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아파트값 거품빼기와 진보

오전에 '벼랑끝 인문학'에 대한 기사들을 모아두었는데, 사실 내가 더 공감하는 것은, 그리고 보다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위기'이다. 소득 양극화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 멕시코와 함께 가장 심각한 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어제 보도로는 자살율도 2년 연속 세계 1위라고 한다. 각종 통계수치에 대한 신뢰도를 조금 낮추더라도 '살맛나는 사회'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정치권 안팎으로 갈수록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골은 깊어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게 '길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 지난주 경향신문의 창간 60주년 특집기사를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쪽에 모셔두고 있는 이유이다(지금 보니까 가방에 있다). 기사는 주로 '진보개혁의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 중에서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 아니 보다 실감나게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장'의 비판은 여러 모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사실 '아파트값 안정'과 '사교육비 경감', 이 두 가지가 대내적으론 가장 핵심적인 국정과제 아닌가? 정부나 정치권에도 난다긴다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왜 해결이 안되는 것일까? 거꾸로 사정은 왜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일까?). 진단에 걸맞는 해법이 현실화될 수 있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의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읽어보고자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경향신문(06. 09. 14) “현실 모르는 ‘반쪽 진보’ 권력 맛본뒤 퇴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사람들 정치는 잘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냐 반독재냐, 직선제냐 간선제냐 같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정치 문제에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독재자를 타도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바보’다. ‘실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처럼 이분법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다. 또 정치 문제와 달리 바로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야 느낀다.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관료다.

나는 그걸 DJ 때부터 봐 왔다. DJ는, 태생적으로 DJP연합이다.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를 택했다. DJ때 경제 정책은 모두 개발 관료에 의존해 나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 건설 경기 부양, 신용카드, 외자 유치 등이다. 그러다 말미에 아들과 측근이 개발 세력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YS, DJ보다 나은 진보 정부라 여겼기에 서민·중산층을 위한 진보적 경제 정책을 내놓을 줄 알았다. 또 재벌·기업의 특혜를 파헤치는 경제 과거사의 진상 규명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룰 줄 알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만 유능, 경제는 바보
참여정부는 집권 1년간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이 적다고 변명했다. 2004년 4월 ‘탄핵풍’으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대거 입성했다. 민노당도 거저 들어갔다. 여대야소 정국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총선 승리로 진보개혁 세력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의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였다. 의미있는 입법 하나 못했다.

경제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아파트 선분양은 그것 자체가 특혜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아파트는 분양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돈주고 사는데 ‘구입’이고 ‘매입’이지, 왜 분양이냐. 분양이라는 말에 나눠 준다는 뜻이 있다. 강아지 분양하듯 이해하는데, 누가 주체인지 잊고 산다. 신도시 개발 방식도 들여다보자. 정부가 농민들의 농지, 임야를 30년간 헐값으로 뺏어서 건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택지 조성도 하기 전에 말이다. 농민은 도시민에게 당연히 빼앗겨야 하고, 국가는 농민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인식이었다. 빼앗은 농지를 건설업자에게 30년간 판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그리고 소비자는 분양받는다. 분양이란 말이 ‘값싸게’를 뜻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시세보다도 높다. 그 자초지종을 알아야 한다.

◇기득권층 얘기만 들어
청와대에 들어간 진보개혁 세력 이야기도 해보자. 학자 출신이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도 현장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이 통계와 자료를 관료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청와대 들어가서 외국에서 배운 이론만 접속시키려다가 항상 관료와 재벌 민간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역이용’ 당한다.

집권 이후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내 진보개혁 세력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관료, 재벌, 재벌 이익단체, 재벌 민간연구소 연구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이다. 시민단체 사람도 만나지만 열에 한두번 정도일 뿐이다. 경제부문의 무능함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료, 이익단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진보’가 어느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보수’가 된다. 권력의 맛도 느낀다. 그런데 정치권내 진보개혁 세력들은 어떻게 접대와 로비를 피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들? 경제 관료나 재벌에게 팽팽당한다. 재벌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 예전에 경제 공부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스터디하나. 관료나 재벌, 이익집단의 연구소 연구원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자료에 데이터에 논리까지 만들어주니까 편하다. 가만 있어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또 그런 세상이니까.

각종 국가정책 용역 생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관료를 통해 나오면 관료를 위한 용역 보고서만 생산된다. 국회나 정당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책 연구소도 100%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미국처럼 관료나 행정부는 법안을 발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관료는 국민을 위한 머슴이다. 머슴한테 의존하는 법안은 안된다. 대의 기구인 국회의원과 정당이 정책·제도를 파고들고 연구해 내놓아야 한다.

보수적 관료들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지시받는다고 갑자기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 바뀌는 데 무엇을 바꾸겠는가. 미국의 연방 공무원은 정권이 교체되면 고위 공무원 절반이 바뀐다. 우리도 헌법이나 공무원법을 싹 바꿔야 한다. 한국처럼 ‘고시’로 평생을 보장받는 나라는 없다.

개발독재 때도 대다수 국민은 희망과 꿈을 가졌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현재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자신감과 희망 있었다. 지금은 우선 열심히 일할 곳조차 없다. 일해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래가 안 보인다. 항상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다. 결국 부동산 문제다. 개인 자산의 80%가 부동산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고민 80%가 부동산이라고 보면된다. 집값 폭등하니까, 5년 10년 일하면 집 사고, 평수 늘리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투기 잘 하는 사람이 선망받는 시대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기를 죽여놓는다.

서민, 중산층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선진국 돼간다지만 재벌만 선진국이고 ‘그들만의 천국’이다. 집권 세력이 95%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5%의 기득권 세력에게 점점 살기 좋은 환경,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다. 95%는 박탈감에 점점 힘들어지는데 5%는 불로소득으로 자산 늘리면서 잘 산다. 이런 게 위기의 본질이다.

대통령, 정부, 여당은 ‘성장률’에 집착한다.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잘 받으려면,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거품을 조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기 주머니, 집 마련, 저축, 일자리 이런 것 고민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은 ‘자기만의 성장률, 성적표’에 집착하고 결국 거품 유혹에 빠지게 된다. 거품 조장하면 결국 투기라는 병이 생긴다.

참여정부가 재벌에게 특혜를 늘려줬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기업도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각종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거품 조장을 해왔다. 주택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백만~2백50만명이다. 그중 15% 정도만 정규직이고 지식 노동자다. 나머지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다. 참여정부 들어 50만~1백만명 고용이 창출됐다. 그중 30%는 외국인 노동자다.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란 게 우리 지식을 배운 청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계 투기 자본이 ‘부동산 투기장’에 투입됐고, 지금도 투입되고 있다. 자꾸 돈이 모이니까 개발과 부동산에 집중되고, 지식 산업과 거리가 멀어지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고 병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못한다. 주택값은 폭등한다. 미래에 대한 위기, 불안 때문에 결혼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빈부격차 심화,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킨 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하니까, ‘미친 놈’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만 말고 대안 내놔야
진보는 그게 지식이든, 돈이든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보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천5백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 기업, 보수 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천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천만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진보인가. 반독재하고 길거리 행동했다고 진보인가. 지금 진보개혁세력은 ‘머리만 진보’거나 ‘행동만 진보’가 많다. 머리와 행동이 다 진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진보’가 없다. 이것이 또 위기의 요인이기도 하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정치, 관료 사회 진입하기 위한 시민단체인가 싶을 정도다. 진보는 인재양성소가 없다. 그래서 인재도 탄생하기 힘들다. 학생운동하다 노동계로 가고, 정보도 자료도 차단된 상황에서 행동하고 일했다고 해서 본인이 인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경실련도 마찬가지다. 무슨 정부나 지자체 위원회에 왜 그리들 많이 가는지, 시민단체가 무슨 이력 관리하는 곳인가.

우리 사회가 왜 위기가 왔고, 중병이 걸렸느냐. 황우석 거품, 부동산 거품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서 선진국 진입단계에 왜 발생했나? 브로커 천국이 된 근본 원인은 뭔가. 엉터리 진단에 엉터리 처방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예견해야 하는데 중병이 들어야 치료법을 생각한다. 그나마 병치료 늦어지고 치료하다 마는 게 반복된다. 어쩌다 먼저 떠들면 미친놈 되기 일쑤다. 지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데 견제하고 감시하고 대안을 내놓는 자들이 없다. 그것이 위기의 실체다.(정리 김종목·사진 권호욱기자)


-김헌동 단장은?-

경실련 김헌동 국책사업감시단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1년부터 19년 동안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97년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사표를 내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2월 경실련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아 분양원가 공개운동을 벌여왔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씨가 친형이다.(*다른 건 몰라도 '아파트값 거품빼기' 같은 게 한국사회의 진보이다. 어려운 이슈들을 제기할 것도 없다. 이게 정치적 진보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보다는 좀 복잡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일까? 김헌동 본부장은 아파트 반값 공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시민단체쪽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정주영의 대선공약이 아파트 반값 공급이었다. 문제는 혹 '의지'가 아닐까?)

06.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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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외)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에 끝난 6·25 전쟁은 3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국토를 분단시켰다. 유엔의 깃발 하에 이 나라를 짓밟은 소위 "서구문명"의 선봉장 미국은 우리 민족에게 의도적으로 대규모 폭격 테러를 자행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까지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끔찍한 학살행위는 폭로되지 않은 채 6·25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전쟁의 성격과 진실을 다시 한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필요가 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첫 번째 주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분출하였다. 이탈리아, 그리이스, 독일 등에서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근로 인민이 투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패배로 지배질서가 붕괴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각지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열되었다.

이러한 폭발적 세계정세는 세력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 일당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특권, 정치권력 등을 더욱 공고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미국은 전후 제국주의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동구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948년 혁명으로 중국대륙에서도 모택동을 위시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고 후퇴시킬" 냉전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사회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과 자칭 좌익 정치세력들은 세계 곳곳에 유엔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인류문명을 위기에서 구하는 고귀한 노력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개입행위였던 6·25전쟁의 진짜 목적이 한반도에서 끓어오르던 사회혁명을 압살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6·25 전쟁은 1950년대 초 각국에 산재해 있던 소위 맑스주의 정치조직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에 사회혁명을 달성한 후 바로 뒤이어 이 전쟁이 발발했다. 따라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전세계에 진군하는 공산주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는 계기가 바로 6·25 전쟁이라고 많은 좌익조직들은 바라보았다.

6·25 전쟁의 기원을 연구한 대다수의 저술들은 누가 38선을 먼저 침해했느냐하는 재미없는 주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대개의 서방 역사가들과 남북한 관변학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지금껏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분석틀은 1945년 종전과 함께 전세계에 밀어닥친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대대적인 사회혁명의 기운을 무시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진행된 한반도의 계급투쟁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바로 이러한 전체적 상황이야말로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과 분단을 올바로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신좌익(New Left) 역사가인 브루스 커밍즈(Bruce Cummings)는 한때 독재정권에 의해서 금서가 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저술했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철저하고 자세하게 분석한 결정적인 자료이다.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여 미국이 주도한 냉전전략이 6·25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제국주의 세력과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조성된 혁명적 격동에 의해서 갑자기 조성되었다.

일본 식민지통치 시기에 한반도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이라고 개념화한 현상이 철저하게 전개되었다. 즉 봉건적 토지소유가 온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공업화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 이식되었다. 이 결과 이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농민의 토지를 등록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우리 인민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응하여 협력한 지배층은 토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으나 많은 인민은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인 기업은 130만명의 우리 동포를 고용하였으며 기타 수십만의 동포들이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파업이나 빨찌산 투쟁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조선총독부는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공산주의 세력의 전복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역으로 공산당의 대중적 신망을 더 올려주었다.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가 철폐되기를 열망하였으며 일제와 친일파 세력을 저주하였다. 자본주의 공업화, 지주제도, 식민지통치는 얼키고 설키면서 이 땅의 인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회혁명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친일세력이었던 지배층은 인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식민지 공업화로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다. 대중의 상당수는 공업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했다. 그러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양반들은 아직 자본가 계급으로 전화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9일 조선총독부는 정권을 여운형에게 넘겼다. 그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를 이미 조직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마치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과 유사하였다. 건준은 당시 자생적으로 전국에서 생겨난 노동자-농민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 의 깃발 아래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공장을 장악했다. 전평은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었으나 사회민주주의 경향도 그 내부에 존재하였다. 미군정 노동문제 고문관 스튜어트 미첨(Stuart Meecham)에 의하면 "대공장의 거의 전부"는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었다.(커밍즈,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인용) 전국농민노동조합평의회(전농) 은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당시 투쟁의 수준은 이탈리아나 그리이스에서 전개되었던 투쟁들과 유사하였다.

승리한 제국주의 연합세력은 바로 이러한 폭발적 혁명 상황에 대면하였다. 얄타에서 이들은 조선이 10년에서 30년에 걸쳐 공동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키자 미국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말 것을 주장했다. 사실 38선은 당시 미국 전쟁성의 하급 관료였던 딘 러스크(Dean Rusk)가 미군 점령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도록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전시에 미국과 맺었던 동맹관계를 훼손시킬 생각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제안에 즉시 찬성하였으며 소련군은 곧 38선 북쪽으로 물러났다.

미국 대 인민운동

미국은 애초부터 인민운동과 임박한 사회혁명을 저지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미군의 태평양 지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포고한 "일반명령 제1호" 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우리 인민이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이 이끈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이들은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대표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준과 인민위원회는 예정대로 일주일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 장군의 정무 수석고문관 메럴 베닝호프(Merrell Benninghoff)는 9월 15일 이렇게 보고했다:

"남한은 불꽃만 당기면 즉시 폭발할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일제 때 높은 지위에 오른 자들은 친일분자로 인정되어 일본인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정치그룹들은 일본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인을 몰아낸 후 곧바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선동가들이 활동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그러나 베닝호프는 미국의 통치를 가능하게 할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나이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비록 이들 중 많은 인사들이 일제에 협력했지만 이 오명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 (같은 글)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에게 미군정이 물질적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한민당으로 결집된 이 인사들은 한국이 보호를 받아야할 단계에 있으며 소련보다는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그는 긍정적으로 주목했다. 성년 생활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 박사가 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미국은 일본군에 복무하여 훈련된 군대를 정부군으로 조직하면서 가냘픈 이승만 정권을 도왔다. 이제 맥아더의 군정포고령에 의해 일제의 모든 법률들은 계속 효력을 가졌다. 1945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인민위원회를 불법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 장군은 "친미주의자나 친일분자나 한국민에게는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S. Lone & McCormack, [1850년 이후의 한국](Korea Since 1850)}

식민지 통치의 연장에 대해 당연히 인민은 저항의 길을 택했다. 1946년 여름 미군정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구속조치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훈련을 받았으며 미국이 지원한 경찰에게 인민의 자생적인 저항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200여 명의 경찰이 이 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다. [시카고 선 ](Chicago Sun)지의 마크 게인(Mark Gayn)은 이 투쟁을 "본격적인 혁명"으로 묘사했으며 "수백만은 아니지만 수십만의 인민대중"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운동을 억압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이 운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스탈린은 "모든 반일 세력과 민주주의 정당들의 활동을 지원하라고 " 지시했다. 물론 이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1946년 2월 소련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기구는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내의 인민위원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스탈린이 직접 선택한 청년 공산주의자 김일성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원과 소련군 대위로서 반일 독립운동에서 믿을만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주장한대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침으로써 북한의 지도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신좌익평론 , New Left Review]에 실린 맥코맥의 논문을 보시오) 정권을 장악한 직후 그는 대중의 지지를 받던 그의 라이벌인 부르조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체포하여 나중에 처형했다.

