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X-MAS 굿즈 주간

 

월초에 모비 딕 스톰 글라스가 갖고 싶어 책을 사려 했으나 금세 동나 뭐야! 뭐야! 안 사! 하고 삐져버렸다.

 

 

 

하나둘 갖고 싶던 굿즈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면서 다음 굿즈 타자 등장까지 길었던가 짧았던가. 언제나처럼 알라딘이 그럼 이건 어때요? 를 시전. 그래, 뭔지나 보자 하고 15일 웹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아니, 이거슨😳🌟

그리하여....

엄청난 크기의 박스와 함께 줄줄이 박스는 민음북클럽 패밀리데이 때도 아닌데 실로 오랜만이었다.

얏호,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

 

 

 

 

현재 알라딘 구매 혜택에서 가장 탐나는 굿즈를 받을 수 있는 분야는 에세이다. 그렇다고 아무 에세이나 살 순 없죠. 올초 한 에세이 때문에 악플러라는 욕을 들으며 얼마나 고초를 겪었던지(_ _)... 지금도 트라우마. 그 책은 중고로 나온 책이 넘쳐나서 알라딘 중고서점도 매입 불가😑 열심히 사라고 할 땐 언제고...

 

 

 

에세이 두 권 사면 받을 수 있는 무릎 담요.

6가지 선택 품목이 있는데, 노견일기 4 이미지가 예뻐서 이걸로 골랐다. 피너츠 에어팟 케이스 & 키링도 받을 수 있다.

 

 

 

선물하고 내 건 언제 살까 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일기 : 전성기 편』. 이 책을 사면 '안네의 일기' 북커버나 베이직 에코백 둘 중 하날 받을 수 있는데, 나는 에코백을 골랐다. 알라딘 에코백 초창기 모델로 알라딘 에코백 중 가장 크지 싶다. 아주 컸던 책모양 에코백보다 큰 것 같았는데, 역시 컸다.

 

김영하 작가가 강력 추천했다고 덥석 산 건 아니고

모드 쥘리앵 『완벽한 아이』는 소설보다 더 강력한 이야기 같아 구매. 요즘은 정말이지 픽션이 논픽션의 다양한 서사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나 싶음. 이 책에 굿즈가 상당히 많은데, 본투리드 책 읽는 고양이 배지와 모비딕 휴대폰 거치대도 겟~

 

 

 

 

 

이번 구매에서 또 나의 강렬 관심 굿즈는!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무릎 담요!

무릎 담요가 너무너무 많아 미칠 것 같아도 머리에 얹고 있더라도 이건 사야 돼😭😭😭😭😭

 

 

 

소파 커버로 덮으니 더 멋짐!

이 무릎 담요 받으려고 고르고 고른 책이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미술책 많이 사고 읽었지만, 북유럽권은 유명 화가만 알고 있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삼. 심란한 연말을 북유럽의 담담한 그림들로 다소나마 편안히 보내고 싶었다.

 

 

 

 

마종기 선생님 시집 만나는 거 아주 오랜만인데, 『천사의 탄식』은 크리스마스 머그가 너무너무 갖고 싶어서😂😂😂 책을 읽고 싶습니까? 굿즈를 사세요. 그럼 책이 옵니다🤭🤭

현재 이 머그는 품절... '더 많은 책쟁이들을 잡을 수 있었는데!' 하는 굿즈 악마의 탄식이 들려 오는 듯.

문학과 지성사 마스크 스트랩도 하나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신상 굿즈 몇 가지...

어린 왕자 스탠드 펜꽂이가 저렴하길래(3,500원) 하나 사봤다. 일반적인 책 높이인데 좀 작은가 싶다가도 자리 많이 안 차지해서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함. 다른 색상으로 더 사든가.

알라딘에 친환경 브랜드 '동구밭'이 입점해서 천연 비누 한 개 사봤다. 향부터 커피를 이길 기세!

 

 

 

 

 

 

 

 

이젠!

이 달 내 책 구매의 최고 스타, 어린 왕자 메리고라운드 캔들홀더 램프 나오세요~~~~~~ 이름도 화려하다, 화려해🤣🤣🤣😆

 

 

 

led 램프가 내장되어 있어 바로 켜 볼 수 있었다.

오오😍🥰🤩

밤새 돌리고 있음ㅋㅡ);; 자동 회전을 위해 풍력을 담당할 미니 캔들 사야겠음.

조립은 간단한데, 요령 없이 끼우다가 스크래치 만들까 봐 당부드리면, 프로펠러를 세워서 캐릭터 고리를 끼우면 쉽게 들어가요. 아래 사진처럼.

 

또 네 권이 오고 있는 중인데... 한 번 사기 시작하면 넘 피곤타😞😖😣😢

새 책과 굿즈를 보며 기뻐하는 것도 잠시. 읽는 게 문제... 이번 구매는 복잡한 내용들이 아니니 좀 나을까. 휘유우.

 

 

 

 

 

♡ 우리는 사랑할 때 빛나는 존재 - 루카 구아다니노 《We Are Who We Are》

 

 

 

올해의 ost.

음악이 흐를 때마다 녹아내릴 듯 좋았다.

《TENET》이 스펙터클해서 그렇지 영상미도 《We Are Who We Are》가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8화나 되니 양적으로는 《We Are Who We Are》가 더 많았지.

사춘기의 정체성 혼란, 감정의 격동을 정말 잘 표현했다. 쉽게 싫어지고 좋아지고 상처받으며, 세상이 엿 같은 기분.

성장했다고 우리가 어른일까. 아니, 그저 어른인 척할 뿐.

록스타가 되고 싶었으나 군인이 되고,

대의와 애국주의를 내세우며 사람들을 전쟁에 내몰고,

명예와 책임의식이 있는 듯 굴지만 군 물자를 빼돌려 팔며 의붓자식을 홀대하는 이중적인 인간이 되고,

부부 서약을 했지만 바람을 피우는,

어른이란 족속은 일정 부분 다 속물이다. 그래서 또 우리는 인간이다. 자신과 타인의 욕망과 허점과 잘못을 마주하면서 매일 모든 것과 씨름해야 하는.

타인은 서로를 비추는 빛이자 거울이 되어주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한다.

프레이저와 케이티가 지금은 솔메이트로 서로를 지탱해 주지만 영원할 수 없을 거라고 예단하며 씁쓸해 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 내일 죽을 수 있으니까. 어떤 끝은 영원이 된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서 사랑을 부정할 때가 있다. 정작 사랑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저 마음이 향하고 흐르는 걸 느낄 뿐.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감정의 타성에 빠져들 때야말로 애정이 끝나는 지점이다. 계산하고 평가와 비교에 빠져들 때 우리는 사랑도 청춘도 잃는다.

