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오죽했으면 ‘문학 회생’에다 ‘힘내라, 한국문학!’이란 슬로건까지 내걸었을까? 그렇다면 대중은 정말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출판시장에서는 여전히 소설이 팔리고 있다는 증거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 증거는 대체로 두 가지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나는 블록버스터다. 2005년은 오로지 <다 빈치 코드>(댄 브라운) 때문에 먹고 살았다고 할 정도로 블록버스터 소설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다. 블록버스터 소설은 처음에는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아동을 주 타깃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대상층이 모든 세대로 확장되었다.

이런 유형의 소설은 스펙터클한 영상과 결합하기 마련이다. 애초부터 영상화를 전제로 ‘만들어’지기에 치밀한 구성력이 뒷받침된다. 게다가 <다 빈치 코드>가 출간되기 전 9개월 동안 인터넷을 통해 사전홍보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획단계에서부터 세계시민을 염두에 뒀음을 알 수 있다.

<다 빈치 코드>를 우리는 현실(팩트)과 환상(픽션)의 경계가 해체된 팩션이라 부른다. 팩션에는 수많은 생경한 지식이 나온다. 팩션을 지식소설이라 불러야 한다는 이도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소설에서도 정보를 얻기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다 빈치 코드>가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금기’를 다뤘다는 것은 그런 욕구를 매우 적절하게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순애다.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가타야마 고이치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지난해 320만부나 팔리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갖고 있는 역대 일본 소설 최고 판매기록을 단숨에 갈아 치웠다.

일본 출판계는 이 소설의 성공 이후 이른바 ‘울고 싶어라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머니와 가족의 의미를 그린 장편소설 릴리 프랭키의 <도쿄 타워>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소설을 소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다시피 하는 “절로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라는 선전 문구는 그 증거라는 말이다.

그럼 우리는 팩션을 만들어낼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성공에 이어 드라마 <주몽>까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우리도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처럼 나름의 성취를 이룬 작품이 꽤 있다. 다만 이런 작품을 전 세계를 호령할 블록버스터로 만들어내는 ‘힘’이 부족할 뿐이다.

그렇다면 순애는? 이것은 우리가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이런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작가가 바로 공지영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을 찾는다고 한다. 10만부가 넘게 팔린 소설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의 작품들이 수십만 부를 가볍게 넘기는 것을 보면 ‘공지영 현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지난 시절,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는 ‘활자를 통로로 모든 감각,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 습관이 지금 소설시장에서는 팩션과 순애라는 두 ‘극단’으로 이어진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둘 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문학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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