소련이 수립한 북한 체제는 소련과 아주 유사한 관료적 노동자국가였다. 노동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혀 없었으나 관료적이고 상명하달식의 사회혁명이 달성되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법적 평등권이 선언되었다. 1946년 3월 6일 토지개혁령이 발효되어 모든 농토가 농민에게 분배되었으며 "애국적" 지주들만 보상을 받았다. 토지 분배는 지역인민위원회가 주도하였다. 1946년 10월 6일 공포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 91호는 일본인이나 친일분자가 소유한 모든 산업을 국유화했다. 스탈린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이 경우에도 소위 애국적 부르조아들을 이 결정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협조 노선은 실패했다. 북한의 사업가들과 그 가족들은 거의 모두 남한으로 도망하여 이후 남한 우익 세력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오랫동안 한국문제 전문가였으며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조오지 맥쿤(George McCune)은 이렇게 썼다:

"북한 인민대중은 소련군정에게 우호적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혁명적 조치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대중은 소위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자신들이 누리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사회개혁 조치가 없었으며 민주주의적 잣대도 불공정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맥쿤, [오늘날의 한국, Korea Today])

미군정이 민주주의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그 결과가 지극히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미국 정보기관의 보고서는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경우 좌익 세력이 완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군정은 민주주의의 잣대를 공정하게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정과 미군정이 차이를 보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차이는 스탈린이 트루먼이나 하지보다 인민에게 더 호의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스탈린 체제가 트루먼의 미국과는 아주 다른 사회적 관계 위에 수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주요 생산수단은 사회적 소유였다. 동구든 북한이든 점령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소련은 자기 나라에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을 점령지에 이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농민의 요구가 사회주의 소유의 틀을 통해서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지향과 소련군정의 정치적 목적 사이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자본주의 "동맹국"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전시의 동맹관계는 독일과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계속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양극화 현상은 한국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공동신탁통치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강대국 사이의 회담이 1946년 봄 그리고 1947년 가을에 진행되었으나 모두 결렬되었다. 이후 연속된 회담에서 소련은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1946년의 대중 봉기를 겨우 진압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남한의 정세에 우려를 나타낸 미국은 일방적으로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한국문제를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성립되어 한국이 서방의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할 때까지 남한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주도 4·3 봉기

한국임시위원회의 통치는 남한 대중의 저항을 새로 불러 일으켰다. 스탈린주의를 추종한 남노당은 1948년 2월 7일에 3일간의 총파업을 개시했다. 곧이어 4월 한국임시위원회는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룬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나 일부 우익 인사들과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피의 억압을 감행했다.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미군정은 도민의 10 내지 20%에 해당하는 3만에서 6만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수만 명의 도민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악지대로 이동한 게릴라들은 보급품도 공급받지 못한 채 수개월 동안 정규군과 싸웠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초토화 작전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한 단독 선거는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 그리고 정권을 제외한 모든 계급 계층의 저항을 받았다.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민족주의자 김구 역시 남한 단독선거가 국토의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난했다. 심지어 김구는 해주와 평양에서 북한 대표들과 회담을 가졌다. 결국 반대 진영은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선거를 통해 "남한 유권자들의 자유 의사가 온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선거의 결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곧 이 정권을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북한에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결국 국토분단은 공식화되었다. 1948년 후반 남한에는 봉기들이 또 일어났다.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이 제주도 게릴라 잔당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위기에서 빠져 나온 이승만 정권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여수에는 인민위원회가 다시 수립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군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1949년 미 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승만은 경찰국가를 강화하는 일로 바빴다. 심지어 부정으로 얼룩진 1948년 국회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스파이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라이벌 김구를 암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제 해가 지나감에 따라 남북간의 전쟁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이승만은 친북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편 게릴라들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 년 내내 국경선인 38선에서 전투가 빈발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달라고 비밀리에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간청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동의하였다. 남한 내에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대단하여 북한이 침공할 경우 금방 남한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김일성과 남노당 지도자 박헌영이 이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침공이 제국주의 세력들을 골탕먹일 값싼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북한의 인민군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모택동은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의 국민당 잔당을 박멸하기 위해 대만 침공에 주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어쨌든 김일성의 계획에 축복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소련, 중국, 북한의 공식 역사 기술에서는 부인되고 있다. 즉 북한이 가만히 있는데 이승만 정권이 도발을 자행하다가 결국 38선을 넘어 북한을 침략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들은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곤차로프 이하 공저, [불안한 동맹자들: 스탈린, 모택동, 한국전쟁,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을 참고하시오)

사실 이승만도 확실히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북침통일을 선언한 바 있었다. 1949년 10월 그는 3일만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미 소 양군의 철수 후 이승만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한에 남아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우두머리 라버츠 장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전투로 단련된 500여명의 미군 병사와 장교들이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미군 대신 전투를 수행할 10만 군대를 양성하는 방식을 미국 군사고문단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유도하고 있다. 북한군이 좋은 사격훈련감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한국전쟁 : 알려지지 않은 전쟁, Korea: The Unknown War])

그러나 라버츠 장군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첫 몇주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전력이 우세한 것으로 생각된 남한의 국방군을 쉽게 물리치고 승승장구 남쪽으로 진군했다. 징집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이 이승만의 자본주의 정권이나 그의 제국주의 후원 세력들을 위해 "총을 쏠 "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민군의 진격 앞에 국방군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인민군의 총칼을 앞세우면서 북한의 기형화된 사회혁명의 성과들이 전진했다. 3개월 동안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인민군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 일본 기업과 기타 독점기업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남한의 인민대중은 "침략자" 인민군을 반기는 듯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의 딘 장군은 그의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인민군에 대한 남한 인민의 태도는 열렬한 환영과 수동적인 인정의 중간인 것 같았다." --- (윌리엄 딘, [딘 장군의 이야기, General Dean's Story, 1954])

미국 정부는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0년 초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발언은 김일성을 기쁘게 했고 이승만의 화를 끝까지 돋구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시아의 신식민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1950년 4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국무성에서 작성한 대외비 메모를 전달받았다. 이 메모는 전세계적으로 사회혁명의 확산을 막는 정책(containment)에서 이것을 저지하고 전복시키는 정책(rollback)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자는 매파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들은 맥아더, 덜러스를 비롯한 극동 담당 군사 및 민간 고위 관리들의 명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루먼은 이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임시위원회는 6월 29일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고 규정하고 유엔의 개입을 촉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동의안이 즉시 통과되었다. 이때 소련은 중국의 회원국 가입을 거부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여 불참했다. 유엔군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남아공 등 16개국에서 보낸 군대로 구성되었다. 과대망상증 환자 맥아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9월로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의 군대가 곧 패배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연합군은 바다와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항에서 대대적인 수륙양용작전을 구사했다. 이 작전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2주가 채 되지 않아 원정군은 인민군을 38선 북쪽으로 쫓아내었다. 애초에 유엔은 국경선의 신성함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제 유엔군은 38선의 신성함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부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유엔의 반혁명 테러

반혁명 테러는 언제나 사회혁명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유엔군의 한반도 점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민의 지지 때문에 쉽게 남한 국방군을 제압했던 인민군과는 달리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은 한국민 전체를 적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지극히 인종주의적 언어로 우리 민족을 "흰 파자마를 걸친 버러지들"이라고 불렀다. 맥코맥이 인용한 일본 자료에 따르면 유엔군이 한국을 "해방시킨" 기간 동안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처형되었다. 이 대대적인 양민 학살은 월남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자행한 대대적인 암살작전의 효시가 되었다. 월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등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감행했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때 맥아더는 그의 부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에게 전선과 중국 국경 사이의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공습하라고 명령했다. 르메이는 나중에 월남전에서 월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악명을 떨친 자였다.(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앞의 책) 미국의 무차별적이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은 전쟁의 성격에서 도출되었다. 즉 미국은 단순히 적대국을 철저히 파괴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았다. 사회혁명을 괴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1월경에 제국주의자들은 별 저항이 없이 중국 국경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때 20만 명의 중국군과 15만 명의 인민군이 반격에 나서자 이들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고함을 질러대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전세는 다시 제국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유엔은 뻔뻔스럽게 중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트루먼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고려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인종주의자들이 다시 원자폭탄으로 아시아 인민을 위협했다.

유엔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 이들은 게릴라 부대들에게 시달렸다. 그러자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의 개시를 공공연히 촉구하기 시작했다. 1951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은 중국 본토에 비밀리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 맥아더는 중국의 주요 도시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5년부터 이 때까지 아주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미국에 투하할 능력이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유럽 동맹국들은 걱정이 컸다. 영국의 수상 클리먼 애틀리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하고 맥아더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아시아인들이 대량 학살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지지했었다. 그리고 당시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군은 좌익 반군들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소련의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날아다닐 일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트루먼은 애틀리의 우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한 언질은 회피했다.

사실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원자폭탄 26기를 통제할 권한을 주는 문서에 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 뒤 그는 이 명령을 철회하고 맥아더를 해임했다. 제국주의 동맹관계가 완전히 붕괴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로운과 맥코맥, 앞의 책에서) 그러나 맥아더의 해임이 미국의 "핵무기 선택"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는 원자폭탄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싸게 먹힌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었다. 소련의 핵무기가 아니었다면 미 제국주의자들은 또다시 아시아 도시들에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것이다.

사실 미 공군은 원자무기가 아닌 재래식 무기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전쟁 개입 첫 3개월 동안 780만 갤런의 네이팜탄이 사용되었다. 네이팜탄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미국은 국제 협정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이 결과 북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3년에 걸쳐 우리는 북한의 도시는 물론이고 남한의 모든 도시들도 불태워 버렸다."고 르메이는 회고했다. 1951년 여름 지상전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유엔군은 주로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공격했다. 도시지역에 대해 계속 폭격을 가하면서 1953년 5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 공군은 북한의 농업을 파괴하고 인민들을 기아상태로 몰아 항복시키기 위해 관개 시설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어느 쪽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으나 전쟁은 회담 개시 후 2년 이 넘게 질질 끌었다. 전쟁포로 송환 문제가 핵심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선전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우겼다. 즉 전쟁포로들이 어느 진영으로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 결정은 전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민군 및 인민해방군 출신 전쟁포로들이 자본주의 쪽으로 넘어오도록 원하면서도 미 군부는 감언이설에 속지 않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를 취했다. 맥아더의 후임자 리지웨이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빨갱이 포로들이 우리의 계획에 저항하거나 우리의 요구에 대해 지연술책을 쓸 경우에 이들을 총살시킬 결심이었다. 이 일을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살인무기들이 철저히 준비되어 있기를 나는 원했다." (커밍즈와 핼리데이, 앞의 책)

결국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우리 국토의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전쟁은 인구의 10%가 넘는 3백만 명을 죽였고 거의 백만 명의 중국군을 희생시켰다. 미군의 사망자는 33,500명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에서는 탄압의 광란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의 반대파에 대한 "용공 재판"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그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다. "만반의 준비 작전(Operation Everready)"은 그를 없애기 위해 비밀리에 수립된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생각된 분자들이 숙청을 통해 제거되었다. 박헌영도 이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남노당 지도자였던 그는 남침이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 김일성의 판단을 흐린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죄목은 두 가지 점에서 괴상망칙했다. 우선 남침은 유엔군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 지장 없이 진행되었다. 둘째, 김일성 정권은 항상 남한에 의한 북침을 주장해왔다. 결국 박헌영의 처형은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늘상 일어나는 정치 라이벌에 대한 조작성 숙청의 일환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수립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를 전후 41년이 넘도록 통치했다. 북한은 역사상 가장 기괴한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에 속한다. 김일성 개인숭배는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국유화 조치에 의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인민에게 중요한 성과로 남아있다. 특히 여성의 권리, 의식주, 탁아시설, 의료와 교육 등에서 북한 인민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혜택들을 누려왔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동맹국 중국은 북한을 버렸으며 이 결과 북한의 경제는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으며 인민의 생활수준 역시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의 복지를 도모한 북한 체제의 성과는 아직도 남아있으며 옹호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노동계급은 국토를 혁명적으로 통일시켜 전쟁이 남긴 국토통일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즉 북한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고 남한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는 사회혁명을 달성해야 한다.

6·25 전쟁에 대한 좌익 국제조직들의 반응

국제 노동계급 운동 조직들은 대체로 6·25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바라보면서 조직의 성격에 걸맞게 이 전쟁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각국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평화주의적 시각에 근거하여 냉전을 반대할 부르조아지의 진보적 분파와 동맹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주장인 북침설을 강조하면서 선동의 중심을 "평화" 호소와 협상에 의한 전쟁 종결에 두었다.

영국 노동당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 개입을 찬양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노동계급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가 계급의 으뜸가는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미국 중앙정보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반공 마녀사냥을 솔선수범하여 열렬히 주도했다.

트로츠키주의 조직들만이 이 전쟁에 대해 혁명적 노선을 채택했다.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트로츠키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로 규정했다. 이 체제의 사회적 기초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이므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방어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할 당시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산하 조직들은 북한을 포함해서 전후 소련군의 점령으로 탄생한 국가들이 소련과 질적으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으며 이들을 "기형화된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올바른 분석의 결과 이들은 국제노동계급이 6·25 전쟁에서 제국주의 및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북한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셸 파블로는 이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다. 그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쟁과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고는 크게 보아 한국전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노선은 철저히 수정주의적이었다. 즉 그는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으로 들어가고 트로츠키 혁명조직을 해소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청산주의는 역사발전을 지극히 조잡하게 객관주의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 노선은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혁명적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적 노선을 주창하였다. 1950년 9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지 [제4인터내셔널, Fourth International]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식민지 대중 운동에 가담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이 운동을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은 토착 봉건-자본주의 계급 그리고 특히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이 운동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다."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가장 강력한 지부였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 제임스 캐넌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올바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 글은 1950년 7월 31일자 당의 신문 [투사, The Militant]에 실렸다:

"이 전쟁은 국토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것은 내전이다. 한국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이 한국의 지주,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경찰, 정치 하수인 등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빈곤에 찌들리고 착취받던 근로인민 대중이 지주와 매판자본가로 구성된 토착 기생집단과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소련 스탈린 일당의 소망이 어떻든 계급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령을 발표하고 국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러한 개혁조치들 그리고 좀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에 대한 약속이 농민과 노동자들을 북한 정권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이 전망이야말로 굶주리고 있는 대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토착 하수인들로부터 이들이 국토의 3분의 2를 빼앗게 만든 `비밀무기'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막강한 월스트리트(Wall Street) 금융자본의 군대와 폭격을 이들이 견디도록 만들었다" --- (제임스 캐넌, [선동가의 노트, Notebook of an Agitator])

영국의 노동자 권력 그룹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캐넌이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어리석은 결론을 내렸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모든 글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면 이것은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이런 노선을 주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의 비판은 따라서 정당하다." ([연속혁명, Permanent Revolution], 1988년 봄호,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편지에서 캐넌은 "이승만 괴뢰정권에게 매수된 몇 안되는 하수인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인민 모두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싸움에서 정의는 한국 인민의 편에 있다. 아시아 전역의 식민지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 또는 유엔의 `해방'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이 논조는 명확하게 유엔/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했다. 어느 편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에서 캐넌은 옳았다. 그러나 반공 마녀사냥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미국 내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압박은 지극히 견디기 힘들었다. 이 악화된 상황에 굴복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쇠한 중핵들은 가끔 심각한 정치적 동요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공식입장으로 널리 알려진 트루먼에게 보내는 캐넌의 공개서한은 평화주의적이며 심지어는 애국주의적 색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캐넌은 1950년 12월 4일자에 보낸 이 편지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이 위대하고 선량한 미국 인민은 군국주의와 전쟁을 혐오한다. 이들은 평화와 자유를 사랑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전쟁을 중단하라!'는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지어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전통"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들이 작성한 선전적 성격이 좀더 강한 글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다른 나라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정치적 혼란을 보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노동자 혁명의 무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들은 너무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파블로의 "새로운 세계 현실" 이론의 객관주의적 편향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맑스주의 중핵들은 개량주의 사민당 및 공산당에 입당하여 이들 정치세력의 들러리를 서는 길밖에 없었다. 즉 사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들은 역사의 긴급한 필요에 의해 엉성하나마 혁명적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수정주의적 방법론이 사회주의노동자당에 침투한 예는 제이 스튜어트가 쓴 [한국의 내전](Civil War in Korea)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제4인터내셔널] 1950년 9-10월호에 실렸는데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비판을 가한 후 노동계급 지도력 확립의 중요성을 말한 김일성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끝맺었다:

"아시아 대륙의 혁명적 위력은 각국 지도자들로 하여금 수십 년간 존재했던 스탈린주의의 잘못된 노선을 걷어치우고 아무리 주저하고 혼란된 방식으로나마 10월 혁명의 위대한 전략적 개념들을 추구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객관적 상황만으로도 스탈린주의자들과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혼동된" 트로츠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경향은 유고슬라비아 티토주의 관료집단을 제4인터내셔널이 잠시나마 지지한 것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수정주의로 인해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로부터 10년 후 쿠바의 카스트로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트로츠키주의를 완전히 기각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제국주의 세력의 파괴공작에 맞서 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동시에 이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어떤 정치적 지지도 보내서는 안된다. 그런데 제4인터내셔널은 일관되게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경향들은 냉전의 압력 속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한국 혁명을 방어해야할 의무를 한사코 거부했다. "워싱턴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니다"고 외치며 "제3진영" 의 입장을 지지한 느슨한 국제 조직들은 "스탈린 전체주의"를 방어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들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이러한 경향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아직도 살아남아 상당한 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0년대 말 클리프는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 내부에 분파를 결성했다. 이 분파는 소련과 동구의 국가들 내부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국가들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했다. 이 나라들이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서방과 "군사적 경쟁"을 벌였으므로 자본주의 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클리프는 주장했다. 이 이론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생산수단과 사회적 관계인 자본을 근본적으로 혼동했다. 그리고 군사적 경쟁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군사적 경쟁이란 체제의 성격과 무관한 모든 국가의 기능이다. 이 점은 너무도 자명하다. 예를 들어 레닌과 트로츠키가 정권을 장악했던 소련은 왜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는지를 클리프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닌과 트로츠키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생산수단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제국주의 군대와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이들은 치열하게 군사적 경쟁을 벌였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클리프의 이론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냉전이 한창일 때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방어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모국에서 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제명 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조직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출당 조치된 후 이들은 노동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평론 ](Socialist Review)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헌신할 "노동당의 조속한 집권"을 주창했다. 이들의 잡지 제2호는 트로츠키주의를 기각한 실론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가 모두 강대국의 허수아비 정권인 한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들 중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 비. 카랄어싱엄, "한국의 전쟁", [사회주의 평론 ], 1951년 1월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한반도 침략, 대대적인 살인적 공습, 핵무기 사용 위협도 이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한국은 두 강대국 진영이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고 있는 경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사회주의나 한국 인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 "한국: 이 `해방전쟁'을 끝내라!", [사회주의 평론 ], 1952년 11월