프레이저가 남자를 사랑하든 말든, 케이티가 남자가 되고 싶어 하든 말든 둘에겐 문제 되지 않는다. '너는 이래야 돼!'가 없는 관계 속에서 서로가 곁에 있는 것에 안심하고 지지하며 돕는다. 이런 전적인 호의 속에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안 적이 없으므로. 유연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젠더성은 고착되고 썩기 마련이며 그래서 세상이 이 꼴이다. 이 드라마의 설정 '미군 주둔 기지'는 사랑이 가장 희박한 공간이자 극도의 억압을 보여준다. 모든 기지의 마켓 물건이 똑같이 배치되어 있듯, 누구든 명령에 따라 이동해야 하듯, 이 시스템에서는 무엇도 자유롭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각자의 개성을 군복 속에 밀어 넣는 즉시 상하 관계가 되고, 나와 너(민간인과 군인)를 가르고, 우리와 타인(자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면서 명령과 통제와 억압으로 모든 사람들을 거미줄처럼 옭아맨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된 가장 어린 장병부터 희생된다. 비난은 너무 쉽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는 노력에 우리는 더 열심일 수는 없는가. 법과 무력이 아니라.

음악이 계속 흐르면 좋겠다.

둘이 blood orange 「Time will Tell」 립싱크하며 춤출 때 얼마나 귀여웠는지ㅎㅎ

🎶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 거야 이걸 헤쳐나갈 수 있을지

🎶 어차피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 너무 부담 갖지 마

🎶 계속 마음에 담아둔 일이라 할지라도

🎶 다 그런 거지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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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0-12-1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무슨 책인지 궁금하네요. 얼마나 책이 별로면 중고가 넘쳐나다니요.

AgalmA 2020-12-18 22:15   좋아요 1 | URL
음..그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나 2020-12-18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대가 누군지 몰라서 사랑을 부정할 때가 있다. 정작 사랑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넘 좋네요. 아갈마님 굿즈 귀여워하시는 거 지켜보면 넘 귀여워요 (죄송) ㅋㅋㅋㅋㅋ 어린 왕자도 디테일 좋네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 보면 기분 좋을 거 같아요. 저는 12월이라 다이어리를 몇권 쟁였는데 흐뭇하네요. 덕분에 신간 잔뜩 사서 숨막히게 읽고 있어여... ㅋㅋㅋㅋㅋ 아, 그리구 책에 대한 의견 말할 때 넘 조심스러워지는 지점 있는데, 모두의 의견에 좀 관대한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 저 완벽한 아이 살까말까 망설이던 중인데 아갈마님도 추천하시니 저도 장바구니에 추가합니당~

AgalmA 2020-12-18 22:17   좋아요 3 | URL
숨막히게 사서 숨막히게 안 읽고 있는 저는 반성합니다ㅜㅜ...
작년 다이어리 엄청 많았는데 제대로 쓴 건 고작 하나라 이젠 다이어리 욕심 안 부리려고요-,,-);;;;;;
노트도 엄청 정리해버렸어요. 연말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바쁜 중에 알라딘굿즈와의 대결이 정말 힘겹네요ㅋㅠ);;

scott 2020-12-18 23:11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알마님 다이어리 노트처럼 쳐박템 됐으어요 ㅋㅋ
에세이에 좋은 굿즈 준다는 정보 처음 알았네요. ^ㅎ^

AgalmA 2020-12-19 18:08   좋아요 1 | URL
하나 님이 <완벽한 아이> 궁금해 하시길래 급히 읽기 시작!
하나 님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신 거 봤는데요. 제가 그 책 살까 모드 쥘리앵 <완벽한 아이>를 살까 고민하다 쥘리앵 쪽을 택한 건 모드라는 아이의 절박함이 제 마음을 더 끌었기 때문이었어요.
하나 님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게 된 게 ‘잘 기능하는 어른의 글 읽을 기분이 아니야‘였다고 말하셨듯이 지금의 저도 딱 그렇거든요.
김영하 작가가 <완벽한 아이> 책 서문에서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듯이 모드가 그 감옥을 이겨내며 탈출하는 과정을 같이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은 하나 님은 <완벽한 아이>도 무척 공감하며 읽으시리라 싶어요. 초반엔 동물들과 어린 모드의 처지와 행동이 슬프면서 감동스러운데요. <플란다스의 개>의 더 슬픈 버전 같다는ㅠㅠ. 자라면서 도스토옙스키 같은 문학 읽을 땐 또 어떤 걸 보여주려나 넘 기대하며 읽고 있어요!
소설보다 더 재밌다고 말하면 이 불행을 겪은 저자에게 무척 실례겠지만 이 책 만나서 좋아요!

하나 2020-12-19 09:25   좋아요 2 | URL
앗 제가 궁금해해서 급히 읽기 시작하셨다니 감동적이네요 ㅠㅠ 저도 그 두 책을 놓고 고민하다가 어린이라는 세계를 집었는데, 아갈마님께서 더 강인한 선택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치만 모.. 저는 제가 완벽한 아이도 읽을 것을 압니다... 아갈마님께서 이 책 만나서 좋다고 하시니... ㅠㅠ ㅋㅋㅋㅋㅋㅋ 푹 주무시고, 아갈마님께서 제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주시는 댓글 남겨주셔서 일어나자마자 좋았어요 ^^ 오늘 하루도 평안하세요!

scott 2020-12-19 15:43   좋아요 2 | URL
안돼요 ㅜ.ㅜ
플란다스개 보다 더슬픈 버전이라니

파트라슈 ㅠ.ㅠ

AgalmA 2020-12-19 21:51   좋아요 1 | URL
하나 님이 평안을 기원해주신 보람도 없이 어제는 알라딘 때문에 웃고 오늘은 알라딘 때문에 울어요ㅜㅜ...아아, 또 맘 상해서 책 안 사고 싶어졌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고...

scott 2020-12-18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마님 스톰 글라스 받으셨어요??
진짜 얼음땡 처럼 변하는지 궁금한데 ㅋㅋㅋ
[‘너는 이래야 돼!‘가 없는 관계 속에서 서로가 곁에 있는 것에 안심하고 지지하며 돕는다. 이런 전적인 호의 속에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안 적이 없으므로. 유연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젠더성은 고착되고 썩기 마련이며 그래서 세상이 이 꼴이다]
맞아요 그래서 세상이 이꼴이에요 ㅎㅎ

아무튼 올 한해 알라딘 굿즈를 이렇게 실물샷으로 올린 알라딘은
털안빠지는 패딩을 알마님에게 줘야 합니다.

(˘∀˘)

AgalmA 2020-12-18 23:13   좋아요 1 | URL
ㅍ.ㅍ)
눈사람 스톰글라스는 싫고 모비딕 스톰글라스 갖고 싶은데 결국 못 구해서 똑땅해요😭😭😭
나중에 굿즈샵에 올라오면 사야할 거 같은데 모비딕 실리콘 램프처럼 2만 원 대 넘어가게 내놓을까 봐 걱정이에요ㅜㅜ

패딩ㅋㅋ 기대도 안합니다.

