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문단 아이돌론
사이토 미나코 지음, 나일등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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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개정판 출간으로 불판이 펼쳐진 지금 내가 오구오구만 할 독자는 아니라서 참고삼아 이 책을 읽게 됐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일수록 더 매의 눈초리로 분석한다. 어떤 건 왜 좋고 어떤 건 왜 싫은지 알고 싶은 것도 있고, 비판점이 있다면 팬인 내가 더 잘 알아야 할 테니까. 책 제목부터 뭔가 B급스러워 평가절하 소지가 있지만 뼈 있고 수긍 가는 내용도 꽤 있다. 미나코의 통찰은 일본 만화를 보듯 잔재미 가득한 색다른 문예비평이어서 읽는 내내 재밌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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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지메 쇼이치는 초기 무라카미 작품을 가리켜 ‘다방 주인 문체’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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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버린 지금에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똑똑히 그릴 수가 있다. 며칠간 계속된 부드러운 비에 여름 동안 쌓인 먼지가 깨끗이 씻겨 내려간 산은 깊고 뚜렷한 푸름을 띠었고, 10월의 바람은 억새 이삭을 이리저리 흔들고, 얼어붙은 듯한 파란 하늘에는 가는 구름이 꼭 들러붙어 있었다."『노르웨이의 숲』

이렇게 노골적으로 서정적인 문장은 그때까지의 하루키 랜드와는 분명히 선을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새 손님을 대거 불러들였지만, 개점 당시의 오붓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단골손님 중에서는 ‘요즘 가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대지’ 하며 미간에 주름을 잡고 발을 돌리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단골손님을 위한 서비스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하루키 랜드. 『노르웨이의 숲』 다음 해에는 개점 당시(『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의 맥을 잇는, 그것도 상하 두 권으로 된 『댄스 댄스 댄스』(1988)를 출판합니다. 그리고 ‘하루키 현상’은 정점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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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하루키 랜드는 게이머로 북적이는 커다란 오락실로 변모했습니다. 이제 무라카미 문학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가 그들을 위한 게임기가 되었으며, 그곳이 과거에 다방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게이머 군단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찾아옵니다. 1994년에 드디어 대망의 신작 게임 『태엽 감는 새』 제1부와 제2부가 출시된 것입니다.

아!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직 하루키 랜드가 다방에서 오락실로 변한 것을 모르는 고상한 손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태엽 감는 새』는 그런 손님들을 당혹게 했습니다. 그리고 평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하다’고 무책임하게 칭찬하는 사람들과 ‘이런 엉망진창인 다방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다’라며 격분한 사람들로."

 

일본 문예라는 좁은 범위지만 미나코의 비교 분석이 한국 문학의 경향과 비교해 볼 부분이 많다. 요즘은 일본문학이 한국 출판계 점유율이 높기 때문에 한국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봐야 할 테고 말이다. 거론하는 스타작가 8인 중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다치바나 다카시, 무라카미 류, 우에노 지즈코는 친숙하지만 다와라 마치, 하야시 마리코, 다나카 야스오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터라 더 깊이 있는 독해를 못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게다가 이 책이 일본의 1980~90년대 거품경제,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열풍 속에 움직인 일본문학 전성기를 돌아보는 문예 비평이라 현재 인기 절정이라고 할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들이 다뤄지지 않으니 지금 시점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페미니즘, 문예, 시사, 문화인류학을 넘나드는 미나코의 현재 저작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아 최신의 관점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에서 내가 한국의 현상과의 유사성을 말했는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대와 그 시대성(‘극단적인 호황과 극단적인 불황, 페미니즘의 대중적 유행, 지적 권위주의의 파괴’)은 지금 한국 출판계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일본의 8~90년대 문단 이야기가 한국 90~2000년 대랑 비슷한 것이 이것도 다른 분야처럼 한국과 일본의 질긴 10년 차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장르소설, 철학 쪽은 일본이 이미 넘사벽이 된 거 같지만.

거론하는 작품들은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책심을 잡았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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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기념일』은 중장년층 남성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만인의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위험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이돌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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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위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소녀 대상 한정 문학’이야말로 전 세계적인 하위(부차·방계·지하·하층·피차별)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인 시대는 한 세기 가까이 차이가 있으나 요시모토 바나나와 코발트계 문학은 『빨간 머리 앤』과 사실상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소녀라고 하는 젠더 역할’에 얽매이지 않은 주인공 캐릭터. 작은 사건을 통해 정신적 자립을 이루어가는 성장 이야기. 여자끼리의 우정을 중시하는 가치관. 남자와의 관계를 쉽게 연애로 발전시키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섹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1990년대 후반 코발트 문고가 소년끼리의 연애를 그리는 ‘보이즈 러브’로 기울어져간 데서도 알 수 있듯이(이는 장르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의 월경과 양성구유성 등도 소녀 문학의 세계에서는 비교적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나나가 거론되는 방식은 일반적인 문예작품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문예작품이라기보다는 문예상품, 아니 ‘바나나’라는 캐릭터상품에 가깝습니다. 질적으로 비슷한 것은 리카 인형이나 산리오의 키티 같은 가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눌한 표현과 죽음으로 물든 멜로드라마. 그곳은 인형 놀이의 세계입니다. 인형 놀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죽어도, 가족 구성이 엉망진창이어도 현실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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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속내’를 파는 장사꾼”이 바로 하야시 마리코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오쓰키가 말하는 “출세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성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세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성욕”은 오랫동안 남성의 속성, 남성에게만 특권적으로 허용된 특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여자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과거 여성에게 허용된 계층 이동은 결혼밖에 없었습니다. ‘옥여(玉の輿, 결혼을 통한 여성의 신분 상승을 상징하는 꽃가마 — 옮긴이 주)’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그런데 하야시 마리코는 입으로는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혼자 힘으로 출세의 기회를 거머쥐는 ‘남성적 신분 상승’을 실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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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녀는 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마케터임에 틀림없다. 시대의 변화를 재빨리 파악하는 날카로운 통찰력, 변화하는 ‘주부’와 ‘여성’의 동향과 심리를 파악하는 카운슬링 능력, 사회 분석뿐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확고한 눈이 그녀에게 오늘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유명 대학’ 출신, 양갓집 자녀, 대학 조교수라는 자신의 기호적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하고, ‘어디까지나 약한 여자의 편’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며, ‘여자들’의 풀뿌리 네트워크를 최대한 이용해 심포지엄이나 강연 장소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어필한다. 또 아사히 신문이라는 영향력이 큰 브랜드 미디어와 제휴해 정력적으로 계몽 활동을 펼친다. (…) 어쨌든 그녀는 다재다능한 것이다. _야마시타 에쓰코, 「밝고 경쾌한 에로 아줌마는 왜 건강의 상징이 되었는가」, 『별책 다카라지마 80년대의 정체!』, 1990년

