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국어를 하는 내 친구는 아직도 영어 사전을 뒤져서 boy 의 뜻을 찾아본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게 아는 게 맞는지, 혹여 다른 뜻이 있는건 아닌지, 하고. 어쩌면 그런 친구의 성격이 친구를 4개국어 하게끔 만든건지도 모르겠다. 자유롭게 구사하는 게 4개국어지 간단한 생활 외국어는 두개 정도 더 할 수 있다고 들었다. 무언가 잘 하는 사람은 그만큼 거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 친구에게도 어떻게 그렇게 외국어를 잘하느냐 물었을 때, '미친듯이 외웠다'고 답을 들었더랬다. 정말 열심히 하기 때문에 실력으로 쌓이는 것 같다.
주말에는 '조정환'의 《증언혐오》를 읽기 시작하면서, 한국사람이 한국어로 쓴 책인데 영어사전을 꺼내왔다. 그리고 책에서 언급된 단어인 'moment'를 찾아봤다. 내가 아는 뜻 말고 혹여나 다른 뜻이 있는가 해서. 잠깐, 잠시, 순간, 때 등, 뜻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최근에 '주지훈' 주연의 드라마 《킹덤》을 재미있게 보았는데, 으앗, 좀비물이라면 부러 피하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미래는 예측불허... 이걸 봤다고 네이버 블로그에 썼더니 누군가가 '현빈 나오는 좀비물' 이라고 《창궐》얘기를 해주는 게 아닌가. 으응? '현빈'이 나오는 '좀비물' 이라고??????????? 나는 왜 정보 1도 없지? 창궐이란 제목은 들어본 것 같은데 제목 말고 정보값이 0 이라면...아마도 내 관심 밖의 것일 터. 그렇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영화를 검색해보니 무려 장동건과 같이 주연이더라. 당대의 스타배우 두 명이나 나오는데 나는 관심이 1이라니, 아마도 그 이유였던 것 같다. 잘나가는 남자들만 포스터에 있었겠지...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좀비가 나오는줄도 모르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빈이여, 장동건이여.... (장동건 싫어한다는 커밍아웃 하고 갑니다)
아니, 나 좀비물 너무 싫어했는데 이게 이상하게 연결되어가지고, 그 뭣이냐,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보고 나니까 킹덤으로 좀비를 보게됐고, 으으 싫어싫어 이러면서 좀비 다 봤네. 그럼 내친김에 현빈 좀비물도 보자, 하고 보았는데, 한국의 좀비들은 너무나 진화하는 게 아닌가. 킹덤에서는 좀비들이 뛰어다니더니(아니, 좀비는 원래 느릿느릿 걷는 존재 아니었나요?), 창궐에서는 막 지붕타고 내려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영화속에서 현빈은 임금의 둘째아들인데 청나라에서 살다가 돌아온다. 그래서 궁에 들어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데, 와, 무슨 ㅋㅋㅋ 이런 옷입고 잘생기고 멋지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옷 갈아입고 나오는 씬에서 나도 모르게 우앗, 멋지다, 해버림.
옷이 날개가 아니라 얼굴이 날개인 셈.
그러나 영화가 왜 흥행하지 못했는지(흥행 못했으니까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거겠지?) 그리고 내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를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잇었다. 나라를 구하는 건 남자들의 몫인데 좀비들하고 싸우면서 여자 전사 1이 나오긴 하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비중이 크지도 않다. 무엇보다 역겨운 건, 현빈이 형수님을 구하는 장면이었다. 좀비가 수두룩해 다들 칼로 얍얍 그러면서 싸우고 있는데 형수님은 벌벌 떨기만하고 그래서 현빈이 가가지고 '내 옷을 꽉 잡고 놓지 마시오' 이러는 거다. 그러면 형수님은 그냥 현빈 옷 잡고 뒤만 따라다니고 현빈은 형수를 구하면서 자기한테 덤벼대는 좀비를 얍얍 거리면서 해치우는거다. 하아-
글쎄, 나는 남자 감독이나 남자 작가들 그리고 남자 배우들이 이렇게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혼자(아니지, 자기들끼리)과거에 머물러서 앞으로 가는 여자들과 보조를 못맞추고, 자꾸 과거에 주저앉히려고 하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거다. 그러니까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여자들에게 '과거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훨씬 나아졌지'같은 개소리를 하게 되는건데, 지금은 과거가 아니다. 지금은 현재다. 그리고 여자들은 앞을 보고 달려가고 있고, 과거의 잘못을 현재까지 끌고 오지 말자고, 미래에는 달라지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 과거에 머무르니까 영화를 만들어도 잘생긴 남자가 나와서 꺅꺅 거리는 여자를 보고 '내 옷 꼭 잡고 놓지 말고 따라와' 같은 걸 만들게 되는거다. 이런거 보면 '약한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 해가지고 여자들 눈에서 하트 뿅뿅 나올 줄 아는가본데, 지금은 '남자가 여자 구해주는 서사'에 반하는 사람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1도 안가진 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마 내 주변 친구들 모두 이 영화 제목도 모르거나 혹은 제목만 들어본 경우가 허다할거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내 옷 잡고 내 뒤만 따라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어. 안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화 안봐요. 게다가 이 감독은 《공조》감독이던데, 내가 공조도 봤던 터라 이 남자 감독이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뭘 드러내고 싶은지 너무 잘 알겠다. 내 여자, 내 가족 지키는 멋진 남자 그리면서 여자들은 울면서 내조하고 싶어하고... 이긍... 공조 2016년 창궐 2018년인데, '잘생긴 배우를 멋지게 드러내서 멋진 영화 만들자' 만 있지, 바뀌는 현재를 영화에 반영할 생각은 별로 없는 듯.
