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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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큭큭큭, 낄낄대며 읽었던 소설.

예전에 썼던 독후감을 옮긴다(소설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썼더라).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278-279쪽)

  

292-292쪽의 난장판 '웃슬픈' 야구 경기를 보면서 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공교롭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난 뒤 잡은 이 책에서 별명이 조르바인 등장인물이 나오니까 이상했다.

결국 두 소설 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셈인데, 공감하는 바는 이 책이 더 컸다.

주인공이 살아온 시절과 장소가 나와 얼추 겹쳐서인가? 모르겠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는 건가?

삼미의 야구를 해 보면 알 수 있을까?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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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미하면 할 이야기 많죠 ㅋㅋ

돌궐 2015-02-08 23:01   좋아요 0 | URL
ㅎㅎ 공감하시는군요.

붉은돼지 2015-02-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있죠...짠하기도 하고요..

어디선가 보니 박민규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고 하더군요...

돌궐 2015-02-09 09:56   좋아요 0 | URL
가끔은 슈퍼스타들처럼 좀 망가지기도 해야하는데, 그러질 못해요.^^;
박민규가 밴드도 한다던데, 그런 일탈을 할 수 있단 게 참 부러워요.

yamoo 2015-02-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박민규의 소설이 재미가 없습니다. 뭐가 좋은지도 딱히 모르겠구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ㅎ

돌궐 2015-02-09 17:2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 작가 있어요. 좋다고는 하는데 왜인지 모르겠는 그런 작가 ㅎㅎ
그런 경우에 전 두고 보지도 않아요.ㅋ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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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집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로알드 달이니까 읽어 보았다.

 

사실 로알달이야 애들한테 <멋진 여우씨> 읽어주면서 알게 되었고, <찰리와 쵸콜릿 공장>은 영화로도 나와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몇 년 전 <제임스와 슈퍼복숭아>을 원서로 읽어보고 나서는 왜들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 거 같았다.

우연히 <맛>이라는 성인용 단편소설집이 있는 걸 알고 읽어보았는데,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발칙하고 찰졌다.

피식피식 실소가 터지기도 하고, 허망하거나 짜릿하거나 끔찍하지만 흥분되는 결말들은 역시 로알드 달이구나 싶었다.

 

<목사의 기쁨>에서는 간교한 골동품 장수의 횡재와 곧바로 이어지는 몰락이 기가 막히다. 중간부터 약간 결말이 예상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손님>의 마지막 반전에서 다시금 되새기는 붓다의 경구. "인간은 결국 똥오줌으로 가득찬 가죽주머니다." 욕망에 눈 멀지 말자.

<맛>은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반전이지만 로알드 달의 이야기가 원전이라고 그러네.

<항해 거리>,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남쪽 남자>에선 일확천금을 노린 인간들의 허망한 결말을 보여준다.

<정복왕 에드워드>, <하늘로 가는 길>, <피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에서는 살인(또는 殺猫)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범죄자들을 동정해선 안되지만... 듣고 보면 그들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 공감이 가는, 그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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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원서로 읽으신 기분 정말 좋으셨겠어요! 그런 내공이 참 부럽습니다^^ 맛이라는 소설을 읽고 저도 큭큭거리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블랙 유머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머러스함이 매력이라면 매력일까요 ㅎㅎ

돌궐 2015-01-04 22:52   좋아요 0 | URL
어익후, 내공이랄 거까진 없구요.. 공부 삼아 조금씩 떠듬떠듬 읽는 것뿐입니다.
기회가 되면 성인용 원서도 함 도전해 보려구요.ㅎㅎ
해피북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반갑고, 감사합니다.^^
알라딘에서 북플을 하면 취향이 비슷한 다른 분들 읽는 책을 알려준다기에... 새해부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분들도 만나고 좋네요.ㅎㅎ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제4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수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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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보고 표지와 제목 글꼴이 독특해서 찍어뒀던 책인데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빌려 읽었다. 뒤표지 안쪽에는 취향존중스티커 15개도 있는데 대출했던 사람들이 모두 착했던지 아무도 스티커를 떼지 않았더라.