페크pek0501 2020-12-19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구경, 멋진 음악. 감상 잘하고 갑니다. 아기자기한 다양한 재미...^^

AgalmA 2020-12-29 13:09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연말 분위기 안 나는 세월이 꽤 된 거 같은데, 올해는 코로나로 밖에 나가는 것도 엄두가 안 나게 만드니 이거야 원^^;
이제 2020년도 며칠 안 남았네요. 마무리 잘 되시길 바랍니다. 페크님/

2020-12-20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9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2-24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마님,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스톰글라스는 못받으셨지만 크리스마스 트리 한그루 심어드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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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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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ry ..:+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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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한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

AgalmA 2020-12-29 13:17   좋아요 1 | URL
scott님, 서재마다 이모티콘 메리 크리스마스를 돌리시느라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먼저...들고, 두번 째로 님 넘 다정하신 거 아녜요. 이거 온라인용 페르소나입니꽈? ㅎㅎ
아, 좋아요! 하트 뿅뿅으로 그냥 답 좀 하지.. 그러지 못하는 제 수세미 같은 맘은 고와질 기미가 안 보이네요ㅎ,,ㅎ;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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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에서 내가 봐온 '아버지'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성실하지만 그 시스템밖에 모르는 NHK 수금원이나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남성들이었다. 하루키의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봐도 전쟁 세대들은 원하는 대로 살기는커녕 생계가 아니라 생사를 고민해야 했고 그 고됨과 상처들을 삭이느라 과묵해지고 가족과도 잘 소통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루키는 아버지와의 세대차로 연을 끊다시피 하며, 혈연의 관계 개선보다 창작과 자신의 가정에 더 노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하루키 작품에서 부모의 자리는 매우 적다. 그러나 하루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1Q84』에서 덴고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향해 독백하던 장면도 소설을 통한 일종의 살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자신을 키워줬지만 그 양육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덴고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실마리가 풀려야 자신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와 아버지 두 사람만 공유하는 추억이 두 가지 나온다. 가장 애틋한 기억 하나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폭력에 대한 얘기 하나다.

아버지는 고양이 식구가 늘자 암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기로 하고 하루키와 함께 그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암고양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낯선 길에서 자전거보다 빠르게 고양이가 돌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절에 동자승으로 보내졌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억을 환기시켰다. 버려지는 상처를 알면서도 그는 똑같은 행동을 했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가 돌아왔기 때문에 삶은 같은 듯 달라진다. 아니 전혀 다른 궤도이다. 아버지가 절에서 집으로 돌아왔기에 살게 된 삶처럼. 스님이 되었다면 겪지 않았을 전쟁의 소용돌이,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강제 동원되어 타국까지 가야 했던 고된 여정과 각종 전쟁 트라우마, 전쟁에서 연인이 사망해 하루키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어머니, 하루키의 탄생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키와 아버지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자신을 위무하고 표현하는 데 글을 쓰는 건 같았다. 아버지는 하이쿠로, 하루키는 소설로. 아버지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듯 전쟁에 대한 참회도 그와 유사했다. 아침마다 조그만 불상 앞에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키가 작가로 쓴 소설이 결코 자기 충족만의 결과물이 아니듯. 전쟁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던 아버지가 하루키에게 들려준 유일한 이야기였던 중국인 처형은 ‘역사’로 전달된다.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재구성되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을지 내내 의구심을 가졌다. 진실을 감당하기 두려웠던 걸까, 아버지의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루키는 아버지가 2008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도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긴긴 시간이 걸린다. 나도 당신도.

마지막에 하루키는 마당에 있던 소나무 위로 올라간 어린 고양이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가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하는 그런 일이었다. 하루키는 어린 고양이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는 걸 무심히 봤고 고양이가 구조 요청의 울음을 울 때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고양이를 찾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린 고양이의 호기심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막지 못한 어린 하루키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더 열심히 찾지 못한 하루키 부자를 탓해야 할까. 삶은 원인과 결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달라질 수 없었다고 자조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하루키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실종’ 이 잦다는 걸 안다. 그게 단순히 재밌는 작품을 위한 작법의 기능이 아니라 작가의 풀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자주 느꼈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영문을 모르게 된 고양이, 전쟁 때문에 삶과 정신이 깊게 바뀌어 버린 평범했던 한 시민, 이 우주의 우연 속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다. 교환 가능한 것이라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한 빗방울의 궤적은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자리는 가능할까. 하루키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풀어놓은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 근본적인 거대한 이야기, 버려지고 상처받았으며 무거운 체험을 충분히 얘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내 부모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싶었던 입장이어서 하루키 부자 이야기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한 방울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위) 책에 수록된 가오 옌의 일러스트

(아래) 이 책의 내용이 처음 실린 <문예춘추> 2019. 6월 호에서의 하루키 부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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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버려지는 경험˝에 대한 생각들이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 됐구나 생각했었어요. 태엽감는 새와도 연관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그 책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하루키 풍년이라 좋았어요. 이 책은 약간 하루키의 다른 글과는 무게나 질감이 다른 것 같았고요. 저도 아갈마님처럼 내 이야기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던 책입니다.

AgalmA 2020-12-19 12:04   좋아요 3 | URL
이번에 나온 <일인칭 단수>도 사라지는 사람들, 관계들 잔뜩 출현이더군요ㅎㅎ;
살아갈수록 사실 그렇죠. 그렇게나 애틋한 관계, 감정이었는데도 어느 순간엔 소식도 모르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부모 자식 간 관계는 천륜이라는 게 수긍돼요. 지지고 볶아도 반드시 돌아보게 되는...

하루키 글은 겉은 모던해도 솔직한 낭만이 있어서 읽을 때 편하고 정감이 가요. 그게 찐매력.

scott 2020-12-18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하루키 새 단편집 자신이 그동안 즐겨 듣던 음악들에 붙이는 주석같은 ‘side note‘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 글은 읽고나면 뭔가 취미를 공유 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게 만드는것 같아 매번 비슷하다고 해도 다음작품이 기다려 지네요.
저도 이에세이 읽으면서 ‘태엽 감는새~‘
떠올렸는데 요즘 이작품 다시 읽으면서 하루키에 모든 작품세계가 이책속에 들어 있는것 같더군요
아버지에 어린시절-청춘-장년 그리고 노년 시절을 아들이 이렇게 한권에 연대기 처럼 남겨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묘비명 같다고 느껴졌어요.

AgalmA 2020-12-18 23:3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하루키 음악 단편 같은ㅎ?