[사회주의 평론 ]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해방공간 당시의 계급투쟁이나 북한 정부의 진보적인 조치들이 전혀 의의가 없는 것인양 이것들에 대해 논평하기를 거부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 미국은 월남에서 또 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남을 자의적으로 분단하였고 이 상황을 고착시키려 했다. 또한 자신들의 인기없는 괴뢰정권이 선거에서 질 것을 우려하여 전국적 차원의 선거도 실시하지 않았다. 한국과 월남의 경우 모두 자본주의 체제인 남쪽에서 봉기가 발생하면서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두 경우 모두 대중적 토착 게릴라 운동을 기반으로 하면서 중국,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스탈린주의 정권이 북쪽에 존재했다. 그리고 미국과 그 하수인 동맹국가들이 연합하여 지지한 괴뢰정권이 남쪽에 있었다. 결국 화해할 수 없는 두 남북 체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두 경우 다 자유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인민을 인간 이하의 "버러지"로 간주하면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인종주의적 성격의 전쟁을 자행했다. 이 두 경우 모두 제국주의 군대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으로 간주된" 인민에 대해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을 가진 대대적인 무차별적 폭격 전략이 채택되었다. 두 경우 모두 전쟁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월남전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호지명의 군대가 월남의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곧이어 벌어졌다. 클리프의 [사회주의 평론 ]은 1952년 1 2월 합병호에서 한국에서 진행 중인 전쟁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월남전의 유사성을 지적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전쟁 당사자 어느 쪽에 대한 지지도 거부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남에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월남 인민은 제국주의자들의 도구인 바오다이 정권과 스탈린의 하수인인 호치민 정권에게 똑같이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편집자 난에서 이 글의 논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우며 노동당을 탈당한 클리프주의자들은 월남연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 호지명 정권의 승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평론 ] 신판 1993년 10월호에 다시 실린 당시의 글에서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웠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68년 초 3백 내지 4백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2천명의 시위대가 우리가 내건 깃발 뒤로 행진을 했다. 이 깃발에는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이것은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 [사회주의 평론 ], 1993년 10월

그렇다면 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은 이렇게 전혀 다른 노선을 주창했는가? 전쟁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노선이 변했다. 전쟁 당사자들의 계급적 성격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대중의 분위기였다. 1950년대 초 반공 히스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 클리프주의자들은 영국 노동당에 입당해서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회주의자 명부](Socialist Register)지의 1984년 판에서 존 핼리데이는 전쟁 기간 동안 노동당 내각이 진행한 토론을 소개하고 있다:

"앨런 위닝튼의 팜플렛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를 [노동자 일간지](Daily Worker)가 출판한 것에 대해 국가반역죄로 기소할 것인가가 토론의 주제였다. 이 팜플렛은 이승만 정권의 범죄행위들을 폭로했는데 어느 누구도 이 글의 진실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 일간지]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기관지의 편집자가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법에 따라 무조건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제3진영" 은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만 명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존재했으며 해럴드 윌슨의 왼쪽에 있는 모든 정치 경향들은 월맹의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이 "제3진영" 노선을 고수했을 경우 이들은 급진적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클리프와 그의 동료들은 호치민과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높이 치켜올렸다. 좋은 원칙이든 나쁜 원칙이든 조직 확대에 방해가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말이지 위대(胃大) 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제4인터내셔널 조직원들은 지배계급의 엄청난 압력 속에 그리고 혼란과 오류를 범하는 가운데에서도 트로츠키주의의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최소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인 북한을 방어하는 용기를 보였다.

[Korea: The Forgotte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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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나는 전망 출판사)

이 글은 <국제혁명당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Revolutionary Party)>의 한축인 <공산주의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이 2000년에 쓴 팸플릿「트로츠키와 트로츠키즘 (Trotsky and Trotskyism)」을 번역한 것이다. 이탈리아 좌익 공산주의에 역사적 뿌리를 둔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혁명사상과 정치적 입장에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한 축인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도 큰 틀에서 <공산주의노동자조직>과 동일하다.

1920년대 초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코민테른의 퇴행과 더불어 반혁명적 물결이 스탈린주의로, 파시즘으로 가시화 되면서 이에 맞서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 트로츠키와 그 추종세력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비판과 투쟁을 전개한 세력은 이태리로부터 전 유럽에 망명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좌익공산주의의 역사는 <국제공산주의흐름>이 출간한 ?이태리 공산주의 좌파(1926-1945) : 혁명 운동사에의 공헌?에 자세히 실려 있다. 편집부는 이 책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을 출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구체적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은 역사학도의 책무일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할 모두에게 주어진 역사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혁명가의 저작을 편의적으로 암송하거나 인용하여 교조로 수용하거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절대적 언명으로 전략·전술을 이해하는 운동(연구 및 실천)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관행을 반성하자는 뜻이다.

둘째, 특히 우리 사회의 혁명운동의 역사와 실천이 일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그것이 주체사상이건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스탈린주의이건 간에)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성찰을 가로막고 스탈린주의의 옹호가 마치 반혁명 운동에 대한 투쟁의 푯대인 것처럼 착각하는 풍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본격적 논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도 스탈린주의의 반대 항으로만 이해되거나 몇 권의 저작, 보기를 들어 ?영구혁명??배반당한 혁명??이행기 강령?에 대한 학습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하는 전략·전술이라는 경직된 태도를 형성시켰다. 물론 우리는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가 지니는 주체적 역사 서술 방법과 혁명과정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우리 사회에 실천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세력들이 여러 형태로 트로츠키의 영향을 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반혁명적 스탈린주의를 진정으로 넘어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째,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과 조직을 정립하는 책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이를 위하여 세계혁명의 발전을 저지시켰던 반혁명운동의 흐름과 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운동세력이 평가되어야 한다. 스탈린주의 극복의 시발점은 그 운동의 전선에 함께 섰던 모든 좌익 반대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진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일부 세력이외에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본격적 논쟁을 벌인 적이 없다. 이 책의 출간이 바로 이것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익 공산주의 세력과의 연대와 갈등의 역사를 몇 가지 정리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1925년 3-4월 이탈리아 공산당은 3차대회에서 ‘보르디가적’인 경향을 제거하기 위해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을 출판하는 것을 금지했다.

2) 1926년까지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통일전선과 노동자 및 농민정부에 대한 거부
② 반파시즘 그리고 계급투쟁 영역에 근거하지 않은 정책의 거부
③ 일국사회주의 거부
④ 민주주의 방어 거부

3) 그 당시 비레닌주의와 트로츠키 반대의 입장을 지닌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 세력은 독일 좌익 공산주의의 테제를 방어했다.
① 의회 문제 : 전술문제 아닌 전략문제이지만 맑스주의와 공산주의의 반의회주의와 관계없는 생디칼리즘의 반의회주의와는 구분.
② 민족 문제 : 로자룩셈부르크 입장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해방의 승리자라는 레닌 입장 거부.
③ 노동조합 문제 : 혁명노조 거부, 노동조합내의 어떤 활동도 거부,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적 투쟁의 참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 투쟁기관으로서의 노동조합 거부.
④ 당과 평의회 : 보르디가와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받아들여 당 문제를 2차적으로 판단.
⑤ 러시아와 국가 :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러시아 혁명의 반혁명적 기원은 NEP(신경제정책)와 크론슈타트  진압이며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카스트화 했음.

4) 1927년 7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좌익분파 분리 (프랑스, 벨지움, 룩셈부르크, 스위스, 미국, 러시아와 연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대회에서 트로츠키 축출.

5) 트로츠키와 연대했지만 보르디가 테제, 코민테른 2차 테제를 지지하고 러시아 반대파와 트로츠키가 방어한 코민테른 3차, 4차대회 테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이탈리아 분파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 분파”로 규정함. 이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코민테른 좌익 분파의 구성
② 임시 중앙위원회 구성
③ 격월간 「Prometeo」출간
④ 기회주의와 기회주의자에 대한 투쟁(공산주의선언, 코민테른 1, 2차 대회의 테제, 로마 테제,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국대회 테제, 5차대회에 보르디가가 제출한 테제, 코민테른 프랑스 지부의 릴리대회에 좌파가 제출한 테제, 보르디가의 모든 저작)
⑤ 당면목적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동지의 재통합, 트로츠키 의장 아래 6차대회 개최 촉구

6) 1929년 2월 추방당한 트로츠키 중심으로 국제 좌익 반대파 결집
① 트로츠키와의 서신교환과 터키방문
②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의 좌익은 트로츠키를 대표로 제안
③ 1932년까지 폴란드에서 스페인까지 “볼세비키-레닌주의자”로 스스로를 부르는 소그룹이 존재
④ 그러나 이들 세력은 이질성이 큼 (소련의 외교정책 등)

7) 이탈리아 좌익은 국제 반대파에 동의하지만 트로츠키와의 견해 차이를 숨기지 않았는데 1929년 「Prometeo」20호에 트로츠키에게 공개서한을 보냄. 9월 25일 트로츠키는 답장을 보내고 이탈리아 좌파가 프랑스에서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대표라고 인식하고 1928년의 “좌파의 강령”을 칭송함.

8) 1930년 4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 좌익반대파 대회에 Prometeo가 불참하자 트로츠키는 이탈리아 좌파에게 “민족적-공산주의자”인가 “국제주의적 경향”인가를 묻는 질의서를 보냄.

9) 1930년 6월 3일 답장에서 “① 우리는 우리를 국제 노동 운동의 일부로 생각한다. ② 코민테른 창설 이후 우리는 좌파경향에 속해 왔다. ③ 우리 경향의 국제 분파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 조직이 한 그룹주위에 상이한 국가로부터 온 인사나 집단의 인위적 결합체가 아니라고 맑스주의로부터 배웠다”라고 반박함.

10) 1930년 6월 19일 트로츠키의 세 번째 편지에서 둘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짐. 정치적 강령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좌파와 달리 트로츠키는 국제 조직 창설보다 그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봄.

11) 1932년 트로츠키는 이탈리아 좌파와의 관계유지를 거절함.

12) 1933년 2월 트로츠키는 “보르디가주의자는 좌익 반대파의 유기적 부분인 적이 없다” “Prometo집단은 국제 좌익반대파에 속한 적이 없다” “볼세비키-레닌주의의 유일한 지부는 신이탈리아 반대파 (New Italian Opposition)이다”라고 하고 ‘보르디가주의’와 선을 그었음.

13) 이들의 근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 밖에 없다”고 주장함.
②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사민당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함.
③ 분파와 당 문제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들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 모든 나라의 좌익 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함.

14) 1933년 이탈리아 좌파에게 제기된 근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①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로 아직도 규정되는 러시아 국가의 본질.
②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1931년 이후 제국주의간의 경쟁시기의 중요한 문제인 “민족해방 투쟁의 본질”
③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시기의 혁명당의 역할과 사회주의 이행기의 본질.
④ 1914년 이래 노동자 투쟁, 프롤레타리아트 경제조직의 형태, 노동조합에서 이탈리아 분파의 활동.

<트로츠키주의 비판>

차례
서문 트로츠키주의 비판을 내며 

1부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의 기원 
좌익 반대파와 연합 반대파 
일국사회주의 
소련의 본질 1부 - 경제 
소련의 본질 2부 - 정치혁명 
이행기 강령과 제4인터내셔널 
이행기 강령과 당 
이행기 강령 요구 
제2차 제국주의 전쟁 

2부 트로츠키와 국제 공산주의 좌파 
1934년의 프랑스 전환 
스페인 내전 
중국, 그리고 아비시니아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주의 공산주의자 당 

3부 1989년 이후의 트로츠키주의 분석의 위기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혼동 
카멜레온으로서 불변하고, 만화경으로서 일관적인 
결론  

부록1 나탈리아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과 결별 선언 
부록2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 연대기 1879-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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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맹, 비합법 전위조직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
조희연, <역사비평> (1992)

1. 머리말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6. 맺음말

1. 머리말

1991년 11월 출범선언을 통하여 세간에 자신의 존재를 공식화한 이후 숱한 화제-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를 뿌리면서 활동하였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1991년 3월 그 중심인물인 박노해가 검거되고 1992년 4월 조직총책 백태웅 및 중앙위원들이 검거됨으로써 실질적인 '붕괴'상태에 돌입하였다.
사노맹에 대해서는 그간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노해의 명망성만으로 유지되는 허상(虛像)의 조직", "좌익맹동적 편향의 극단적 발현"이라고 하는 평가에서부터, "남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맥을 계승하면서 불굴의 혁명투지를 보여준, 이 시대 사회주의혁명운동의 적자(適者)"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주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대립되는 평가가 주어지고 있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는 유보될 수밖에 없으나, 사노맹의 검거는(구혁명운동과 연관된 세력이 주도하였던 사회주의전위조직 결성시도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통일혁명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나 1970년대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등의 검거와 달리 1980년대 변혁적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성장한 신세대 혁명운동인자들에 의한 '전형적인' 비합법혁명전위조직이 '붕괴'하였다는 점에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한 커다란 전기를 상징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처럼 1980년대 이후의 혁명적 운동사의 일정한 분기점을 상징하고 있는 사노맹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것의 실체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글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변혁적 사회운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과 달리 1980년대의 사회운동은 조직화, 대중화, '이념적 급진화'라는 측면에서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까지의 정치적 갈등은 '보수세력 내의 여야갈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정치적 갈등의 장(場)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1980년대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변동에서 변혁적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위상변화는 학술연구에도 영향을 미쳐 변혁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공개적이고 (半)합법적인 형태의 운동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것도 1980년대 이후의 운동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대 한국사회운동의 총체적 파악을 위해서는 그간 충분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1980년대 이후의 다양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논문은 사회운동에 대한 이러한 연구 상황을 극복하는 의미에서,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 중 사노맹을 선택하여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하여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그간의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를 비합법운동에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의 실상을 조직적 형성, 조직적 확대, 조직적 활동과 검거, 조직구조의 측면들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을 밝히는 데 초점이 있으므로 이념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1980년대는 1970년대까지의 반파시즘 민주화운동의 축적 위에서 사회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자기정립하고 변혁운동으로서의 사상이념적, 조직적 기초가 강화되어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특히 학생운동이 변혁적 성격을 선진적으로 강화시켜왔으며, 이러한 학생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변혁적 인자들을 중심으로 전위적인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까지는 혁명적 인자들의 존재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혁명적 인식을 갖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시도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1980년대의 전위조직은 주로 학생운동의 선진적인 인자들과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및 기층 출신 노동운동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운동영역을 중심으로 본다면 1970년대까지의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은 기본계급의 성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변혁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학생운동 출신인자들은 목적의식적으로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지원투쟁을 전개하였다. 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두 가지 논리인 현장론과 정치투쟁우위론 모두에서 중시되던 바였다. 이러한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이전 및 활동, 외부지원과 노동운동의 내적 계기를 통한 선진노동자들의 성장으로 인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목적의식적인 정치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 할 수 있는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바로 1985년 6월의 구로연대파업이었다. 이 연대투쟁의 조직적 성과로서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으로 나타났는데, 이 조직은 1년여 동안 선진적인 노동운동의 정치적 투쟁체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노련은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 당위성, 노동계급의 정치의식화와 조직화라고 하는 원칙적 과제를 제기하였을 뿐,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총체적인 변혁론을 정식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말 학생운동으로부터 변혁론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당시 NL(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의 대립- 내적인 해체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합법 조직들은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면서 서노련 이후 부재상태가 된 민중운동의 정치적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형태들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들의 주체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진영이 크게 NL진영과 반(反)NL진영으로 양분화되어 있는바, NL진영은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핵심적인 진영은- 자신의 전위조직을 '한국민족민주전선'(KNDF)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합법 전위조직을 별도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반NL진영 혹은 비(非)NL진영은 한국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조직 혹은 전위조직을 건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위조직 건설-그것을 구체적으로 시도하건 아니면 전망으로서 제시하건 간에-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체적인 시도가 몇몇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제헌의회 그룹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루어진 전위조직을 유형화하고자 할 때. ① 일정한 부문운동의 전위조직인 경우와 전체운동의 통일적 지도를 지향하는 전위조직인 경우, ② 조직적 결합의 수준이 협의체적 성격의 조직인 경우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체계를 갖는 조직'인 경우, ③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학생운동 출신 인자들이 대다수인 조직인 경우와 학생운동 출신이 많더라도 사회운동 속에 일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의 경우, ④ 조직이 소그룹적 결합의 수준을 부분적으로 넘어선 수준에 있는 경우와 동맹의 수준에 이른 경우, ⑤ 조직의 지역적 범위가 서울 및 수도권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와 비록 제한되기는 하나 전국적인 범위에 걸쳐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전된 조직이라고 하면 이상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후자의 특징이 지배적인 조직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기별로 나누어본다면, 1980년대 초반의 전위조직의 다양한 시도들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전민노련'), '전국민주학생연맹'(이하 '전민학련' 1980년 5월 결성, 1980년 6월 검거)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10월 검거). '마르크스-레닌주의당'(1986년 10월 검거), '제헌의회그룹'(1986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초부터 활동, 1986년 11월 검거). '노동자해방 투쟁동맹(이하 '노해동' :제2차 제헌의회그룹, 1987년 중반에 재건됨. 1988년 4월 분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1987년 11월 결성,『노동자의 길』발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연맹' (1987년 11월 결성, 『노동자의 깃발발행』, '사회주의노동자동맹'(1988년 4월 준비위 구성, 1989년 11월 정식결성), '노동계급', '자주민주통일그룹', '반제반파쇼투쟁그룹', '국제사회주의자들' (IS) 등이 있다.
먼저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은 197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는데, 변혁운동과 대중운동을 선도하고자 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무림노선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준비론적 시각을 공격하면서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에서의 선도성을 복원시키면서 전체 정치투쟁 활성화의 선도적 투쟁을 담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과 조직화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을 상정하였는데, 이 조직은 1981년 1월경 결성된다. 전민노련은 1980년 5월에 결성되었는데, 그 지도적 인물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노동운동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인자들, 1970년대 학생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텔리 인자들이었다. 이 조직은 1981년 6월 총책 이태복씨가 연행되면서 검거되기 시작하여 8월경까지의 수사로 조직이 파괴되게 된다.
제헌의회그룹은 전민학련에 참여하였던 김철수, 윤성구, 민병두와 새롭게 최민 등이 중심이 되면서 1986년 5월경에 결성된 조직이다. 이 조직원들은 직업적 혁명가로 자처하고 비합법적인 지도그룹을 목적의식적으로 결성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직선제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진영에 대립하여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 개량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신민당을 비판하면서 약 반년 동안 학생운동의 '민민투'조직을 지도하면서 '반파쇼투쟁'을 수행하였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본격적인 전위조직 건설의 물적 토대가 사상적 통일성의 확보에 있다고 보고 전국적 정치신문(NPN)의 발간을 통하여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을 구체화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86년 11월경부터 1987년 1월까지의 시기에 대대적 검거를 맞아 파괴된다.
이 제헌의회 그룹이 검거로 파괴되면서 잔류성원들이 제헌의회그룹을 재건한 것이 바로 노해동이다. 이들은 1987년 4월경 정식으로'신중앙위원회'를 결성하면서 활동하고,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1987년 대선 시기에 백기완씨를 대통령후보로 하는 독자후보전술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선투쟁과정에서 당면정세에 대한 판단 및 전략전술적 대응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로 노해동그룹은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립된다. 1988년 4월 민중집권과 민중주도성의 목적의식적 추구를 강조하던 소수파가 노해동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때 잔류한 다수파 역시도 내부에 상이한 의견그룹간의 논쟁을 통하여 대립하나 일정한 의견의 수렴을 보게 된다.(다수파 내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영수 편, 『한국사회변혁운동론의 모색-CA그룹의 자기비판과 새로운 전망』, 백산서당, 1989 참조). 그러나 이 다수파는 대중운동 속으로 산개할 것을 결의하면서 1988년 말에 스스로 해체하게 된다. 1988년 4월경 분리된 소수파가 17개월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재집결하여 결성한 한 것이 바로 '사노맹'이다. 제헌의회그룹에서 사노맹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객관적인 혁명운동의 발전을 반영하여 협의체적인 수준에서 동맹적 수준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 중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는 여러 계급의 성원이 확대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노맹은 1980년대 전위조직운동의 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사노맹을 1980년대 전위조직의 비교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 1>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조직분화과정