표면적으로는 ‘다재다능함’을 칭찬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언짢은 논조의 야마시타 에쓰코는 정말로 그녀를 ‘유능한 마케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내심 씁쓸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칭찬 범벅’이 된 것은 아닐까요.

‘B형 지즈코’를 씁쓸하게 생각한 사람은 더 있습니다. 바이링구얼의 숙명이라고 할까요. 저널리즘(밖)에서도, 학계 & 페미니즘(안)에서도 ‘이단자’로 여겨졌던 그녀. 안에도 밖에도 일곱 명의 적. 밖에서는 ‘페미니즘의 기수’로 불렸던 그녀이지만 페미니즘 업계(여성학회) 내부에서는 비판의 화살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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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내성적으로 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즉, 하루키는 마리화나 같은 효과를 준다. 반면에 무라카미 류를 읽으면 강렬한 쾌락을 느낀다. 즉, 류는 각성제라고 할 수 있다’라는 시시하지만 대중에게는 잘 먹힐 만한 코멘트가 실려 있길래 대체 누가 한 말인가 하고 보니 ‘작가 가메와다 다케시’라고 쓰여 있어서 놀랐다. _가메와다 다케시, 「하루키가 대마라면 류는 각성제」, 『쓰쿠루(創)』, 1989년 3월호

류 씨의 책에는 남자들만이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죠. 그런데 여자들은 그것을 지저분하다고 느껴요. (…) 류 씨의 이미지는 우선 폭력적. 느끼하고 동물적. 무섭다. 하지만 하루키 씨는 식물적이고 갑자기 달려들지도 않아요. _무레 요코, 「동물적인 무라카미 류와 식물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분게이슌주』, 199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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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은 경제 성장을 목표로 달려왔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개인의 정체성도 형성되어왔지요.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출세의 인생 게임’이었는지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 변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1970년대까지는 효력을 발휘했던 그런 ‘이야기’들은 1980년대 들어 급속히 리얼리티를 잃게 됩니다.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하는가, 무엇을 보람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가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 체계가 흔들리면 문학도 사상도 교양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 틈을 메꾸는 형태등장한 것이 1980년대의 ‘문단 아이돌’이 아니었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비평의 오타쿠화, 게임화를 부추겼고 다와라 마치와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때까지 ‘여자아이 전용’이었던 J포엠과 소녀 문학의 흐름을 문학계의 공식 무대에 올림으로써 여자아이들의 문화를 경시했던 ‘문단 마을의 아저씨’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습니다.1980년대에 일시적으로 페미니즘의 기세가 높아진 것도 어쩌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가시적 계층(포스트 계급?)으로서 남녀 간의 격차가 ‘발견’된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하야시 마리코와 우에노 지즈코는 고도 경제 성장기의 남성 역할을 몸소 실천했던 존재였습니다. 출세 인생 게임 vs 사회 변혁. 체제파 vs 반체제파. 대중 vs 지식인.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파워풀한 데다 노악(露惡) 취미가 있습니다. 많은 여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반감도 샀던 까닭은 한 시대 전의 남성 캐리커처를 여성이 연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 작가와 엘리트 여성학자 대결 구도로 하야시 마리코와 우에노 지즈코가 비교되었듯이 동물성과 식물성의 대결 구도로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교되는 건 그들이 동시대에 활동했기에 더 재밌는 관전 포인트다. 이 책에서 인용된 당시 두 명의 무라카미 비교론은 너무나 단순한 논리임에도 정말 재밌다ㅎ. 이건 한국 문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도 김금희 vs 최은영 라이벌전 을 만드는 걸 나는 똑똑이 보았으니까. 왜? 그들을 아이돌로 만드는 독자와 문단의 합작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는 현상이다. 여기서 미나코는 허점을 콕 찌른다.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셀러로 인기 절정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는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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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를 에일리언이라고 한 이유는 그녀가 ‘여자아이의 나라’에서 ‘남자 어른의 나라’로 넘어온 요술공주 샐리였기 때문입니다. 소녀 대상 문학계(여자아이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들이 문학계(남자 어른의 나라)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발휘합니다. ‘마하리쿠 마하리타!’ 소녀 문학계의 주문을 거는 순간 일제히 쓰러져간 어른 인텔리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간텍스트성’에 쏟았던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요시모토 바나나에게 쏟았다면, 아니, 근대 저변에 흐르는 소녀 문화라는 지하 수맥을 눈치챌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멍청한, 아니 고매한 ‘분석’으로 칠전팔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작품의 질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인식 속에 묘한 차별이 있는 것 아니었냐는 페미니즘적 지적이다. 신빙성은 있지 않나?

