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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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들어야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명반같은 시집이다. 내 몸은 길인가 그림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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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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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을 때 처음에는 글자만 읽히다가, 다음에 문장이 읽히고, 이내 그 시의 본의를 깨달을 때가 있다.

 

한참 전에 서울 변두리 팔당호가 가까운 곳에서 살았었다. 호수가 가까우니 안개가 자주 꼈었다.

함민복 시 <안개>를 읽고 있자니 그 시절 새벽 안개를 뚫고 서울로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다.

안개가 자욱한 추운 겨울날 새벽, 집을 나서면 아직 새순도 돋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안개꽃이 뒤덮여 있었다. 

희부연 안개 속에 설백색으로 덧칠된 나무숲을 지나는 시간이 꽤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안개는 그렇게 사물과 그 배경을 모두 지우고 내 몸 속 어딘가에 숨겨진 더듬이를 내밀게 한다.

더듬더듬, 시인처럼

나도 가끔 세상을 그렇게 더듬어 보고 싶다.

 

 

안개

안개는 풍경을 지우며
풍경을 그린다

안개는 건물을 지워
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다

안개는 나무를 지워
무심히 지나쳐 보지 못하던 나무를 그려보게 한다

안개는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나누어놓는다

안개는 사방 숨은 거미줄을 색출한다
부드러운 감옥 안개에 갇히면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다

시선의 밀어냄을 흡수로 맞서며
눈동자에 겸손 축여주는 안개의 벽

안개는 물의 침묵이다
안개는 침묵의 꽃이다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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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24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민북 시집을 사셨군요. 가만 보면 한국에서 글 써서(문학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10명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돌궐 2015-06-24 06:50   좋아요 0 | URL
네 곰곰 님 추천하신 함민복, 김신용, 문태준 시집 한 권씩 샀습니다. 김신용, 문태준 시집 다른 것도 있던데 그것도 나중에 사서 보려구요.
김신용 <환상통>은 자주 들춰보게 될 거 같아서 아예 비니루로 쌌습니다. 감사합니다.^^

돌궐 2015-06-24 06:59   좋아요 0 | URL
참, 책 표지 안쪽에 날짜 적고 `곰곰님 추천`이라고 썼답니다.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05:46   좋아요 0 | URL
어쿠. 감사합니다. 제 기준에 좋은 시집이라 추천이 쉽지는 않습니다. 누가 추천한 걸 사서 읽은 적 있는데 하도 후져서 욕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김신용이란 작가는 제가 눈여겨보는 작가입니다.
 
이런 시가 하필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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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관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제된 글로 표현한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12)

 

이 시로 김사인 시인은 2005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한편만으로도 시집은 별3개 깔고 들어간다.

나는 시를 많이 모르지만 시집 한 권에서 다섯 편 이상 뽑을 수 있다면 별 다섯 개를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81)

 

 

 

옛 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석거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86-87)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렷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쪽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88-89)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38)

 

 

#

누가 시를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고 했다던데, 나는 그저 시는 허세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복수면 어떻고 허세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허세로 가득한 일장춘몽 아니던가.

허세고 복수고 간에 이런 시를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옆에 떨어진 나뭇잎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어서 고맙고,

내 안에 숨겨진 '날선 조선낫' 한 자루가 무언가 생각해 본 것도 고맙고,

"손도 한번 못잡아"보고 떠났던 아이가 생각나서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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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2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하지 않고 멋 부리지 않아 더 와닿네요

돌궐 2015-03-21 23:05   좋아요 0 | URL
시집 속에는 조금 어려운 시도 있긴 한데, 아직 제가 다 소화를 못했습니다.^^;

해피북 2015-03-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렇게 날것 처럼 생생하게 다가올때 크게 와닿는거 같아요 ^~^

돌궐 2015-03-21 23:07   좋아요 0 | URL
김사인 시의 장점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순대를 사서 먹었다
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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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시집 두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하나가 <저녁 6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시집인데, 이제서야 겨우 읽었다.

몇 년 전에 신문(아마 한겨레였을 듯)에서 '갈퀴'를 읽고 나서부터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녁 밥을 먹고 자려고 누운 자리에서 읽기 시작하여 내처 해설까지 다 읽었으니, 이건 시집 한 권 읽으려면 한참이 걸리는 나로선 전례가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으니 이리 됐을 뿐이다.

무슨 숙제를 마친 것도 같고, 빚을 갚은 것 같은 심정도 든다.

얼마 전에 올린 페이퍼에 '식물성 곱창'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에 실려있다고 썼었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시다.