 

소개글에 보니까 ‘자진모리장단처럼 숨 가쁘게 휘몰아치는 익살맞은 문장’이라던데, 문장도 문장이지만 나오는 각종 루저들의 캐릭터와 이야기들이 매우 우의적이랄까, 뭔가 헛웃음도 나왔다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감도 되었다가 연민도 느껴졌다. 그런데 또 이 루저들이 벌인 일은 자못 통쾌하고 짜릿하다. 루저는 졸지에 영웅이 된다.

 

장면과 캐릭터들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그들이 왜 ‘안티 버틀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씩 하나씩 밝혀지는 게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 같았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비슷한 스타일로 천명관의 <고래>가 떠올랐다. 그저 킬링타임용 통속 소설은 아니고 나름 묵직한 메시지도 있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는 거, 내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거. 여기서 ‘취향’은 또 다른 낱말들로도 바꿀 수 있겠지. 

 

 

책에서

 

* 김B가 한에게 ‘안티버틀러’를 소개하면서 하는 말.

“자신들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근거가, 그들이 고양이를 ‘이해’하기 때문이란 거죠. 그와 더불어 그들이 고양이와 ‘소통’하는 것이 자신들의 교감 능력이 뛰어나서라고 얘기합니다. 이것들이 무슨 얘기냐면, 고양이 비애호가들을 이해력과 교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본다는 얘기예요. 어딘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한다는 얘기죠. 단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

(중략)

“무엇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러니까 고양이 비애호가들이 실제로 이해력과 교감 능력이 떨어진다면, 버틀러들도 싫어할 이유가 없겠죠. 그러나 한 씨도 아시다시피, 그런 건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요. 무엇을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인간 객체마다 본연히 다른 그것을,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뭉뚱그려 비하하는지에 대해 말입니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이 고양이 비애호가를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는 까닭은, 그게 그들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나 얄팍한 수작이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실제로 빛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폄하하고 깎아내리면서 자신의 반짝임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요. 보통 자신의 특별함을 간단히 추구하려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을 짓밟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아주 간단히 특별함을 공고하게 해버리죠. 그렇지도 않으면서요.” (84-85)

 

 

* 안티 버틀러의 마지막 유튜브 동영상 대사 중에서

“저희는 ‘안티 버틀러’, 이 세상의 모든 버틀러에 반대합니다. 여기서 버틀러란, ‘집사’라는 의미로 일부 고양이 애호가를 지칭하는 데서 출발하였지만 그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에 근거해 타인을 차별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 자신의 취향을 숭배하기 때문에 타인의 취향을 낮잡아 보는 모든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취향이란 무엇일까요? 이 시대에 취향이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지표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에 매혹되어 있는지는 우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일까요? 우리는 그 뒤에서 일종의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변 애호가 중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이른바 저희가 버틀러라고 부르는 이들이죠. 그들은 주로 소수의 무리였을 겁니다. 다수에 의해 이해받지 못하는 데 염증을 느끼고 공통의 취향을 가진 이들끼리 뭉치게 되었을 테니까요. 그게 그들이 배타적이 된 역사적 배경이었죠. 긍정적인 결과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보다 더 깊은 수준의 연구와 학습을 하는 경향을 보였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자의식이 싹텄지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코 긍정적이라고 볼 순 없었지만 그들이 소수인 이상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버틀러들의 위험성이 두각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 다수가 되었을 경우의 일이었습니다.“ (325-326)

“이러한 연유로 저희는 장국태 의원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궁극적 목적은 특정 취향에 지배되는 세상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취향은 동일한 만큼의 가치를 지닙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우열이 가려질 수는 없습니다. 호불호가 외압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것은 취향이란 것이 그만큼 순수하단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의 취향이 소중하다면 타인의 취향 또한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든 이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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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3 : 불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오덕 일기 3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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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이오덕 일기>가 들어와 있는 걸 보고 한 권 집어들었다. 한때 이오덕 선생이 쓰신 <우리글 바로쓰기>를 정독하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이 책을 보게 될 가능성도 줄었을 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기를 정리한 3권을 빼내어 잠깐 훑어만 보려고 했다. 내 어리고, 치기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에 이오덕 선생은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데군데 읽어 본 글들이 너무나 울림이 커서 결국 빌려와서 읽고 있다.

