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 이 단어 강박자 같으니라구. 조르주 페렉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중에 누가 더 승자인지 모르겠네.

흐음, 월리스 문체가 워낙 까다로워 번역하기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좀 더 자연스러웠으면 좋았을걸 아쉽다.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포크너의 난감한 번역 문장을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기다리던 월리스 소설이 국내에 짠~ 하고 나타난 게 어디야ㅜㅜ
내겐 노벨 문학상 이슈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소설 국내 출간이 더 놀라웠다구. 엉엉. 알마 출판사 큰일 했네~

미셸 우엘벡 신간도 10월에 나온다더니 올해 10월은 읽을 게 넘쳐나는 달이다. 이 겨울도 책으로 따땃하려나.







일곱 개의 케이크 빵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제품은 얼핏 종이처럼 보이지만 비닐처럼 찢기는 트랜스폴리머 재질로 개별 밀폐 포장되어 있었다. 이 합성 재질은 M&M으로유명한 마스Mas사가 1980년대 후반 일대 혁신을 일으킨 ‘밀키웨이 다크 제품군에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 대부분의 미국 과자 회사들이 일제히 도입했다. 제품 포장에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흰색과 파란색의 미스터 스퀴지 디자인이 적용돼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세밀한 질감의 검정 선으로 표현된 교도소 창살 뒤에서 미스터 스퀴시 아이콘이 동그란 눈과 입으로 만화적 공포를 표현하고 있고, 밀가루 반죽 색의 통통한 양손으로 전 세계 수감자들의 보편적인 손동작을 재현하여 창살을 하나씩 말아 쥐고 있다는 것이다. 포장지에 담긴 고밀도의 촉촉해 보이는 짙은 색 케이크 빵의 상품명은 펠러니! relonist(*중범죄 뜻)였다. 사뭇 모험적으로 보이는 이 다면적인 이름은 건강에 민감한 오늘날의 소비자들이 대기업에서 만든 고칼로리 스낵을 소비할 때 느끼는 악덕, 탐닉, 일탈,
죄악의 감정을 함축하는 동시에 패러디하고 있었다. 이 상품명의 연상 매트릭스에는 ‘성인‘과 ‘성인의 자율에 대한 암시도 포함돼 있었는데, ㄴ‘과 ‘우- 음으로 점철된 귀엽고 만화적인 상품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펠러니!라는 이름
ㅡ <미스터 스퀴시>

오드리 보겐에게 이 은어의 유래를 설명해야 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가 19번 홀룸의 커다란 ‘퇴창‘을 맹렬히 덮치고 납틀 판유리를 따라 복잡하게 포개지는 여러겹의 번들거리는 면으로 흘러내렸다. 유리와 캔버스 차양을 치는 빗소리는 기계식 혹은 ‘자동식‘ 세차장 소리와 비슷했다. 고급 수입 목재, 어둑한 조명, 각종 주류와 애프터셰이브와 헤어 오일과 고급 수입 담배와 남자들의 젖은 스포츠 의류 냄새들로 가득한 19번 홀룸은 따뜻하고 아늑하고 안락‘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비좁은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위압적인 어른의 무릎 같았다. 일곱 달 가까이 시달려온 극심한 수면장애로 인한 동요와 감각지각의 왜곡 혹은 ‘변형‘이 네 번째 페어웨이에서 덮쳐와 민망한 모습을 보인 후 또다시 덮쳐온 것은 대략 이즈음이었다. 그 증상과 기분은, 대뇌에서 지진 혹은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정서적 스트레스와 만성 수면 박탈이라는 조건하에서 기능해야 했던 신경이 반발하여 ‘신경성 시위‘ 혹은 ‘반란‘을 일으키는 느낌과다르지 않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19번 홀룸에 있는 모든 사물의 색깔이 순식간에 제멋대로 밝아지고 채도가 높아졌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떨리고 울렁거렸다. 개별 사물들은 역설적이게도 뒤로 물러나며 멀어지는 동시에 비정상적일 만큼 또렷이 보이며 윤곽이 매우 매우 세밀하고 분명해졌는데, 꼭 빅토리아 시대의 유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ㅡ<오블리비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프카 전작품이 그럴테지만 이 소설도 프로이트가 분석하기 좋아했을 작품. 꿈속 전이 같은 장면 전개, 성적 몽상 등. 이것과 더불어 만나는 여성마다 연애 분위기가 되는 것은 홍상수 영화와도 매우 흡사하다. 지금에서는 매우 흔하지만 카프카의 이런 플롯은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파혼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여성관에 따른 여성 캐릭터는 전근대적인 게 흠이다.