다음으로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초반에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기본계급의 성장과 그를 위한 노동현장으로의 이전 및 활동을 중시하던 현장론에 따라 학생운동 과정에서 의식이 성장한 많은 인자들이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학생운동 배경에 따라 일정하게 소그룹적 연계를 갖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소그룹적 연계수준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기반을 갖는 정치조직을 건설하려는 것은 운동발전의 일반적인 지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처럼 소그룹적 수준의 조직에서 탈각(脫殼)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조직들이 사건화된 것은 바로 1980년대 중반 '반제동맹당'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은 1986년 11월 검거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당시 학생운동에서 광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에 기초하여,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동운동에서는 서노련의 실질적 붕괴 이후 다양한 소그룹이 분립하는 상태로 전화되고 있었는데, NL적 경향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소그룹적 연계구조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며 대중적인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초기과정에서 검거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86년 10월말에 검거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은 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지역현장운동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의사건도 마찬가지이겠는데, 서노련 해체 이후 새로운 노동운동의 정치적 조직을 건설하려는 과제가 현안으로 제기되고, 여기서 '지역현장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단위지역 현장에 대중적 토대를 갖춘 현장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지역현장조직→지역노동자동맹→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이라고 하는 건설경로를 거쳐 노동자대중의 정치조직이 발전되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은 바로 이러한 지역현장운동론에 기초하여,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지도적 인물간의 지역협의체를 운영하면서 활동하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은 소그룹적 결합관계를 부분적으로 벗어난 수준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포괄범위도 전국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특정지역에 국한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사건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수사당국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1980년대 중반에 사건화 되지 않고 상당한 기간 동안 자신을 조직적으로 유지하여온 조직으로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이하 '인민노련')과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을 들 수 있다. 당초 이 조직들은 서노련의 외곽지역조직으로서 인천지역 운동조직이었는바. 서노련 해체 이후 일정한 이념적 통일성 아래 소그룹적 수준의 자기조직을 유지확대하면서 전국적인 혁명적 노동운동의 한 유파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민노련이나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조직적 결집수준을 넘어선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인민노련은 1986년 여름 인천지역에서 소그룹으로 결집되기 시작하여 1987년 2월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지역노동자투쟁위원회'를 중간과정으로 하여, 1987년 6월 26일 인천지역의 다른 활동가그룹과 결합하여 결성된다. 이 그룹은 『노동자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계속 발간하고 있다. 1989년경부터는 내부에 이견이 발생하여 『사회주의자』라는 별도의 비합법 소책자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주요 성원들은 1990년 당국에 의해 조직의 중심적인 많은 인자들이 검거되었고, 최근에 -이른바 '신(新)노선'에 기초하여 합법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와 그 후신으로 탄생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음으로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서노련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그 입장을 대체로 계승하는 그룹들이 조직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해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그룹을 '신삼민'그룹이라 부른다. 이 그룹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지속적으로 발간해왔다. 이 조직 역시 1989년 8월에 당국에 의해 주요 구성원이 검거된 바 있다. 이 그룹은 주요 성원들 역시 인민노련 그룹과 함께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를 거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의 변혁운동사는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의 제모순과 그러한 자본주의화에 수반된 종속적 파시즘의 모순에 대항하는 투쟁과정에서 이념성, 조직성, 대중성에서 지극히 낮은 수준에 있던 운동이 점차 높은 수준의 운동으로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구혁명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으면서도 혁명적 인식과 실천능력을 담보한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는 이러한 혁명적 인적 자원이 전후에 새롭게 성장한 학생운동 속에서 광범하게 형성되고 혁명적 인자의 풀(pool)로서 존재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60년대 대표적인 조직사건인 통혁당사건 공판 모습

특히 이러한 전후세대의 혁명적 인자로의 발전은 광주민중항쟁과 그에 대한 군사정권의 '대량살륙적 제압'과 그에 대한 심화된 반성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 낮은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고있던 사회운동-특히 학생운동-에게 있어 광주항쟁은 폭력적 실체로서의 국가권력에 대한 본질적 인식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의 당위성, 광주항쟁에서와 같은 민중의 혁명적 진출을 올바른 방향 속에서 지도할 수 있는 목적의식적인 전위세력 및 선도조직의 필요성, 학생운동 등 인텔리 중심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기층민중운동의 활성화의 필요성, 군부세력의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적 지배주체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 등의 교훈을 던져주게 된다. 광주항쟁이 군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그것의 의미를 보다 심층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구좌익운동이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은신(新)혁명운동세대들이 대거 형성되어 나오게 된다. 초기에 이러한 신혁명적 인자들은 주로 이론적 수준에서의 혁명적 인식에 도달하였을 뿐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및 중반의 격렬한 반파시즘투쟁과정에서 전후의 잠재적인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실천적으로 단련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인자들이 다수 형성된다(학생운동에서의 혁명적 인자의 형성, 확대). 또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공개적인 이념논쟁은 선진운동인자들로 하여금 용이하게 혁명적 이념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였고 혁명적 이념에 대한 거부감도 축소되게 되었다. 이로써 1980년대 이후 1970년대의 의식수준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혁명적 인식 위에서 독자적인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인자가 전후세대들 중에서 광범하게 형성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의 주체적 요인이 완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에 머무르고 있던 선진적 노동운동 역시 제5공화국 군사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가게 되며, 그 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배출된다. 이러한 기층노동자들 수준에서 인식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하였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학생운동 선진인자들의 혁명적 인식변화와 그에 기초하는 현장으로의 투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5년 선진노동자와 인텔리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결합하여 만든 서노련은 이러한 발전의 출발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그 후 5공정권에 대한 반파시즘운동의 고양과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생존권투쟁과정에서 노동대중들의 전반적인 의식이 상승하였고, 일부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결합'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운동의 과제가 부분적으로 현실화됨으로써, 혁명적 인자의 존재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은 인텔리출신 노동운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의 결합체인 노동운동단체들의 강화발전으로, 노동대중들의 단결조직인 노동조합의 지역적, 전국적 연합조직의 강화발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들의 인식변화는 학생운동처럼 대규모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선진적인 인자들에 국한해본다면 많은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도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전에는 일부 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 국한되었으나, 이후 대중운동이 활성화됨으로써 대중적인 수준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처럼 학생운동의 경계를 넘어 혁명적 인자들이 생성, 확대됨으로써(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혁명적 민중의 생성),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지도조직의 건설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 1980년대에 혁명조직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연령적으로도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실제 6ㆍ25 전후의 시기에 청년세대로서 일정한 구혁명운동을 하였던 세대들의 경우, 60∼70세를 넘는 등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를 통하여 한국사회가 전면적인 자본주의적 구조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혁명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구혁명운동의 조건과 질적으로 차별화되고 현실적으로도 혁명조직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역량이 신혁명운동세대들에 의해 담보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지하조직운동은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으나, 1980년대에는 새롭게 성장한 신혁명운동적 인자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그들이 독자적인 혁명적 활동능력을 일정하게 체득하게 됨으로써 주로 신혁명운동인자에 의한 비합법 전위조직이 추동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자적인 혁명적 이론에 기초하여 혁명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즉 신혁명운동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노맹 전신으로서의 '제헌의회그룹', '노해동'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과는 구별되는 신혁명운동인자 중심의 지도부가 구성된다. 이미 1980년대에 이르면 생물학적으로 노령화되어 구혁명운동 경험 속에 있는 인자들이 조직활동의 일선에 설 수 없는 조건 때문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후 학생운동의 투쟁경험이 구혁명운동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지하조직의 결성을 추동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이 전후 학생운동세대들에게 확보되어 있지 못하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1970년대의 남민전이 자신의 조직적 활동의 정치사상적 기초, 조직활동의 전거를 전적으로 혹은 일정부분 구혁명운동에 두고 있었던 데 반해, 1980년대 이후 조직들이 구혁명운동의 역사적 경험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행하고, 중앙위원급 지도부들이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전후 학생운동을 포함한 변혁운동이 구혁명운동에 상응하는 혁명적 인식과 실천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사노맹은 전신은 '제헌의회그룹'과 그 재건그룹으로서의 '노해동'이었다. 이 조직은 앞서 레닌이 활동하였던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결성된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동맹'의 명칭과 조직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은 레닌의 이원적인 전위당 조직원칙에 따라서 '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라고 하는 분리된 중앙지도부를 구성하였다.(레닌,「우리의 조직적 과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 홍승기 역, 『레닌저작선』, 거름, 1988. 291∼305쪽 참조). 사상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김철수, 유강근, 이성희였고, 실천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최민, 윤성구, 민병두, 김성식 등이었다. 이들은 전후에 자생적으로 성장한 혁명적 인텔리 및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지향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1970년대 반파시즘 학생운동의 과정에서 혁명적 인텔리로 성장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이들은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하에서 투옥되었거나 학생운동과정에서 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혁명운동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고 전후 반파시즘 학생운동과정에서 그 인식과 실천역량이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지도적 인물로서 최민을 들 수 있는데, 최민은 1978년 대학에 입학하여 긴급조치하 학생운동의이념적 급진화과정에서 혁명적 의식을 갖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의식형성의 장(場)도 학내의 공식적인 서클인 '대학문화연구회'에서였으며, 혁명적 인자로서의 실천적 경험도 역시 반유신 학생운동과정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지도적 성원들은 전적으로 전후세대 및 전후의 운동경험 속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들의 경우 특별한 배후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구혁명운동으로부터 혁명적 이론과 조직적 활동경험이 전수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들의 학생운동 경험에서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부여받고 있었다. 이처럼 구혁명운동과의 '단절'적 조건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중요한지적 원천은 주로 고전적 저작, 특히 레닌의 혁명저작들이었다. 실제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의 원형은 전적으로 레닌의 저작 우리의 조직적 관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띄우는 편지에 의거하고 있었고,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조직적 경험이나 구남로당의 조직구조나 조직활동 등이 참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헌의회조직은 1986년 말경부터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조직적으로 붕괴되는데, 제1차 제헌의회조직의 중간지도부 제1차에서는 중앙지도부가 아니었음은 1차조직의 중앙지도부가 구속된 후 조직을 재건하면서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조직명을 '노해동'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조직의 지도부는 박종운, 김정일 등이었다. 이들 역시 1977∼1979년 사이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전위조직의 한 전형으로 상정한 사노맹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1986년 말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가 구속되고 난 후 결성된 '노해동'의 지도부 중 '소수파'가 1988년 4월 조직적으로 분리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고, 그래서 조직의 중앙지도부는 노해동에 참여하였던 인자들로 구성된다. 노해동 내부에서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립은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1987년 대선투쟁과정에서 그리고 13대 국회의원 선거투쟁과정에서의 대응방안을 둘러싸고 첨예화되었고, 그것이 급기야는 조직적 분열로 나아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다수파는 주로 조직국 성원으로 구성되고 있었으며, 소수파는 주로 편집국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노해동에서는『선봉』이라는 비합법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편집국이라고 하면 바로 이 『선봉』편집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양자간의 이론적, 실천적 대립은 주요하게는 대선국면에서의 선전의 방향과 전술적 방침을 둘러싸고 심화되었는데, 1988년 13대 총선이 종결된 후 과거의 실천을 평가반성하는 과정에서, 1988년 4월 소수파는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을 목표로 노해동으로부터 분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출범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인적 규모는 학생 및 현장활동가를 포함하여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분리 당시 소수파의 규모는 현장활동가 120명 정도, - 성남 45명, 인천 18명, 편집부 18명, 노도운동단체, 지방 및 여타 지역 등 학생운동활동가 80여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분리선언서에서는 ① 노동계급 전위정당 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려놓는 일, ② 당면 계급투쟁전선에서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영도를 부인하는 기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 ③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선전선동계획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6월 조직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문건(일명 TASK)을 작성하여, 사노맹의 조직사상적 기본방향을 확정하고 구체적인 조직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제헌의회그룹'부터 사노맹에 이르기까지 중앙지도부는 과거의 혁명운동과는 단절된 전후, 특히 1970년대의 학생운동 출신인자들로 구성되는바, 사노맹 중앙 지도부 역시 전원 전후의 혁명인자들로 구성된다. 사노맹의 초기 중앙위원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태웅, 박기평(박노해), 남진현 등이었다. 1992년 5월 15일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1년 조직개편시 대거 중앙위원의 교체가 있었는데, 구속되어 있는 박노해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백태웅을 포함하여 7인의 중앙위원, 도합 9인의 중앙위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국가안전기회부,『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1992. 5; 『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보조자료』, 1992. 5 참조).
사노맹은 조직적으로 제헌의회그룹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으나, 제헌의회 그룹과 비교하여 갖는 특징은 제1차 제헌의회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조직'을 자임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주로 프롤레타리아적 성원이기보다는 현장활동 경험이 일천한 인텔리 출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노해동에 이르면 ①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현장지향적 인텔리 활동가뿐만 아니라 (혁명적 인텔리). ② 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할 수 있으나 상당한 기간동안 지역노동운동 혹은 현장노동운동 관련영역에서 활동함으로써 혁명적 활동가로서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인자들과, ③ 기층출신으로서 1980년대 신혁명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혁명적인 활동가로 성장한 선진노동자들(혁명적 민중)도 참여하게 된다. 기층민중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참여는 박노해 같은 인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박노해는 부친이 해방 이후의 좌익운동 출신이기는 하나 자신이 혁명적 활동가로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1970년대 이후 일련의 반파시즘 투쟁과정에서, 파시즘하에서의 자생적인 노동운동을 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②, ③의 경우는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부분인데,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의 위상 및 전체 혁명운동의 발전전망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과정에서, 기층민중의 혁명적 발전 및 주력군으로서의 성장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혁명적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현장론'이라는 논거하에서 노동자로 존재이전하거나 현장노동운동의 외곽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선진 학생운동인자들은 대규모로 현장 혹은 현장 관련영역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과정을 통하여 지역적 기초에서, 개별사업장에서, 더 나아가 노동운동 속에서 자기기반을 확보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경우도 많이 나오게 된다. 1980년대 후반 사노맹에서는 바로 이러한 발전이 반영되어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 현장에서 성장한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며, 이것이 1980년대 초중반의 혁명조직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노맹 지도부의 구성은 1960, 70년대의 좌익조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기 시작하였음을, 전후의 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운동인자들이 본격적인 혁명적 좌익으로 성장하였음을, 나아가 신혁명운동인자들이 혁명적 인텔리 출신만이 아니라 기층출신 인자들까지 포함하는 발전적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사노맹은 '자신을 자생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전위조직', '노동자계급의 비합법 전위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인적 구성하에서 사노맹은 1988년 4월 사노맹 준비위를 구성한 이후 1989년 11월 12일 '지역ㆍ업종별 노조 전국회의'가 서울대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식적인 출범선언을 하게 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사노맹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성장한 기층민중운동, 그 과정에서 기층출신의 변혁적 인자들의 형성확대 등의 조건 때문에 1960, 70년대에 비하여 변화된 구성을 보이게 된다. 즉 1960, 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들이 학생운동에서 성장한 인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데 반하여, 기본계급 출신(노동계급, 농민 등)의 인자들도 상당한 규모로 참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운동이 기본적으로 인텔리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학생운동의 이념적 발전에 기반하는 측면이 강한 반면에, 1980년대 운동은 기층운동 지향성이 보다 명확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실체화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나타나는바, 사노맹은 이러한 기반 위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비록 광범한 대중적 기반위에서 서는 것은 아니었으나, 객관적인 조건을 반영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한 형태로서의 사노맹은 선진적인 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혁명적 민중들이 참여하는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이 1988년 4월경 '제헌의회그룹'으로부터 분리할 때 조직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 1990년 10월 안기부의 수사 발표시에는 1,600여 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후 1991년 4월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정조직원이 500여 명에 이르고 지지자들이 2,500여 명, 전체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기부의 발표는 수사의 공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압수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사노맹 정조직원의 규모는 300여 명에 정도에 이르고 지지자들까지 포함한다면 1,500여명 내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밀조직이므로 조직원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70년대의 비합법조직의 정조직원이 100명 이하의 수준이었다면, 1980년대 비합법조직의 하나로서 사노맹의 경우 비록 조직원은 아니나 지지자 혹은 협조자의 위치에 있는 인원들이 1960, 70년대에 비하여 훨씬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는 1970년대적 조직에 비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인적인 확대의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노맹의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공장소조의 결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의 공장소조원은 포항제철, 선경화학, 서광, 해태 등 전국 500여 개의 공장 및 230여 개 노동단체에 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노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구속되기 전, 전국적으로 100여 군데에 공장세포 창설작업을 하려는 과정에서 구속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과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기부의 경우 자신들의 수사대상을 증폭시켜서 발표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박노해 진술의 경우 재판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나온 언명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1987년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획기적 고양과 확산, 현장에서의 파업활동 등을 통한 혁명적 의식의 제고 등으로 사노맹의 인적 확대과정의 중요한 대상의 하나가 노동자들이 되고 있으며, 현장노동자에 대하여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점만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압수된 극비문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수도권위원회와 영남위원회는 역할이 맞먹는 정도이나, UC(울산-필자)등은 대공장의 존재로 영향력으로 보면 비중이 더 크다. 특히 MC(마산창원 필자), PH(포항 필자) 지역 대공장에는 우리의 영향력이 있다. 수도권에서는 공장에 영향력은 아직 적고, 단체 파견역량이 많다. "(국가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의 조직실체』, 1991. 4, 163쪽)]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정치적 노동운동의 중요한 구성은 사실 학생 운동 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제고되면서 사실 학생운동 출신의 도움 없이도 현장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운동의 중요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 운동의 중요역량이 기층출신에서 충원되는 방향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노맹의 조직확대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충원범위인 지역적 확장은 반파시즘대중운동이 198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보다 구체화된다. 사실 부마항쟁 이후 반파시즘운동의 지역적 협애성(狹碍性)은 완전하게 타파된다. 특히 1980년 봄의 정치적 경험, 1987년 대투쟁의 경험은 반파시즘운동이 일정지역에서만 전개되는 상황을 완전하게 반전시키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사노맹은 기존 노해동의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로 분리되어 만들어졌으므로 초기에는 특정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즉 사노맹의 초기 지역적 기반은 성남, 인천, 부천, 안양, 서울 중심의 활동가들로 한정된다. 그리고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하에 있던 학생운동 역시 서울 및 일부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는다.
사노맹이 제헌의회의 다수파로부터 분리되는 1988년 4월부터 사노맹이 정식으로 외화되는 1989년 11월까지는 바로 사노맹의 형성과정이자 초기의 조직적 확대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989년 초까지는 주로 내적 조직정비 및 훈련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조직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1989년 초 대중사업의 활성화를 향한 '일대전환'을 한 이후 인천, 서울 정도에 머무르고 있던 사노맹 조직은 점차 대중활동이 강화되면서 시위원회의 형태로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부산, 포항, 대구, 구미 등으로까지 그 조직적 기반이 부분적으로 확대해가게 된다. 특히 지방에서 노동자 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울산, 구미 등지에도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1년 초의 조직개편에서는 지방사업의 활성화로 인하여, 지방위원회를 각 지방별로 분권화하여 일정하게 의사결정권을 갖는 활동단위로 전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점 역시 사노맹의 지역적 기반이 확장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케 해준다. 실제로 분권화 요구는 하부단위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인바, 2년여에 이르는 조직사업을 통하여 이미 일정한 정도로 그 지역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사노맹의 지역적 확대과정은 그 영향력하에 있는 사노맹계열 학생운동의 지역적 확대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 시기에 사노맹의 외곽학생조직이었던 '통일민주학생연맹'은 학내 기반이 주로 서울의 일부대학이었고 그 내실이 약하였던 데 반하여, 1989년 초 일대전환 이후 본격적인 외부조직사업을 하는 시기의 학생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 (서민학련, SDSL)의 경우에는 상당한 조직적 기반을 서울권 대학에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서민학련은 1990년 5월 '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전민학련, 통상 민주주의학생연맹이라고 한다. JDSL)으로 확대되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전민학련은 서울대 등 전국 45개 대학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대학 2학년 이상의 공식조직원은 400∼500 여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서술을 종합하여 볼 때, 1970년대의 혁명전위조직에 비하여 사노맹은 변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조직적 성원이 보다 확대된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학생운동 출신의 혁명적 선진인자까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포괄하는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970년대의 남민전은 서울 중신의 조직이라는 성격을 부분적으로밖에 탈각하지 못하였으나, 사노맹에 이르면 지방조직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일정하게 포괄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필자는 여기서 사노맹의 인적 지역적 기반이 이전 시기에 비해 절대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노맹의 대중적 기초가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조직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사노맹이 1960, 7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진일보한 측면은, 사노맹에서는 골간조직의 설치 및 그 분화, 외곽조직의 분화 및 독자적 활동,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 가동 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의 특징을 사노맹의 시계열적인 조직분화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 및 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사노맹 결성의 준비단계로서,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이하 '사준위')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분리선언이 이루어진 1988년 4월경부터 1989년 11월 사노맹 정식출범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다시 두 개의 소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소시기는 '일대전환'이 이루어지는 1989년 초까지이며 제2소시기는 '일대전환' 이후의 시기이다. 다음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는 사노맹 정식 출범에서부터 1990년 후반의 검거선풍에 맞서 조직보위와 개편을 이루어내는 1991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다음 제3단계는 대규모 조직개편 이후 1992년 5월 중앙위원의 대규모 검거사건까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노맹 조직의 결성준비단계인 제1단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8년 4월 1일 노해동으로부터 소수파가 분리선언을 하고 1988년 6월 1일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 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창립취지문을 작성 배포함으로써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년 7개월에 이르는 기간을 통하여 사준위 상태에서 조직의 정식 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먼저 제1소시기인 1989년 초까지 사준위는 지옥훈련 및 조직훈련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육체적 자기준비, 조직결성의 물적 확보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 일대전환 이전에 사준위는 주로 조직체계의 재구축, 조직결성의 인적 준비작업(혁명적 인자의 육성작업)과 물적 기반 확보작업에 집중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에 사준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보하기 위한 '지옥훈련'과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조직사업, 물적 조건 확보와 선동 등 '필수실천'"을 두 개의 주요한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1988년 6월부터 10월경까지 중앙 및 지방의 핵심조직원 50여 명이 사상교육, 체력단련, 무술습득 등을 완료하게 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자임하는 조직원들이 그러한 자임에 부응하는 자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발적 훈련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준위는 조직체계를 재정비하면서 제헌의회 시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조직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당초 분리선언 후 6개월의 준비를 거쳐 1988년 9월 1일을 기해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체적 조건의 확보를 위한 준비가 여의치 않아 출범은 거의 1년여가 늦어지게 된다.
제1소기기 말의 조직구조는 다음 그림과 같았다. 사준위 이후의 준비기를 거치면서 조직체계를 재정비하여 다음과 같은 조직구조를 완비해내게 된다.