다시 나의 관심사로 돌아와서, 1991년 걸프전쟁 이후 공통적으로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무라카미 류 『5분 후의 세계』를 비교하고도 싶은데 한국에서의 아이돌 저력도 하루키가 승자라 『5분 후의 세계』 책이 없어 읽을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다. 일본어 공부를 해서 원서로 읽으라고요? 읽어야 될 아이돌이 어찌나 많은지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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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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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라는 시어를 보면 나는 이성복 시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시어가 아니었던가.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해 가을」, 「1959년」 등등. 이성복의 ‘그해’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그날」)아하는 삶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정확한 지점이 있었다. 이제 '그해'는 박준으로 더 기억되는 시대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박준의 ‘그해’는 미인과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에만 쓰인다. 시공간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없음’의 지대다. 미인이 영영 떠나 화답을 바랄 수 없는 화자가 추도 연서(戀書)를 보내는 제사(祭祀)의 영역이다. 있었던 일이었지만 결코 완료는 되지 않을 것이기에 좋았었다고 말하지 않고 ‘좋았을’(「마음, 고개」, 「가을의 제사」)이라 말하고, ‘좋을’-‘들어가고 있을’-‘도착했을’-‘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숲」) 것이라는 가정 시제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잠의 살은 차갑다」) 버릇이 몸가짐처럼 되었다 말하듯이 죽음과 깊은 상실을 복기하는 특성은 박준의 독특한 시적 정황이 되었다. 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은 독자라면 더 잘 이해할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 전에 나왔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산문집에서도 느꼈지만 그 특성은 이제 바깥을 보듬는 힘으로 더 넓어졌다. 가족부터 마을 사람들까지 두루 살피며 음식을 나눠 먹는 풍경이나 '새끼 거미'(백석「수라(修羅)」)가 가족을 잃을까 염려하던 백석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안과 밖」),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좋은 세상」-영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이 박준의 시에서는 빛이 난다. 그는 어떤 빚이 있어 이런 빛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비슷한 상황을 우린 레이먼드 카버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도 만난 적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따뜻한 롤빵을 건넸고 그들이 그것을 먹으며 잠시나마 기운을 차리던 것을. 백석, 허수경, 박준이 시에서 건네는 음식 풍경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주변과 읽는 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과잉된 내적 발화와 온갖 작법의 실험으로 가득한 작금의 시들 속에 박준의 시가 이렇듯 인기를 끄는 것은 자신과 주변을 동등이 그리고 잔잔히 살피는 이 마음 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에도 박준의 시에서는 들으려는 귀가 더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인 거 같다. 그가 쓰는 형용사와 부사만 봐도 늘 대상을 더 살핀다. “불을 피우기 미안한(형용사) 저녁이 삼월에는”(「삼월의 나무」), “겨우(부사)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84p」), “가. 그냥 가지 말고 잘(부사) 가.”(「사월의 잠」) 등등. 읽은 이를 놀라게 하고 뽐내며 이기려고만 드는 멋진 수사와 문장들은 사실 읽는 이에게 스트레스다. 세상과 문제점을 비판하긴 쉽지만 편안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문장이야말로 한 수 위다. 이것은 어떤 시적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것은 몸가짐이고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배운다고 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럴 수 있기까지의 시간과 경험을 모두 똑같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에게 시에게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시를 문장을 읽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 좀 해보자. 시에 놀라운 발견과 전이(轉移)만 요구할 것도 아니고, 공감을 채워주는 서정만 바랄 것도 아니다. 혼잣말을 출판까지 할 이유가 없는 이상 시도 근본적으로 상대에게 전하는 말이다. 죽은 이에게 더 공손하듯 편지로써 더 공손하듯 시에서 시를 통해 더 그러하려는 박준은 한국시에서 귀한 미인(美人)이다. 자신의 말이 진정 바라는 사람됨을 전하고 있는지 마음을 담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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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12-23 22:24   좋아요 0 | URL
남들보기에 제가 좀 오락가락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ㅎ;; 어떨 땐 어려워도 매우 좋은 책이 있고, 어떨 땐 남들은 별 매력 못느끼는 평범한 책이 매우 좋을 때가 있어요^^; 제 감상을 적어나가며 나는 이런 게 좋았구나 정리하는 거지 제가 누굴 평가하고 요구할 만한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죠;;;
응원 늘 감사하고 따뜻한 겨울되세요^^♧

서니데이 2018-12-19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AgalmA 2018-12-23 22: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당연히 서재의 달인이실 테죠.
서재 활동을 부지런히 못해 여러가지로 소원했는데 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12-20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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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의 링컨은 중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열한 살에 사망한 소년 윌리 링컨의 영혼과 많은 사람들을 남북전쟁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소년의 장례식 하룻밤에 머문 묘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바르도의 윌리 링컨’, ‘두 바르도에 있는 두 링컨등 여러 가지 해석거리들이 나온다.
티베트 불교 용어인 바르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죽음과 연옥의 상황을 다룬다는 걸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바르도는 핵심 용어인데, 바르도는 티베트에서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일컫는다. 이 책은 사후세계에서 환생하기까지 49일간 머무르는 영혼을 인도하는 절차와 영혼이 취해야 할 방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 옆에서 그들이 좋은 길로 갈 수 있게 이 책의 게송을 계속 들려준다.
(참고로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채 사장이 이 책을 아주 좋아했죠ㅎㅎ;)
 
