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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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이야기이다. 박범신의 글은 신문 등에서 가끔 읽었는데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소설은, 자못 문장이 고풍스럽고 세련된 낱말들이 적혀있다. 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생각은 옳다. 그것은 나랏것들이 독점해서는 안되고 백성들의 삶에서 쓰여야 하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백성들을 위한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길 위에 서 있었다. 그가 길을 더듬어 가는 과정 속에서 사랑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김정호의 외롭고 고단한 삶을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아버지가 품고 떠난 군현도는 바로 물길과 산 들이 제각각 떨어져 맥을 이루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살이도 사람과 사람, 떼와 떼의 맥을 짚어내지 못하면 죽을 뿐이고, 산하를 치세함에 있어서도 산과 산, 물과 물의 이어짐을 잘 짚어내지 못하면 치세의 죽음뿐이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줄기를 잘 엮고, 떼와 떼의 이음새를 잘 다루어, 억울하거나 원통한 이 없이, 밖으로는 방비를 든든히 하면서, 안으로는 그 맥에 따른 특성을 잘 살펴, 사람과 자연을 함께 이롭게 하는 일일 터이다.
물론 지도는 치세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임금과 재상이 강토의 형세를 알아 치국의 저울로 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백성이 땅을 알아 이롭게 가꾸고 넉넉히 거두며, 물과 바람을 알아 살림과 식솔을 보호하고, 험난한 곳과 평탄한 곳, 급한 곳과 원만한 곳을 알아 풍속을 바르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땅히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라야 한다.
그가 굳이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새기고 절첩식으로 고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 (84-85)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게 된 동기는 꽤 절실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 지도 제작의 지난한 과정은 생략되거나 간략하게만 다루어져서 리얼리티에서 느껴지는 감동 같은 게 조금 부족했다. 자료와 발이 아니라 영감과 어조로 쓴 듯한 소설이다. 김정호가 길에서 홀로 맞아야 했을 그 많은 고갯길과 이슬과 호랑이가 보이지는 않았다.

 

 

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용후생입지요. 제 선친께서 일찍이 실제와 다른 지도로 억울하게 작고하셨습니다. 관아에서 내준 지도였어요. 지도란 사람살이의 흥망은 물론이고 목숨줄이 달려 있는 겁니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강토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대마도, 우리 땅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이상이나 정치적인 목적, 판단은 제 소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시 말해 대마도를 우리 강토로 그려내도록 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감 같은 분의 소임이지요.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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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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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삼십대 암담한 젊은이들의 상황들,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그들의 생각이 엿보여서 몰입하며 술술 읽었다. 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을 때가 있잖은가.

한국이 싫다고 하는 입장과 의견은 잘 알겠고, 어느 정도 인정한다. 200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비추어볼 수 있는,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와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꽤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 이민 간 사람의 변명으로 읽어주기엔 너무 길지 않은가 싶다. 날씨가 싫고, 애인이 싫고, 결혼이 싫고, 직장이 싫고, 삶의 구조가 싫어서 떠난 걸 '한국이 싫다'는 편리한 핑계를 만들어서 장황하게 둘러댄다. 하소연만 있고 감동은 없는 줄거리였다. 

소설에 감동이나 여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내 취향일지는 모르겠다. 근데 요즘 청년들이 명백하게 강조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취향 아닌가. '한국이 싫다'는, 그런 뚜렷한 취향과 세태를 제대로 묘사해냈다는 점에서는 이 책은 분명히 성공적이다.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인 계나의 소망은 사실 단순하다. 대단한 이념이나 철학적 고민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152-153)

 

그런데 이상한 건 '어떻게' 쪽이라고는 하면서 정작 바라는 것들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게 대부분이다. 이건 (저자가 의도한 것 같긴 하지만)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 아닌가.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안위와 자존심 뿐이다.