<그림 2> 1988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 조직구도

먼저 분리 당시에는 주로 조직국과 『선봉』편집국이라고 하는 두 중심기구 중에서 『선봉』편집국에 소속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과거 편집국 성원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방조직에서는 주로 안양ㆍ성남지역과 인천ㆍ서울지역 등 수도권위원회 소속성원들과 일부 영남위원회 성원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는 주로 내적 준비작업에 집중하였고 외곽조직을 발전시킨다거나 프랙션망을 파견해낸다거나 하는 외적 작업은 유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주로 분리 당시의 조직체계를 재구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점에서는 골간조직의 분화수준이 낮고 골간조직의 지방조직 역시 지극히 미미하였다. 또한 외곽조직의 분화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프랙션조직 역시 본격적인 가동단계에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구조가 협의체적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중앙(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 존재하는 구조였다고 한다면, 재건중앙(노해동)은 단일한 지도력을 갖는 하나의 중앙 밑에(과거 두 개의 중앙 역할에 해당하는) 조직국과 편집국을 두었다. 사준위 역시 이러한 노해동의 조직방식을 따라 초기에는 중앙위 산하에 편집국과 조직국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중앙위에 편집국과 조직국의 2인이 각각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집행하는 식이었다. 이때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종결정기관으로서의 중앙위가 실질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고, 실제적인 지도력을 가진 상임중앙위원이 조직을 지도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들이 모이는 모임을 중앙상임위원회라고 불렀다).
여기서 편집국은 사상적 지도의 의무를 담당하는 기구였으며, 주로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을 내용적으로 담보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대외적인 선전선동매체를 발행하는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조직국은 조직사업, 연락업무 및 사무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조직국은 백태웅을 중심으로 남진현 등이, 편집국은 박노해 등이 지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 중앙상임위나 편집국 혹은 조직국은 임시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지방조직은 수도권위만 가동되는 상태였고 이 수도권위에서는 서울, 성남, 인천, 안양지역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수임자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수임자들은 지역별로 2∼3명이었는데, 경북지역의 수임자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많은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고, 조직사업은 본격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상태에 있던 사준위는 조직의 정식 결성을 위한 내적 준비작업이 완료되고 각 지역에서의 기초적인 인적 확충작업이 완료된 후에, 외적인 대중사업을 본격화하게 되면서 사준위 단계의 제2소시기로 이행해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이루는 요인으로는, 1988년 10월 말경부터 구속자들이 석방되고 수배자들이 수배가 해제되며 동시에 광주ㆍ5공청문회를 통하여 대중적인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내적 준비 차원으로부터 전환하여 외적인 대중사업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들 수 있다. 1989년 초 이후의 이러한 사업의 기본방향을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일대전환』이라는 팜플렛이다. 이 팜플렛에서는 대중사업방식에서의 일대전환을 표방하였는데, 대중사업방식, 노동조합활동방식, 비합법 정파활동방식 등의 대중적 전환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SJD 선생 회견록」, 국가 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 조직실체』, 163쪽 참조).
이 일대전환 이후 사준위는 대중활동을 대폭 강화하게 된다. 여기서 대중활동이라고 할 때는 대중운동 및 그 조직들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 그러한 운동들 속에서 조직원을 발굴하여 참여케 하는 것, 학생운동 등에 개입하여 정치적 지도를 수행하면서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력하에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정비하여 하나의 조직적 대오로 편제해내는 것,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발간을 통하여 사준위의 정치적 방침을 일반화해내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겠다.
이 제2소시기를 경과하면서 사노준위는 <그림 3>와 같은 조직구조로 발전해가게 된다. 일대전환 이후의 조직체계에서는 중앙골간조직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중앙상임위원을 없애고 중앙위가 실질적인 권한과 결정권을 갖도록 한 것이며, 부분적으로 하부지도기관의 독자적 권한을 확대하였다. 1989년 말 사노맹 출범시까지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먼저 중앙골간조직의 분화와 지방조직의 분화, 외곽조직 및 프랙션조직의 건성을 들 수 있다.

<그림 3> 1989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의 조직구도

먼저 편집위의 경우 연구정책기능을 강화하여 그 산하에 정치, 경제, 노동, 농민, 학생문제연구팀을 만들고 각각에 연구원을 위촉하여 일종의 내동자(內動煮)로서 정세분석자료를 만들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중앙조직에서는 기존에 조직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업무가 대폭 분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조직규모가 확대되고 조직원이 증대되면서 내부의사 전달을 전담할 사무국, 즉 조직문건 수발을 전담할 부서가 분화 신설된다. 그리고 조직국의 고유한 업무인 조직사업활동이 분화되는데, 외곽기관(예컨대 노동문학사와 같은 부설기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지도할 프랙션이 설정되고, 시도 및 지방위원회가 보다 활성화가 되어 각계 대중조직(예컨대 전국회의 등)에 대한 프랙션이 가동되게 된다. 이 시기의 조직구조 변화의 중요한 의의는 그 이전 시기에는 중앙상임위원(백태웅, 박노해)이 편집사업과 조직사업을 각각을 직접 관장하면서 중앙과 하부가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각 지방위원회와 편집위원회, 각종 프랙션조직이 이전 시기와 달리 분화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외곽조직(사노맹 내적으로는 편집위원회나, 사무국 등은 부속기관으로 설정하고 있고, 노동문학사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등은 부설기관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골간조직을 중앙위, 지방위 및 부속기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외곽 방계조직이라고 한 것은 부설기관을 지칭한다)으로서 노동문학사(『월간 노동해방문학』 발간)와 노동자대학, 민주주의학생연맹(민학련) 등도 만들어지게 된다. 먼저 1989년 4월호부터 발간된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정치적 선전사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기에 상당한 조직력이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발행인 밑에 실질적으로 내용적 지도를 담보하는 상임기획위원장이 있고, 그 산하에 편집국과 사무국, 영업국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사노맹은 편집위의 지도 아래 상임기획위원장(사노맹의 조직원)이 운영을 전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보인다.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독자적인 기관이며 프랙션이 파견, 지도하는 기관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준위의 부설기관 혹은 외곽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노동자대학을 들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대학은 사준위만이 추진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운동의 여러 그룹이 연합하여 추진하는 것이나, 사준위의 영향력 및 지도력이 강한 상태였던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다름으로 사준위의 외곽사업으로서 민학련에 대한 지도를 들 수 있다. 사준위는 제1소시기에서부터 학생운동파견망을 설정하여 그간 제헌의회그룹 노선에 동의하고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자파의 외곽 학생운동조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노맹은 통일민주학생연맹(이하 '통민학련')의 구성과정, 서민학련의 결성 및 전민학련으로의 확대과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학생운동에 대한 조직적 지도의 '구조화'를 시도하게 된다.
사준위는 공식적 출범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노맹의 본견적인 활동을 가능케하는 각 운동 단체의 파견망 구축, 각계 영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조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당시 사회운동단체에 파견망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구축된다. 즉 전국회의, 전국농민회총 연맹, 노동자대학,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여러 대중단체들(예컨대 종교단체)등이었다. 사준위는 당시 변혁운동 진영의 대중조직들에 파견망을 파견하여 단순정보의 수집에서부터 정치적 지도력의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적 사업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지방조직이 시위원회체계로 분화발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준위 초기에는 인천ㆍ서울지역위원회와 안양ㆍ성남지역위원회로만 분화되어 있었는데 각 지역별 특수성에 따라 조직사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시위원회체계의 체계로 지역조직을 분화해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위원회는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포항, 부산, 대구, 구미 및 기타 시수임자로 구성된다. 사준위의 시기가 지나면서 수임자가 시위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면 시위원회로 전환시키고, 그렇지 못한 수임자들은 시수임자로 설정 운영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위원회는 지역적 조직을 완결해내고 필요한 조직에 프랙션망을 건설하는 것으로 상정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9개 지역위원회가 모두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그리고 영남지방의 대공장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위원회의 구성 및 활동이 일정하게나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2소시기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달리 골간조직이 분화될 뿐만 아니라, 골간조직, 프랙션조직, 외곽조직의 구분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사준위의 시기를 거쳐 1989년 11월 노동자대회장에서 사노맹의 정식출범을 선언하게 되면서 사준위 상태에서 사노맹으로 정식 전환하게 되며, 이에 따라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 시기는 1991년 1월 중앙위에서의 조직개편시까지의 시기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식출범한 이후 준비과정에서 확보된 조직적 기반에 의거하여 자신의 조직적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조직적 활동을 수행하며, 이에 대해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이 주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한 조건이므로 출범 이후 사노맹은 권력의 집중적인 추적과 탄압을 받게 된다. 따라서 사노맹의 경우 본격적인 활동시기는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과의 대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 말의 조직구도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직적 측면에서는, 출범까지 골간조직을 확보한 후 그것을 분화시켜가며 나아가 외곽조직을 확산시켜가고 그것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해가며, 동시에 여타의 정파, 민중진영의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프랙션조직을 더욱 확대해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림 4> 1990년경 사노맹의 조직구도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외곽조직의 분화로, 먼저 노동문학사라고 하는 문예창작부를 독립적 문예조직인 노동해방문학실(이하 '노문실')로 확대개편한 것을 들 수 있다. 노문실은 1990년 2월 노동문학사에서 비합법 조직으로 분리 독립하여 개설된다. 이 노문실은 여러 문학계열(민족해방문학계열, 민중적 민족문학계열, 민족문학계열, 노동해방문학계열 등) 중에서 노동해방문학계열에 속한 문예활동가들의 비합법 문예전문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문실은 '민중문학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노동자문학가동맹' 결성을 추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노문실은 전국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지부의 결성을 시도하고 지부 결성의 일환으로 '노문실 대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주도하에 마산ㆍ창원의 대학생문예조직(전선의 불꽃)을 결성하게 된다(1990. 5).
다음 중앙위원인 백태웅은 대학원 및 인텔리 출신의 전문연구역량을 갖는 소수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하 '사과원')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사노맹의 선전선동활동의 자료개발및 노동계 급당 강령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구축작업을 수행하는 기구라고 판단된다. 이 조직은 1990년 5월 '준비위원회' 명의의 내부제안문을 제출하였으며, 사과원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 8일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1990년 11월 창립제안서를 배포하게 된다. 그 후 1991년 1월에 정식으로 출범하며 1991년 6월에 재개편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과원은 사상투쟁, 이론투쟁의 영역에서 전위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사노맹의 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인 표현에 따르면 사노맹은 사관원이 독자적인 연구단체로서 일종의 연구자전위조직일 뿐, 사노맹의 조직원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사노맹의 외곽조직으로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설립을 들 수 있다. 1990년 1월 중앙위원 백태웅, 남진현을 중심으로 하여 사노맹과 동일한 이념적 기초 위에서 활동하는 '선진적인 학생정치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에 대한 조직적 지도를 수행하고자 설립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이다. 사노맹은 서민학련을 중심으로 전민학련 구성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사회주의 학생연구소를 통하여 실질적인 조직적 지도를 행하고 있다.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건설은 학생운동 파견망의 위상을 격상시켜 그것을 별도의 부설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파견자망 구축시도를 들 수 있는데,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결성된 각종 대중단체 및 운동단체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대중단체의 활동에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것은 출범 당시에 비하여 상당히 확대된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조합의 전국적 단일조직인 전노협, 민중당 등에 파견자망을 구축하여 사회주의운동세력의 확대 및 대중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행하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도 파견자를 보내 내부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발전의 제2단계에서는 1989년의 조직구도가 유지되면서, 즉 기본구조의 변화보다는 외곽조직의 확대분화(예컨대 사회주의학생 연구소, 노동해방 문학 실 등), 프랙션 활동의 확대(전농 등) 등 부분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발전의 제2단계 시기는 조직원들의 검거사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제1차 검거는 1990년 9월 17일 사노맹중간책임자인 현정덕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사건 (제1차 보위사고), 그 후 10월 1일 중앙위원 남진현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이 그것이다(제2차 보위사고).