그쵸. 나도 그런 거 있는데! 하면서 미주알 고주알 수다 떨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이 에세이 읽고 하루키 작품 연보를 다시 살펴 봤어요.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상당히 예전에 쓴 소설이었다는 게 좀 놀라웠어요. 1994년 발표인데...아버지 사망은 2008년이니. 그래서 하루키 작품 속 아버지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 많이 했는데, <1Q84>(2009) 덴고 아버지와 <기사단장 죽이기>(2017)에서의 노인 화가 설정이 하루키가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을 많이 담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러나 아름다운 - 2014년 전면 개정판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프리 재즈란 용어는 있지만 프리 클래식이란 용어는 없다. 흑인의 저항과 역사를 대변하는 재즈와 백인의 역사라 할 클래식을 굳이 대결 구도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재즈도 더 이상 게토의 삶을 대변하거나 반항적인 모습이 아니고, 그 역시 재즈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긴 마찬가지다. 용어가 비평가들이 만드는 구분일 뿐이지만, 두 음악의 특징 면면을 생각해보면 그 정형성과 대비는 흥미롭다. 어떻게 표출하든 예술에서 대전제는 동일하다. “예술에 대한 최고의 독법은 예술”(조지 스타이너 『그리스도의 실재』)이고, 훌륭한 음악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내놓는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난관이지만, 우리가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면 지금의 많은 예술 작품들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선 시대의 누구의 영향을 받아 이런 연주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채 후대 재즈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앞선 시대 연주자들의 특별함을 깨닫기 어려울 것이므로 제프 다이어는 재즈는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감상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재즈의 즉흥성처럼 그의 글 특징처럼 이 책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재즈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거장 루이 암스트롱이나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거장들을 거론하며 계보를 좇지 않는다. 제프 다이어는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재즈를 이끌었던 대표 뮤지션들에 집중했다. 모든 흑인 뮤지션들은 인종차별과 모욕을 피할 수 없어 쉽사리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다. 약과 술에 취해 병원에서 허물어지던 뮤지션이 부지기수였는데, “뉴욕 벨뷰 병원은 현대 재즈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버드랜드와 거의 동등한 위치”라고 할 정도였다. 레스터 영(1909~1959), 텔로니어스 멍크(1917~1982), 버드 파월(1924~1966), 찰스 밍거스(1922~1979), 벤 웹스터(1909~1973), 쳇 베이커(1929~1988), 아트 페퍼(1925~1982)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공연을 위해 이동하는 길 위에서의 시간이 많았던 듀크 엘링턴(1899~1974)과 해리 카나(1910~1974)의 여정이 막간처럼 툭툭 끼어든다. 이 구성 때문에 짐 자무시 《커피와 담배》 같은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도 든다.

음악계든 문학계든 천재 예술가들의 불운과 요절 소식은 역사적으로 자주 있었지만 재즈 뮤지션만큼 혹독하게 겪은 예술가도 없다. 색소폰 연주자 레스트 영은 군대 징집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

테스트 결과 그는 매독을 앓고 있었다. 그는 늘 술에 절어 있었고, 약에 취해 있었다. 암페타민 중독이었던 까닭에 그의 심장은 시계처럼 째깍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그들은 레스터를 군대에 집어넣기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무시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연주하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는가, 이틀 밤 동안 결코 똑같은 연주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재즈란 무엇인가에 결부된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같기를, 동일하기를, 식별 불가능하기를, 닮아 보이기를, 같은 생각을 하기를, 내일도 모든 것들이 오늘과 똑같이 남아 있기를,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원했다. 모든 것들은 정확한 각도를 형성해야 했고, 예리한 날을 세워야 했다. 그의 침대 시트는 사물함의 금속 모서리처럼 정확하고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들은 나무토막을 대패질하는 목수처럼 그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다. 마치 머리통을 정사각형으로 만들려는 듯. 군복조차도 신체를 사각형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재단되었다. 곡선도 부드러움도, 색도, 침묵도 없었다. 군대는 마치 한 사람이 2주 만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중략)

훈련하다 부상을 입어 찾게 된 병원에서 그는 신경심리학과 과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의사인 동시에 군인이기도 했던 그는 전장에서 못 볼 것들을 너무나 많이 본 나머지 정신이 나간 사내들을 주로 담당했다. 영의 문제가 전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의 동정심도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영이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답변을 할 때마다 퉁명스럽게 반응하던 의사는 그가 동성애자라고 확신했지만, 진단서에는 보다 복잡하게 썼다. ”약물 중독(마리화나, 바비튜레이트), 만성 알코올중독, 떠돌이 생활로 인해 야기된 종합적인 정신병적 상태……. 전적으로 규율 부족 문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위의 기록들을 요약하기라도 하듯, 한 단어를 부가했다. “재즈.”▦



영은 삶이 군대 전과 후로 나뉘어버렸고,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들에게 감옥과 정신병원과 군대는 언제라도 서로 제 역할을 바꿀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태양은 구리 심벌즈로 보였을 것이다. 평소에도 불안정한 재즈 피아니스트 버드 파월이 감옥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텔로니어스 멍크는 약물 소지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결국 마약 소지 죄로 감옥에 갔던 파월은 감옥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켰는데, 재즈계에 복귀하고서도 그리 긴 음악 생활을 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제프 다이어는 신경 쇠약과 약물 중독에 빠졌었던 버드 파월의 당시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펼쳐 놓았다.

큰 덩치에 쉽사리 분노에 휩싸였던 벤 웹스터와 찰스 밍거스의 이야기는 funk(Jazz, R&B, Soul 음악이 혼합된 리드미컬하고 춤추기 좋은 음악)처럼 진행됐다면, 백인 재즈 연주자 쳇 베이커와 아트 페퍼 이야기는 무드 발라드처럼 펼쳐진다. 쳇 베이커 음악에 대한 제프 다이어의 해석은 100% 동감이다.



📖

다른 뮤지션들은 옛 곡의 선율이나 악구를 직접 해석하고 변형하거나, 그 곡에 완전히 자신을 흡수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쳇의 경우, 곡이 온전히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쳇이 한 일이라곤 그저 곡들에 담겨 있는 상처 입은 부드러움을 끄집어내는 것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결코 블루스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가 블루스를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블루스라고는 할 수 없었다. 블루스에 함축된 유대감과 믿음에서 그는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스는 그가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트럼펫을 침대에 남겨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문이 달각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이 사소한 순간에조차 슬픔이 서린다는 것에 놀랐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들은 다가올 이별의 순간을 예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연주하는 곡의 모든 음이, 마지막 순간의 전조처럼 들리는 것처럼.