소설 끝 부분에 나오는 독백을 읽으면서는 일반화가 매우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좀 길지만 옮겨와 보면,

 

미연이나 은혜한테 이런 걸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걔들은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고 있어. 시어머니나 자기 회사를 아무리 미워하고 욕해 봤자 자산성 행복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높아지지 않아.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가게에서 진상 떠는 거, 며느리 괴롭히는 거, 부하 직원 못살게 구는 거, 그게 다 이 맥락 아닐까? 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잖아.

난 그렇게 살지 못해.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해야 해. (185-187)

 

그런데 말이다, 호주만 가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고 너무 막연하다. 남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 진상떠는 인간, 며느리 괴롭히는 '시어머니년', 연고대 무시하는 서울대 애들 물론 있다.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마치 다인 것처럼 말하면서 그 때문에 자기가 더러워서 떠난다는 투의 주장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을 싫어하게 만드는 원흉임은 맞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굴복하여 떠난다는 건 그래도 남아서 버티고 싸우려는 사람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짓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호주 이민을 알아보는 단순하고 성급한 젊은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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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이 나라에 넌덜머리를 내며 이민을 가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꼴저꼴 보기 싫고 외국 나가서 살겠다는 거다. 그 마음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나라도 능력만 되면(그리고 누가 불러주기라도 한다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능력이 있더라도 싫증 났다고 이민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넌덜머리를 내서 나가떨어지게 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이 '축사 속의 가축'으로만 안주하도록 만들려는 무리(체제)에게 굴복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막연한 실체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근데 이건 멀리 나가 봐야 겨우 깨닫게 된다. 그런 걸 깨닫기 위해서 떠난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를 떠나도 좋다. 유학도 좋고 이민도 좋다. 하지만 그냥 싫어서 떠난다는 말은 별로다. 도대체 뭐가 싫다는 건가. 조국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던데(170), 조국은 인격체가 아니므로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쯤되면 이건 뭐 거의 어리광 수준이다. 세금은 조국이라는 허황된 개념을 위해 내는 게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위해 내는 거다.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 복지도 하고 국민들 교육도 하는 거다. 그걸 엄한 데 쓰는 거 못봐주겠거든 끝까지 이 땅에 남아 투표하고, 제대로 된 정치가를 뽑을 일이다.

 

꼰대같은 소리라 해도 할 수 없다. 싫다고 공동체를 빠져나가는 사람만 있으면 그 사회의 미래는 뻔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변명을 들어줄 여력이 없다. 아니, 그들이 어딜 가든말든 나는 관심이 없다. I don't care. 사람대접 받고 싶다던데, 관심이 없으므로 대접해줄 용의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괴로움이다. 그럴진대 한가하게 내 행복이나 목 빼고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나. 극단적인 예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들 때문에 세월호에서 손도 못 쓰고 돌아간 사람들만 304 명이다. 이 위태로운 나라에서 산다는 게 난파한 여객선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들으며 넋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작품 해설에서 평론가 허희가 쓴 말이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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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8-28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지 않아서 속단할 수는 없지만, 뭘 잘 모르고, 특히 외국에 대한 막연한 생각과 편견을 버무린 듯 하네요.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얻는게 있으면 포기하는 것도 있죠. 3000만원으로 살고 어쩌고 하는데, 연 3만불 벌어서 지은이가 말하는 것들을 하고 사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네요. 저도 외국에 살면서 이런 저런 삐딱한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지만, 그리고 종종 이곳의 삶에 만족하고 다행이란 생각도 하지만, 저자의 글 - 인용하신 부분 - 같은 이유는 아니네요.

돌궐 2015-09-05 06:27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소설이 마치 연구실적 쌓으려고 쓴 논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편적인 아이디어와 미미한 자료로 깊이 없이 급하게 쓴 논문이요. 근데 그런 실적은 선수들끼리는 거들떠 보지 않죠.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런갑다 하는 거죠.
 
