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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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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고백하건대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을 추천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외모>(책으로는 표지와 제목이 되겠다.)라는 첫인상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일단 [바다]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바다]라는 것은 비록 명사지만 얼마나 추상적인가? 만약 [바다]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고 하면 얼마나 두꺼운 종이가 필요할까? 그곳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나 자원 같은 것만 다 적어도 엄청난 두께의 책이 탄생할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400쪽도 안되는 책이 감히 [바다]라는 제목을 들고 나왔으니….  

 사실 나 자신이 뭔가 수학처럼 딱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감상적인 내용이 많이 담긴 책을 별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특히 폭풍우를 묘사하면서 "그래 괴물아, 뭘 원하는 거냐? 사방에 보이는 난파에 취했구나, 뭘 더 바라느냐? - 너와 세계의 죽음을, 지구의 멸망을, 카오스로의 회귀를"(p.84)과 같은 문구를 보고 있으면 닭살이 돋으면서 글쓴이가 과대망상이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나마 3부 <바다의 정복> 부분에서는 감상적인 내용에서 비교적 벗어난 이야기가 많아서 즐겁게 독서할 수 있었다.  

  글쓴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처음으로 생명을 나은 바다를 인간은 존중하고…모든 종이 자연의 기능을 누리도록 해야한다."(p.295~296) 이에 대해서는 나도 적극 공감하고 있다. 사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면서도 바다를 소홀히 다뤄오고 있었다. 예컨대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군산~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간척토지 28300ha와 호소 11800ha를 조성하기 위한 새만금 간척사업은 아래 사진과 같은 오늘날 환경 대재앙으로 돌아 왔다.

  

  

 이에 각계 각층에서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서명 운동도 벌였고 심지어 소송까지 했으나 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나 역시 유사 법조계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사안의 경우 법원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새만금 간척 사업을 무효화 할 경우 이에 투자된 세금을 회수할 길을 막막해지고 새만금 간척 사업을 추진한 곳에 대한 대대적인 후폭풍이 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를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이 바다를 희생시키는 일을 강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게임 이야기를 할까 한다. 어렸을 때 잠시 여수에서 살았던 적을 제외하면 나는 KOEI사의 명작인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통해 바다를 접했었다. 게임 상에서 [바다]라 함은 정복의 대상이고 전투의 공간일 뿐 어떤 감흥을 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물론 게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게임을 통해 이렇게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후에 바다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할 우려가 있다. 이제는 온라인 게임으로 서비스되는 것 같은데 게임과 다른 진정한 바다 이야기(여기서 바다 이야기는 도박 게임이 아니다.)를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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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다윈의 시대 - 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EBS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 제작팀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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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인간은 창조되었을까? 진화되었을까?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민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쟁이 심화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돈벌이와 직접 관계가 없는 이런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의 말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안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의 기원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진화와 창조의 문제가 본격화 된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2007년에 출판되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킨스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하였는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우리 나라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계속되었고 EBS에서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화와 창조의 논쟁을 소개하였고 그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주장하는데 그 속 뜻은? 


