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지난해 10월 일본에서는 인터넷 기업 링크셰어재팬이 잡지 창간호부터 ‘잡지기사 어필리에이트’란 것을 개시했다. ‘잡지기사 어필리에이트’란 잡지에서 소개한 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에 따라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가 광고주로부터 어필리에이트(성과보수)를 받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광고에 QR코드(휴대전화 2차원 바코드, 이메일주소, 전화번호, 회사명 등의 정보가 들어 있음)가 표시되어 있어 상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QR코드를 해독하는 휴대전화를 이용해 광고주의 웹사이트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상품이 팔렸을 경우에는 출판사가 성공보수를 받는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광고주는 잡지광고를 보고 무엇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잡지의 가치를 결정했던 애매한 발행부수보다 훨씬 정확하게 광고 효과가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링크셰어에서는 의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 등 여러 채널을 개설해 독자가 어디를 통해서든 어필리에이트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데 이런 시스템을 잡지만 이용하라는 법 있나? 무가지, 회원소식지 등 ‘구독의욕이 높은 독자를 가진 종이매체’라면 다 가능할 것이다. 링크셰어 관계자는 장차 성과 보수가 고정 광고비를 웃도는 잡지도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사례에서 바라볼 수 있듯이 인터넷과 연결된 휴대전화는 이제 미디어이기도 하고 점포이기도 하며 판매 채널이기도 하다. 또 휴대전화는 미디어끼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다. 휴대전화를 축으로 텔레비전과 책, 음악과 책 같이 다양한 미디어 그리고 콘텐츠가 만날 수 있는 장치를 새롭게 구축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휴대전화는 홍보와 판매에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자, 새로운 ‘미디어 콜라보레이션[(다른 업종과의 협업, 제휴)을 유발해주는 기점으로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출판사가 자사의 콘텐츠를 데이터베이스화해 독자 또는 고객과 신뢰할만한 인적네트워크를 사전에 구축해두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없으면 다른 업종과의 제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출판은 만화 캐릭터를 활용해 의류, 완구, 문구 등의 사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또 책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수많은 이벤트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인터넷 세계는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첫 단계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URL 전쟁시대’다. 너나없이 닷컴을 마련하던 때다. 두 번째 단계는 ‘포털 전쟁시대다. 포털을 통해 ‘무엇이든’ 이룩해보려던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는 지금 점차 확산돼가고 있는 개별기업의 ‘인터넷홍보 전쟁시대’다. 이때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최고로 키운 다음 수시로 최고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분명 일부에게는 ‘비전’이 될 수 있다. 조금씩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출판계 현실에서는 불황을 돌파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출판사는 그야말로 소수일 터이다. 지금처럼 출판사들이 감동도 주지 못하고 전문성과 깊이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책을 만든다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성공할 수 없다. 아니 그런 책을 가지고 시스템에 적용한다면 출판사 간판을 내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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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오죽했으면 ‘문학 회생’에다 ‘힘내라, 한국문학!’이란 슬로건까지 내걸었을까? 그렇다면 대중은 정말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출판시장에서는 여전히 소설이 팔리고 있다는 증거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 증거는 대체로 두 가지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나는 블록버스터다. 2005년은 오로지 <다 빈치 코드>(댄 브라운) 때문에 먹고 살았다고 할 정도로 블록버스터 소설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다. 블록버스터 소설은 처음에는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아동을 주 타깃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대상층이 모든 세대로 확장되었다.

이런 유형의 소설은 스펙터클한 영상과 결합하기 마련이다. 애초부터 영상화를 전제로 ‘만들어’지기에 치밀한 구성력이 뒷받침된다. 게다가 <다 빈치 코드>가 출간되기 전 9개월 동안 인터넷을 통해 사전홍보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획단계에서부터 세계시민을 염두에 뒀음을 알 수 있다.

<다 빈치 코드>를 우리는 현실(팩트)과 환상(픽션)의 경계가 해체된 팩션이라 부른다. 팩션에는 수많은 생경한 지식이 나온다. 팩션을 지식소설이라 불러야 한다는 이도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소설에서도 정보를 얻기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다 빈치 코드>가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금기’를 다뤘다는 것은 그런 욕구를 매우 적절하게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순애다.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가타야마 고이치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지난해 320만부나 팔리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갖고 있는 역대 일본 소설 최고 판매기록을 단숨에 갈아 치웠다.

일본 출판계는 이 소설의 성공 이후 이른바 ‘울고 싶어라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머니와 가족의 의미를 그린 장편소설 릴리 프랭키의 <도쿄 타워>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소설을 소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다시피 하는 “절로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라는 선전 문구는 그 증거라는 말이다.

