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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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에서 내가 봐온 '아버지'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성실하지만 그 시스템밖에 모르는 NHK 수금원이나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남성들이었다. 하루키의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봐도 전쟁 세대들은 원하는 대로 살기는커녕 생계가 아니라 생사를 고민해야 했고 그 고됨과 상처들을 삭이느라 과묵해지고 가족과도 잘 소통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루키는 아버지와의 세대차로 연을 끊다시피 하며, 혈연의 관계 개선보다 창작과 자신의 가정에 더 노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하루키 작품에서 부모의 자리는 매우 적다. 그러나 하루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1Q84』에서 덴고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향해 독백하던 장면도 소설을 통한 일종의 살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자신을 키워줬지만 그 양육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덴고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실마리가 풀려야 자신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와 아버지 두 사람만 공유하는 추억이 두 가지 나온다. 가장 애틋한 기억 하나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폭력에 대한 얘기 하나다.

아버지는 고양이 식구가 늘자 암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기로 하고 하루키와 함께 그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암고양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낯선 길에서 자전거보다 빠르게 고양이가 돌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절에 동자승으로 보내졌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억을 환기시켰다. 버려지는 상처를 알면서도 그는 똑같은 행동을 했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가 돌아왔기 때문에 삶은 같은 듯 달라진다. 아니 전혀 다른 궤도이다. 아버지가 절에서 집으로 돌아왔기에 살게 된 삶처럼. 스님이 되었다면 겪지 않았을 전쟁의 소용돌이,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강제 동원되어 타국까지 가야 했던 고된 여정과 각종 전쟁 트라우마, 전쟁에서 연인이 사망해 하루키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어머니, 하루키의 탄생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키와 아버지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자신을 위무하고 표현하는 데 글을 쓰는 건 같았다. 아버지는 하이쿠로, 하루키는 소설로. 아버지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듯 전쟁에 대한 참회도 그와 유사했다. 아침마다 조그만 불상 앞에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키가 작가로 쓴 소설이 결코 자기 충족만의 결과물이 아니듯. 전쟁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던 아버지가 하루키에게 들려준 유일한 이야기였던 중국인 처형은 ‘역사’로 전달된다.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재구성되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을지 내내 의구심을 가졌다. 진실을 감당하기 두려웠던 걸까, 아버지의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루키는 아버지가 2008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도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긴긴 시간이 걸린다. 나도 당신도.

마지막에 하루키는 마당에 있던 소나무 위로 올라간 어린 고양이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가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하는 그런 일이었다. 하루키는 어린 고양이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는 걸 무심히 봤고 고양이가 구조 요청의 울음을 울 때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고양이를 찾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린 고양이의 호기심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막지 못한 어린 하루키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더 열심히 찾지 못한 하루키 부자를 탓해야 할까. 삶은 원인과 결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달라질 수 없었다고 자조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하루키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실종’ 이 잦다는 걸 안다. 그게 단순히 재밌는 작품을 위한 작법의 기능이 아니라 작가의 풀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자주 느꼈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영문을 모르게 된 고양이, 전쟁 때문에 삶과 정신이 깊게 바뀌어 버린 평범했던 한 시민, 이 우주의 우연 속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다. 교환 가능한 것이라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한 빗방울의 궤적은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자리는 가능할까. 하루키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풀어놓은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 근본적인 거대한 이야기, 버려지고 상처받았으며 무거운 체험을 충분히 얘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내 부모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싶었던 입장이어서 하루키 부자 이야기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한 방울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위) 책에 수록된 가오 옌의 일러스트

(아래) 이 책의 내용이 처음 실린 <문예춘추> 2019. 6월 호에서의 하루키 부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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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버려지는 경험˝에 대한 생각들이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 됐구나 생각했었어요. 태엽감는 새와도 연관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그 책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하루키 풍년이라 좋았어요. 이 책은 약간 하루키의 다른 글과는 무게나 질감이 다른 것 같았고요. 저도 아갈마님처럼 내 이야기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던 책입니다.

AgalmA 2020-12-19 12:04   좋아요 3 | URL
이번에 나온 <일인칭 단수>도 사라지는 사람들, 관계들 잔뜩 출현이더군요ㅎㅎ;
살아갈수록 사실 그렇죠. 그렇게나 애틋한 관계, 감정이었는데도 어느 순간엔 소식도 모르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부모 자식 간 관계는 천륜이라는 게 수긍돼요. 지지고 볶아도 반드시 돌아보게 되는...

하루키 글은 겉은 모던해도 솔직한 낭만이 있어서 읽을 때 편하고 정감이 가요. 그게 찐매력.

scott 2020-12-18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하루키 새 단편집 자신이 그동안 즐겨 듣던 음악들에 붙이는 주석같은 ‘side note‘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 글은 읽고나면 뭔가 취미를 공유 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게 만드는것 같아 매번 비슷하다고 해도 다음작품이 기다려 지네요.
저도 이에세이 읽으면서 ‘태엽 감는새~‘
떠올렸는데 요즘 이작품 다시 읽으면서 하루키에 모든 작품세계가 이책속에 들어 있는것 같더군요
아버지에 어린시절-청춘-장년 그리고 노년 시절을 아들이 이렇게 한권에 연대기 처럼 남겨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묘비명 같다고 느껴졌어요.

AgalmA 2020-12-18 23:3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하루키 음악 단편 같은ㅎ?

그쵸. 나도 그런 거 있는데! 하면서 미주알 고주알 수다 떨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이 에세이 읽고 하루키 작품 연보를 다시 살펴 봤어요.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상당히 예전에 쓴 소설이었다는 게 좀 놀라웠어요. 1994년 발표인데...아버지 사망은 2008년이니. 그래서 하루키 작품 속 아버지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 많이 했는데, <1Q84>(2009) 덴고 아버지와 <기사단장 죽이기>(2017)에서의 노인 화가 설정이 하루키가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을 많이 담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