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하게 밤을 새워야 하고 이건 내 잘못인가.
그의 시집 속에 비처럼 쏟아지는 생활과 언어의 무게를 들여다보며, 나는 나의 무게를 생각해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잘못인지 아는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모두 짓눌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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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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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록이 대체로 그렇듯 공감되는 문장도 있지만 인간의 판단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영향받으며 구축되는지 사실 관계를 따지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세가 부족해 두루뭉술한 게 많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240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균형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윤곽, 선과 색, 선과 그 인물의 외관에서 찾아지는 비밀스런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이 시대,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많이 드러났다.


오늘 jtbc 조국 사태 토론에 나온 유시민 작가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상대방을 칭찬해가며 주장을 펼치는 유연함을 보였지만 논쟁의 해결 기미가 안 보이자 그는 슬슬 짜증을 내는 단계로 넘어갔다. 급기야 손석희 사장 같은 언론인은 안 되지만 보통 사람들이 진영 논리를 가지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데올로기 타파를 말년까지 꾸준히 주장했던 칼 포퍼 생각이 났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사고를 할 수 없고 자기 논리에 빠져 순간적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유시민 작가의 그 말은 논쟁에서 이기려다가 자충수를 뒀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주의 주장을 가질 수 있다. 그 말은 그가 늘 좋은 가치로 말하던 자유주의를 확장한 의미일 거라 추측하지만 진영 논리의 긍정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49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62 솔직함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솔직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는 솔직함은 다른 사람에게 신용을 얻고자 하는 교묘한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63 거짓에 대한 혐오는 우리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 우리의 발언을 종교적 교리처럼 존중하게 만들려는 작은 야심이다.

64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 세상에 피해를 주는 만큼 진실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84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것보다 친구를 믿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85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을 낳는 것은 이해 관계일 뿐이다. 우리가 친구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친구에게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86 우리의 불신이 상대의 속임수를 정당화시킨다.

105 합리적인 사람은 우연히 사물의 이치를 찾아낸 사람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알고 그것을 판별하며 음미하는 사람이다.

145 우리는 종종 칭찬이란 수법을 통해서 그런 식이 아니면 감히 폭로할 수 없는 그 사람의 결점을 교묘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른바 독을 넣은 칭찬이란 것이다.

175 변함없는 사랑은 끝없는 변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온갖 장점들을 앞에 두고 어떤 때는 이런 장점을 어떤 때는 저런 장점을 떠올리며 사랑을 이어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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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계절 시작시인선 43
조연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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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처서 지나고」)라고 했다면, 조연호 시인은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라고.


김춘식 평론가 평에 공감해 내가 애써 더 덧붙일 게 없다.
이렇게 품절되긴 아까운 시집.

그 벽 한구석에 나는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을 붙여놓았다. 창 밖은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
ㅡ「죽음의 집」

겨우내 나는 길눈이 어두웠다. 나는 또 詩라는 잘 닫히지 않는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맑은 소년 같던 옆집 고양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평생 바람을 퍼올리던 아카시아숲, 나는 또 病이라는 낡은 산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가 남기고 간 화분 속 석회가루들이 잎새 쪽으로 희게 몰려간다. 고즈넉한 자목련과 친족들의 장례와 트럭 폐유의 냄새, 모든 걸 다 숨기기에 이 상자는 너무 거짓말이 많았다. 소음벽 아래 모인 목련이 용서로 가득 채워진 꽃잎을 꺼낸다. 다만 한 발짝씩 기억에서 발을 옮겨놓았을 뿐인데도, 좌판을 벌이는 노인네의 감자 몇 알처럼 뎅글뎅글하게달이 떠오른다. 생명체가 있을지도 몰라, 시력 나쁜 애인은 깊게 패인 쪽의 달이 신비롭다. 전생이 있다면, 그것이 서로의 열매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의 흔들림이라면, 목련이 있던 자리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목련꽃이 핀다. 달의 인력이, 애인의 월경이 목련을 끌어당긴다. 영영 소년이 될 수 없는 아이와 상자 속의 거짓들은 용서 받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ㅡ「달의 목련」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가 없는 것이 슬펐다
ㅡ「불을 꿈꾸며」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산꼭대기로 오르던 과일장수 여자의 두꺼운 팔뚝이 행복에도 불행에도 가깝지 않았다.
ㅡ「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꺾이고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젊어진다.
ㅡ「나쁜 혈통」