그는 항상 떠나고 있는 사림처럼 보였다. 당신은 그와 약속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서너 시간쯤 늦게 오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거나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며칠이고 및 주고 훌쩍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사내를 이토록 쉽게, 중독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기분은 다른 이들에게 동지애마저 느끼게 했다. 그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외로움을, 반쯤 빈 전철에서 만난 낯선 이의 애절한 얼굴에서 흘긋 엿볼 수 있는 외로움을 가져다줬다. 사랑을 나누고, 그가 그녀에게서 빠져나간 뒤, 몇 분 지나지도 않아 그녀는 그를 잃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뒤 여인의 몸에는 자궁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와 같은 열정의 각인이 남는다. 그가 곁에 없어도 여인은 그로, 그의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쳇은 그에 대한 갈망뿐인 공허함을 남긴다. 다시 한번 그대를, 다시 한번 그대를, 하는 바람만을 남긴다. 그 순간 여인은 그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오직 그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언젠가 쳇의 한 친구가 그녀에게 그의 연주에 대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가 음을 다루는 방식은 여자가 울기 직전의 순간을, 그녀의 얼굴이 유리잔에 가득 담긴 물처럼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순간을, 그래서 그녀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무슨 일이든 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완벽해서 이러한 아름다움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그 무언가를 가진 듯 보인다. 그녀의 두 눈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해온 모든 말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제 그녀에게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말하지만, 바로 이런 말들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울게 한다…….▦



제프 다이어는 후기에 재즈 역사와 의미에 대한 훌륭한 비평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해당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도 찾아 들으며 도움이 아주 많이 됐다. 이를테면 듀크 엘링턴이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열차 속에서 작곡한 「템포 속의 회고 Reminiscing in tempo」에 대한 제프 다이어의 곡 해석은 적확했다. “이 곡은 남부를 달려가는 기차의 모든 리듬과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기차의 재잘거림과 휘파람은 꾸준히 그의 음악을 파고들었다. 특히 루이지애나에서 소방관들이 휘파람 같은 엔진 소리에 맞추어 연주한 블루스는 여자들이 밤에 부르는 노랫소리처럼 그를 홀렸다. 철로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동시에 미국 흑인들의 역사를 관통했다. 흑인들은 철로를 건설했고, 철로에서 일했고, 철로를 따라 여행했고, 그는 철로를 따라가며 작곡했다. 기찻길은 그가 상속받은 전통이었다.”





이 책은 재즈 음악 전문가에게도 입문자에게도 전혀 문외한에게도 충만한 경험을 줄 책이다. 품절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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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11-30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내서 읽어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AgalmA 2020-12-18 21:40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이고요^^ 연말 재즈와 함께 훈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서니데이 2020-12-10 2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AgalmA 2020-12-18 21:41   좋아요 2 | URL
그렇게 되었더군요. 감사드려요.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리고요. 이 시즌 되면 늘 이렇게 덕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 같아요^^
날이 많이 춥더군요. 건강 또 건강하세요.

2020-12-10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8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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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깨졌고 과실이 상대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때 순애보의 영화 대사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한다면 상대는 광고 카피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자신을 변호할 수도 있다. “네 탓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제 마음이 변했다고 자인하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을 일이다. 대면도 하지 않고 카톡 한 줄로 끝나는 이별도 수두룩하다. 현실뿐 아니라 문학, 영화, 연극, 드라마, 음악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콘텐츠에는 사랑과 이별이 넘쳐난다. 모두가 원하지만 잘 안되고 필요한 만큼 얻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 그렇다.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도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라고 말하고 있다. 실패조차 할 수 없는 솔로도 가득하지만 요즘의 ‘사랑’은 그 가치가 ‘연애’, ‘결혼’의 가교처럼 여겨지는 것도 같다. 1900년 태생인 에리히 프롬도 당시 이런 문제점을 느꼈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사랑의 기술』은 1956년에 발행되어 34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혀왔다. ‘기술’이라는 단어가 픽업아티스트의 용어 같기도 하지만 프롬이 ‘기술’이라는 단어를 쓴 건 깊은 뜻이 있다.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할 때의 문제를 지적한다. 사랑할 줄 아는 자신의 ‘능력’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지’만 고심하고, ‘대상’의 문제로 전가하며 ‘인간의 애정 관계를 상품의 교환 가능성’처럼 여기며, 사랑을 ‘머물러 있는 상태’로 인식하기 때문에 정작 사람들이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사람의 원초적인 분리 불안은 고립의 공포와 고독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여러 합일의 형태들을 찾게 되는데,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다른 합일의 방식도 모색되었다.



📖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일치와 함께 현대 생활의 다른 요인, 곧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균화’되고 노동력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의 관료적 힘의 일부가 된다. 그는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그가 하는 일은 이 일을 관리하는 조직에 의해 지시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은 모두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감정조차도 지시받고 있다. 쾌활함, 믿음직함, 모든 사람과 마찰 없이 지내는 능력까지도.

오락도 그리 격렬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이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 슬로건도 그들에게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 연속물, 카드놀이, 사교 파티 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아도취가 아니라 자립적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이 순수한 생산적 활동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반한다. 프롬의 입장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대단히 잘못되었다.



📖

“남녀 양극성의 문제는 사랑과 성에 대해 더 많은 검토를 요구한다. 나는 전에, 프로이트가 성욕을 사랑과 합일의 요구가 나타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 성적 본능의 표현─혹은 승화─만을 보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잘못은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생리학적 유물론과 일치하는 바, 그는 성적 본능을 몸속에 화학적으로 생긴, 고통스럽게 해방을 갈망하는 긴장의 결과라고 본다. 성욕의 목적은 이 고통스러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적 만족은 이러한 제거에 성공하는 것이다.

유기체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할 때 굶주림이나 갈증이 생기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욕이 생긴다고 하는 점까지는 이 견해가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욕은 갈망이고 성적 만족은 갈망의 해소이다. 이러한 성욕의 개념을 갖는 한, 사실상 자위自慰는 이상적인 성적 만족이리라.

매우 역설적이지만 프로이트가 무시한 것은 성욕의 심리적·생물학적 측면, 남녀의 양극성, 그리고 결합에 의해 이 양극을 연결하려는 욕망이다. 아마도 프로이트의 극단적인 가부장주의는 이처럼 기묘한 잘못을 촉진했을 것이다. 가부장주의 때문에 그는 성욕을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가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독특한 여성의 성욕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는 <성의 이론에 대한 세 가지 공헌>에서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리비도libido는 남성 안에 있는 리비도든 여성 안에 있는 리비도든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남성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 소년 또한 거세된 ‘남성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한다. 또한 소년은 거세된 남성으로서 여성을 경험하고, 여성 자신은 남성 성기의 상실에 대해 여러 가지 보상을 구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똑같은 사상이 합리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여성의 성욕은 ‘남성적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것이다.

양성 간의 성적 매력은 부분적으로 긴장을 제거하려는 욕구에 그 동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의 극과 합일하려는 욕구이다. 사실상 색정적 매력은 결코 성적 매력에 의해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성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성격’에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다. 남성적 성격은 침투, 지도, 활동, 훈련, 모험이라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여성적 성격은 생산적인 수용성受容性, 보호, 현실주의, 인내력, 어머니다움으로 정의된다. (각 개인에게는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남성’ 또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프로이트 사상은 부분적으로 19세기 정신의 영향을 받았고 부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유행한 정신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통속적 생각과 프로이트의 개념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관습에 대한 반발을 들 수 있다. 프로이트 이론을 결정한 두 번째 요인은 자본주의 구조에 바탕을 둔 인간 개념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중략)