이 책에 대한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단테적인 미국판 유령 발라드평가에 동감이다. ‘바르도란 단어가 강력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영향력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더 강하다. 아마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호불호도 그런 유사성에 기인할 것이다. 고전 서사시의 운문 형식으로 인해 낯설고 불편한 가독성, 환상 소설 양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전개 방식,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르포적인 글이 아닌 영혼들의 카니발리즘이 더 조명되는 데서 오는 실망 등등. 신곡은 보르헤스가 책 얘기만 하면 꺼낼 정도로 평생 극찬했는데, 인간이 죽음과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한 이 책의 입지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 같다. 내가 신곡바르도의 링컨에서 느낀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신곡은 단테가 42세이던 1307년경 쓰기 시작해 사망 직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열린책들 신곡해설에 따르면, 단테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자기 작품을 대비되는 <코메디아comedia(희극)>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분석하는 <비극>이 고상한 주제와 인물, 문체를 다루는 것과 대비되게 그는 저승 여행이라는 세속적인 주제를 다뤘고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냈기에 그렇다. 또 단테는 중세 유럽 문인들이 쓰던 고상한 라틴어 문체가 아니라 피렌체의 민중의 언어인 <속어(俗語)>로 작품을 썼다. 바르도의 링컨에 나오는 영혼들이 쓰는 많은 속어, 비속어들은 현장감을 살리면서 작품의 리듬을 한껏 살리고 있다. 신곡이 기하학적 치밀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지 손더스도 바르도의 링컨에서 영혼들의 어지럽게 토해내는 지껄임(서사시의 코러스와 유사)과 쌍을 맞춰 현실 속에서도 그런 대비 쌍(신문 기사, 인터뷰 글, 에세이, 편지 등등)을 가져와 배치했다. 소설을 서사 구조로 읽는데 길들여진 독자는 이런 불협화음 같은 형식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낯선 형식을 즐긴다면 이 소설 읽기가 더욱 풍부해질 텐데…….
1290년 스물네 살에 사망한 첫사랑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단테는 신곡에서 그녀를 천국으로의 안내자로 그린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가장 사랑한 아들인 윌리 링컨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총명한 아이였다. 영혼이 된 윌리는 묘지에서 비루하게 머물고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는 모두 죽은 자들이며 죽음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고 이끄는데 신곡에서 천국의 안내자였던 베아트리체 역할과 비슷하다. 윌리의 죽음은 아버지 링컨이 내전에 동원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을 제대로 통감하며 남북 전쟁의 대의를 재점검하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14세기 단테의 여러 상황이 19세기 초의 윌리 링컨과 에이브러햄 링컨과 오버랩되는 게 있어 흥미롭다. 윌리 링컨은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는데 단테는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정치 생활에서도 단테와 에이브러햄은 어려운 처지였다. 단테는 피렌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 망명생활을 하면서 신곡을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외모 폄하, 정치적 암투, 이해받지 못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여러 상황에 대해 이 소설은 빠르게 전달한다. 윌리 링컨이 병에 걸렸을 때 공식 만찬을 열었던 것도 심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가장 심한 것은 워싱턴의 갭 앤드 주스트라는 쓰레기 신문에 만화가 실렸는데, 링컨 부부는 샴페인 잔을 들이켜고 소년(눈 대신 작은 X자가 그려져 있었다)은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며 아버지, 나를 보내며 한 잔?”하고 묻는 내용이었다.”(p345) 어린 윌리가 사망한 즈음 북군의 사상자가 최대였던 도널슨 전투 사상자 명단이 발표되면서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작가는 당시 링컨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그린다.
 

이 아이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그런데도 그 무게 때문에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이런 슬픔을 밖으로 밀어냈어. 한 삼천 번쯤. 지금까지. 오늘까지. 산더미. 같은 아이들. 누군가의 아이들. 그걸 계속해야 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라면 레버를 당길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내가 만들어낸 것의 한 소중한 예가 있잖아, 내 명령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어떻게 하나. 중지시켜? 그 삼천 명을 손실 구덩이로 던져 넣어? 그러고서 평화를 간청해? 항로를 거슬러올라가는 위대한 바보, 우유부단한 왕, 영원한 웃음거리, 엉거주춤한 시골뜨기, 교활한 변절자가 돼?
이건 통제 불능이야. 누가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누가 그 원인이야. 누가 나타나서 이게 시작된 거야.
나는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p221)

죽음 이후의 모습을 다루는 신곡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떤 식으로 지상을 마무리하며 떠나는지를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기에 그 묘사에서 대단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단테와 조지 손더스의 차이는 인물들에서 극명하다. 단테 신곡이 여행자가 관찰하는 영혼으로 소극적으로 묘사했다면, 조지 손더스 소설의 영혼들은 이 소설의 첫 시작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소설을 가득 채울 만큼 능동적이다바르도의 영혼들은 가톨릭이 연옥에 머무는 이유를 가리키는 일곱 가지 대죄인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방탕이라는 고전적 이유를 초과한다. 대부분 자신의 죽음과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련과 혼란 상태다. 흑인이라서 숱한 강간을 당했던 소녀에게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죽어서까지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어 차별하는 상황이라면 죽음과 현실이 뭐가 다를까.
바르도는 종교적이지만 조지 손더스는 영혼들을 죄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동등한 인간이었다. 그 중 로저 베빈스 3세와 한스 볼먼의 캐릭터 설정이 특히 맘에 들었다. 그들의 독특한 외양, 윌리 링컨이 이곳에서 고통받지 않게 도우려는 행동, 선행 뒤의 변화 등이 영화 장면처럼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서 재밌는 장면들은 대개 이들에게서 나온다. 청렴하게 살았을 애벌리 토머스 목사가 왜 연옥에 머물러야 했는지 그 비밀을 추측해보는 것도 재밌는 설정이다. 영혼들이 그들에게는 불길하게 나타나는 빛, 그들에게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영향으로 바르도를 떠나는 상황, 이곳에 머물며 파괴되어가는 모습 등은 현실 속 삶의 모습만큼 다양하고 절절하다.
 

"사실, 우리는 지루했죠, 아주 지루했죠, 계속 지루했죠." - 로저 베빈스 3세
"매일 밤이 참담하게도 똑같이 지나갔습니다." - 한스 볼먼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나무의 모든 가지에 앉아봤어요. 모든 묘석을 읽고 또 읽었어요. 모든 길, 소로, 잡초가 우거진 길을 걸어봤고(달려봤고, 기어봤고, 거기 누워봤고), 모든 내를 건너봤어요 이곳의 네 가지 독특한 유형의 토양의 결이나 맛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갖추게 되었어요. 우리 동포의 모든 머리 모양, 복장, 머리핀, 시곗줄, 양말, 멜빵, 허리띠의 철저한 물품 명세를 만들었어요. 나는 볼먼 씨 이야기를 수천 번은 들었고, 안됐지만, 나 자신의 이야기도 적어도 그만큼은 했어요." - 로저 베빈스 3세
(p178)

 

이 소설의 출발은 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죽은 아들의 납골당에 자주 찾아가 그 주검을 안아주었다는 기사를 지인이 조지 손더스에게 전하는 순간 그는 링컨 기념관의 링컨 좌상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합쳐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이미지는 구도 상으로 매우 흡사하다. 링컨 부자의 숭고한 모습은 소설 속에서 유령들을 깨우고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유령들이 몰려드는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와 에이브러햄 링컨은 서로를 결코 느끼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두 사람을 통해 많은 유령들이 죽고 살 의지를 가졌던 것과 달리. 삶과 바르도는 구조만큼 복잡하고 이상한 겹침의 미로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먼 길을 선택하면서도 어떤 존재로 있든 삶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죽음인지 삶인지 제3의 길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4세기에 단테가 그랬고 21세기 조지 손더스가 그렇듯 우리는 끝없이 이것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건 우리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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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나사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것이 떨어진 곳을 알고 있다. 예전에도 떨어져서 죈 기억이 있다. 다시 떨어질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 돌이키기 어렵게 망가진 자리에 임시변통으로 죄었던 나사였다. 처음같이 변함없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게 많다. 사물만이 아니다. 사랑 특히 모든 사랑의 전사(前史)가 되는 평생의 사랑에서라면 냉정한 판단은 더욱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 가장 큰 장애인데 기억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나사는 짐작하지 못한 데서 회전하고 멈추기도 하니까. 줄리언 반스는 그걸 내내 의식하면서 연애의 기억을 써나갔다.