<사진> 1991년 3월 12일 구속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

이러한 검거사태를 계기로 사노맹은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그로 인해 조직적 분화의 제3단계로 변화해간다. 1991년 2월경까지를 통하여 완결된 조직개편은 제1차 보위사고와 제2차 보위사고를 맞아 조직을 복원하고 종래 활동방식을 혁신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노맹의 내부문건인 『조직개편 투쟁에 관 한 지침』(국가안전기회부, 『사노맹 유인물분석』 제8집, 1991.10, 98∼106쪽)에 따르면 조직개편 투쟁의 기본적 목표로서 ① 중앙지도 기관의 강화 ② 지방조직의 건설과 분권화 ③ 프랙션의 독자활동 단위화, 분권화 ④ 통일성의 강화 ⑤ 사업의 공식화와 사무전산화 ⑥ 강령과 규약의 명문화 ⑦ 대중성의 강화 ⑧ 물적 조건의 안정화 등이다. 즉 사노맹은 중앙기관의 통일성 있는 지도와 각 하부기관의 독자적인 활동성이 통일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지방기관과 프랙션조직의 분권화 및 독자활동단위화라는 원칙 위에서 조직을 개편하고, 그에 대한 중앙위의 통일적 지도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의식하에서 조직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5> 1991년 1월 조직개편 이후의 사노맹 조직구도

구체적으로 조직개편을 보자. 먼저 중앙위가 기존의 4인에서 9인으로 확대되는데, 이에는 구속된 박노해와 남진현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중앙상임위원 2인, 정책위원장, 조직위원장, 수도권위원장 등 7인을 포괄하여 총 9인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최고 심의ㆍ결정기구로서의 중앙위원의 확대는 조직의 분권화라는 각도에서 각 중요기관의 책임자가 결정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의사결정과정의 중복을 막고 각 중요기구가 자신의 관할영역을 최종책임지는 독자적인 사업단위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으로 지방위를 중심으로 한 지방조직의 분권화와 독자사업단위화라는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상임위원은 중앙위로부터 위임된 범위 내에서 일상적인 조직의 결정을 내리고 조직을 총괄지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중앙위가 각 조직의 중요사항을 모두 최종 결정하였던 상태에서 탈피하여, 분기별로 회합하여 주요 방침만 결정하고 나머지 집행을 각 기관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전화하게 된다.
다음으로 그간의 조직활동의 확대를 반영하여 중앙정책위와 조직위가 분화되었는데, 정책위는 "당면정세와 전술방침 수립 등 사노맹 투쟁노선에 입각하는 선전선동의 내용을 안출해내고 외곽조직 및 파견망 조직의 활동방침, 대중단체의 투쟁방침을 안출하는" 등 정책적 지도임무를 주로 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분과, 통일국제분과, 정치분과, 대중단체 분과, 편집부로 나뉜다. 여기서 편집부는 기존에 편집위가 주요하게 담당하였던 『월간 노동해방문학』발간지도사업과 사노맹 명의의 각종 유인물의 내용을 책임지게 된다.
다음 조직위는 조직적 지도임무를 담당하는데 연락통신부와 사무부(총무부), 지방사업부, 대중사업부(파견부)로 나누어진다. 조직체계상 조직국에 해당하는 일을 담당하는데, 연락 통신부는 부서간, 부서와 외곽조직, 부서와 파견자 및 조직간의 연락, 통신, 문서 수발을 담당하고, 사무부는 각종 자료의 관리 및 재정사업을 총괄하며, 지방사업부는 지방조직의 확대추진, 각 지방위 하부조직의 결성 및 지도관리를 담당한다. 그리고 대중사업부는 그간 중앙위 산하에서 관장되던 각 운동단체의 프랙션조직망을 일괄 관리하며 대중운동 단체의 투쟁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지방위는 이젠 체계에서는 9개의 지역위원회로 되어 있었는데, 각 지방위를 광역화하여 4개 권역으로 나누어 활동하게 된다. 기존의 각 지방위는 독자적인 결정권한이 제한되었으나, 분권화하면서 광역 지방위는 자신의 관할사업에 대해서 독자적인 결정권한을 갖게 된다. 여기서 수도권위는 서울, 인천, 경기지역 위원회로 구성된다. 영남위는 울산준위, 마창준위, 대구ㆍ포항 수임자, 부산수임자 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수도권위와 영남위의 역량이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하는데, 영남위는 대공장에 대한 영향력이 일정정도 확보되어 있으며, 그 주요한 기반이 공장역량으로 구성되는데 반해, 수도권위는 대부분의 역량이 단체파견역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남위의 경우 대구지역위는 안동, 원주, 포항, 구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진노동자에 대한 조직사업이 확장되었으나, 보위사고 이후 대구와 포항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부위와 호남위는 준비위 상태로 존재하고 있고, 강원, 태백, 경기도 이천 등의 지역에는 수임자가 활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각 지방위는 각자의 실정에 따라 중앙의 기관들에 준하는 하부실무 전문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편집국, 사무국, 연락사무국, (정치)선전국 등이 그것이다.
개별 지방위 산하에는 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역사업 담당 국장과 부속기관 국장이 지방위의 구성요원이다. 부속기관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무국, 선전선동 담당부서, 공장사업 담당부서, 지역의 여타 정파에 대한정치적 사업을 담당하는 정파 담당부서 등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방위의 하부에는 공장 소조 담당부서가 있는데, 각 공장에 소조를 확대하여 이것을 공장프랙션 조직, 나아가 공장세포위원회로 발전시키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소조의 조직화 사업의 진전 정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명확히 단정할 수 없으나,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정한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활발한 지방의 경우 지역을 더욱 세분화하여 지역국을 두는 경우도 있다. 영남위의 경우 발전속도가 빨라 8개월 사이에 200여 명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한다. 영남의 경우 울산, 부산, 구미 등의 지역국을 설치하고 있으며, 주 업무는 일반사업부(민족민주운동단체사업, 노동운동단체사업)와 공장사업으로 나뉘어 있다. 호남지역이나 기타 농민지역의 경우는 농민사업부를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조직구도는 1991년 초의 상황에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991년 3월에 박노해 및 김진주가 구속되는 등 제3차 조직보위사고가 발생하게 되면서 조직개편에 관한 문건들이 발견됨으로써 조직개편의 윤곽이 제시되었는바, 비합법조직의 특성상 조직구조가 노출되었으므로 1991년 5월 중앙위에서 보위사고에 대응한 부분적인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이때 이루어진 조직개편의 내용으로는 ① 중앙조직위를 중앙조직국으로 중앙정책위를 중앙정책국으로 개편한다. ② '중앙상임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총책인 백태웅, 중앙조직국장(丁明燮), 중앙정책국장(殷秀美)으로 구성된 '중앙상임위'를 신설하여 중앙단위의 일상적 집행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③ '전산부', '시각매체연구소' 등을 비서실 산하에 신설한다. 중앙골간조직 부속기관인 전산부는 '조직 효율적 관리 및 조직보위', '조직의 사무의 전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설립된 전문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중앙상임집행위원장의 직속기관으로 위치지어진 것 같다. 시각매체연구소는 비디오그래픽 등 시각매체를 이용하여 선전선동물 제작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91년 5월 이후에 이전 단계와 달리 형성된 중앙부속기관으로서는 '노동자영상교육센터'(노동자들에게 노동해방사상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노동자정치교육기관' 설립을 목표로 하는 기관)가 있다.
다음으로 파견망이 확대됨으로써 프랙션조직을 구축하여 각계에 조직적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도 지속되었는데,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에 파견망을 보냈고, 보건의료 분야 및 종교기관에 파견망을 확대하여 조직의 외부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사노맹은 각 지역의 공장소조를 구축하려는 작업에 많은 힘을 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골간조직의 건설 및 분화, 외곽부문조직의 분화 및 조직적 활동의 확대,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의 가동이라는 점을 볼 때 1970년대의 남민 전에 비하여 사노맹은 그 조직적 발전정도가 더욱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곽 방계조직에서 외부 대중운동에 상응하는 부문별 조직분화를 시켜내고 그에 기초하여 각 계의 변혁운동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1970년대와 비교하여 상당한 조직적 발전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1980년대의 전위조직활동이 1970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갖는 두드러진 특징은 투쟁의 전명화 및 대중투쟁에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변혁적 인식이 선진활동가들의 수준에서 그리고 선진대중의 수준에서 확산 되어가고, 따라서 전위적 인식과 대중적 인식의 괴리가 일정하게 극복되며, 또한 합법적 논의공간에서 일정하게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사노맹의 활동은 1970년대적 수준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사노맹의 조직활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사노맹의 대외적인 투쟁활동,둘째로 대중투쟁과 관련한 활동, 셋째로 혁명조직의 기본사업이 라고 할 수 있는 내부교양사업, 넷째로 '보급투쟁' 활동을 들 수 있다.
먼저 사노맹에서 대외투쟁이 갖는 비중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더욱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1960년대 조직에서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정간(精幹)요원의 육성ㆍ은폐의 과제는 대중운동 속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자생적으로 육성되어 나오고 완전 한 은폐의 필요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그 과제는 약화되고 대회투쟁에 일차적인 주안점이 두어지게 된다. 즉 '방어형 조직'이라는 성격보다는 '투쟁형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통일혁명당은 그 자체가 비밀조직적 성격을 띠면서 일종의장기적인 준비조직으로서 활동을 하였고, 1970년대 남민전에서도 한편으로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그 기조는 정간요원의 발굴 육성이라는 장기적인 과제 수행에 조직의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1980 년대 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과제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는 조직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사노맹은 창립 후에 사회주의적인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경찰서 등 권력의 하부통치기구에 대한 독자적인 타격투쟁, 기타 다양한 대중투쟁에의 참여 및 선전선동작업에 광범하게 참여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공개화되지 못하였던 사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사노맹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주의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위하여 내는 발행물로는 중앙기관의 선전선동기관에서 발행하는 팜플렛과 3∼4쪽의 간단한 '리플렛', 1∼2쪽의 단순 유인물 등이 있으며, 외곽기관에서 발행하는 매체로는 노동문학사의 『월간 노동해방문학』, 사회주의학생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새벽바람』. 기타 지방위 및 그 하부기관이 발행하는 기관지나 유인물 등이 있다. 반파쇼 투쟁을 위한 가두선전선동도 사노맹이 전개한 투쟁적 활동 중위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인확성기를 동원한 대형 선전선동활동, 대형건물에 선전선동 플래카드를 공개적으로 부착하여 반정부투쟁을 선전선동하는 사례도 들 수 있다. 또한 1989∼1990년 사이 시내에서 파출소를 공개적으로 타격한다거나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례, 1990년 5월 메이데이투쟁시 주자파출소에 대한 타격투쟁 등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선전선동, 타격투쟁 등은 1970년대 선전선동이 소규모에 그치고 있었고 단속(斷續)적인 활동이었던 점에 비 추어본다면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은폐적인 활동이 아니라 반(半)공개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에 비하여 반합법공간이 확장된 데도 기인하지만 1970년대에 비하여 보위능력이 훨씬 발전한 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후 사노맹은, 1990년 5월의 대규모 반민자당가두투쟁시, 1991년 5, 6월 가두투쟁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깃발과 슬로건, 팜플렛으로 선전선동활동을 공개적으로 수행해왔다.

