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미제 사건이던 화성 연쇄살인자 이춘재가 쏟아내는 범죄 사실, 검찰과 사법 정의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펼쳐보지 않을 수 없는 책.
마녀 재판에서 시작하는 담담한 서술에서 푸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진지해서 좋다.
오늘날 9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면, 어렵지 않게 신성 재판 제도의 결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 불과 물로 행한 신성 재판에서 유죄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 죄가 없는 남자나 여자도 당연히 뜨거운 쇳덩이나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물통에 가라앉을지 아닐지 여부는 주로 폐 안의 공기량의 문제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체지방 비율의 문제였다. 여자와 몸집이 큰 남자는 당연히 (그리고 불공평하게) 불리했다. 비록 그 절차가 타당했더라도 그런 신성 재판은 어떤 형태의 진정한 일관성도 없이 운영되었다.
지금부터 900년 이후의 누군가는 현재 우리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볼까? 사실을 말하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선조들의 신성 재판을 보고 받는 충격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가 용인하는 정해진 절차와 체계적인 불공정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시대 판사와 배심원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수백 년 전에 재판을 주재했던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서 인지하는 만큼이나 명백한 편견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형사법을 살펴보면서 이단 금지만큼이나 잘못되고 불합리한 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다수의 남녀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얼마나 괴로운 문제인가? 낮춰 잡아도 25명 가운데 1명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1980년대 DNA 검사의 발전은 우리 사법제도를 따라다니는 문제점과 일별하게 해준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깜깜한 거대한 저택 안에서 겨우 성냥 하나 켠 모양새가 아닌가 싶다. 어슴푸레한 빛 덕분에 우리의 형사 사건 처리 절차가 끔찍하게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DNA 검사 이후 300명이 넘는 사람이 유전자 불일치로 혐의를 벗었는데, 이들 가운데 95퍼센트 이상이 살인범과 강간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었다. 존경받는 법관이자 법률가인 러니드 핸드Learned Hand가 언젠가 장담한 것처럼 ‘유죄 판결을 받은 결백한 남자의 유령’이 떠도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 아니다.
우리 사법제도가 직면한 위기의 전체 규모는 몇 배나 크다. 혐의를 풀어줄지 모르는 DNA 증거 활용이 불가능해서, 좋은 변호사를 찾지 못해서, 잘못된 유죄 판결이지만 굳이 싸울 가치가 없어 포기한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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