프로이트의 사상은 19세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유물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람들은 모든 정신적 현상의 근원을 생리학적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사랑, 증오, 야심, 질투 등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성적 본능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근본적 현실은 인간 존재의 전체에 있다는 것, 곧 첫째,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상황, 둘째, 사회의 특수한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생활상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유형의 유물론을 넘어서는 결정적 조치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해 취해졌고 유물사관에서는 신체나 식욕, 소유욕 등 본능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 생활 과정, 곧 인간의 ‘생활상의 실천’이 인간 이해의 열쇠가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본능적 욕구에 대한 충분하고 억압되지 않은 만족은 정신적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임상적 사실을 보면 자신의 생활을 무한한 성적 만족에 바친 남자들─그리고 여자들─도 행복을 획득하지 못하고 대체로 신경증적 갈등이나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본능적 욕구에 대한 완전한 만족은 행복을 위한 기초가 아닐 뿐 아니라 정상적 정신조차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이트 사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본주의 정신에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곧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억제로부터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을 위한 바탕으로, 그리고 불안해하고 자동 기계화한 개인을 위한 주된 만족으로서의 소비로 변했다.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하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했다. 자기애를 자아도취적 낮은 단계로만 해석한 프로이트 이론에 반박한 프롬의 지적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그의 견해도 전통적 가부장적 해석에서 아주 벗어났다고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사랑을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태도’이자 ‘의지’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한다. 프롬은 프로이트 외에도 현대 정신분석학자 H. S. Sullivan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

“설리반의 정신분석 체계에서 우리는, 프로이트 체계와는 대조적으로, 성욕과 사랑의 엄격한 구별을 발견한다.

설리반의 개념에서 사랑과 친밀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친밀감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상황의 어떤 유형으로서, 개인적 가치의 모든 구성 요소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개인적 가치의 확인에는 내가 제휴collaboration라고 부르는 관계가 필요하다. 제휴라는 말은 점점 더 동일해지는, 다시 말하면 더욱더 가까워지는 상호 만족 추구에 있어서, 그리고 점점 더 유사해가는 안전성의 효과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상대가 표명한 욕구에 대해 명백히 정식화된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설리반의 약간 까다로운 어법에 말려들지 않는다면, 사랑의 본질을 두 사람이 “우리는 자신의 명예와 우월감과 공명심을 유지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에 따르고 있다”고 느끼는 제휴 상태에서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사랑 개념이 19세기 자본주의의 관점에 선 가부장적 남성의 경험을 기술한 것처럼, 설리반의 기술은 20세기 소외된 시장형 퍼스낼리티의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 곧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적대적이며 소외된 세계에 함께 대항하는 두 사람에 대한 기술이다. 사실상 설리반의 친밀감에 대한 정의는 원칙적으로 ‘공동 목표를 추구하는 데 상대방이 표명한 욕구에’ 모든 사람이 ‘행동을 적응시키는’ 협동적인 팀의 어떠한 감정에도 타당하다(여기서 설리반이 ‘표명한’ 욕구라고 말한 것이 적어도 두 사람 사이의 ‘표명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반응을 포함하지 않고는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뜻이라면 주목할 만하다).

상호 성적 만족인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처인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 형태다. 사랑의 병리학에는 여러 가지 개별적 형태가 있지만 이것은 의식적인 괴로움에서 생기는 것이고 정신과 의사에 의해, 또한 점점 그 수효가 늘어나고 있는 비전문가들에 의해서도 신경증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사이비 사랑의 형태를 사랑이라 착각한다. ‘우상 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투사적 사랑’ 등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또는 사랑의 경험이 현재에서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해주는 마취제로서 작용한다.” 마치 상품처럼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고치지 않는 한 그런 이에게 진정한 사랑은 성취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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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속적 생활이 의거하는 원칙은 무관심과 이기주의의 원리이다(후자는 흔히 ‘개인주의’ 또는 ‘개인의 창의創意’로 불린다). 참으로 종교적인 문화를 익힌 사람에게는 조력자로서의 아버지가 필요한데, 이를 아버지의 가르침과 원칙을 자기 생활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여덟 살 난 어린아이에 비교할 수 있다.

현대인은 오히려 세 살 난 어린아이, 곧 아버지가 필요할 때는 아버지를 찾으며 울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놀이를 할 수 있는 한, 전적으로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러한 점에서, 다시 말하면 신의 원칙에 따라 생활을 바꾸지 않고 갓난아이처럼 신인동형적 신상神像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는 원시 부족에 더 가깝다. 다른 점에서, 우리의 종교적 상황은 현대의 서양 자본주의 사회에만 특유한 새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책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려야 할 투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다른 게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 공정한 교환이라는 원칙, 소비한다는 만족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신의 개념은 본래의 종교적 의미에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소외된 문화에만 적합한 의미로 바뀌었다. 근래 그것이 종교적으로 어떤 형태로 되살아났는가 하면,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경쟁적 투쟁에 더 적합하게 만드는 심리적 책략으로 바뀌었다. 종교는 인간의 사업상의 활동에서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기 암시 및 심리 요법과 제휴한다.”


 프롬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요소로 ‘전 생애를 통한 훈련’, ‘정신 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을 거론했다. 또한 자아도취와 반대되는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도 사랑의 기술에 요구된다. 자본주의의 극복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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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선口頭禪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 이상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지만, 우리의 관계는 기껏해야 현실적으로는 ‘공정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공정성은 상품과 용역의 교환에서, 그리고 감정의 교환에서 사기와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재화에서나 사랑에서나 ‘받은 만큼 준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적 격언이다. 공정성 윤리의 발달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별한 윤리적 공헌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러한 사실의 바탕은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에 있다. 전前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재화의 교환은 직접적인 힘이나 전통, 사랑 또는 우정이라는 개인적 유대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요인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다.”▦


 프롬의 이 책은 그의 자전적 경험과 시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부장적 아버지와 애착적 어머니 영향에 대한 극복, 아내 헤니와의 사별과 애니스와의 사랑, 나치를 피해 도미한 사정과 냉전시대를 겪으며 정치 사회에 대한 실존적 고민 등은 그의 이전 저서에서 계속 반영되었다. 프롬은 1980년에 작고했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이 시대는 더욱 피폐해졌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 역자의 말처럼 “형이상학적 천착이나 종교적 설교, 도덕적 교훈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수 천년이 넘도록 많은 이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참된 자아를 찾으라고. 쉽게 얻으려 들지도 말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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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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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몸, 재산, 인간관계, 추구하는 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소유욕은 본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무소유의 숙명이 ‘한 번 사는 인생 ……’ 운운하며 우리의 욕망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몸, 노동, 정신 능력을 소유한다’고 주장했지만, “재산은 고정 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통용되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기호와 변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유동적 개념”이 되었고, 소유’보다 더 넓은 ‘접속’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존재 양상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재산을 시장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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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의 역할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급 효과는 엄청나게 크다. 근대 이후로 재산과 시장은 줄곧 동의어로 쓰였다.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재산을 시장에서 교환한다는 발상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시장’이라는 단어가 영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였다.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상품이나 가축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시장이라는 용어는 공간적 지시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물건을 사고파는 추상적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 너무나 깊이 얽혀 있어, 이제 우리는 인간사를 시장이 아닌 다른 틀로 이해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장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어 오는 힘이다. 우리 모두는 시장의 분위기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시장이 잘 굴러가면 우리의 생활도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시장이 건강하면 우리 마음도 밝아진다. 시장이 맥을 못 추면 우리는 상심한다. 시장은 우리 삶의 안내자이며 상담자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물건이 아니라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실리를 가져온다. 부는 이제 물적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적 자본은 여간해서는 교환되지 않는다. 공급자는 지적 자본을 단단히 거머쥔 채 제한적으로 임대하거나 사용권을 빌려준다.