기묘함이 진지한 상황과 함께 인물의 우스꽝스러움을 유발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참 유사한데 결과적으로는 부조리한 우화가 되는 게 카프카의 변별점이자 주 특징.




K는 홀의 끝 쪽에서 들려오는 째지는 듯한 외침 소리에 방해를 받았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손을 눈 위쪽에 갖다 댔다. 햇빛에 반사된 공기가 희뿌옇게 되어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문제의 인물은 바로 그 세탁부였다. K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그녀가 소란의 장본인이리라 짐작했다. 이번 일의 책임이 그녀에게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분명치 않았다. K는 다만 한 남자가 그녀를 문 쪽 구석으로 끌고 가 끌어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그 여자가 아니라 그 남자였다. 남자는 입을 헤벌린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주위로 작은 원을 그리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근처의 회랑에 있던 사람들은 K가 조성했던 심각한 회합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깨진 것을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K는 당장 그리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었다.

두 사람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K는 여전히 문간에 서 있었다. 여자가 그를 속였다고, 그것도 예심 판사에게 가봐야 한다는 말로 속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심 판사가 다락방 같은 곳에 앉아서 기다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오래 노려본들 계단이 그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때 K는 다락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조그만 표찰이 붙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그리로 가서 어린애처럼 졸렬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보았다. 〈법원 사무처 계단〉. 이 셋집 다락 층에 법원 사무처가 있단 말인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리고 피고의 입장에서 볼 때 법원이 가난하여 극빈자들이 쓰레기 같은 넝마를 버리는 이런 곳에 사무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어도 K의 머릿속에서는 감시원들 생각이 떠날 줄 몰랐다.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아 있어도 도무지 집중이 안 되어서 일을 끝내기 위해 어제보다 조금 더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귀가 중 다시 그 창고 같은 방 앞에 이르자 그는 습관처럼 문을 열어 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캄캄한 어둠 대신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자 당혹스러웠다. 모든 것이 어제저녁 그가 문을 열었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문가 바로 앞쪽에 있던 서식 용지들과 잉크병들, 회초리를 손에 든 태형 형리, 옷을 완벽하게 차려 입고 있는 감시원들, 선반 위의 촛불. 그리고 감시원들은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K는 얼른 문을 홱 닫고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렇게 하면 문이 더 굳게 닫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거의 울상이 되어 사환들에게로 달려갔다.