이재무의 시집 두 권을 나란히 서점에서 뽑아서 읽다가 '식물성 곱창'이 좋아서 촬영한 뒤 옮겨적었는데, <슬픔에게..>에 실린 걸로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식물성 곱창'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아마 이 어처구니 없는 오류에 대한 인식이 나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 애써 끝까지 읽은 것이고.

 

아무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시들이 많이 있었다.

사회와 시대풍조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능청스러운 낭만과, 삶에 대한 회한, 그리고 문학에 관한 성찰이 여러 시편들 속에 담겨 있더라. 아래에 시 다섯 편만 옮겨 본다.

 

 

갈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올리는 것이다

눈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가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11)

 

 

넘어진 의자

 

 

누가 저 의자를 넘어뜨렸나

한 평 반 벌방 속 젖어 축축한 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던 의자

고시원 옥상에 버려져 있다

한쪽 다리가 꺾일 때까지

비닐가죽 깔판 속 근육 뭉친 솜들이

터진 틈으로 질질 샐 때까지

묵묵히 무게를 견뎌온

저 순결한 이타,

누가 있어 기억이나 해줄 것인가

비명도 없이 쏟아지는 비

흠뻑 젖는 제 영혼 추슬러

스스로의 무릎에 앉히고 있는,

버려진 의자

(64)

 

 

 

울음이 없는 개

 

 

몸속에 꿈틀대던 늑대의 유전인자,

세상과 불화하며 광목 찢듯 부우욱

하늘 찢으며 서슬 푸른 울음 울고 싶었다

곧게 꼬리 세우고 송곳니 번뜩이며

울타리 침범하는 무리 기함하게 하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본성대로 통 크게 울며

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

배고파 달이나 뜯는 밤이 올지라도

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

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목에는 제도의 줄이 채워져 있고

줄이 허락하는 생활의 마당 안에서

정해진 일과의 트랙 돌고 있었다

체제의 수술대에 눕혀져 수술당한 성대로

저 홀로 고아를 살며 자주 꼬리

흔들고 있었다 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

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울음

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

(80-81)

 

 

 

팽이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려댈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96-97)

 

 

 

 

관상용 대나무

 

 

 

도회지 공원이나 술집 한구석

장식품으로 살아가는 저 홀로 대나무

제 뜻과 상관없이 이주되어

실향을 사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저 나무에게서

옛소련 시절 강제분할 이주를 겪은

사할린 동포의 얼굴을 본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오의 눈물을,

죽어 상품이 된 체 게바라의 혁명을 본다

한 시대 양심의 본이었으나

자본의 데릴사위가 되어 웃음 파는

쓸쓸한 선비의 초상을

(98)

 

 

 

「그 여자」 중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를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57)

「말과 권력」 중에서

탕진만이 욕망을 쉬게 하리라
사는 동안, 살기 위하여 나 말에 멱살 잡혀
실감과는 상관없는 생 살아왔는지 모른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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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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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에 한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누구인지 알고 보냈다. 해마다 있던 환경미화 때문에 여학생들 교실에 올라가 못질 해주다 알게 된 애니까. 등교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보던 건 덤이었고, 함께 혼성 합창부 활동을 했던 건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이므로 절대로 우연이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고 아담한 키와 날씬한 몸매에 머리를 늘 두 갈래로 단정하게 땋고 다니던 그 애한테 편지를 보낸 건 분명히 내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남들 눈에 잘 안 띄는(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 조용한 아이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훑어보다가 뒷쪽 주소록에서 그 아이 주소를 '매의 눈'으로 찾아냈다. 그리고 친구 몰래 속으로 그 주소를 달달 외웠다. 기말고사 시작 1분 전에 필사적으로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달달.

 

그렇게 외워 온 주소를 집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적어 두고는 아마도 얼마 뒤엔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정말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고나 할까. 어차피 답장도 안 올건데 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인지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지내는 친구인 양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를 편지에 썼었다. 같잖은 사랑 고백이나 되도 않는 허세를 다 빼고 그냥 내 일상과 간단한 소개 정도를 휘갈겨 썼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하는 부담스럽고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한 1주일 쯤 뒤인가 답장이 왔다.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가 우편함에서 가져온 편지들 가운데 하나를 건네주며 "너한테 편지 왔다. 근데 걔 누구니?"하던 그 순간.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읽던 그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겁지 않게 자기소개를 하는 편안한 편지였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왜 나한테 편지를 썼냐고 물어보더라. 여기서 냉큼 너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하면 안되는 거다. 그거야 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좋아하더라도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겐 결정적인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나이 든 지금의 내가 말한다.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도시 애덤스는 생판 모르는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때 줄리엣의 소유였던 찰스 램의 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며, 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데 책을 더 구할 수 없느냐고. 자기가 살고 있는 건지 섬은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그는 찰스 램의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소개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도시 첫 편지를 다시 읽는다면 찰스 램 이야기가 결국 도시와 건지 섬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19)

 

여기서 나는 도시가 '실례를 무릅쓰고' 줄리엣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찰스 램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건 내가 옛날 그 여자애한테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로 편지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찰스 램은 핑계였을 뿐이다. 근거는? 추신에 나와 있다.