(중략)

예전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시장의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자와 사용자가 주역이다.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시장을 통한 거래는 줄어들고 전략적 제휴, 외부 자원의 공유, 이익 공유가 활성화된다. 기업들은 이제 서로에게 물건을 파는 것보다는 집합 자원을 공유하여 광범위한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 경영을 선호한다.

경제 활동의 기본 구도가 달라짐에 따라 경제를 주도하는 기업의 성격도 당연히 달라진다. 시장이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물적 자본을 많이 가진 기업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상품 거래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가치 있는 지적 자본을 많이 보유한 기업이 장땡이다.”

“사유 재산이 한 인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뜻했고 또한 ‘인간을 재는 잣대’로 오랫동안 간주되었던 세상에서, 소유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접속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노동을 상품화하는 것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접속의 시대에는 문화 생산이 중요하며 놀이의 상품화가 특징이다. “제의, 예술, 축제, 사회운동, 영성 수련과 공동체 활동, 시민적 참여를 개인적 오락으로 유료화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여러 플랫폼에서 우리가 매일 즐거워하며 올리는 수많은 인증숏과 후기, 공유 피드를 생각해보라. 상업 영역이 서비스 중심에서 현재는 체험 중심으로 변화했다. 2050년이 되면 성인 인구의 불과 5퍼센트만으로도 기존의 산업이 운영 관리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우리의 삶은 더욱 상품화되고 공리의 영리의 경계선은 점점 허물어진 채 우리 대다수는 그저 소비자로 살아갈 것이다. 리프킨이 가장 주목하는 문제점은 ‘자본의 문화 잠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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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화는 줄곧 시장보다 우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만들고 정교한 사회적 규약을 만들었다. 공유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재생산하고 사회적 자본의 형태로 사회적 신뢰를 구축했다. 사회적 신뢰와 사회적 교환이 어느 정도 발전한 다음에야 공동체는 비로소 상업과 교역에 뛰어들었다. 요컨대 상업 영역은 언제나 문화 영역에서 파생되었다. 상업 영역은 언제나 문화 영역에 의존했다. 문화는 합의된 행동 기준을 낳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합의된 행동의 기준이 신뢰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런 믿을 만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은 발생한다. 그런데 상업 영역이 문화 영역을 삼키기 시작하면-우리는 2부에서 이것을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상업적 관계를 낳는 사회적 토대 자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어쩌면 접속의 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산업 시대에 자연 자원이 인간의 남용으로 고갈되어 버릴 위기를 맞이했던 것처럼, 문화 자원도 과도한 영리 추구로 인해 언제 고갈되어 버릴지 모른다. 상품화된 문화 체험에 점점 무게 중심이 놓이는 지구 네트워크 경제에서 문명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 끌어올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새로운 세기의 으뜸가는 정치적 숙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연예 산업이 조직되는 방식을 본뜨려고 애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음반업, 예술계, 텔레비전, 라디오를 아우르는 문화 산업은 물리적 제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경험을 상품화하고 포장하고 마케팅한다. 문화 산업이 재화로 쌓아두고 거래하는 것은, 현실을 모방한 세계와 의식을 고양시키는 세계로 잠시 접속할 수 있는 권리이다. 물건과 서비스를 상품화하던 것에서 경험 자체를 상품화하는 단계로 변모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이것은 더없이 이상적인 모델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는 문화 기업이 그동안 관객과 맺어온 관계를 점점 닮아간다. 우리는 시간과 정신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상품으로 판매되는 지적 자본주의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주고받는 물리적 상품의 제조와 거래(소유)는 특히 지리적 공간에 기반을 둔 시장에서는 여전히 우리 일상 현실의 일부로 존속하겠지만 차츰 경제 활동에서 주변적 지위로 밀려날 것이다. 경제 활동의 중심부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판매되고 구입될 것이다. 소비자 개개인의 일상 경험이 무대의 순간, 극적 사건, 개인적 변신의 끝없는 연속으로 상품화되고 탈바꿈되는 새로운 시대의 선두 주자가 바로 영화 산업이다. 경제의 모든 영역이 지리적 시장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이동하고 물건과 서비스의 판매에서 모든 인간 경험 영역의 상품화로 옮겨가기 시작하면 할리우드의 조직 모델은 상업 행위를 조직하는 전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어떤 영화가 히트하면 너도나도 그것을 보러 가고, 모르는 건 유튜브나 위키피디아에서 찾으면서 10억 명 이상이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전화를 걸어본 경험이 없다. 이 세계는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격차보다 접속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더욱 크다.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 두 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문명 속에서 우리는 사이버 권력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양분되고 있다. 요즘 뜨는 직업이 유튜버인 게 단순히 시류가 아닌 거다.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사유재산의 관념이 산업 시대의 근간이었고, 그것이 일상생활의 조건을 규정지으며 정치 담론을 지배, 인간의 지위를 판가름하는 잣대 노릇을 했지만, 접속의 시대는 상거래, 정치 참여의 방식, 의식 등은 네트워크 속에서 자라난다. 산업 시대에서 살았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타인을 배제하고 재산을 모은 사람이 시장에서 승리하는 세계를 제시했지만, 네트워크 경제 시대에는 상호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면서 시장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소유하더라도 단기간 쓰고 파는 소비자에 맞춰 제품 주기는 더욱 빨라졌다. 경제 생산물의 무게가 가벼워진 만큼 우리의 소비 패턴도 빠르고 일시적이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 이상으로 전자 상거래는 성장했다. 1995년에는 불과 1,430만 명이었던 전자 상거래 이용자는 1997년 말 4천백만 명이 넘었다.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에 달렸던 장사의 성패가 ‘지리적 시장에 기반을 둔 시대’에서 ‘사이버스페이스의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시대’로 변화하며 부동산은 짐이 되거나 줄여야 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예능 《골목식당》을 봐도 알 수 있듯 네트워크에서 인기를 끌면 지금의 소비자는 찾아간다. 요즘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이 없듯이 돈도 탈물질화 추세가 진행된지 오래다. 1970년대 등장한 신용카드도 이젠 관리하기 귀찮은 물건이다. OO페이에서 어떻게 더 바뀔지 궁금할 지경이다. 비정규직도 이런 시장 변화의 수순이었다. 이제 기업에겐 물건보다 아이디어와 이미지가 성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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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꼽는 아웃소싱의 장점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아웃소싱을 하면 기업은 돈을 버는 데 집중하고,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수익 창출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지원 기능을 외부 지원업체에 맡길 수 있다. 둘째, 아웃소싱을 하는 기업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업체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셋째, 값비싼 설비를 구입하거나 기업의 수익 창출에 직결되지 않는 주변적인 업무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쓸데없는 돈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끝으로, 리스처럼 아웃소싱도 상품의 주기가 점점 짧아짐에 따라 정신없이 바뀌는 시장 상황에 기업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아웃소싱 계약은 그러나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이런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물리적 구현물은 경제 과정에서 점점 부차적 존재로 밀려난다. 산업 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

새로운 상행위의 저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나이키이다. 나이키는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도 그렇고 이제는 가상 회사가 되어버렸다. 일반인들은 나이키를 운동화 제조업체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이키는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이라고 보아야 옳다.”

