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랑 와인을 마셨다. 친구는 운전을 해야해서 웰치스 마시고 나는 와인 한 병 시켜놓고 홀짝홀짝 마셨는데, 한잔이상 정도가 남은 상황. 다 마시기는 힘들고 싸가야지, 했는데 병째 들고가자니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거다. 마침 내 가방 안에는 텀블러가 있었아. 오호라. 나는 텀블러에 와인을 따라가지고 백팩에 넣었다. 친구는 '음, 흘리진 않을까' 염려했지만, 내 가방에 책이 세 권 들어있었고, 그 옆에 텀블러를 넣은 거라 딱히 위험할 것 같진 않다며 나는 걱정하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양재역에 도착했는데, 마침 지하철이 도착한 게 아닌가. 그래서 계단을 다다다닥 뛰어내려가서 안전하게 똭- 타버렸고, 타자마자, '앗, 와인!' 하고 헐레벌떡 자리에 앉아 나는 백팩을 열었던 것이야.
그리고
이내
처참한 장면을 목격한다..
이게 뭐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 권중 이 한 권만 이렇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 책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이고 게다가 선물받은 책인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슬픔의 새드니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가방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휴지를 꺼내서 열심히 열심히 닦아보려고 하지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되질 않았고 ㅠㅠㅠㅠㅠㅠㅠ그렇게 슬픔을 가득 안고 집으로 갔던 것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책과 그에 못지않게 내가 사랑하는 와인이 만났는데, 왜 그 결합은 슬픈걸까. 좋은것과 좋은 것이 만나면 더 좋아져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가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겠어. 버터 맛있고 청경채 맛있으면 버터에 청경채 볶아 맛있게 나와야 하는데, 그 날 나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울면서 버터된장찌개를 끓였었지.. 아아, 앤 타일러 님의 명문이 생각납니다.
정말이지 폴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마이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둘이 함께 사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앤 타일러, 아마추어 메리지, p.230)
나는 텀블러를 꺼내 들고 가기로 한다. 그러나 어제 날씨가 얼마나 추웠나. 장갑도 안가져왔는데 이걸 들고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하니 너무 고통... 내가 이럴 필요가 뭐있나 싶어 오금역 화장실에 들러 텀블러의 와인을 다 쏟아 버렸다. 어차피 버릴 거면 그냥 남기고 올 것을, 괜히 싸들고 와서 책까지 슬프게 만들어버렸잖아. 어리석은 선택이여... ㅠㅠ 텀블러에 넣을 때만해도 세상 알뜰하고 천재적이라고 자부했건만.. 나여...
하아-
똥같은 세상..
점심에는 콩나물국밥에 돈까스나 추가해서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