 

내가 꼭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가 기억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따라서 행복한 축에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지 추측일 뿐이다.”(하나)

 

케이시 폴이 수십 년간 공책에 사랑에 관한 문장을 채우고 지우길 반복하며 사랑의 진실을 찾으려 애썼듯이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아니다를 오가는 저울 같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기억과의 사투일까, 진실과의 사투일까. 아니면 기억과 진실 간의 사투일까.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하나)

그는 가끔 자신에게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 그는, 결국,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너는 공감과 반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인간의 마음에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들이 나란히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너는 그간 읽은 책에 화가 난다. 단 한 권도 이런 것에는 대비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엉뚱한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엉뚱한 방식으로 읽었거나.”()

삶의 슬픔. 그것은 그가 가끔 생각에 잠기게 되는 또 다른 난제였다. 어느 것이 올바른또는 더 올바른공식이었을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아니면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실이지만, 어느 것이라고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최종 평가는 사후에 가능하다. 정확한 사후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고 있나삶의 문제에서 더 하고 덜 하고를 현명하게 선택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무신경 혹은 무책임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때도 있다. 어쩌면 더 많이. 그에 따른 결과가 행복이나 불행, 진실이라고도 재단할 수 없다. 어떤 문제는 고통, 시간의 경과, 기억과 사실의 부재나 혼동으로 인해 깊이 고찰하기도 어렵다. 가능하다 해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일흔이 넘어서야 폴은 수전을, 수전과의 사랑을, 진실을 알기 위해 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ㅡ“자신들은 범주와 묘사를 다 벗어나 있다는 것”(특수성)ㅡ을 제일 먼저 경계하면서. 폴은 자신이 일기 같은 기록을 남긴 적이 없고 시간, 장소 같은 걸 순서대로 나열해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써 나가며 그는 깨닫는다. 자신도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그럼에도 그가 남기는 이 연애의 기록은 그가 사랑했던 첫 사람—단 한 사람—의 지워지고 잃어버린 모습을 되찾고 그녀의 순수를 기억하고 유지하고자 하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그들 둘 다를 위한 마지막 의무’이다.
줄리언 반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내게 진부한 사랑, 19년 연상연하 커플의 사랑과 삶의 파국, 신파로 읽히지 않는 건 그가 인간 삶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ㅡ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는 것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 시작되는 첫 공모의 순간(“어떤 음모나 계획은 물론, 접촉, 키스,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몇 마디 던지고 진입로를 따라 걸어가기 전, 그냥 그렇게 함께 차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모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뭔가를 하자는 공모는 아니었다. 그냥 나를 조금 더 나로 만들어주고, 그녀를 조금 더 그녀로 만들어주는 공모일 뿐이었다”),

독특하게 고지식한 첫사랑의 특징(“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 둘이, 그리고 우리가 이르러야만 하는 곳이 있다,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내가 꿈꾸던 곳에 가까운 어딘가에 실제로 이르렀지만, 나는 대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춘 시기에 사람의 습성, 관습, 기성세대에 대해 가지는 불만과 혐오 그것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내가 어른의 무엇을 싫어하고 불신했을까? 글쎄,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자격을 가졌다는 느낌, 우월하다는 느낌, 가장 잘 알지는 못해도 더 잘 안다는 가정, 어른이 지닌 의견들의 엄청난 진부함, 여자들이 콤팩트를 꺼내 코에 분을 바르는 모습, 남자들이 두 다리를 벌려 음부의 묵직한 윤곽을 바지에 그린 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정원과 정원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말투, 그들이 쓰는 안경spectacles과 그들이 자신들을 재료로 만들어내는 광경spectacles, 음주와 흡연, 기침을 할 때 가래가 끓는 끔찍한 소리, 자신의 짐승 냄새를 감추려고 바르는 인공적인 냄새, 남자들이 대머리가 되고 여자들이 풀 분무기로 머리 모양을 만드는 모습, 그들이 여전히 섹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생각, 사회적 규범에 대한 유순한 복종, 풍자나 의문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못마땅해하는 모습, 자식의 성공은 부모를 얼마나 잘 모방했느냐로 잴 수 있다는 가정, 서로 맞장구를 치며 내는 숨 막힐 듯 시끄러운 소리, 조리한 음식과 먹는 음식에 관한 논평, 내가 역겨워하는 것(특히 올리브, 절인 양파, 처트니, 야채 겨자 절임, 고추냉이 소스, , 샌드위치 스프레드, 악취가 나는 치즈, 마마이트 이스트)에 대한 그들의 사랑, 감정적 자기만족, 인종적 우월감, 잔돈을 세는 방법, 잇새에 낀 음식을 추적하는 방법, 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원치 않을 때 나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이건 짧은 목록일 뿐인데, 수전은 당연히 또 이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 한 가지 더. 진짜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유전적 공포 때문이 틀림없지만, 그들이 감정생활을 비꼬고, 양성 간의 관계를 반복해서 멍청한 농담거리로 삼는 태도. 여자들이 실제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한다는 남자들의 암시, 남자들은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여자들의 암시.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여자는 귀여워해주고 응석을 받아주고 돌봐줘야 한다는 남자들의 허세, 축적된 성적 민간전승에도 불구하고, 상식과 실용성을 갖춘 사람은 자신들이라는 여자들의 허세. 양성 모두, 상대의 모든 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흐느끼며 인정하는 것. 그들하고는 살 수 없어, 그들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과 결혼해 살았으며, 어떤 재사(才士)가 표현했듯이, 결혼은 정신적 제도*라는 의미에서 제도였다. 누가 그 말을 먼저 했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어느 시대든 자식의 불길한 사랑에 부모들이 겪는 혼란(“부모가 당황하고, 이웃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하고, 잠시 잠적하고, 문을 닫아놓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내 앞길에 놓인 곤경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결국 자신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투사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가설을 세우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수용하는 자신들의 능력에서 약간의 침착한 영웅적 자질을 찾아내고, 어머니는 페드로가 계속 자신의 머리를 자르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적절한지 궁금해하고, 그러다최악의 단계로자신이 새로 발견한 관용에 명예의 훈장을 수여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내내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서 이런 날을 보지 않은 것을,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랑 뒤에 우리가 괜찮은 척하는 연기들(그건 연기야. 우리 모두 연기를 하지. 너도 언젠가는 연기를 하게 될 거야, 오 하고말고.”,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지.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나이가 들고 사랑의 파국을 겪어본 이들이 연인들을 보게 되는 시선(“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믿도록 놓아두는 것. 글쎄, 먼저 죽는다는 잔인한 일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부러워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다(중략)나는 세상이 아마도 그들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이 아마도 서로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싶다. 하지만 물론, 이건 가능하지 않다. 나의 돌봄은 요구되지 않고, 그들의 자신감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니까”),