 

87년 민주화 운동 때 선생을 비롯해서 문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 일기를 통해 마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간 듯했고, 김지하가 '저주의 굿판을 집어치워라'고 했을 때 이오덕 선생과 문인들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내막이 드러나 있다. 일기에 따르면 당시 고은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작가회의에서는 김지하 시인의 제명까지 결의했다고 나온다.

반면에 3권에서 이오덕 선생이 칭찬하고 좋게 본 작가들은 김유정, 김남주, 리영희, 백석, 그리고 권정생 선생 등이다.

 

한 사람의 일기가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헌이 되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잠깐 살펴본 이 일기 몇 줄만으로도 한 시대를 뚜렷한 방향과 사상으로 살아갔던 인물의 기록은 엄청난 무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한가하다면 이 다섯 권 일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정독하고 싶다. 

 

 

초록

 

1987년 6월 20일 토요일

......

오후에는 종로 2가에서 송현 씨를 만나려고 현실문제연구소에 갔더니 송현 씨가 민음사 앞에 있다고 해서 그 사무실에 있는 젊은이 한 분과 그쪽으로 가는데, 조금 전에 왔던 수협 건물 앞에서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나와 같이 가던 젊은이가 박수를 쳤는데 나는 한 손에 우산을 짚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아이들의 그 씩씩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화락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아, 이 젊은이들이 있어 우리 겨레가 살아 있는 것 아닌가. (91)

 

1987년 6월 26일 금요일

......

... 이쪽저쪽 인도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면서 박수를 치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겨우 빠져나가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든다. 아, 이 광경, 이 역사적인 광경. 나는 최루탄 가스의 눈물이 아니고 진짜 눈물이 났다. 나도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었다.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고, 교통을 차단시켜 아주 마음껏 외치고 뛰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안 된 것은 오늘 관공서고 기업체고 모조리 직원들의 발을 묶어 놓고 있는 데다 대회장에 못 들어오도록 전경들을 이중 삼중으로 배치하고 전철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97)

 

1987년 11월 6일 금요일

......

차숙이는 오늘 그 지역 일대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공장이 쉬게 되었단다. 오늘 쉬는 대신 모레 일요일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공장의 시설, 관리자들의 횡포 같은 것을 들으니 너무 기가 막혔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인이고 문인이고 정치인이고 그는 인간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위험하니 노태우를 찍어 줘야 한다고 말한다니,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노예근성으로 길들여 놓았는가 알 수 있다. 노예사회가 결코 옛날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도시는 거대한 노예 도시로 노예국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29)

 

1987년 12월 18일 금요일

......

지하도를 지나는데 내 옆을 가던 어떤 여자가 "선거가 잘됐는데, 학생들이 무슨 재미로 또 데모를 하노"해서 내가 "선거가 잘됐다고요? 모르고 그런 말 마시오!" 했다. 그런데 내 뒤 어디에서 또 여자 목소리가 났다. "미친 것들 또 데모를 하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니 거리 곳곳에 전경들이 무리지어 서 있었다. 오늘 시청 앞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지만, 거기엔 아침부터 철통같이 경비를 한 모양이다.

집에 와서도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아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134)

 

1988년 3월 24일 목요일 맑음

뜻밖에 오늘은 아침에 한길사 사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를 단재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놀랐다. 내가 무슨 단재상을 받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단재상을 어떤 사람에게 주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상 받을 일을 했는가? 그리고 나는 단재의 책을 한 권도 읽은 바가 없다. 전집을 사 놓고도 못 읽었다. 어떻게 내가 그 상을 받겠는가? (149-150)

 

1988년 5월 22일 일요일 비

온종일 쉬어 가면서 교단 일기를 옮겨 썼더니, 밤 9시 반이 되어 드디어 한 권 분량(약 1,300장)을 마쳤다.

이 일기를 옮겨 쓰면서 생각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몇십 년 옛날에 써 둔 것을 읽으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온갖 일들이 되살아난다. 참 이런 일도 그때 있었구나, 이건 이렇게 했던 게로구나, 하고 여러 가지를 깨닫고 알게 된다. 사람의 머리로 기억해 둔 것은 너무나 빈약하고, 모호하고, 잘못되어 있기도 하다. 일기를 적어 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알게 되었다.

