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앞부분 생략) 이건 단순히 영화가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없는 영화는 세상을 해치지 않는다. 물론 그 영화를 보려고 2시간 정도를 낭비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일 수도 있지만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낭비하는 더 나쁜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반복되는 소재나 이야기가 현실과는 격리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이 아무리 충실하게 현실을 반영해도 그 영화 속의 현실은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넘어서고 만다.
이건 꼭 퀴어 영화만의 경우도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윤기의 <여자, 정혜>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어린 시절 겪었던 성폭력의 경험이라는 진상이 지나치게 고루한 클리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현실세계에서도 클리셰인가?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폭력은 겪는 사람들에겐 똑같이 아프다. 하지만 스크린이나 활자로 수백번 반복되며 관습이 되어버린 이야기 재료들은 지겨워진 관객들과 독자들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한다. 결국 모두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버리고 끝나 버리는데, 그러는 과정 중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폭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영화들을 처음부터 보지도 않고, 본다고 해도 그런 주제들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 그냥 그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버리고 만다. 아마 따지고 보면 메시지 영화들도 일종의 도피처일 것이다. 세상에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가 실제로 겪는 것 이상으로 많다는 환상을 주는 도피처.
(듀나 '퀴어 영화라도 뻔해지면 유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