 지금까지 수 많은 진화론과 창조론을 다룬 책을 읽어 봤지만 이와 같이 읽고 나서 화가 나는 책은 처음이었다.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은 나름 공평한 입장에서 인터뷰하고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양 측 모두에게 공평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오히려 다른 진화론과 창조론 책에서 하나의 주장만을 일관되게 하는 것보다 더 문제가 많은 것이라고 하겠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주장하여 교묘하게 종교의 손을 들어주는 책이라고 하겠다.(마치 2MB처럼 친서민 정책을 외치면서 부자 감세 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이 책은 과연 공평하게 집필되었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이 책이 과연 공평한 관점에서 집필된 것일까? 진화론에 대한 반대 논거로 '지적 설계론', '창조과학'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등을 예로 드는데 소개하는 것 까지는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중립적인 입장에서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은근히 진화론을 비판하고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듯한 표현이 담겨 있어 읽는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에 대해서는 최대한 공평하게 썼다고 당연히 부인하겠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들어가는 글>을 보면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는 지적설계라는 이론을 소개하며 '그 정당성을 떠나서 진화론에 도전하는 이론이 끊임없이 존재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고 말하고 있다. 초등학생이 봐도 이 문장의 속 뜻은 진화론에 보다는 진화론에 도전하는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각 학자들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각 챕터 마지막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지지하는 학자들과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에게 하는 질문은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질문이 많았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에드워드 윌슨과의 인터뷰에서 "하지만 단순히 종교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기에는 종교에도 그 나름의 설득력 있는 논리가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고(p.152) 도킨스에게 한 "모든 종교에 반대하십니까? 종교에 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p.142)라는 질문은 종교의 이점을 묻는 질문을 한 데 비해 진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인 마이클 베히의 인터뷰 질문에는 "다위니즘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p.68)와 같이 마이클 베히가 좋아할 만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적 설계론을 소개한 것은 아직 우리 나라에 지적설계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소개할 만하다고 하더라도 지적설계론이 지금까지 오랜 시간 검증되어 과학적 증거가 누적된 진화론과 동급 이론(지적 설계론을 Theory라 부를 수 있는 지도 의문이다.)은 분명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설계론을 진화론과 같은 수준의 과학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이른바 '창조 과학'에 대해서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창조 과학을 대해 중립적으로 서술해보니 오히려 처음 듣는 사람은 이에 대해 그럴 듯 하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왜 과학자가 창조 과학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창조 과학에 대한 이런 서술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마지막 결론 부분 역시 문제가 많다. 요약하면 종교와 과학은 서로 존재하는 평면이 다른 것이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입장은 종교를 두둔하는 결론이다. 한 마디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투지 말고 잘 지내자라는 뜻인데 지금까지 종교인이 과학자의 검증 요구를 묵살해 온 논리와 다른 점이 없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그나마 중립적으로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책이니 만큼 처음 이런 논쟁에 대해 접한 사람에게는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다만 이 책을 읽은 후에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아갈 필요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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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 다큐멘터리라기에 이 책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책 속에 내용의 숨은
의도가 있었군요. 부동님 말씀대로 정확하게 알고 균형적인 시각을 보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쓴 책들도 같이 읽어봐야겠습니다.

암향부동 2010-12-09 23:33   좋아요 0 | URL
이 책 서평은 막상 써 놓고 후회하고 있는 서평입니다…. 제가 너무 '욱'해서 공격적으로 서평을 쓴 것 같습니다. 사실 내용만으로 보면 이렇게 악의적인 평가를 내릴 책은 아닌데요….

사실 저 역시 교회를 다닌다는 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확고한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이자 진화론자인지라 이런 책에서 논리적 헛점을 발견하면 울컥하게 되네요. 특히 <지적 설계론>은 그렇다 쳐도 <창조 과학>을 이렇게 겉핱기 식으로 소개한 점은 불만입니다. 예컨대 창조 과학에서는 지구의 나이를 6000여 년으로 주장하는데 방사선 동위 원소를 통해 밝혀진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는데 의심을 품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창조 과학회>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여기에 과학을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지요.