결국은 모두에게 진짜로 남는 사랑-이야기가 있다는 것(“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의 기억 작용을 짐작게 한다.

 

행복, 기쁨, 웃음으로 이루어진 오랜 기간들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미 내가 묘사하기도 했으니까. 기억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그것은…… ,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자. 통나무를 쪼개는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인상적이다.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기계의 대에 올려놓고, 발로 단추를 밟으면, 통나무가 도끼날처럼 생긴 날 쪽으로 밀려간다. 거기에서 통나무는 결을 따라 쪼개진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따라서 나는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기억하기 가장 힘든 부분이라 해도. 아니, 기억이 아니라묘사하기에. 그것은 나의 순수함의 일부를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성장이란 순수를 잃는 필연적 과정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문제는, 그런 상실이 언제 일어날지 아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그리고 어떻게 될지, 그 뒤에.”(하나)

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공적 개입은 원하지만 너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너의 진실성이라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유연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잃어버린 기억 하나는 순수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 상대에 대한 순수 하나를 잃어버리면 내 순수 하나도 잃어버리는 게 된다. 폴은, 우리는 얼마나 추적해나갈 수 있을까.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 순수는 정확히 거기 있으며 하나일까. 폴과 수전은 세상의 눈총과 족쇄에서 달아나 둘만의 새로운 세상을 바랐지만 그곳에 순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수전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혐오했으면서 자신도 알코올 중독과 정신 이상으로 폐인이 되어 갔다. “알코올중독자의 파트너는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아니,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스스로 그 습관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듯이 수전도 그리되었다. 그러나 원인은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망, 친척 아저씨의 집요한 성폭력, 전쟁과 시대적 상황, 연인의 사망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개인적 이유들이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전과 다른 듯 비슷하게 폴도 무력하고 수동적이었다. 그녀를 돌보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고 전도 유망한 변호사가 되기보다 시원찮은 일을 하며 삶을 꾸려나갔다. 거기서 또 보람을 느끼면서. 그가 이리 된 걸 수전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자신이 말짱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바라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속이면서도 그들은 상호의존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삶을 채우는 사랑, 가식, 의무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내면화되는 인간성이다.

 

젊은 시절, 수전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뜨거웠던 그는 경쟁심이 강했다, 모든 젊은 남자가 그렇듯이. 내 좆이 네 좆보다 크다, 내 심장이 네 심장보다 크다. 젊은 수컷들은 또 여자친구에게 딸린 것들을 자랑하기도 했고. 반면 그의 자랑은 달랐다. 나의 관계가 너희의 관계보다 얼마나 더 위반적인지 봐라.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 또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의 강도를 봐라.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당연히. 감정의 강도가 행복의 수준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시에 그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논리적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그녀를 탈환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돌아보고…… 자신을 탈환하는? 무엇으로부터? ‘그 이후 그의 삶의 난파로부터? 아니, 그것은 멍청할 정도로 신파적이었다. 그의 삶은 난파한 적이 없었다. 그의 심장, 그래,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계속했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 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낡은 교조로부터의 이런 해방은 그 나름의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다. 의무감은 내면화되었다. ‘사랑은 그것 자체로 의무였다. 너는 사랑할 의무가 있었고, 이제 그것이 너의 중심적인 믿음 체계이기 때문에 의무감은 더욱 강해졌다. 사랑자체가 많은 의무를 수반했다. 그래서, ‘사랑은 겉으로는 무게가 없어 보여도 아주 무거울 수 있었고, 강하게 속박할 수 있었으며, ‘의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이 열아홉에 느끼려 한 사랑의 진실과 일흔이 넘은 뒤 돌이켜보는 사랑의 진실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반스는 그 비교도 썼다.

 

당신은 나이 열아홉에 사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에서라면 그런 이해가 책 몇 권과 영화 몇 편, 친구들과의 대화, 어찔한 꿈, 자전거를 탄 어떤 소녀들에 관한 가슴 아린 환상, 내가 잠자리를 함께한 첫 여자와의 사분의 일 쪽짜리 관계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평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열아홉 살짜리 자아는 법정의 평결을 바로잡을 것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랑과 진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나는 진실을 본다. 그렇게 간단해야 한다.”(하나)

몇 번의 검열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공책의 한 기록.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그는 처음 이 말을 발견한 이후로 계속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더 넓은 생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 자체가 절대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 그 참가자들 누구도 그렇지 않다는 것. 한 사회가 강요하려 하는 감정과 행동의 모든 엄격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것을 미끄러져 지나쳐버린다.” ()

 