 

추신. 제 친구 모저리 부인도 한때 당신의 것이던 소책자를 구입했답니다. 제목은 《불타는 떨기나무는 과연 존재했을까? 모세와 십계명을 위한 변론》이죠. 모저리 부인은 당신이 여백에 남긴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 아니면 군중통제의 수단?' 어느 쪽인지 결론이 났습니까? (19)

 

여기서 도시는 모저리 부인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자신도 역시 줄리엣의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도시가 줄리엣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찰스 램을 읽는 사람이며 또 다른 책에다는 저런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던 "당신을 알고 싶어요"가 아니었을까?


추신에 굳이 줄리엣이 남긴 글을 언급하면서 그 결론이 궁금하다고 한 것은 고도의 시네루(이런 말밖에는 생각이 안 나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였다. 물론 스스로 시네루를 준다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엄청난 회전이 들어간 白球가 된 셈이다.

 

#
옛날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 후로도 죽 편지를 교환했다. 음악 얘기도 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 애는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공부도 잘 하는(전교 1등이었다) 여자애가 헤비메탈이라니! 난 그 의외성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말했던 임펠리테리(Impellitteri) 앨범부터 사서 듣기 시작했다. 임펠리테리 하면 보통 화려한 기타 속주로 잘 알려진 명연주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지만 난 1번과 2번 트랙 <Stand in Line>과 <Since You've Been Gone>을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너무 들어서 테잎이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Impellitteri - <SInce You've Been Gone>

 

각설하고, 도시에게도 줄리엣은 의외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저 책이나 더 구해주고 선심 좀 써서 찰스 램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의 기대에 걸맞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편지 왕래가 계속될 일이 없었겠지. 나중에 줄리엣이 자기는 작가라는 걸 밝히고 건지 섬의 북클럽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까지 하니 도시는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도시는 편지를 쓰면서 단순한 정보 이상의 뭔가를 더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저리 부인 소유 책에 적힌 그녀의 필체를 통해 젊은 여성임을 간파했다든지, 아니면 막연한 대화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리 전쟁 뒤의 힘든 상황이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 아닌가.

도시에게 보낸 첫 답장에서 줄리엣은 독서와 자신의 메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22)

추신. 모세에 관한 건 도무지 결론이 나질 않네요. 아직도 고민 중이랍니다. (23)

 

게다가 친절하게도 줄리엣은 《찰스 램 서간집》에 나오는 재미난 구절('술, 술, 술, 짠, 짠, 짠, 벌컥, 벌컥, 벌컥, 팽, 팽, 팽, 어질, 어질, 어질, 쾅! 난 결국 구제 불능이 되고야 말겠지. 이틀을 내리 술만 들이켜고 있으니. 내 도덕관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심도 희미해져가(원문: Buz, buz, buz, bum, bum, bum, wheeze, wheeze, wheeze, fen, fen, fen, tinky, tinky, tinky, cr'annch! I shall certainly come to be comdemned at last. I have been drinking too much for two days running. I find my moral sense in the last stage of a consumption and my religion getting faint)')까지 일부러 소개를 해주고, 돼지구이 만찬의 비밀과 감자껍질파이의 정체에 대해 질문까지 했으니 이제 쌍방향 교류의 전용선이 깔린 셈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라는 물음에 줄리엣은 "저도 당신이 궁금해요"라고 화답한 것이다. 내 뜬금없는 편지에 망설이거나 얌전 빼지 않고 답장을 해 주었던 그때 그 아이처럼.