「당신은 이 법정과 이 법정에서 자행되는 사기 수법을 꿰고 있군요.」 K가 말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밀착해 오는 그녀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니 참 좋아요.」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서 편하게 몸을 고쳐 앉으며 치마를 펴고 블라우스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더니 양손을 그의 목에 두르고서 매달리며 몸을 뒤로 젖혀 오래도록 그를 쳐다보았다. 「만일 내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를 못 도와주나요?」 K가 떠보는 투로 물었다. 여자 조력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꼴이군. 스스로 놀라며 그는 생각했다. 처음엔 뷔르스트너 양을, 그다음엔 정리의 마누라를 그리고 이제는 이 조그만 여자 가정부를 말이야. 이 여자는 말할 수 없이 나를 원하는 것 같군. 원래부터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꼴 좀 봐! 「네.」 레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당신은 내 도움을 원치 않는 것 같군요. 관심조차 없어요. 당신은 정말 고집불통에다 남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아요.」 잠시 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애인은 있나요?」 「없소.」 K가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 사실은 있어요.」 K가 말했다. 「없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사진까지 갖고 다녀요.」 그녀가 자꾸만 졸라 대자 그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서 몸을 구부린 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스냅 사진이었다. 뱅뱅 도는 춤을 추던 끝자락에 찍은 엘자의 사진이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보면 법원에서 인정한 변호사는 없는 셈이고, 법정에 변호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볼 때 모두 엉터리 변호사일 뿐이다. 이런 사실은 변호사라는 직업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K가 앞으로 법원 사무국에 가게 되면 사실 확인을 해볼 겸 변호사실에 한번 들러 보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아마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그들에게 배정된 좁고 천장이 낮은 방 자체가 이미 법원이 변호사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경멸의 빛을 보여 준다. 그 방엔 천장에 나 있는 작은 들창 하나를 통해서만 빛이 들어온다. 그 들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려면 바로 들창 앞쪽에 있는 굴뚝 때문에 연기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고 얼굴까지 그을리는데 그마저도 천장에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먼저 동료 하나를 구해서 그의 등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그 방의 마룻바닥에는 ─ 이런 형편없는 상황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 벌써 1년이 넘게 구멍이 하나 나 있다. 사람 몸 하나가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다리 정도는 빠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이다. 변호사실은 다락의 2층에 있어서 누군가의 다리가 빠지면 그 사람의 다리가 다락방 1층의 천장에 달랑달랑 매달린다. 그곳은 바로 의뢰인들이 기다리는 복도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변호사들 사이에서 치욕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행정 관청 쪽에 불평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다고 변호사들이 자기 돈으로 변호사실의 뭔가를 변경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변호사들을 이렇게 대접하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되도록 변호사의 개입을 배제하고, 피고가 모든 것을 직접 떠맡도록 하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숨 : EXHALATION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일 년 뒤의 미래에서 당신들에게 이 경고를 전송하고 있다. 이것은 백만 초 범위의 네거티브 딜레이 회로가 통신 장치에 장착된 이후 처음으로 도착한 장문의 메시지다. 다른 문제들을 다룬 다른 메시지들도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예측기가 당신에게 끼칠 영향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ㅡ<우리가 해야 할 일>

이런 생각은 동물원 사육사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동물 쪽을 선호한다는—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나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한다. 동물과의 비非성적인 관계는 정상으로 보면서 왜 성적인 관계는 그럴 수가 없을까. 동물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한정된 동의는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왜 그들과 섹스를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일까. 이번에도 애나는 개인적인 불쾌감에 근거하지 않은 반박 논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불쾌감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ㅡ<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ㅡ<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과학은 우리의 아픔을 경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과학에 투신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는 반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탐구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과학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과학은 의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여, 저는 이제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ㅡ<옴팔로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택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취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이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평행우주의 존재에 의해 상쇄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의사 결정은 양자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고전역학적 현상임을 지적했고, 따라서 선택한다는 행위 자체가 우주를 새로운 갈래들로 분기시키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갈래의 평행우주를 형성하는 것은 양자 현상이고, 각 갈래에서의 개인의 선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프리즘이 개인 행위에 수반되는 윤리적 책임을 무효화시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ㅡ<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숨 : EXHALATION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독 중.

1. 테드 창은 상반된 관점의 대비를 계속 보여주는데, 엄밀히 따지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슬립이라 하겠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와 비슷하게 평행우주론을 믿지 않는 결정론을 제시한다. 이후 단편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는 평행우주론에 입각해 펼쳐진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는 여러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나 그들 모두는 ‘변화‘가 아니라 ‘이해‘를 배운다.


2. <숨 : EXHALATION>은 만물 유전 사상 비슷하다고 할까. 오랫동안 ‘영혼‘이라 여기던 자리에 그는 ‘공기‘를 배치한다. 폐 같은 기관을 돌려쓰고 자기가 자신을 해부하는 위치까지 간 인간에겐 ‘자기‘라는 개념은 뒤떨어진 생각으로까지 보인다. 그런 인간이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습은 ‘기압의 흐름‘ 같은 것.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1.
젊은 시절에는 무의미하게만 여겼던 관습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그 효용을 이해하게 되듯이, 어떤 정보를 감추는 것은 그것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산은 깨달았습니다. "아뇨, 오히려 경고해주지 않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2. "...정상적인 방법으로 복도를 거쳐가는 것보다 더 빨리목적하는 방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 말입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방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까?"