“사업 방식의 체인화라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와 생명과학이라는 좀더 새로운 분야는 이 점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전자는 사업 방식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앞세워 거대한 점포 네트워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후자는 유전자 특허를 앞세워 농부에서 연구원과 보건 전문가까지 폭넓은 사용자를 아우르는 전속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 두 가지 예는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역학 관계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물품이 점점 정보 집약화, 쌍방향화하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물품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물품은 제품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진화를 거듭하는 서비스로 탈바꿈한다. (중략) 서비스에 역점을 두는 추세는 제품을 혁명적으로 설계하려는 움직임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제 기업은 제품을 고정된 특징과 일회적 사용 가치를 지닌 고정된 품목이 아니라 온갖 유형의 업그레이드와 부가 가치 서비스를 실어 보낼 수 있는 ‘플랫폼’으로 여긴다. 새로운 제조업의 풍토에서 중시되는 것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이다. 플랫폼은 이런 서비스를 실어 나르는 통에 불과하다. (중략) 고객이 정말로 구입하는 것은 물품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접속권이다.”

“불과 2,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수익을 내던 정보 기술 분야의 많은 기업들이 너도나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변신하고 있다. IBM, 제너럴 일렉트릭, 제록스, 휴렛팩커드 같은 기업들은 물리적 제품만 팔아서는 이렇다 할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맹이를 담는 통 혹은 플랫폼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점점 싸지고 제품의 질이 거의 엇비슷해지는 상황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서비스의 형태로 고객에게 노하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략) 제품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물품과 서비스의 이동 영역이 날로 확대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부족한 것은 사람의 관심이지 물건이 아니다. 잠재 고객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물건을 그냥 주는 것은 마케팅 전략으로 점점 각광을 받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사회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 시장에 의존한다. 의식주 해결은 물론 놀이, 감정의 해소, 타인의 공감과 관심도 사이버 네트워크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 플랫폼은 상업적 네트워크이다. 리프킨을 비롯 많은 미래학자들은 이 현상이 인간의 ‘최후의 심판’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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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벨을 비롯한 많은 미래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두 가지 변화 때문에 최후의 심판은 가까운 시일 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첫째, 사유 재산 체제의 보루였던 물품 자체가 순수한 서비스로 변형되면서 소유가 사회생활의 기본을 정의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둘째, 서비스 자체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비스는 물품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독립된 단위의 거래로 계약되었다. 하나하나의 서비스는 독립된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자 상거래와 정교한 데이터 피드백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서비스는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장기적이고 다면적인 관계로 재창조되고 있다.”



 접속의 시대에서는 ‘근면’이 아니라 ‘개인성과 창조’가 부각되며, 일은 즐겁게 버는 ‘유희’여야 한다. 최근 밀레니얼 세대 열풍으로 그들의 문화적 특징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제러미 리프킨의 이 책을 보면 그것은 접속의 시대가 낳은 특징에 불과하다. 공유하는 문화도 미디어 시장으로 인정사정 없이 끌려 들어가 상업화되는 걸 그들은 현재 우려하고 있는가. 기업은 재능 있는 젊은 작가, 화가, 지식인을 영입해 상품을 문화적 기호로 포장하는 임무를 맡기며 소비자와 지속적 관계를 도모하고 있다. 체험 경제의 선봉장인 관광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업으로 떠올랐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기 바쁘다. 인류의 공동 자산인 유전자도 기업이 특허로 사유화하며 마음대로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에도 속수무책이고, 함께 누리던 공공 재산이 줄어가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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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는 자아가 개인의 사유 재산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지만, 인간 행동을 연출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이제 자아는 더 이상 개인의 사유 재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어빙 고프먼이 말한 대로 자아는 ‘그가 공유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 의해 [한 인물에게] 부여된 감각’에 가까워진다.”

“기술 혁명이 막 일어나던 무렵이었던 1970년대 중반에 이런 지적을 했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통찰력을 말해 준다. 우리는 그 혁명이 전 세계적으로 미친 여파를 지금에야 겨우 감지하고 있다.

맥퍼슨은 우리의 머릿속에 지금 들어 있는 소유 개념은 대부분 17세기와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분석을 시작한다. 맥퍼슨에 따르면 근대적 소유 개념의 첫 번째 특징은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다. 우리는 이 지엄한 소유의 원칙을 너무나 맹신한 나머지 더 먼 옛날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것의 혜택을 보거나 어떤 것을 이용하는 데서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도 엄연히 소유 개념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망각했다고 맥퍼슨은 지적한다.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는 공공 소유라는 소유의 두 번째 범주를 만들어 이 안에 공원, 도시 거리, 공유지, 수로를 집어넣었다. 개인은 누구든지 이런 공공 재산을 사용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데서 배제당하지 않을 법적 권리를 보장받았다. 사유 재산과 공공 재산이라는 소유의 두 형태는 사회의 모든 성원이 개별적으로 누리는 재산권의 일부분이었다. 사유 재산은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고, 공유 재산은 타인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공유 재산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맥퍼슨은 말한다. 공공재라는 관념은 정부에 남아 있고 공유 재산이 무엇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지만 모든 개인에게 포함의 권리와 배제의 권리를 동시에 보장하는 이중 소유 체제가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러미 리프킨은 기계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의 낭비가 가져올 재앙을 경고한 『엔트로피』(1980)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노동의 종말』(1995)은 정보화 사회로 일자리를 잃게 될 현대인에게 경고를 보냈다면 『소유의 종말』(2000)은 그러한 접속이 우리의 일상과 인류 문화를 휩쓸고 있는 실상에 대한 경고다.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350권의 책과 1천 여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 카드와 약 2천 개의 주석을 동원한 역량을 독서하는 내내 실감할 수 있었다. 그의 세계 동향 분석은 어떤 분석가보다 포괄적이다.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둔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만이 인간의 문명과 건강한 공존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는 한 문장으로 이 책을 설명하기엔 방대한 정보가 있다. 리뷰로 많은 걸 전달하려 했지만 직접 읽어야 이 책의 저력을 실감할 것이다.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답답하고 적절한 해석을 원하는 독자라면 일독해야 할 책이다. 코로나19를 겪는 지금도 그렇지만 점점 더 네트워크 접속의 문화가 정교해질 걸로 예상되는데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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