 

요즘에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알고 지내는 사람(사실은 id)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그들이 쓴 글에 덧글을 다는 것만으로 손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겨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겨우 pc통신만 몇 개 있었지 인터넷은 흔히 쓸 수 없었던 시대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속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가장 요긴한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써 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각박하게 살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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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줄리엣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돼지 구이 파티의 유례와 몇 가지 부탁, 그리고 1944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 대한 질문을 적었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후 엘리자베스는 거의 이 책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독서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엘리자베스였다.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나는 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편지에 엘리자베스에 대해 쓴 내용들을 보면 그렇다. 책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만일 내가 도시였다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을 것 같고, 독일군 의무관이자 친구가 된 크리스티안과 엘리자베스가 서로 깊은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크게 절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서서 엘리자베스의 딸 킷을 보살펴 온 사실이나(심지어 그는 줄리엣이 킷을 낳을 때 에번과 이솔라, 아멜리아와 함께 아이를 받는다) 뒤에 프랑스 여인 레미를 건지 섬으로 애써 데리고 와서 성심껏 보살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지심이었다고 설명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크리스티안과 친구가 된 이후, 도시가 어느 날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티안이 연인이란 걸 깨닫는 장면은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제가 물 나르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담배를 권했고, 우리는 길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건지 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에 관해, 책이나 농장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았습니다. 늘 전쟁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만 했지요. 한번은 우리 둘이 그렇게 서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덜컹덜컹 달려오더군요.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전날 밤도 거의 꼬박 새우며 간호 일을 한 터였고, 주민 대부분처럼 그녀의 옷도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그녀가 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더군요.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다가와 섰습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본 저는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제야 그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아챈 겁니다. (158)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겠지만 그는 기꺼이 두 사람을 축복했으리라 본다. 건지 섬에 온 줄리엣이 도시한테 크리스티안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 말에서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독일인과 비슷할 거예요. 키가 크고 금발이고 눈동자는 푸른색인, 다만 그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원문: He looked like the German you imagine - tall, blond hair, blue eyes - except he could feel pain). (256)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크리스티안이었기 때문에 도시는 그를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인정해줄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의 딸인 킷도 마치 자신의 딸인 양 사랑해 줄 수 있었겠지. 도시가 킷에 대해 쓴 글을 보자.

 

킷이 엘리자베스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회색 눈동자와 집중할 때의 표정만은 쏙 빼닮았어요.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감정이 아주 격렬해요. 거의 젖먹이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킷이 악을 쓰면 창유리가 흔들리고, 그 조그만 손으로 제 손가락을 움켜잡으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지요. 저는 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엘리자베스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더러 천생 아빠가 될 운명이라며, 자신은 제가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할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티안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그건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킷을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198)

 

나만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정도면 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숨겨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쓸쓸한 심정을 나는 저 담담한 글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심정은 글로 적혀 있기에 읽히는 게 아니라 글 속에 숨겨진 진실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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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 지로가 건지 섬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다만 레미가 등장한 이후 도시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곧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시가 줄리엣에게 이제 막 품기 시작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시와 줄리엣의 감정이 무르익어 가려던 결정적 순간에 때마침 건지 섬을 방문한 마크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줄리엣을 부르고, 도시는 망연히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도시는 여행가방 빌려줘서 고맙다는 얼척 없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캐릭터를 가만히 놔두지 말라는 소설작법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자들은 "안 돼~~~!" 라고 할 것이며, 남자들은 "이런 제기랄! 이 자식은 왜 하필 지금 온 거야?"라고들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는 줄리엣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마크란 놈은 한 눈에 보기에도 타고난 외모와 엄청난 재력을 지닌 사람인 것 같았을 텐데. 도시가 크리스티안이나 마크와 같은 매력적인 남자들에게 느낀 열등감은 줄리엣이 섬으로 오기 전 보냈던 1946년 4월 2일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도시의 감정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문장이다.

 

건지 섬에 멀쩡한 남자는 별로 없었고, 재미있는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지치고 초라하고 수심 가득하며, 남루하고 신발도 없이 더러웠습니다. 우리는 패배자였고, 그렇게 보였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기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없었지요. 건지 섬 남자들은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키 크고 금발에 잘생기고 피부는 구릿빛이었습니다. 흡사 신의 이미지였지요. 그들은 화려한 파티를 열고 명랑하게 열성적으로 어울렸으며, 차가 있고 돈도 있고 밤새 춤을 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와 데이트하는 아가씨들 중 일부가 아버지에게는 담배를, 가족에게는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티에서 돌아올 때면 롤빵, 파이, 과일, 완자, 젤리 등을 핸드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고 그 가족은 다음 날 진수성찬을 만끽할 수 있었어요. (147-148)

 

도시는 또 다시 절망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엘리자베스를 잊고 새로 시작해 보려는데 어디선가 또 훤칠한(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그녀를 나꿔채 갔으니 오죽 했을까. 과연 이런 게 자기 운명이려니 하면서 크게 낙담했을 법하다. 문득 건지 섬에 온 레미가 북클럽에서 '운명 예정설' 토론 중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만약 운명이 예정된 것이라면, 신은 악마입니다." (374)

 

도시는 레이가 겪었던 끔찍한 불행과 비극에 견준다면 자신의 이 사소하고 개인적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충격과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레미의 저 짧은 말로도 충분히 대변된다.
도시는 그런 레미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줄리엣은 애초부터 자기와 맞지 않는, 접근도 불가능한 존재였을 뿐이며 한때 흔들렸던 마음은 이제 정리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자조적인 마음을 둔감한 줄리엣은 알아채지 못하고 소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나 썼다.