"회개와 속죄는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유감이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미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잠시 이 말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은 전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바샤라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낙담을 안기는 말처럼 들렸지만, 어찌 보면 그 사실이 일종의 보장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도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면 향후 이십 년 동안은 그 어떤 것도 저를 죽일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아무 걱정 없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습니다. 살아남을 것이 확실하니까요."

3. 현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4.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5. "생각건대, 제가 가진 가장 값진 지식은 이것입니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숨 : EXHALATION>

1. "내 몸은 어디 있는 것일까? 나의 시력과 동작을 더 넓은 공간으로 연장해준 도관들은 나의 원래의 눈과 손을 뇌에 연결하고 있는 도관들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조작기들은 실질적으로 내 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내 전망경 끝에 달린 확대경들은 실질적으로 내 눈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 확장된 뇌의 한가운데에, 해체된 조그만 몸이 위치해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내 몸을 배치해놓고, 나는 나 자신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미경을 돌려 기억 담당 하위 부품 중 하나의 형태를 관찰했다. 나 자신의 기억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단지 기억이 기록된 방법을 추측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겹겹이 포개진 박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톱니바퀴나 개폐기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의외였다. 대신 하위 부품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공기 관들의 뱅크(동시에 작동하도록 배열된 부품이나 단자 — 옮긴이)였다. 이 세관들의 틈새로 뱅크의 내부를 지나가는 잔물결 같은 것이 흘끗 보였다."

2.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추정과 달리, 공기는 단순히 우리의 사고를 발생시키는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3. "뇌의 연구가 과거의 비밀이 아닌 미래의 궁극적 운명을 밝혀냈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과거에 관해 중요한 뭔가를 알아낸 것이라고 믿는다. 우주는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비축된 데서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고찰은 우리의 우주가 점진적으로 내쉬는 숨에 의해 생성된 소용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내쉼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4.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년 미제 사건이던 화성 연쇄살인자 이춘재가 쏟아내는 범죄 사실, 검찰과 사법 정의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펼쳐보지 않을 수 없는 책.
마녀 재판에서 시작하는 담담한 서술에서 푸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진지해서 좋다.









오늘날 9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면, 어렵지 않게 신성 재판 제도의 결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 불과 물로 행한 신성 재판에서 유죄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 죄가 없는 남자나 여자도 당연히 뜨거운 쇳덩이나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물통에 가라앉을지 아닐지 여부는 주로 폐 안의 공기량의 문제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체지방 비율의 문제였다. 여자와 몸집이 큰 남자는 당연히 (그리고 불공평하게) 불리했다.
비록 그 절차가 타당했더라도 그런 신성 재판은 어떤 형태의 진정한 일관성도 없이 운영되었다.

지금부터 900년 이후의 누군가는 현재 우리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볼까?
사실을 말하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선조들의 신성 재판을 보고 받는 충격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가 용인하는 정해진 절차와 체계적인 불공정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시대 판사와 배심원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수백 년 전에 재판을 주재했던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서 인지하는 만큼이나 명백한 편견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형사법을 살펴보면서 이단 금지만큼이나 잘못되고 불합리한 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다수의 남녀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얼마나 괴로운 문제인가? 낮춰 잡아도 25명 가운데 1명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1980년대 DNA 검사의 발전은 우리 사법제도를 따라다니는 문제점과 일별하게 해준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깜깜한 거대한 저택 안에서 겨우 성냥 하나 켠 모양새가 아닌가 싶다. 어슴푸레한 빛 덕분에 우리의 형사 사건 처리 절차가 끔찍하게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DNA 검사 이후 300명이 넘는 사람이 유전자 불일치로 혐의를 벗었는데, 이들 가운데 95퍼센트 이상이 살인범과 강간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었다. 존경받는 법관이자 법률가인 러니드 핸드Learned Hand가 언젠가 장담한 것처럼 ‘유죄 판결을 받은 결백한 남자의 유령’이 떠도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 아니다.

우리 사법제도가 직면한 위기의 전체 규모는 몇 배나 크다. 혐의를 풀어줄지 모르는 DNA 증거 활용이 불가능해서, 좋은 변호사를 찾지 못해서, 잘못된 유죄 판결이지만 굳이 싸울 가치가 없어 포기한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