열아홉의 폴은 사랑과 진실이 단순한 실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흔이 넘은 폴은 진실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본다. 자신과 수전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여러 상황을 가정해본다.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드 입장에서 상황을 재해석해보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이 사라진 시점도 파악한다(“가장 열렬하고 가장 진지한 사랑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해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 죄책감과 가책, 불가피하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렸지만 결국 그녀보다 자신을 구원하기로 한 선택, 연민과 분노와 함께 자기혐오를 감당해야 하는 수치에서 벗어나기).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라는 말을 청년 시절에는 절망의 권고처럼 들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정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수전의 순수를 찾는 이 과정은 자기 보호이자 용기이자 비겁인 모순적인 양면성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평생 전사로서 간직하며 사는 폴은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연기하며 독신으로 생을 마감할 듯하다. 수전의 삶이 그랬듯 그의 이유도 복합적이다. ‘그의 부모, 그들의 성격과 상호작용, 다른 결혼에 대한 그의 관점, 그의 눈에 보인 가족이 주는 피해, 그것에서 탈출해 수전 매클라우드에게 간 일, 어떤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짧은 착각, 관계 속 환멸과 소심의 왕복, 거듭되는 상심, 그의 생각을 바꿀 대상의 부재등등. 그는 인간이 너무 불완전해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영화에서 파생된 환상(브롬화물)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다고도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나 ‘사랑’이 온 세상을 바꿀 혁명적 힘이자 만병통치약인 듯 말한다. 줄리언 반스의 이 소설은 어떤 형태로 있든 사랑의 민낯, 사랑에 대한 불가피한 통찰과 현실성을 말했다. 공감할 수 없어 반스에게, 나에게 사랑에 대해 이것이 정녕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우리가 알고 겪었던 많은 사랑이 대개 이렇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거 같다한계와 때늦음을 곱씹으며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이런 사랑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은 어떤 이에겐 외면하고 덮고 싶은 상처이고, 어떤 이에겐 삶의 의지와 위안을 주는 행복이며, 어떤 이에겐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숙제이지만, 우리는 승자도 패자도 아니고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래, 사랑은 그에게는 완전한 재난이었다. 그리고 수전에게. 또 조운에게. 그리고그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당연히 매클라우드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줄을 그어 지운 기록 몇 개를 훑어보다가, 공책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어쩌면 늘 시간을 낭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랑은 결코 정의로 포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오로지 딱 이야기로만 포착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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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16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아닌 듯 하고. 나의 기준에 따른다면 다른 이들의 사랑은 저와는 또 다른 것도 같은. 그래서, 사랑은 아마 그 때 그 장소에서 당시의 나에게 일어났었던 박제된 감정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뭔 소리를 하는건지...ㅜㅜ)

AgalmA 2018-10-16 22:44   좋아요 2 | URL
백 가지 사랑이 있다면 백 가지 정의가 있겠죠. 일반화로 모으려 하지만 예외와 불가해를 우린 늘 직면하잖습니까.

겨울호랑이님 그 감정, 뭔 소린지 저는 좀 알 거 같은데요ㅎ; 이심전심도 아니고 이건 뭐람;; 공부가 부족하여....;;;
 
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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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질서가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이는 글을 쓰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총을 쏜다. 나는 소심하면서도 완강하게 연도와 날짜를 적지 않고 일기를 써나간 적 있다. 계절 얘기나 특정 사건 때문에 대략의 시간은 추정할 수 있어 완벽한 미스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2018년인데 2008년이라고 찍힌 다이어리에 쓰고 있었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한 300년 뒤 이 다이어리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이 기록을 2008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용 표시 같은 걸 하지 않고 책의 여러 문장들을 내 꿈과 생각과 합쳐 적어 놓았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10년 뒤 글을 쓴 당사자인 내가 봐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앞뒤 인과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또는 '사실'은 우리 기대설정에 지나지 않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각과 상상을 쏟아내고 실현하는 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을 떠올린 순간부터 인간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더라도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생각한다. 성 정체성도 평생의 족쇄로 따라다닌다. 이런저런 구분의 질서 속에 있는 한 내가 라는 인식은 늘 불만스러운 좌표 위에 있다. 반문도 따라 나온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가.

 

배수아는 근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질서가 아니라 시간과 자아의 철저한 망각을 실험한다. “바늘 없는 시계의 세계에서, 사라지고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한 번도 없었던 일처럼 일어나고, 꿈과 과거-현실-미래와 이야기가 트럭이나 문, 교수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계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당연히 주인공도 특정한 사건도 없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겪는 일들로 가득해 AB여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적 있다. 흔한 이름이라면 좀 더 씁쓸해 하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일도, 누군가가 죽는 일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들 겪는다. 그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내가 겪는 특별함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배수아는 여기서 다시 비튼다. 이해할 수 없이 공유되는 특별함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여자는 오래전에 떠났던 할머니의 양철 가방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해 그 가방과 함께 자신도 여행 중이다. 어느 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반두어로 적힌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 편지를 이해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반두어를 들었을 뿐인 잭도 편지 낭독을 듣고 그 나름대로 이 편지를 이해한다. ‘낭독은 배수아 작가가 여러 소설에서 쓴 소재인데, 언어와 음악의 결합 같은 이 방식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인류의 소통 방식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당신이 소리 내어 읽은 그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면 내게는 선험적 말이고, 말 이전의 말이었는데! 제안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꾸며대서 당신을 웃겨볼 생각이었던 거예요. 정말로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를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요. 그건, 그건 당신의, 아니, 당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쩌면 당신 할머니일 수도 있는 소녀의,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매우, 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언유주얼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잭은 충격과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서 이어서 말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p265~266)

 