역사소설 읽기
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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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가끔 챙겨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사실과 정보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사실과 정보를 얻으려면 역사책이나 논문을 보면 되니까. 하지만 소설은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구체적 상황들을 재현해내어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과 정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흡입력 있는 줄거리와 현실성 있는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연성 있는 사건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만 생겨나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일반 소설처럼 역사 소설에서도 줄거리와 그 구성(플롯)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잘 갖춰지면 소설의 흡입력은 저절로 생기고, 재미도 뒤따르게 될 것이다.

 

김선우 소설 <발원>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그저 줄거리만 나열한 게 아니라 사건의 구성을 매우 치밀하고 적절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효가 화랑이 되기를 포기하고 출가하게 되는 계기라든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김춘추의 요청으로 원효를 신라에서 내보내려는) 의상을 떼어내기 위한 원효의 술책으로 서술한 부분이 그랬다. 

 

또 혜공이 죽는 장면에서는 매우 격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짝 눈물까지 나더라. 이 사건은 원효가 백제 병사를 구한 행동이 기화가 되어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런 설정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장치였고 그런 서사 속에서 독자는 안타깝고 북받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는 우연, 그리고 훌륭한 인물의 숭고한 죽음을 통해 공포와 연민을 불러온다는 비극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드라마였다. 바로 이런 게 내가 역사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역사, 종교와 사회에 관한 저자 나름의 철학과 소신들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사상과 철학이 없이 줄거리만 있는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맹탕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원효라는 대사상가의 촌철 대사를 읽는 즐거움이 컸다.  

 

(황룡사 백고좌법회의 원효 연설 중)

부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세상 한가운데 머문다 하셨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황룡사 불제자들의 상구보리는 귀족과 황금입니까? 이곳의 하화중생은 게으름과 배척입니까?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 하더군요. 저기 장경각에 가득 쌓인 숱한 경전들에 말입니다! (1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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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시인으로 먼저 알려졌다. 시인이라면 문장 하나 낱말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을 터. 이 책에서도 저자는 문장과 어휘에 공을 많이 들인 게 역력했다. 어설픈 문장으로는 서사가 아무리 교묘해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이란 건 결국 몰입에서 오는 것일 텐데, 잘은 모르지만 이 몰입은 사건과 동태 묘사의 리얼리티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결국 이 리얼리티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좋은 문장일 것이다. <발원>은 문장을 읽는 즐거움도 큰 소설이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말고는 저자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읽는 내내 김선우라는 시인을 문장 속에서 만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던데, 이 소설도 아주 좋은 페미니즘 관련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석이 원효라는 남성을 자극하고, 각성하게 하며,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지켜내면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은 구중궁궐 안에서 원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서술됐던 <삼국유사> 속 요석의 수동적 이미지와 전혀 다른 점이었다. 나는 <유사>의 저 얼척없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석(瑤石)'이라는 이름만 겨우 알고 있었을 뿐, 그녀의 이념과 감정을 짐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요석을 아름다운 정신과 감정을 지닌 신라 여인 '요석(曜夕)' 으로 재해석하였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저녁'으로서 '가장 어두운 새벽'인 원효(元曉)를 이끌어내는 존재로 탄생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페미니즘을 가장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원효와 요석의 로맨스이다. 특히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상황들은 매우 여성적인 시선으로 묘사된다. 원효의 성격과 행동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는 민감하고 치밀한 성격이지만 소설에서 묘사되듯 예민하거나 지나치게 신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여인에게 순정적일 것 같지도 않다. 나로서는 원효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주인공들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설정된 것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살짝 나쁜 남자, 호방한 성격의 남자로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여성주의적 시각 때문에 오히려 서사 속에 전개되는 로맨스가 어색하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문학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와 요석의 동침 장면은 화면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가치를 완전히 잃을 게 뻔하다. 그들의 섹스는 언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이 만약 화면으로 변환된다면 그야말로 감각적이고 말초적 이미지로 바뀔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과 범주가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강신주는 해제에서 원효가 요석과 자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나는 원효가 자고 안자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미 사랑과 성욕으로부터 무애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김선우는 두 사람이 나눈 섹스를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하였다고 본다. 요석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아버지인 김춘추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원효는 자신의 존엄과 권위마저도 포기한 것이고, 이 결정적 시간을 저자는 두 사람의 절정의 장면으로 승화하였다.