봄볕 내리던 날, 다투어 가지 않아도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만나졌다.
ㅡ「오월」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ㅡ「오월」


너무 많은 질투를 가진 이상한 아동인 빨간 모자, 따뜻해지고 싶은 어린 시절이 모두 불화의 색깔이었다.
ㅡ「빨간 모자」


연인의 퍼즐 맞추기가 석양 아래 거진 끝나가는 것이, 뭔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억새꽃 아래,
굴뚝은 수납장 옆에, 뿌리는 가지 위에, 연인의 손끝이 세상을 하나하나 완성해 간다.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두고 이제 갈림길과 걸음을 마주했으니 어쩌나, 뒤집힌 무당벌레처럼 擬死하는 하늘, 이 길들 중 어느 쪽을 죽여 붉고 무거운 쪽을 가질 수 있을까.
ㅡ「갈림길」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와만 교미했고 뒤집힌 손이 뒤집힌 손을 맞잡았다.
ㅡ「해피엔딩」

배부름과 같거나 비슷해진 말들이 그의 속에서 텅텅 울린다.
ㅡ「斷食」


처음엔 生이 얇은 비닐막 같았고, 다음엔 김 휘휘 도는 찌개그릇 같았고, 나중에 生은 자기 입에 못 담을 험담들이 되어갔다. 
ㅡ「모래의 시작」


희망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내가 울다.
ㅡ「희망」


여름 개암열매에는 아직 세속의 이름이 없다고 애인이 말했다.
ㅡ「몇 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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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의 우주 3부작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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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책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 중력 이론과 미시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 이론이 서로 상충되는 게 많아 통합된 ‘양자중력 이론‘이 향후 물리학의 키 포인트가 되리라는 얘기를 자주 접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중력 이론 중 루프 양자중력 이론가이다. 이 책만으로는 그 이론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우나 아주 흥미로운 설명이 이 책에 가득하다. 예전에 로벨리의 전작 『모든 순간의 물리학』(★★★),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도 읽었는데, 나는 이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가 제일 좋았다.
‘시작‘과 ‘끝‘을 설명하기에 가장 중요한 관건 ‘시간‘이 주제여서 더 재밌었고, 양자이론을 양자역학이라고도 하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기존의 물리학 책과 차별된다. ‘사물‘이 아닌 ‘사건‘ 중심, ‘선형적 흐름‘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내포한 동적 변화‘, ‘에너지‘가 아니라 ‘엔트로피‘를 강조하는 등이 그렇다. 특히 ‘엔트로피‘ 설명이 매력적이다.
우리의 시간관념 형성과 오류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시간의 역사학‘ 책이라고 할만한데, ‘시간‘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다행히 두껍지도 않아 땡큐ㅎ

시간의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와 근사치들의 결과물이다. 앞서 언급한 지구가 평평해 보이는 것이나 태양의 회전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조들, 즉 층들이 복잡하게 모인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조각들은 실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며 어설프고 서투른, 그리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 관점이나 양상에 따라 근사近思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왜냐면 결국,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주보다는 우리와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열과 엔트로피,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 등은 자연을 대략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 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분자들은 촉매처럼 공정들의 얽힘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제하기도 한다.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11장) 인간은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기억으로 뭉쳐져 있는, 엔트로피 증가는 대역사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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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마카롱 에디션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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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미친 방‘이 주어진다면? 자살하지 않은 것이 놀림거리가 되고, ‘늙고, 비루하고 빈털터리이며, 열등하거나 미친, 이방인 여자‘라는 타인의 잔인한 평가에 괴로워하며 더더 내면으로 숨고자 한 여자. 본명마저 숨기고 투명 인간이 되고자 한 여자.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며 존재하고자 한 여자. 이 소설이 나온 지 80년이 지나서도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 여성 비하, 성폭력은 여전해서 이로 인한 정신분열증적 여성 캐릭터를 또 만나게 되는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진 리스의 문학성 때문에 강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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