그럼 우리는 팩션을 만들어낼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성공에 이어 드라마 <주몽>까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우리도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처럼 나름의 성취를 이룬 작품이 꽤 있다. 다만 이런 작품을 전 세계를 호령할 블록버스터로 만들어내는 ‘힘’이 부족할 뿐이다.

그렇다면 순애는? 이것은 우리가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이런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작가가 바로 공지영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을 찾는다고 한다. 10만부가 넘게 팔린 소설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의 작품들이 수십만 부를 가볍게 넘기는 것을 보면 ‘공지영 현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지난 시절,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는 ‘활자를 통로로 모든 감각,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 습관이 지금 소설시장에서는 팩션과 순애라는 두 ‘극단’으로 이어진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둘 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문학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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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올해 들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만큼 대대적으로 언론에 소개된 책이 있을까? 1980년대에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른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은 이 책은, 올해 초 책도 나오기 전에 보수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하고 사설에까지 언급하면서 대단한 반향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이 떠나갈 듯이 떠든 것에 비하면 대중의 관심이 그리 대단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편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여러 출판사에서 이 책의 출간을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는 출판사마다 조금씩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을 의식해서라기보다는 과거의 ‘성과’나 특정인물을 지나치게 공격하고 있어 출판사의 ‘앞날’에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출판기획자의 촉수는 늘 이런 파장을 몰고 올 새로운 ‘감성’을 담은 책에 열려 있다. 팩션, 블루오션, 서드 에이지, 디지로그 같은 신조어를 제목에 달기도 하는 등 대중의 관심을 단숨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을 펴내고자 한다. 성공하면 한 해 농사는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담론’을 담은 인문서에서 기획자는 최고의 가치를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열풍이 휩쓸고 간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은 출현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니 기획자에게는 지금 같은 악조건이 없을 터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사상가가 출현해 이른바 ‘빅 타이틀’을 내놓지 않은 지 꽤나 오래되었고 당분간은 그런 책이 출현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다고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출판기획자들이 관심을 두는 대표적인 영역이 인류가 축적해놓은 지적 유산을 새롭게 구성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그것은 주로 신화, 역사, 고전 등을 ‘객관적 명제’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맥락잡기’로 새롭게 해석한 책이었다. 인류의 문화를 재조명하는 책들이야말로 세상을 헤쳐 갈 상상력이라는 무기를 획득하려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런 유의 책은 크게 두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특정 시기를 다룬 책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 18세기는 메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한국판 문예부흥기라는 18세기에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등은 “다단한 층위의 글쓰기를 통해 지배적 사유”를 마구 뒤흔들며 새로운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그런 간접 경험이 오늘날의 대중에게 매우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서도 <나비와 전사>(고미숙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연암을 읽는다>(박희병 지음, 돌베개 펴냄) 등의 신간은 출간 즉시 매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다른 하나는 특정 테마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주제사로 <사도세자의 고백>,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문제작들을 꾸준히 펴낸 이덕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한 <조선왕 독살 사건>은 팩션 열풍까지 더해져 12만 부나 팔렸으며 최신작 <조선 최대 갑부 역관>(김영사)도 출간 즉시 역사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계 출판계에서는 이런 출판경향을 20세기 말부터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꾸준히 책을 펴내왔다. 국내 출판계는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서 있다. 수요는 있으나 ‘물건’이 한없이 부족하다. 이것이 우리 출판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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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창해)에서 세계화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눴다. 세계화 1.0 시기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해 구세계와 신세계의 장벽을 허문 1492년부터 1800년 전후까지다. 이 시기에 지구적 통합을 이뤄내는 변화의 동력은 마력이나 풍력, 화력으로 표시할 수 있는 국력과 그 힘을 얼마나 적절하게 배치하는가에 관한 창조적 재능이었다.

2.0 시기는 1800년부터 2000년까지로 이때의 동력은 다국적 기업에서 나왔는데 변화의 강력한 추진력은 초기의 화력선과 기차에서부터 전화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주로 하드웨어에서 나왔다. 개인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협력하고 경쟁하게 된 지금의 3.0 시기에 동력은 하드웨어가 아닌 광케이블을 통한 네트워크와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소프트웨어에서 나온다.