사노맹의 투쟁적 성격은 무장투쟁을 -비록 단기적인 시행사항으로 상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하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박노해는 민중무장봉기의 단계 별 이행과정을 제3단계(제1단계 : 자생적 무장화 단계, 제2단계 : 계획적 조직적 무장화 단계, 제3단계 : 기존 국가권력의 무장력 제압과 접수단계)로 구분하고, 궁극적으로 지배권력의 무장력에 대한 무장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하에서 이에 대한 일정한 준 비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예컨대 폭발물 개발을 추진한다거나 무기고 탈취계획을 수립한다 거나 지방위별로 민중무장력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것 등이 이러한 것이다(물론 사노맹은 궁극적인 힘의 근거가 무장력에서 유래하며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혁명의 일반적 목표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무장이 수반된 민중봉기'가 불가피하다는 일반론적 인식을 넘어 서서, 현실적인 투쟁형태에서 무장투쟁 혹은 도시게릴라투쟁을 사고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둘째, 1980년대에 오면 각계의 대중운동이 활성화된 채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노맹의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와 수준이 훨씬 확장된다는 점에서 사노맹 활동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정도라는 점에서 보면, 대중투쟁 전개과정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영향력 수준을 뛰어넘어 전위조직이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대중운동이나 대중조직체에 대해 프랙션적 지도를 포함하여 일정한 조직적 지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위조직이 대중조직에 대하여 일관된 조직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노맹에서 나타나는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라는 점은 먼저 현단계 대중운동의 주력 중의 하나인 학생운동 내부에 자신의 외곽조직을 확보함으로써 학생운동의 흐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와 달리 사노맹 의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의아해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조직적 영향력은 전체 학생운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생운동의 일부 정파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1988년경 NL이 주도하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등에 대립하여 CA그룹은 학생운동조직인 서울지역대학생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이하 '서건추')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CA 다수파가 NL로 합류하면서 서건추는 서총련 소수파로 통합된다. 이로 인해 제헌의회그룹의 학생 운동 지도선이 부재하는 상황이 된다. 서건추가 서총련으로 통합된 후에 상부지도가 없는 관계로 통하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운동의 제세력들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준위가 결성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를 시작하게 되고, 이러한 지도하에서 통합에 합류하지 않은 조직들이 모여 통민학련(외대, 한양대, 동국대 중 심)을 결성하는데, 이 통민학련은 1989년 상반기 민주화투쟁 학생연합(이하 '민투학련', 서울대, 건국대 중심)이라고 하는 (CPC계)조직과 통합하여 서민학련을 결성하게 된다(후에 양자는 조직적으로 결별한다). 사노맹은 이처럼 통민학련부터 시작하여 서민학련 및 전민 학련(민주주의학생연맹의 전국적 조직)결성에 이르는 과정에 지도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지도노선을 따르는 학생운동세력을 창출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학생운동 내에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검거시에 전민학련 위원장도 사노맹 조직원으로 구속된 바 있다. 이 전민학련은 사노맹의 이념적 지도를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투쟁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러 차례의 가두투쟁에서 전민학련은 독자적인 이름으로 가두선전선동작업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이러한 방계조직에 대한체계적인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학생연구소'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전민학련에 대하여 전략전술적 지침을 내리고 정 치적 지도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과 학생운동 방계조직과의 조직적 지도 피지도 관계를 보면, 직접적인 조직적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1980년대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한데, 비록 전위조직이 변혁운동 전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정파적 그룹 내에서는 -조직적 연관을 갖건 갖지 않건 간에- 일정하게 지도 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 역시 자신의 변혁이념인 '민족민주혁명론'(NDR) 그룹 내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70년대의 전위조직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대중투쟁과 전위조직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넘어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가 1970년대에 비하여 부분적으로나마 확대되었다는 점도 사노맹 활동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은 기층 대중운동이 활성화되고 기층운동 가운데서 선진적인 변혁이념에 공감하는 인자들이 보다 확대된 규모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사노맹은 1980년대의 노동운동의 조직적 대중적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조직들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다양한 프랙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각계각층의 사회운동조직 특히 노동운동 및 변혁운동조직들 들에 자신의 입장과 조직적 입장을 관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간 사노맹은 노동자대학,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농민회총연맹, 국민연합, 전국빈민연합, 민중당 내에 파견망을 보내 어 그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문건에 따르면, 전노협이 결성되기 전의 전국회의 산하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1988. 12. 22) 결성시부터 파견자를 2∼3명 정도 보내어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양한 운동 조직에 자파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공개단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관철되도록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1∼1992년경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중당',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 '민중회의',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파견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사노맹은 혁명의 주력군으로 상정하고 있는 노동계급 내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 한 조직적 시도를 하는데, 위의 파견망 외에도 전국의 많은 공장에 세포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사업장을 혁명의 요새로 만들기 위하여 성남, 안산, 창원, 포항, 울산, 태백 등지의 기업노조와 업종별 노조,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병원, 지하 철, 운수노조 등에 조직원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가능한 사업장에서 특히 서울수도권과 울산 등 동남공업단지 내에서-공장소조작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국가안전기획부, 『사노맹의 실체 수사결과』, 1991. 10, 38∼40쪽). 이러한 결과로 울산 등 몇 몇 지역에서는 현장의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장도 존재 한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위에서도 중앙조직에 상응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데, 지역에 존재하는 노동운 동단체에 파견망을 둠으로써 조직적 연관관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동시에 공장사업부를 두어 개별공장에 자신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그것을 공장프랙션 혹은 공장세포조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시도와 함께 계기에 따라 파업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선전선동작업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작업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중앙조직국 산하에 공개투쟁조직인 '노동해방선봉대', 비공개 투쟁조직인 '사회주의선봉대', '선동소조'등 을 결성하여, 집회 및 파업투쟁이 있는 곳에 투입하여 선전선동을 전개하였다.
사노맹의 공장사업은 1989년 초 '일대전환' 이전에는 주로 학생운동 출신 및 선진노동자 들을 중심으로 한 내적 훈련에 초점이 주어지고 있었고, 대중사업으로서의 공장활동이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대전환 이후 ①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 활동 ② 지역 사업 ③ 지역단위에서의 공장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사노맹 자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사업 자체도 활성화되기가 어려웠고, 사노맹 출범 이후에야 더욱 확대된 규모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1991년 이후에는 공장활동 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에서 사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경우 전반 적인 이면적 심화와 각계각층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조응하여 노동운동의 선진활동가와 선진 대중을 일정하게 확보함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인적 기반을 더 확대된 규모에서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인, 인적인 영향력의 확보시도와 함께 사노맹이 1970년대와 달리 다양 한 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여러 운동 영역 및 인자들에게 홍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사노맹은 "노동해방 이념과 사회주의이념을 선전선동하는 합법적인 매체" 로서 『월간 노동 해방문학』을 정규적으로 발행함으로써 선진활동가 및 선진대중의 정치적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회적인 경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노동해방과사회주의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함으로써 대중운동의 정치적 지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통혁당의 경우『청맥』이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독자 적인 이념을 선전 선동하는 잡지라기보다는 당시 진보적인 잡지의 한 형태였을 뿐이었고, 1970년대 남민전은 우회적이건 직접적이건 자신의 이념을 유포할 수 있는 잡지의 창간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1980년대 사노맹은 확장된 정치적 공간의 영향 때문이기는 하나, 공개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기적인 팜플렛인 『긴급전술결의』,『한걸음 더』,『새벽바람』등을 발간함으로써 자신의 이념을 확산할 수 있는 기제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도 1970년대에 비하 여 일정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쩨로 사노맹이 행한 내부 교육사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인적 재생산이라는 점에 서 사노맹의 내부 교육체계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보다 체계화, 정교화된다는 점을 지적 할 수 있다.
먼저 사노맹은 엄혹한 현실 속에서 조직보위를 위하여 엄밀한 선발기준하에 조직원을 포섭하고 있다. 외부의 한 성원이 조직원으로 가입하려는 경우 추천자가 '가입추천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본인에게 가입원서와 자기소개서 및 정치사상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한 다음, 포섭대상자의 '사상성', '비밀활동능력' 등 50여 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게 된다. 이때 포섭대상자의 출신성분, 투쟁경력 등에 대한 신원사항을 은밀히 조사하고 설문조사, 직접면담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검토한 후 가입케 하고 있다. 선발된 후에도 6개월 이내의 후보조직원의 검증기간을 거쳐 조직원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직원 자격기준은 초기에는 조직보위 차원에서 대단히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나, 1991년 1월 조직개편 후에는 가입자격을 완화하여 과거 사노맹의 지지자 격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충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조직원으로서 가입한 다음에는 1개월에서 1년 간의 '사상교양', '체력훈련' 등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하여 직업적 혁명전위투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옥훈련은 사준위 시기에는 조 직원으로서 서약한 모든 조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조직원으로서 선발된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인식과 실천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과 혁명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실시'-'혁명의식 강화를 위한 좌우면 설정'-'조직 활동의 목표달성을 위한 슬로건 제정'-'직업혁명가로 육성하기 위한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엄혹'한 현실 속에서 직업적 혁명활동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 고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옥훈련만으로 훈련과정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더하여 '필수실천'이 뒤따라야 완전한 조직원으로서의 교육이 완결된다.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을 위하여 세미나를 주 1회 개최하여 투쟁이념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그것이 끝난 후에는 투쟁이념 정립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세미나과정에서는 '민족민주혁명'이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세인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다. 마지막에 실시되는 지옥훈련에는 체력훈련, 무술훈련, 실무훈련(통신연락 등), 팀워크훈련 (위장, 상황판단 훈련 등), 담력훈련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조직원 후보자의 '성분' 을 분석하고, 조직원으로 선발된 경우에도 강도 높은 조직원 교육을 통하여 내부의 이념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혁명가로서의 이념적, 실천적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0년대의 내부교육과 1980년대의 내부교육이 다른 점은 혁명적 인식을 획득하기 위한 일반적인 교양이 내부 교육과정에서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대중의 이념적 급진화가 진전되고대중운동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조직내부 에서 수행되어야 할 혁명적 교양내용을 습득한 상태에서 조직원으로 가입하게 되므로 내부 교양에서는 정파적 입장에서의 정치사상 교육 등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조직원으로서의 교양내용은 '10대 보위수칙' 등 조직 및 조직원의 보위를 위한 훈련지침, 조직원 상호간의 접선방법(무인포스트를 이용한 접선방법 등), 내부의 비밀을 위한 은어사 용법 등이 들어있으며, 10대 보위수칙에는 기밀유지 방법, 미행차단방법, 기타 안전대책 등 이 포함되어 있다.

사노맹은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조직활동을 시작한 후 이를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평가(暗行點檢)하여 더욱 높은 활동을 위한 평가 및 지도자료로 활용하기도한다. 중견 핵 심간부인 현정덕이 구속되면서 드러난 자료에 의하면, 하부조직원 역량평가서를 작성하는데, 평가기준은 ① 조직적 안정성 ② 임무수행 능력 ③ 비밀활동 능력 ④ 이론 및 조직지도 능력 ⑤ 재정 능력과 임무수행의 조건정도 등이다. 이 각각의 평가기준을 다시 세분하여 그 각각에 대하여 9등급(상상, 상중, 상하,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으로 평가하고 하부조 직원에 대한 지도 및 비판의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결국 1980년대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의 경우 가입 및 승격과정의 체계화, 내부혁명교 육체계의 제도화, 일반 혁명교양을 전제로 한 특수한 혁명교양 제도의 확보 등으로 1960, 70년대에 비하여 더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동반한 인적 재생산메카니즘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사노맹의 활동을 '보급투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즉 사노맹이 자신의 물적 재생산을 위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그것이 얼마나 체계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적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사노맹을 살펴보게 되면, 산업화의 진전으로 이전시기에 비하여 객관적인 물적 자원동원력이 확대되고, 전위적 활동인자들과 대중들의 정치의식상의 괴리가 축소되기 때문에 내부적인 자금조달력이 대단히 확대된다. 그래서 사노맹의 경우 북한이나 일본의 자금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체의 회비, 특별기부금을 통하여 조직활동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물적 재생산 능력이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확대강화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사노맹은 계급투쟁의 3대영역을 조직, 사상, 재정으로 설정하여 재정확보 활동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재정사상이 아닌 사회주의적 재정사상에 기초하여 재정을 모집, 운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활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보급투쟁'(보투, BT라고 지칭)이라고 명명하고, 4차에 걸쳐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하게 된다. 초기의 조직 결성자금을 마련하기 위 한 활동은 '신혼비 작전'이라고 명명하는데, 이 작업은 1988년 9∼11월에 집중되었고, 부분적으로는 1989년 초까지 진행된다. 여기에서 1억 2,000여만원의 자금을 모집하여 아지트, 인쇄시설 등 조직적 사업의 물적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2차로 1990년 8월부터 11 월간에는 당국의 수사가 확대되면서 '도피 및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박노해 치료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약 5,000만 원 정도의 자금을 모금하게 되며, 3차로 1990년 12월 중순부터 조직개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확보작전을 '호랑이 사냥 작전'으로 명명하고, 자금확보에 나서게 된다. 4차로 사노맹은 1991년부터 1992년 초까지 '지각변동'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보급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약 5억 원 정도의 목표액). 이러한 자금확보 활동은 박노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상당부분 매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물적 재생산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노맹은 이러한 비정규적인 기부금을 통한 조직운영자금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서 수익사업을 통하여 조직 자체 내에서 체계적으로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사노맹 후원자 3개팀 12명으로부터 사업자금 3,000만 원을 확보한 후, 소위 '인삼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경기도 이천 및 발안의 인삼밭에 1,400만 원을 투자, 입도선매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알루미늄 피막처리기술을 이용한 신소재 개발사업에 착안, 재정후원자로 하여금 5,000만 원의 자본금을 출자케 하여 이윤을 분배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이 계획은 노출되어 중지된 것으로 판단된다-지속적인 수익 사업을 계획,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안정적인 조직운영자금 확 보를 위하여 학원, 광고기획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사노맹은 또한 조직적으로 월간지 등에 기고하여 사노맹의 대중적 선전과 동시에 조직자금 을 동원하려는 시도도 한 바 있다. 특히 박노해 시인의 명망성을 이용하여 『신동아』등 월간지에 기고하고 고료를 조직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규모가 늘어나고 전업적 활동가가 많아지면서 대규모의 자금이 소요됨으로 써, 그러한 조직운영자금의 조달 자체도 문제이지만, 조직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도 문제였다고 한다. 실제 일선기구에서의 재정난이 심각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었다 고 한다. 하부 활동가들의 경우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학원강사, 자영사업 경영,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활과 활동을 병행해가는 경우도 나타난다.
1980년대의 전형적인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이 그 객관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에 외부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극복하면서 자체의 여러 방법을 통하여 방대한 조직운영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그 조달방법도 일시적인 특별출연방 법을 넘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조달방법, 즉 수익사업 혹은 기금조성에 기초한 재정운영 방법의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80년대 전반적인 조건 의 변화가 사노맹이라는 특수조직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1988년 4월 사준위가 결성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조직총책이 검거되는 1992년 3월까지 4년여의 기간, 1989년 11월 사노맹의 출범이 공식화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2년 반의 기간동안 조직파괴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사노맹은 1990년 9월 연락국의 현정덕이 검거되면서 위기상황에 돌입하고 1991년 3월 조직의 중심인물인 박노해의 검거로 다시 조직적 위기가 가중된 후,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이 검거됨으로써 조직의 실질적 '붕괴'를 겪게 된다.
1960년대의 통혁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 1970년의 남민전과 비교하여 사노맹의 검거 과정은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째는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들의 경우 일정 한 검거의 단서로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가 본격화된 이후 단기간 내에 조직지도부로 파급되고,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이 일괄 붕괴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의 하부에서 조직침탈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그것이 곧바로 조직지도부의 검거로 이어지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조직보위 및'반격투쟁'이 이루어지다가 후에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의 '붕괴'가 나타나게 되며, 또한 조직지도부의 검거가 이루어지더라도 조직의 전모가 완벽한 의미에서의 조직붕괴-실질적인 '붕괴'이며 설혹 조직이 잔존한다고 하더라도 재건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직파괴가 심대한 것이지만-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노맹의 검거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검거과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1990년 9월 현정덕을 비롯한 연락국 조직원들의 검거와 10 월 중앙위원인 남진현의 검거를 계기로 한 조직파괴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1991년 2∼3월 김진주, 박노해의 검거를 수 있다. 셋째는 1992년 4월 사노맹 총책 백태웅의 검거단계이다.
첫째 단계를 사노맹에서는 '제1차 보위사고' 및 '제2차 보위사고'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유인물의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현정덕(수사발표에 따르면 연락국 책임자이다)과 관련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관련자들이 검거된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그 의 수사과정에서 노출된 단서를 계기로 중앙위원인 남진현이 검거되어 사노맹의 중요 보고서 및 조직 내부자료들이 압수된다. 이를 계기로 역시 전국에서 많은 조직원 및 지지자들이 검거된다. 수사당국에 의한 검거가 본격화될 것에 대비하여, 사노맹은 1990년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60일간을 '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1990년 8월 15일부터 9월 10일까지를 '초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설정하고, 조직보위를 위한 내부적 방안들을 강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직원이 검거된 후 사노맹은 이른바 '반격투쟁'을 전개한다.
둘째 단계는 박노해 검거과정에서 중앙위의 문건을 포함하여 조직 내부의 중요 문건이 압수되어, 그 당시까지의 조직의 실상이 상당부분 드러나게 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박 노해 검거로 압수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그 이후 조직원의 검거가 확대된다.
셋째 단계는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을 비롯하여 중앙위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단계이다. 수사당국은 이전에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하여 사노맹의 주요 아지트를 파악하였고 그곳을 감시하여 1992년 4월 29일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핵심간부를 포함하여 관련자 40명을 일괄 검거함으로써, 조직은 실질적 '붕괴'를 보게 된다.
사노맹은 사실 1980년대 이전의 비합법 혁명전위조직과의 연계없이 1980년대에 성장한 혁명적 인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결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1970년까지의 비합법 조직이 갖는 조직적 취약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었다. 조직의 장기적 보위를 가능하게 했던 사노맹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먼저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의 최상층부와 하부조직원이 무매개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으로써 조직상층부의 검거가 곧바로 최하부조직원까지의 일괄 검거로 나타나게 되는데, 사노맹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원간의 연계가 비록 무인포스트나 암호를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인적 연계를 불가불 동반하여 조직원 상호간의 노출이 일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 하부와 상부, 조직부서간의 연계가 인적 연계방식이 아니라 통신망을 통한 문서전달체계로 이루어짐으로써 한 부서의 조직침탈이 다른 부서의 조직침탈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조직원과 비조직원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조직적 노출의 가능성을 극소화하였고, 조직원의 노출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는 것이다. 1960, 70년대 비합법 조직의 경우- 사회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이 기도 하나- 조직적 활동이 비조직원에게 노출되어 그것이 검거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비조직원과의 모호한 연계가 검거의 단서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이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검거된 조직원이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여 조직전모의 노출을 차단하고자 했고, 조직을 보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제1차 보위사고에서 검거된 현정덕은 "숟가락으로 목을 찌르고, 안경을 쓴 채 머리를 책상에 받고, 혀를 깨무는 등 6회에 걸쳐 자해를 기도하고, 4일간 단식, 묵비권 행사 등 극렬한 심문투쟁을 전개" 하였고, 박노해 역시 자해를 감수하는 자세로 조직보위를 시도하였다는 것은 사노맹 조직원들의 특징적 모습-이러한 자해의 모습자체에 대해서는 대중적 평가가 다양할 수 있겠으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협조자가 발생하여 그로 인하여 조직의 전모가 용이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이전 시기에는 많았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원의 '변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바,이 역시 사노맹의 특징적 모습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검거과정을 통해 볼 때, 사노맹의 조직적 취약성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수사당국의 입체적인 수사 및 미행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백태웅 스스로도 지적하고 있는 바인데, 조직보위에 대한 '원론적'인 강조와 생활화에도 불구하고 수사당국의 수사방식의 고도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둘째, 검거위험이 만성화하여 각 관련기관의 보위가 불철저하고 이완되어 있었다는 점 을 지적할 수 있겠다. 후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사노맹의 중앙부속기관인 조직 국과 수도권위에 대한 집중적인 감시와 미행을 상당기간 동안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수사의 고도화에도 기인하는 것이나-이를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수의 아지트간의 상호 연계에도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은 1992년 4월의 검거 때 중요 아지트의 일괄급습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셋째, 조직부서간의 연계를 통신망을 통한 문서보고체계로 하는 보위에 대한 적극적인 측면을 위에서 특징으로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갖는 역기능적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문서보고체계상 조직 내의 논의 및 상ㆍ하부의 교통이 모든 문서화된 형태로 보존되게 된다. 이것은 일단 자료가 수사당국에 입수되는 경우 조직의 전모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사노맹은 문서 자체에 암호를 사용하거나, 컴퓨터 자료의 경우 일정한 '방어(protect)'메카니 즘을 만들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소화하려고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역기능적 측면을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사노맹의 조직구조와 조직활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필자 는 이 글에서 먼저 사노맹이 그 일부를 이루는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에 사노맹의 조직적 형성과정, 그것의 인적 구성 및 지역적 기반, 사노맹 조직구조의 실상 및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사노맹의 조직적 활동내용과 조직검거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사노맹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인적, 조직적 발전과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사노맹이 인적으로 확대를 경험하고 조직적으로 분화발전되어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이 곧 사노맹의 대중적 기반이 광범하다든가,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사노맹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심대하다는 것을 곧바로 말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사노맹의 인적인 발전에도 불고하고 여전히 '혁명적 인텔리' 조직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대중적 기반의 정도가 협애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비록 사노맹의 조직적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절대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노맹이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변혁적 사회운동은 빠른 속도로 발전되어왔으나, 그 이면에서 지배권력의 안정화도 더욱 빠른 속도로 진전되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노맹의 '혁명적 위상'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1989년부터 19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노맹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주로 그 노선 혹은 이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노맹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입장 및 혁명적 노동자계급적 관점에서 여타의 많은 노선에 대한 비타협적인 사상투쟁을 전개하였고 그것이 오히려 사회운동진영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노맹의 이념적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사노맹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실상이 어떠한지, 하나의 조직으로서 사노맹이 갖는 특징은 어떠한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에 주안점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념 및 노선에 대 한 분석은 배제하였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이것은 사노맹이라는 조직에 대한 '혁명운동사적 평가'를 필자가 유보하였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사노맹에 대한 분석논문을 쓰기에는 사노맹이 너무 '동시대적인' 사건이고, 더구나 조직성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자료가 아직 충분히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글은 극히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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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사회주의정치연합)

