각보다 우리 집에 일찍 도착했다. 나는 조금 더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샤워를 하던 중에 조카들이 온 것이다. 밖에서 웅성웅성 조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초조해졌다. 으앗 왔구나! 나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안방 욕실에서 샤워를 했었는데 문을 열자 큰조카가 안방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더라. 그렇게 나를 보더니 이모!!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나 역시 조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소리 지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보고싶었어, 나도. 이러면서. 아... 이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게.. 이게... 내가 살면서 이렇게 나 보고 싶었다고 진심으로 나를 끌어안는 이런 경험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누가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반갑다고 나를 안아줄까. 내가 너를 안고 너가 나를 안는 그 순간이 진심만으로 꽉 차는 순간들이 살면서 나에게 앞으로 몇 번이나 오게 될까. 내가 무슨 복을 받았다고 이런 마음을, 이런 그리움을, 이런 사랑을 받나. 어떻게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오나. 내가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했다고 신은 내게 이런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걸까.
2주 전에 새로운 조카가 태어났다. 나는 고모가 되었다. 새로운 조카에게는 젊은 이모가 셋이나 있다. 그 이모들에게 첫조카이니만큼 아마 크게 사랑받겠지. 이 아가의 사진을 받거나 영상을 보게 될 때마다 내 눈은 하트가 되는데, 그런 나를 보며 엄마가 '그런데 이 아가는 이모가 셋이나 되어서 너는 뒤로 쳐질거야, 얘는 아마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너에게 무심할 수도 있어' 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안다고, 아마도 그렇게 될거라고, 아이에게는 아마도 가끔 보는 고모보다 자주 보는 이모가 더 친하고 다정하며 소중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했다. 나는 아이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사랑하는게 아니라고, 내가 사랑해서 사랑하는거라고, 내 안에 사랑이 너무도 크고 충만하게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도 않고 아무리 사랑을 퍼주어도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내 안에는 이미 사랑이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것을 주는 일은 받는 것과 꼭 같은 크기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정말이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해가 잘 드는 집이라서 나는 이 시간의 이 장소, 해가 잘드는 여기를 좋아한다.
이 시간에 매트 깔고 요가 하는 거 너무 좋아한다. 오랜만에 요가를 해야겠다. 요즘 통 안했는데 이런 환한 낮에 요가하는 건 궁극의 행복이다. 샤라라랑~
요가를 하고나면 이것저것 또 해먹어야겠다. 삼겹살도 있고 파스타도 있고 와인도 있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