둘째, 그 옛날의 삶을 기억만으로 회상할 때는 즐겁게 달콤하기도 한데, 일기를 읽어 보니 참으로 괴롭게 살았구나 싶다. 나는, 지금 내가 다시 젊어진다고 해도 내 지난날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내 과거의 교직 생활은 고뇌에 가득 차 있다.

셋째, 그러나 그 옛날의 일기를 하루하루 읽으면서 옮겨 쓰면서, 지금의 삶과도 비교해 보고, 마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내가 살고 있는 듯한 심정도 들어, 그것이 그처럼 괴롭지만 그 괴로움을 단지 마음으로 되씹는다는 것이 어떤 즐거움이기도 하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나는 일기를 읽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두 시간을 한꺼번에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도 일기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일기를 옮겨 쓰는 것을 귀찮은 일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일로 여기면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지금의 일기를 쓰는 것도 즐거움으로 여겨야겠다. (165-166)

 

1989년 6월 8일 목요일 비

아침에 셔츠를 빨았다. 비누를 묻혀서 자꾸 치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렇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손으로 치대는 것이 참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빨래를 다 마치고 그것을 걸어 둘 때도 즐겁지만, 다 마른 것을 거두는 것도 기쁘고 깨끗이 빤 옷을 입는 것도 기쁘다. 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여자들이 오래 사는 것은 바로 빨래를 하기 때문이라고. 참 엉뚱한 생각이지만 이건 재미있는 시적인 생각이라, 시를 한 편 써 보고 싶었다. '빨래'란 제목으로. (219)

 

1990년 1월 5일 금요일 흐림

......

권정생 선생 집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좀 지났다. 강아지 뺑덕이가 훌쩍훌쩍 뛰어 반겼다. 권 선생은 몇 달 전부터 간에 대한 약을 먹고 있는데, 전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잠시 누구와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요즘은 그렇잖다고 했다. 일직 장터까지 나갔다가 오는 것도 된다고 했다. 단지 갔다 오면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고 손가락 끝이 저리다고 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겠지. 아무튼 간이 회복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간이 나빠진 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있었으니! 20몇 면 동안 계속해서 결핵 약을 먹었으니 그 약의 해독이 이렇게 사람을 못쓰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린다는 약이 도리어 사람을 잡는 독이 되어 있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권 선생은 저녁밥을 해 왔는데, 간고등어 구운 것이 그렇게 맛있었다. (245)

 

1990년 4월 6일 금요일 맑음

......

... 공 박사는 여전히 기계화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한참 동안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타자기는 무얼 씁니까?" 했다. 아직 안 배웠다고 했더니 그래서 안 된다면서 다시 또 한참 열변을 이었다. 공 박사 말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내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박사님 말씀 모두 옳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자기 안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사님 기계화 자꾸 말씀하시지만, 기계화만 된다고 사회가 구제되는 것 아니라요. 책방에 가면 책이 산으로 쌓였는데, 저는 이제 글 쓰는 사람들 제발 글 좀 조심해서 적게 썼으면 싶어요. 원고지 한 달에 천 장 쓰던 사람은 백 장 쯤 줄였으면 싶어요. 활자 공해, 인쇄물 공해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저 자신도 이제 글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62-263)

 

1990년 5월 5일 토요일 맑음

.....

아침에 권정생 선생한테 전화를 걸어 풍금을 탈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악보 보고 가락만 탈 줄 안다고 하면 내가 샀던 것과 같은 악기를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언젠가 일직교회 갔을 때 풍금 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락을 대강 탄다면서 그렇잖아도 풍금을 하나 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번 한겨레신문사에서 책이 나오면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것을 하나 사 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사람은 악기라도 탈 수 있도록 해야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269)

 

1991년 1월 17일 목요일 맑음

......