 

도시에 대한 너의 질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어. 킷한테 가야 한다고. 아니면 레미나. 요즘은 도시를 거의 만나지 못할뿐더러 아주 가끔 마주칠 때도 그 남자는 당췌 말이 없어. 그것도 로체스터(《제인 에어》의 남자 주인공)처럼 로맨틱하게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게 아니고, 반감을 표하는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이야.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정말 몰라. 처음 건지 섬에 왔을 때 도시는 내 친구였어. 함께 찰스 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섬 여기저기를 산책했지.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웠어. 그런데 해안 절벽에서의 그 끔찍한 밤 이후로 그가 입을 다물어버렸어. 어쨌든 나한테는 말을 걸지 않는다고. 지독하게 실망스러운 일이지. 서로 마음이 통하던 그 감정이 그립지만, 그 감정 역시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353)

 

도시가 왜 그렇게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을 지켰겠는가. 별 다섯 개 주려고 리뷰까지 쓰고 있는 소설책의 여주인공한테 할 만한 얘긴 아니지만,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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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도시가 줄리엣에게 쓴 편지는 사실 몇 편 안된다. 그 외에는 줄리엣이 서술한 도시나 다른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 얘기한 내용들로 그의 상황과 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문장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남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레미를 만나러 프랑스로 갔을 때 도시는 줄리엣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건 심지어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다. 편지를 쓰면서 도시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편지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의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건 책 줄거리 소개가 아닌 한 등장인물에 관한 고찰이므로 거기에 집중하는 게 나을 성싶다. 나는 변죽만 울리는 편지글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시 애덤스의 감정을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개인적 경험이 마침 책을 읽으면서 기억났기 때문에 서평이랍시고 끄적여 보았다.

 

들은 얘긴데, 이 소설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와 줄리엣에 누가 캐스팅될 것인가 궁금하겠지만 난 그들보다 도시 역할로 누가 선정될까, 그리고 이 남자의 모습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지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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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테라, 메탈리카도 아니고 임펠리티면 그당시 웬만한 건 다 섭렵했다는 건데ㅎ
정신분석적으로 편지 등의 욕망에 대한 분석글들 읽으면 정말 인간의 모든 것이 와장창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저는 알라딘 서재도 건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쟁과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요

돌궐 2015-02-12 23:29   좋아요 0 | URL
그랬죠. 그 아인 그랜드마스터급 메탈덕후였어요. 물론 팝도 많이 들었구요. 나중에 신촌 모롹카페에서 같이 헤드뱅잉도 했어요.ㅋㅋㅋ
와장창하는 정신분석은 언제 한 번 소개해 주세요. 재밌을 거 같아요.
음... 알라딘 서재가 건지라는 말씀은 의미심장 하군요.^^ 그럼 Agalma 님의 줄리엣은 어디에 계실까요?

AgalmA 2015-02-1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을 다시 시작해서 서재리뷰 올리기가 쉽진 않을 거 같지만 줄리엣 다리도 다 사라지고 구두만 남기 전에 차곡차곡 걸어가려 합니다. 만날 것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요...허헛;

돌궐 2015-02-12 23:59   좋아요 1 | URL
줄리엣 다리는 사라지고 구두만 남았네. - 난해한 시를 읽는 거 같습니다.ㅎㅎ
리뷰는 저 죽기 전에만 천천히 해 주세요.ㅋ

다락방 2015-02-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성스런 리뷰를 읽으니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케이트 윈슬렛`이 나온다고 들은것 같은데, 어떤 역할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돌궐님.

돌궐 2015-02-24 12:5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 님, 덕분에 본문 읽다가 잘못 쓴 거 하나 고쳤네요.^^; 감사합니다.
2번 트랙은 <Since You`ve Been Gone>이었습니다. 이 노래도 참 좋아요.
내친김에 동영상도 바꿧어요. 리뷰에도 어울리는 거 같아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