남자들아, 과거에만 있으면 안돼.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영화는 그만 만들어. 이제 그거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어. 여자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길 원하고, 궁극적으로는 보호가 필요없는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 세상을 더럽히는 것도 남자고 구하는 것도 남자인 영화 속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역할 같은 거, 그만하고 싶어한다고. 유 가릿?
독서는 도움이 됩니다. 바뀌는 흐름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요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남자 감독들이여, 배우들이여... 독서를 해. 그리고 장동건..은 내가 일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일기를 쓰도록 하자. 감독들 배우들 모두 일기를 쓰세요. 오늘 내가 뭐했나, 일기를 써.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고 모레도 써. 그리고 며칠 지나서 몇 달 지나서 몇 년 지나서 읽어보란 말이야. 그러면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어떻게 다른지 아니면 같은지를 알 수 있다. 일기장에 쓸 쪽팔릴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어. 일기를 쓰자. 일기를 쓰면 '오늘은 베프 저새끼랑 불법촬영물을 돌려봤다' , '오늘은 성매매를 했다' 같은 거 ....다 기록으로 남게 되고, 그 기록을 안남기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이건 너무 내 생각인가... 내가 너무 또 머릿속 꽃밭인가...아직 인류애 잃지 못했나.....
아무튼 독서 하시고요, 무슨 책 읽어야 될지 모르면 그냥 내 페이퍼만 읽어도 된다. 내가 다 써머리 해주니까. 인용문도 다 올려주니까. 나 알라딘 여성학 분야 마니아 2위야.........
미래는 예측불허, 좀비 싫어하는데 최근에 너무 좀비물 왕창 봤네. 봤다고 해서 좀비에 정들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동일'의 《로마법 수업》을 읽으면서 출근했다. 저자 소개 읽으면서 완전 깜짝 놀랐는데, 아니,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의 변호사' 라는 게 아닌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것 같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어떻게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세상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니까? 게다가 읽다보니 이탈리아 유학하고 법 강의 들으면서 이탈리아어 몰라서 엄청 열심히 공부했던데, 진짜 대단하다. 이런 거 너무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읽은 39페이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로마에서는 재판관이 개인적으로 판결을 조작하거나, 여성에게 약을 먹여 성폭행을 한다는 것은 차마 반성을 촉구하거나 죄의 경중을 따지기도 힘든 극악무도한 범죄로 치부했습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용인하지 않았던 일이 21세기의 대한민국 땅에서, 그것도 특권층들에 의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은 너무나 참담하지요.
로마에서 이런 자들은 사회 구성원 자격을 박탈하고 철저히 격리해버렸습니다. 유배 장소는 주로 지인들조차 접근하기 힘든 이탈리아 연안의 섬들이나 리비아 사막의 오아시스였고요. 이 때문에 '섬 강제유배'로도 불렸답니다. 재판의 판결을 조작한다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약물로 비열한 협잡질을 저지른 이들은 외딴섬에 고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로마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근래 한국을 뒤흔든 사법농단이나 젊은 연예인들의 일탈과 성범죄는 로마법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중범죄로 여겨졌던 사안들입니다. 특권을 가진 이들일수록 더욱 엄중하게 다스렸지요. 대한민국의 법은 과연 이들을 어떻게 다스릴지 우리 모두가 똑바로 응시해야겠습니다. (p.39)
그렇다. 똑바로 응시하자. 한국 너무 남자들 살기 좋은 세상인데, 남자들만 살기 좋다는 건 크게 잘못된거다. 좀비만 때려잡지 말고 성차별을 때려잡아야돼. 없는 좀비를 향해서 얍얍 거리지 말고 눈앞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 차별에 대해서 얍얍 거리라고. 오케바리?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