계몽서이기에 당대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화 또한 시대적으로 달랐다. 국가가 평균적 능력의 신민을 요구하던 1.0 시기에는 ‘이솝우화’나 ‘라퐁텐 우화’가 안겨주는 윤리적 교훈과 재미가 안성맞춤이었다. 전세계 국가들이 일제히 석유 확보에 나섰던 1970년대 말의 오일쇼크가 엄청난 불경기를 불러왔을 때만 해도 대중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 같은 책에서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오로지 먹이를 더 많이 찾기 위해 날았지만 주인공 조나단은 남보다 높고 멀게 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결국 자신의 꿈이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같음’의 미학을 깨닫게 된다.

2.0 시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우화는 1998년 미국에서 출간된 스티브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다. 이 우화가 강조하는 것은 미로(기업주)는 결코 변하지 않으니 남보다 ‘빨리’ 치즈가 있을 법한 미로를 찾아내라는 철저한 환경순응의 철학이다. ‘변화’라는 교훈은 결국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라는 것에 다름없다.

올해 상반기에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는 세 우화는 누구도 가지 않은 길, 곧 ‘외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한국경제신문사)는 마시멜로라는 달콤한 과자를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자만이 미래에 누구보다 많은 마시멜로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핑>(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 웅진윙스)에서 주인공인 개구리 핑은 부엉이(멘토)의 도움을 받아 누구도 가지 못하는 ‘황제의 정원’으로 향한다. <배려>(한상복, 위즈덤하우스)에서는 남을 위한 배려나 나눔의 철학을 강조하지만 그것도 결국 개인의 성공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오늘날 개인은 국가도 통제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강력한 힘에 지배받는다. 그 힘을 가진 이는 토마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창해)에서 말한 ‘초강대 개인’일 수 있다. 프리드먼은 초강대 개인은 ‘초강대 국가’나 ‘초강대 자본’과도 맞설 수 있다고 말하며 개인의 능력을 한껏 띄워놓았다.

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기업주들이 대량 구매해서 직원들에게 나눠준 ‘쓰나미’가 지나간 후 이 땅에는 전국민의 임시직화가 진행되었다. 이제 대중은 원초적인 인간관계만을 그린 소설 또는 최상의 멘토는 자기 자신이라고 유혹하는 자기계발서, 외길을 가라는 우화 등에서나 겨우 ‘개인’의 힘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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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87’은 지고 ‘97’은 뜬다. 여기서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1987년의 6월 항쟁,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말한다. 87의 정서는 오로지 정상이나 중심을 향한 외길이었지만 97의 정서는 비록 오솔길일지언정 자기만이 만족하면 되는 길이다. 그것은 삶의 방향성이 아니라 삶의 무늬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무늬는 매우 섬세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다. 영화시장에서는 <쉬리> 등장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동막골> 등 분단과 전쟁 그리고 민족주의를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하며 전국민을 역사적 ‘경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2005년 연말에 개봉한 <태풍>은 초특급 블록버스터 영화였음에도 관객 420만 명에서 막을 내리고 저예산 영화 <왕의 남자>가 전인미답의 12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왕의 남자>는 한마디로 세대마다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초점 영화다. 작년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로맨스 판타지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19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궁>이 인기다. 하지만 두 유형 어디에서도 진지한 ‘구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벼운 ‘수다’만이 넘친다.

출판시장에서도 ‘개혁적 열망’을 담은 책이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모모>(미하엘 엔데 지음)가 드라마에 몇 번 소개된 뒤 85만 부나 팔렸던 것처럼 영상과 결합한 책은 언제나 상종가를 친다. 20권이나 되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가 100만 질의 신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서바이벌 만화 과학상식>(코믹컴 외 지음), <마법 천자문>(시리얼 지음), <코믹 메이플 스토리>(송도수) 같은 스토리 만화 시리즈들도 모두 400만 부를 넘겼다. 홈쇼핑에서는 150만원이 넘는 그림책 시리즈가 1시간 방영으로 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 분야는 아무리 평단에서 주목받는 작품이라도 3천부 초판을 넘기기 어렵고 1만부 넘는 작가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인문서 또한 1천 부를 넘기기 어렵다.

외환위기 직후만 해도 우리 사회의 담론은 ‘변화’였다. 변하기만 하면 나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월급으로 먹고 사는 사람보다 자본운용으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양극화하면서 그런 믿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포기하고 경쟁사회의 어지러움증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핑>(스튜어트 에이버리 지음), <배려>(한상복 지음) 등 지금 베스트셀러에 상위권에 올라있는 우화형식을 차용한 자기계발서가 대중에게 자기만의 길을 가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다룬 책이나 특이한 이력의 삶을 가진 사람들의 감동적인 자전적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87’과 ‘97’의 세대교체는 물론 물리적 나이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소비자는 동일하지만 앞의 경험은 급격하게 잊혀지고 뒤의 경험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지금 문화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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