중동에 전쟁이 기어코 터졌다는 소식이다. 미국 놈들이 어째서 그곳까지 가서 전쟁을 하나? 참으로 용서 못 할 일이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은 전쟁을 일으킨 것을 축하하면서 군대를 보낸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다. (291)

 

1991년 3월 19일 화요일 맑음

아침에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오늘은 21일 한길문학에 가서 강의할 준비로 소설 문장 보기글을 고르고 그것을 옮겨 쓰느라고 온종일 걸렸다.

저녁에 헌책방 앞에 가서 신문을 사고, 오는 길에 찰떡을 2천 원어치 사서, 그중 천 원어치를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애를 먹었다.

밤에는 《백석 시집》을 읽었다. 이 시가 좋은 줄을 이제 새삼 알겠다. 이런 시를 지금의 청소년들도 좀 읽을 수 있어야겠는데, 참 이런 우리 정서가 아주 끊어졌으니 답답하다. 그래도 몇 편쯤 골라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298-299)

 

1991년 5월 5일 일요일 맑음

......

<조선일보>는, 이 김지하 씨의 글 옆에 또 운동권 학생과 인사들을 비판하는 사설과 글을 실어 놓았다. 더러운 신문이다.

김지하란 사람은 이제 그 본질이 드러났다. 이 사람은 본래 노동을 하면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어도 그렇다. 이상한 신비주의와 영웅 심리 같은 것이 뒤섞인 성장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한때 그처럼 영웅이 된 것은 재주 때문이다. 그가 쓴 시는 삶의 바탕이 없고, 그저 막연한 영웅적 울분과 감정의 배설 뿐이다. 그의 산문은 관념과 추상의 신기루다. 그런 심리들 속에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자신이 괴로워(그렇게 살아갈 도리가 없기에) 이제 고백이니 참회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노동자와 농민과 학생들을 그처럼 악의에 넘친 말로 욕할 것은 뭔가? 역사 속에 매장되어야 할 사람이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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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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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독특하고 감각적인 문체.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사회와 문명 비판이 가득하다.

가끔은 적응하기 힘든, 좀 지나친 시선도 없지 않았지만 그 꼬인 관점도 나름 존중해 줄만하다.

 

 

살아 움직이며 펄떡대는 문장들은 아마도 원서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번역문보다 원문에서 더 명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더 읽기가 수월해진 다음에 시도해 봐야겠다.

왜 레리 브래드버리 하는지 조금 알 거 같다.

 

 

 

아래는 화성에 매료된 탐험대원 스펜더가 탐험대장에게 한 말: SF 소설에서 누가 이런 문장을 기대했을까?

 

 

"순진한 것이 이롭게 작용할 때만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종교와 예술과 과학을 융합한 것도, 결국 과학이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연구하는 일이고, 예술이란 그 기적을 해석하는 일이니까요. 화성인들은 과학이 미와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도의 문제일 뿐이지요. 지구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 그림에는 실제로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색깔이라는 것은 어떤 물질의 분자들이 빛을 반사하도록 배치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색깔은 내가 우연히 보게 된 물건들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훨씬 더 영리한 화성인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것은 멋진 그림이다. 이 그림의 아이디어와 색깔은 삶에서 왔다. 이것은 좋은 그림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157-158)

 

 

만연체 사색이라면 탐험대장도 만만치는 않다.

 

 

'영리한 것 같지도 않고 영리하고 싶지도 않을 때 영리한 것, 난 그게 정말 싫어. 슬금슬금 돌아다니다가 어떤 계획을 하나 세우고는 그게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이 정말 싫어. 도대체 우리가 뭐야? 다수파? 그게 정답인가? 다수는 언제나 신성한 거야? 언제나, 언제나 신성하고 아주 작은 순간, 아주 사소한 경우에도 결코 틀리지 않는 거야? 그런 것이야? 천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아? 도대체 이 다수의 정체는 뭐고,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해서 그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 생각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거야? 이 썩어빠진 다수에 내가 가담하다니,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나는 지금 마음이 편치 않아. 폐쇄 공포증인가? 군중을 무서워하는 공포증인가? 아니면 상식을 무서워하는 공포증? 온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인간이 옳을 수도 있을까? 그래, 이제 이런 생각은 집어치우자. 배를 깔고 기어 다니다가 제멋대로 흥분해서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거야. 그래, 그거야. 바로 그거야!" (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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