작가가 문학작품을 쓰고 독자가 그 책을 읽는 과정도 위와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누군가 글로 보여줬을 때의 쾌감과 공감, 강렬했지만 구체적으로 복기하지 못하던 꿈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 말이다. 현실에서는 기억을 못해 실수를 하거나 꾸지람을 듣거나 봉변을 당하기 일쑤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꿈에서 나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이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오직 나 하나다. 사실과 환상을 모으고 설치하는 문학은 현실에 틈을 비집고 공유할 자리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처럼 배수아가 제시하는 잔상들은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이미지들이다. 아이들이 극히 비극의 대상인데 누군가 쉽게 훔칠 수도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여왕에게 잡혀가지 않게 소녀들은 남자아이로 살거나 검은 아네모네즙 때문에 눈이 멀고 야만인 흉노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급기야 처형당하기도 한다. 질서의 대행자 남성들은 위로는 사령관, 경찰, 의사, 아래로는 교사, 역장, 눈표범 조련사, 돼지 장수, 살인자 등 타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다. 얼이에 대해서의 얼이처럼 빨리 죽거나 1979의 남교사의 히키코모리 남동생처럼 편지를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지 않는 이상 그들은 대체로 그레이하운드 사냥개처럼 당당하다. 반면 여성들은 적당한 자리가 없다. 의탁할 곳 없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꼭 아버지에게 물어보려 하고 버림받아도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가 사령관이길 바라는 여자아이, 미친 자, 아이 낳는 자, 아이를 잃는 자(남성이라면 부하를 잃는 자, 노인 울라에서), 강간당하는 자, 죽임을 당하는 자, 여승, 갈 곳 없이 떠도는 자, 사라지는 마술을 하며 살다가 정말 사라지는 자로 부유한다. 유일하게 분명한 역할이 있었던 뱀과 물에 나오는 여교사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산 끝에 죽음을 꿈꾸는 파괴적인 몽상을 하면서 그렇다면 어디로를 되뇌며 사직서를 쓰고 있다.

 

배수아가 펼쳐놓는 이 이미지들의 나열과 중첩에서 여성으로 산 시대적 감수성을 제거하고 읽기란 힘든 것 같다.

우선 이 단편들 속에는 이국적인 것도 조금 끼어 있지만 대체로 작가가 자라온 시대, 정서적 매개물을 보여주는 사물들과 호칭으로 가득하다. 이 단편들이 어린 시절을 다루기에 더욱 그렇다. 작가가 상상하고 재구성한 어린 시절이면서 작가가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우물, 두레박, 서커스, 고아원, 철봉, 전신주, 담배가게, 모래를 실은 손수레, 바구니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 함지박을 옆구리에 낀 식모아이들, 돼지 장수, 등받이가 높고 따르릉 소리나는 화물용 자전거, 굵은 설탕을 뿌린 달콤한 도넛, 달걀 행상 노파, 무당, 초가집, 보건소, 기찻길, 주름진 함석지붕을 얹은 길가의 오두막등등. 이것들은 이제 많이 사라져서 오래된 동화 같은 분위기로 이 소설의 독특한 정서를 만든다.

여성 작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떤가. 여왕이 일곱 살이 넘은 여자아이는 잡아가지 않기 때문에 일곱 살 이후로는 여자아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아버지를 찾아가는 눈 아이 이야기는 여러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깔려 있다.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는 동급생 얼이,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누나가 주는 흰색 원피스를 받으며 여왕 얘기는 더 이상 믿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도둑 자매에서 아이는 가짜 언니에게 납치당한 뒤 가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낡고 검은 광목 원피스 차림에 가방을 들고 어린 시절과 작별하며 집을 떠난다. 1979에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소녀를 어려워하는 동급생 남학생들과 달리 성적으로 끌리는 성인 남성이 여럿 나온다. 작가는 이 시기에 아이들의 정체성이 갈리는 풍경 묘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정전기를 일으키는 비슷비슷하게 거칠고 건조한 천에 싸인 채 흐릿한 몸 냄새를 풍기는 여든한 개의 작은 육신이 두 종류의 무의식을 주장하며 교사를 사이에 두고 마치 길처럼, 두 갈래로 나뉘었다.”(p85)

남교사의 남동생은 성 정체성의 갈래만이 아니라 아이와 성인의 갈래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p94)

남동생의 말처럼 이 소설 속의 아이들은 실제 시간 속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기억 속 아이들이고,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며, 작가가 형상화한 아이들이다. 자의식 이후 어린 시절을 포획물로 남겨둔 자들에 대해서는 뱀과 물에서 언급하고 있다.

 

어린 시절도 일생 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p223)

일기나 글쓰기는 기억을 구체화함으로써 성장과 치유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직 를 내세우지 못하고 기어 다니고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절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한참 쓰고 읽고 말하고 있다. 가방도 매일 지니고 다닌다. 대관람차가 허공의 같은 자리로 돌아오듯이 내 방에 매번 돌아오면서도 여행자 같다. 바늘 없는 시간인데도 빠르다, 느리다, 늙었다 하면서 우리는 삶을 더 사는 망상, 죽음을 더 늦추려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망상을 돌리는 윤활유는 대체로 욕망 아닐까.

내가 라는 감각을 가장 극도로 느낄 때는 삶 속에서가 아니라 죽음에 다다를 때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듯 이 책의 여러 단편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겹으로 펼쳐진다. 이 경향은 작가가 내비치는 세계관과 연관된다. 도둑 자매의 끝 문장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뱀과 물에서 이어지는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라는 문장은 대조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간을 비순차적으로 여기는 인식 속에서 상상과 실재는 서로의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힘과 신비에서 동등하며 동시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다. 명확한 서사를 강조하는 질서의 세계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지지만 배수아가 그려내는 동시성의 세계는 끊임없으면서 불쑥불쑥 이어지는 세계다. 폭력과 불협조차도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조건이다.

읽고 쓰고 말하며 매일 경험 속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비친 것만 더 심하게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잘 보고 있는 것일까. 정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신의 뒤통수를 평생 상상으로만 채우는 우리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눈과 빛과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신비한 말들을 이렇게 묶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갈래 길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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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03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뱀과 물」을 못 읽었지만, AgalmA님 글을 읽어보니 언어, 시간, 보편성, 특수성, 경계라는 단어들이 떠오르네요. ^^:) 제겐어려운 작품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패스~.

AgalmA 2018-10-03 23:4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는 책 보면 제가 더 어려워할 책이 많던데요-,.-)...어려운 건 둘째고요. 두꺼워서 저 같은 싫증쟁이가 참기 버거운ㅎㅋㅎ;

2018-10-14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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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4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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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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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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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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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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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4: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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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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