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87’은 지고 ‘97’은 뜬다. 여기서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1987년의 6월 항쟁,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말한다. 87의 정서는 오로지 정상이나 중심을 향한 외길이었지만 97의 정서는 비록 오솔길일지언정 자기만이 만족하면 되는 길이다. 그것은 삶의 방향성이 아니라 삶의 무늬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무늬는 매우 섬세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다. 영화시장에서는 <쉬리> 등장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동막골> 등 분단과 전쟁 그리고 민족주의를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하며 전국민을 역사적 ‘경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2005년 연말에 개봉한 <태풍>은 초특급 블록버스터 영화였음에도 관객 420만 명에서 막을 내리고 저예산 영화 <왕의 남자>가 전인미답의 12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왕의 남자>는 한마디로 세대마다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초점 영화다. 작년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로맨스 판타지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19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궁>이 인기다. 하지만 두 유형 어디에서도 진지한 ‘구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벼운 ‘수다’만이 넘친다.

출판시장에서도 ‘개혁적 열망’을 담은 책이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모모>(미하엘 엔데 지음)가 드라마에 몇 번 소개된 뒤 85만 부나 팔렸던 것처럼 영상과 결합한 책은 언제나 상종가를 친다. 20권이나 되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가 100만 질의 신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서바이벌 만화 과학상식>(코믹컴 외 지음), <마법 천자문>(시리얼 지음), <코믹 메이플 스토리>(송도수) 같은 스토리 만화 시리즈들도 모두 400만 부를 넘겼다. 홈쇼핑에서는 150만원이 넘는 그림책 시리즈가 1시간 방영으로 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 분야는 아무리 평단에서 주목받는 작품이라도 3천부 초판을 넘기기 어렵고 1만부 넘는 작가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인문서 또한 1천 부를 넘기기 어렵다.

외환위기 직후만 해도 우리 사회의 담론은 ‘변화’였다. 변하기만 하면 나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월급으로 먹고 사는 사람보다 자본운용으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양극화하면서 그런 믿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포기하고 경쟁사회의 어지러움증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핑>(스튜어트 에이버리 지음), <배려>(한상복 지음) 등 지금 베스트셀러에 상위권에 올라있는 우화형식을 차용한 자기계발서가 대중에게 자기만의 길을 가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다룬 책이나 특이한 이력의 삶을 가진 사람들의 감동적인 자전적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87’과 ‘97’의 세대교체는 물론 물리적 나이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소비자는 동일하지만 앞의 경험은 급격하게 잊혀지고 뒤의 경험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지금 문화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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