나 역시 원효가 요석의 아픈 사랑을 흔쾌히, 어쩌면 아주 대범하게(어차피!!)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밀한 비유와 개념적으로 수식된 문장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남자가 여자를 안을 때는 훨씬 직접적이고 말초적이다), 그 문장들은 역사 소설에서 보기 드문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자.

 

단애를 흠뻑 적신 불붙은 물의 시간, 서로의 몸속에서 목숨으로 태동하던 완벽한 합일이 수차례 거듭되며 벼랑이 무너지고 온몸의 뼈와 살이 공기처럼 흩어졌다. … 원효가 지나온 시간과 요석이 지나온 시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원효의 몸속에서 요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나신을 보았다. 뭉클한 노을빛 구름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다.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이 한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 님이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요석의 입속을 맴돌 때, 요석은 깨달았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요석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요석을 꽉 끌어안은 채 아끼고 아끼며 쓰다듬던 원효가 그 탄성을 들으며 안도했다. 원효의 가슴 위로 요석이 몸을 포갰다. (2권, 252)

 

이 문장들은 내게 요석의 벅찬 심정과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 결합의 시적 표현들은 저자가 작심하고 써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아무래도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며 모든 갈등과 슬픔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만큼 원효와 요석의 동침을 도발적으로 묘사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읽은 지는 너무나 오래 됐지만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에는 이 같은 ‘적나라한 베드신’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석가모니는 사랑하는 것은 고통의 하나임을 설파했다. 생로병사를 포함한 '팔고(八苦)' 가운데 하나가 애별리고(愛別離苦), 즉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사랑은 곧 고통이다. 그것이 고통인줄 알면서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사랑조차도 고통의 시작이요 원인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것을 몸소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효는 김춘추와 그의 정치판에서 요석을 구해내기 위해 흔쾌히 자신을 고통 속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고통조차 감내하고자 했을 거다.

석가모니를 유혹하던 마라의 딸들은 석가모니에 의해 ‘똥오줌으로 가득찬 가죽주머니’로 비하되었지만 요석은 다르다. 그녀는 깨달은 자를 유혹하려는 마녀가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아닌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인이 바로 요석이다. 빛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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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류뚱도 안나오고, 추추나 강노루도 시원찮아서 메이저리그 보는 게 시들시들하다.

게다가 다저스도 졌고 레인저스도 졌으니 그 김빠진 경기를 볼 맛이 안 나더라.

이럴 때 생각나는, 아니 메이저리그 야구를 볼 때마다 가끔 떠오르곤 하는 시가 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질척이는 골목의 비린내만이 아니다

너절한 욕지거리와 싸움질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팔월이 오면 우리는 들떠오지만

삐꺽이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아니면 소줏집 통걸상에서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외국의 어느

김빠진 야구경기에 주먹을 부르쥐고

미치광이 선교사를 따라 핏대를 올리고

후진국경제학자의 허풍에 덩달아 흥분하지만

이것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쓸개 빠진 헛웃음만이 아니다

겁에 질려 야윈 두 주먹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까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 신경림, 『농무』, 창비, 92-93쪽.

 

시인은 무얼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던걸까. 요즘도 참 부끄러운 게 많은 시절이긴 하지만 저 시절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도대체 역사 속에서 인간은 단 한 순간이라도 부끄러워할 만한 게 없었을 때가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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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시작시인선 49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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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지하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종이박스를 길게 이어붙여 관처럼 만든 잠자리를 준비하는 노숙인들을 볼 때마다 김신용의 시가 생각날 것 같다. 비록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는 못하였지만 꽃화분이 될 수도 있는 `깡통`을 `홧김의 구둣발`로 차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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