1. 글쓰기에 대하여

1-1. 장기계획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글은 1980년대 말부터 기금까지 공개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참여한 관찰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느낀 단상을 거칠게 정리하고 문제 제시하는데 그친다. 나로서는 구체적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 있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역사적 글쓰기의 새로운 보기를 보이고 싶은 모험심도 있다.
(참고 글 : 1. 한국노동당의 ‘신전략’비판 2.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정치조직을 중심으로 3. 사회주의 역사에서 배우자)

1-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 연합 추진 위원회”, “민중당 창준위”, 민중당,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노동자정치연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노동자의힘, 사회주의정치연합(준)에 이르는 15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1-3. 주체적 경험과 느낌 등의 단상으로 표현하면서도 몇 가지 평가 틀을 지닌다. 첫째,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유지했는가의 문제 둘째,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실현했는가의 문제 셋째, 의회와 선거에 대한 원칙을 견지했는가의 문제 등으로 구분하고 분석한다.

2.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투쟁으로서의 합법 정치전술 평가

2-1. 7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초반에 걸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정파의 1세대에 해당된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이전한 엘리트 사상집단이며 이들의 사상 이론적 기반은 대체로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론적 학습의 깊이와 폭은 레닌과 스탈린 저작, 소련에서 간행된 교재, 일본에서 간행된 저술들이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2단계혁명론이 군부파시즘의 암혹한 정세와 맞물리면서 혁명적 정세의 임박함에 긴박되고 고무되고 있기도 했다.

2-2. 이들 세력의 조직노선은 당연히 비합법 전위당 노선이었고 파시즘의 탄압 속에서 더욱 그 노선이 정당화 되었다. 흔히 PD, ND, IL로 표현되는 세 개의 큰 정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의 노선과 정세인식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참고자료 2참조)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주체사상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전선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보수야당 추종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87년 대선 당시 독자 후보론의 입장에서 함께 했으며 (물론 CA가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거연합은 92년까지도 이어진다.

2-3. 87년 이후 선거전술을 넘어선 조직노선으로의 합법정당 건설론은 복합적 요인이 교직되어 나타났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고 집약된 사회주의 진영의 합법공간으로의 진출의 필요성이라는 공감대의 형성 둘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사상적 동요와 혼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확산, 혁명의 포기로 인한 합법.개량주의의 합리화, 셋째. 9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정치주의자들의 욕구와 계산 그리고 이에 편승한 패거리 정치, 넷째,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조직의 성장과 발전 등이다.

2-4. 민중당의 창당은 바로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비합법 정파가 개입 또는 적극적 결합을 했고 반군부독재 투쟁세력이 상층(일부 혁신계와 지식인 포함)은 주로 인민노련이, 사무국과 학생위원회는 CA를 포함한 PD정파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는 인민노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전략으로 포기하고 민중당을 전략당으로(혹은 그롤 준비하기 위한 단계로)인식한 세력이 주도한 당의 생명은 짧았다. (참고자료 1참조) 한국노동당 창당과 탄원서 사건(PT독재와 폭력혁명노선 폐기)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전술당으로 개입한 세력은 철수하거나 탈당하고 그 일부가 민중회의라는 정치조직을 건설한다.

2-5. 민중당 내에서의 사상투쟁은 주로 강령 건설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강령위원회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강령작성으로 이어지는데 민중당의 경우는 교수위원회(당에 교수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진보적 지식인의 집단적 결합이 지니는 의미 때문에 두게 되었다)가 강령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령작성을 했다. 교수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수들(대부분 사민주의자들)은 정책위원회의 자문을 하고 있었다. 민중당 강령은 최대 강령은 아니었지만 이행기 강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민중민주주의 강령의 틀을 원칙적으로 담아냈다. 강령이 확정되기까지 교수위원회와 정책위원회의 대립이 있었고 학생위원회는 원칙적으로 교수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참고자료,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서” 참조) 민중민주주의를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로 수정하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민중당 상집에서 있었고 실제로 민중당 강령은 사문화 되었다.

2-6.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의 합당, 통합민중당, 그리고 소멸은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과하면서 양분화 되고 사회민주주의를 전략당으로 표현하려는 세력과 합법정치전술로서 지속적으로 구사하려는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념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합법.개량주의 반대 투쟁 전선으로 구획되었다.

2-7. 그 이후 제파와 사노맹 모두 조직사건으로 탄압받다 해체되었다. 민중회의 시절 사노맹과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사노맹은 합법정치부대로 사회당(추)을 만들었고 1992년 대선 이후 민중회의와 통합하여 민중정치연합을 만든다. 제파는 전국노련으로 편입되거나 한노정련으로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대중조직의 활동가로 분산된다. 이 시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 중심은 사상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보듯이 수정주의와의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다. 노동계급에 부르죠아 사상이 침투한 것이 수정주의, 특히 사민주의이며 우리 사회의 대중운동의 투쟁과 역행하는 청산주의적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투쟁하는 것, 즉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복원시키고 세워내는 것이었다. 반합법정치조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조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상을 보위하고 선전-선동하려는 과정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대신 “근본변혁”이라는 용어가 대체되었고 당 건설 투쟁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어졌다.

2-8. 92년 대선은 위와 같은 정세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사회주의는 망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계급대중의 패배주의나 일반대중의 우경화의 이데올로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전 선동할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고 그것을 당면한 대중투쟁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계기로서 대통령선거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강령을 구체화된 선거강령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것이었고 92년 백선본 강령은 90년 민중당 강령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직사건의 검찰 기소문을 보면 92년 선거강령을 주로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는 선거투쟁의 공동투쟁을 기반으로 흩어져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연대.통합하는 성과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진정추(인민노련)는 통합에 응하지 않고 민중회의와 사회당(추)가 통합하여 1993년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한다. 전국노련(제파)의 경우 대중운동으로의 산개와 이론연구운동의로의 우회로뿐만 아니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사회주의정치운동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다.

2-9. 사노맹이 해체되고 약화되면서 민정련은 당 건설 경로를 둘러싼 노선대립(민중연대안과 정치연합안)으로 분화되고 진정추와 사회당계열이 통합되는 진보정치연합으로, 민중회의 계열이 노동정치연대로, 그리고 계급해방그룹이 노진추(노진추는 단지 인민노련의 탄원서 사건만을 문제 삼았다)로 분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당 계열이 기존의 사노맹 노선과 달리 전략수정을 하고 전략으로서의 합법당으로 선회한 것이고 노진추 역시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세력은 민주노동당내에서 사민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회의의 일부였던 청년그룹은 청년조직을 만들고 그 후 청년진보당 그리고 사회당을 만든다.

2-10. 각 정치세력은 각개 약진하면서 세력보존과 확장을 한다. 96-97 총파업의 공동투쟁전선이 복구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연대 틀을 형성하고 또 한번 정치연합을 모색한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가 그것이다. 정치연대는 테제 형식을 빌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을 정리하였지만 임박한 대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합법개량주의, 사민주의 세력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국민승리21을 결성하였고 일부 민족주의세력 역시 합법정당전술에 입각하여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하고 있고 노동자 민중진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정치연대 운영위원회는 다수가 대선 불참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본 출범하기 몇 일전 정치연대 대표였던 나는 선거 참여조건을 직접 작성하여 권영길 대표와 담판을 하게 된다. (중도 후보 사퇴 불가, 대중투쟁과 함께하는 선거투쟁, 계급적 관점의 견지 등) 공개된 합의문을 놓고 정치연대는 선거참여를 결정하게 되고 일부가 정치연대를 탈퇴하고 청년진보당을 창당하게 된다.

2-11. 합의문의 이행여부를 놓고 (선거강령 내부 투쟁, 종이정당 사건,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 등) 선대본 내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는 선대본 공동대표를 사임하게 되고 강령위원회에서 철수, 서울 선대본을 중심으로 한 내부투쟁(일어나라 코리아 포스터 철거 등)을 한다. 정치연대의 사후 평가에서 선거참여 결정이 문제가 있었음을 결론짓게 된다. 96-97 노동계급의 정차파업의 성과를 그대로 개량주의 세력에게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대선 이후 사회주의세력의 조직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판단 등이 참여 결정의 근거가 되었지만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었다.

2-12. 정치연대의 후신인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새정조)에서의 논쟁은 이념 논쟁이 아니라 조직노선을 둘러싼 쟁점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정에 좌파블럭으로 개입하자는 견해(노동조합, 현장 그리고 노진추 등)과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의 독자적 정치조직화를 주장하는 견해가 대립되었고 노진추 그룹이 탈퇴하고 좌파블럭론이 안을 철회함으로서 노동자의힘(준)이 결성되었다. 새로운 정치조직의 이념과 상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 논쟁은 이때부터 본격화 될 수밖에 없다. 쌩디칼리즘이나 무정부주의,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혼합된 정치운동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정당 건설을 말하기보다 이념논쟁을 선행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희화화되어 버렸고 혁명적 맑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동담론으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단결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정치신문의 형태로 세력을 표현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은 이념적 소통, 혁명적 정치조직과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위한 연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 (참고 : [전진]기본노선, 사민주의의 좌익적 언사)

3.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중투쟁과 선거 투쟁 평가

3-1. 10년 주기의 공황으로 볼 때 1987년, 1997년, 2007년 전후의 주기를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호황에는 대중투쟁의 소강상태로 불황에는 대중투쟁의 고양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87년 7, 8, 9노동자 투쟁, 96-97정치총파업은 우리 노동운동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룩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3-2.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관철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확장되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시작되어 김영삼 정권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자본과 자본가 권력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 전술이 한국사회에서는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 파시즘 아래에서 억압, 착취당했던 노동계급이 어용의 굴레를 벗고 생산의 주체로 올라오는 대중투쟁의 시기,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의 시기 10년, 정치총파업을 통하여(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정치의 주채로 나서는 8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아마도 2007년쯤에는 역사의 주체, 혁명의 주체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3-3. 그러나 이러한 성장, 발전기도 불구하고 개량주의화 관료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경향도 함께 보이고 있다. 1991년 전노협이 내세웠던 깃발인 평등세상건설과 노동해방은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퇴색하고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에 묻혀버렸고 총연맹과 연맹, 그리고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의 만연은 조직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혁명성, 계급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노동자정치운동의 개량주의와 맞물리면서 노사협조주의와 교섭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3-4. 사회주의정치세력이 지금까지 대중투쟁의 정치적 지도부의 역할을 할 만큼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부분적 개입과 상층 및 현장에서의 부분적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선거와 맞물리는 상황에서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결국 선거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범하였다.

3-5. 합법정치전술로 민중당을 규정한 세력과 전략당으로 규정한 인민노련의 경우를 보기로 들어보자.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이 고양될 때 보수야당(김대중과 김영삼)은 지자체 선거가 있자 투쟁본부에서 이탈하였고 민중당 역시 선거 참여를 결정하면서 대중투쟁을 방기하였다. 나는 유일하게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였고 결국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92년 5월 총선에서 보여준 민중당 후보의 모습은 보수야당의 선거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6. 96-97 노동법, 안기부법저지범대위가 광범위하게 구성되기 전까지 민중운동탄압범대위가 존재했을 뿐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단결하여 대중투쟁에 결합하여 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주체인 노조와 그 상급단체인 총연맹인 민주노총의 주도권 하에서 대우자동차투쟁, 삼호중공업투쟁 등 몇몇 사회주의 세력의 적극적 개입의 성과를 보여준 투쟁이 있었으나 역시 부분적 성과에 지나지 않았다.

3-7.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적 지도력의 결여는 혁명사상 이념의 불철저성(사민주의 세력 등)에도 기인하지만 정파이기주의와 가족주의로 인한 사회주의연대의 분절성도 큰 원인중의 하나이다. 대중조직이 정치운동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대중조직을 장악하려는 선거주의(조합권력이 되었건, 현장권력이 되었건, 중앙권력이 되었건 간에)가 판을 치고 (지금까지의 총연맹 위원장 선거에서의 연합전술, 특히 이번 금속 선거에서의 3차 연합전술) 총파업 투쟁에서의 비공식적 개입과 결과에 대한 무책임 등은 그를 주도한 특정 정치조직의 책임이며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신뢰를 깨뜨리는 작풍이었다.

3-8. 최근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의 결성은 여전히 참여세력에 대한 불신, 공동투쟁체에 대한 상과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 주도권 다툼 등의 갈등적 요인이 있기는 하나 모처럼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일상적 대중투쟁을 촉진시키고 책임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사상.실천적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세력 사이의 노선투쟁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오류에 대한 반성을 근거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상설적인 공투체를 지역 중심으로 건설하고 투쟁하는 업종(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현장투쟁위원회를 만들어간다면 산별과 연맹에만 목을 매는 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8. 선거와 의회를 통한 집권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세력(민주노동당 등)을 제외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합법정치전술로서의 합법당의 필요성(혁명정당건설 이전에)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부르주아선거에도 사회주의자 연대를 통하여 전술을 공동 결정해야 한다. 92년 사회주의 사상투쟁의 교두보 구축의 방어적 투쟁은 사회주의 세력의 불안정한 통합,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확대로 유실되면서 97년 양날개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민주노총을 등에 업는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연합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고립화된다. 97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전망을 가지지 못한 채 몇 가지 선거투쟁을 조건으로 권영길 선본에의 결합은 96-97 정치파업의 성과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진영의 오류였다.

3-10. IMF관리체계를 경과하면서 주기적 공황에 접어들고 신자유주의 압살에 변혁적 노동운동이 압살당하고 개량주의와 관료주의가 만연되면서 맞게 된 2002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99년 이후 최대의 정파로 성장한 노동자의힘은 계급정당건설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강령과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전술적 개입으로 판단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고 있으며 운동내부의 선거정치에서 중앙파와 국민파와 끊임없이 연합하려는 기회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반위에서 2002년 대선 공투본 전술과 경선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 전술은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당 건설이라는 전략이 전제되지 않은 전술이라는 점 둘째, 사회주의 진영의 광범위한 논의와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사민주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공동선거 투쟁에 대한 환상과 그에 기반한 지분을 구축하려는 대중추수적 노선이 착종되어 있었다는 점 넷째, 그 지분을 기반으로 2004년 총선에 연합하려는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 사회당의 경우 87년부터의 민중후보전술에 집착함으로서 당 건설 보다는 합법적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의 편향, 사회주의의 상업적 대중화, 노동계급운동의 부문운동화 등이 작용하여 노동자의힘과 합의가 무산되자 사회주의정치연합(준)과의 합의를 깨뜨리고 독자 대응함으로서 역시 실패하였고 왜소화 되었다.

3-11. 돌이켜보면 가장 강조해야할 사상투쟁과 선전 선동을 소홀히 하고 그 혁명 사상을 담지 할 조직건설(당)에 대한 확고한 전망과 실천을 게을리 한 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가족주의와 종파주의에 매몰되어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의 선거주의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하는 근본적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계획과 사업이 부르조아 선거일정에 맞추어 역산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보기이다. 글과 말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를 구사해도 몸으로의 실천은 중도주의적 활동에 그치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공개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12.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복원을 위한 연대와 소통이 노선투쟁과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혁명적 대중투쟁이 끊임없이 고양되도록 하는 혁명적 대중조직과 현장조직의 건설, 그리고 일상적 투쟁을 담지 할 투쟁체 건설이 선행되면서 혁명정당 건설의 상과 성격 및 경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투쟁전술, 선거전술을 세우는 것이 순서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정치운동 15년의 결산이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힘차게 연대단결하는 운동이 펼쳐지지 않는 한 어느 한 세력과 정파의 행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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