또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과거 [만들어진 신]과 [도킨스의 망상] 서평으로 다른 분들과 심지어 만나서 7시간 가량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만난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더군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런 점이 굉장히 아쉽습니다.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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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유명한 인터넷 서평꾼(비록 '꾼'이라는 단어가 비하하는 의미로 종종 쓰이나 스스로 그렇게 지칭하는 만큼 그대로 인용하였다.) 로쟈의 서평을 모은 책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을 읽으면 타인의 서평을 읽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타인의 서평을 읽는 일을 굉장히 꺼리는 편이다. 과거 독서 모임에서 발표를 해야되서 책을 읽고 나서 발제문을 쓰기 전에 '과연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혹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궁금증에 타인의 서평을 먼저 읽어 본 적이 있었다. 타인의 서평을 읽은 후 발제문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은 결과 타인의 서평에 드러난 생각에 함몰되어 나만의 생각과 시각을 가지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은 후 나만의 생각이 담긴 서평을 쓰고 난 <후> 남들이 쓴 서평을 읽어본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서평만 발췌해서 읽어 보려고 하였으나 나름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읽지 못한 책이 대부분이라 어쩔 수 없이 이번 만큼은 나의 원칙을 어기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되도록 이 글에서 로쟈가 쓴 서평에 대한 서평은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일단 로쟈가 이야기하는 <서평>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순리일 듯 싶다. 로쟈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닐까 싶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p.40) 그러나 나는 서평은 단순히 남에게 책을 알려주기 위한 '소개'와 '비평'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책을 읽고 독후감 혹은 서평 혹은 리뷰라고 불리는 어떤 글을 쓸 때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귀찮더라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첫째, 글을 쓰면서 나의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고 둘째, 후에 기억 안 나는 것이 있을 때 빠르게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나의 초창기 글을 일종의 리포트와 비슷한 형태였다. 그러다가 단순 내용 요약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독서력이 짧은 나로서는 감히 책을 평가할 수 있는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비평'이란 면은 내가 쓴 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점점 이른바 '책을 보는 눈'이 띄어감에 따라 하나 둘 비평도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단순 내용 요약 → 자신의 생각 첨부 → 책에 대한 비평 첨부 이런 식의 과정을 밟아 온 것이다. 결국 나의 서평에는 '나'를 위한 내용 요약이 다른 서평에 비해 많이 들어간 편이다. 

 이어서 로쟈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서평>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로쟈 역시 서평을 쓰면서 '책을 읽을 자유' 보다는 '책을 읽은 의무'를 상기하며 글을 썼고 자의로 읽은 책이 많지만 타의로 읽은 책 역시 적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난한 대학생으로 한 권에 만 원 이상 하는 책 값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꾸준히 이른바 고전은 허리띠를 졸라매서 구입하되 신간에 대해서는 서평단 활동을 통해 나의 지적 욕구와 경제적 압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서평을 쓴다는 것이 '책을 읽은 의무'가 되어 버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쓴 서평을 통해 다른 이와 댓글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서평이라고 칭찬을 받을 때의 기쁨이 '의무'를 기쁘게 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책을 읽을 자유''책을 읽은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책을 읽을 자유'가 보편화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최근의 일이지만 인간으로 '최소한의 권리'에 속한다고 로쟈는 말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대다수가 한 달에 평균 1권 가량 읽는 오늘날 진정한 책을 읽을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나는 '책을 읽을 자유'를 넘어 '책을 읽은 의무'를 지는 사람이 점점 많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을 읽고 '행동하는 것''책을 읽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차 우리 나라에 책을 읽는 사람이 늘어나 '책을 읽은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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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4-0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이 전이되는 서평 그대로의 서평을 읽어 봅니다. 아니, 귀로 들어 보았다고 더 말해 보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세상을 변화 시켜 주지를 못하지만 책을 읽어야 된다는 필연성의 의무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켜 주는데 둰동력잉 되어 준다고 하더군요!본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입니다. 책을 즐거움의 유희 보다 책 속에 담겨져 있는 거울들을 들여다 보아 주기를.. 그럼 그들이 우리들한테 무엇을 가리켜 주는지, 우리들은 그들로 인해 무엇을 느끼고 행동해야 될지를 알려 줄텐데 말입니다. 유럽에서 혁명의 바람이 불었고 그것의 여파가 자기들의 세상을 행복으로 세 세상을 보여 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존재의 의무를 심어 줄 수 있었던 것도 책의 지식이 유희가 아니라 실천의 지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빛은 사람들한테 빛을 전해 줄 수 있지만, 어둠은 사람들 한테 그 빛을 열게 만들어 주는 힘을 준다고 하더군요!! 우리 인간들 세상에 저녘이란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아 보이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들한테 빛을 열어라고 소리없이 말을 걸어 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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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참 공교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자그마한 인문/사회 독서 모임을 하는데 다음 달에 읽을 인물 혹은 책에 대해 의논하다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혹은 <1984> 혹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었다. 평소 나는 문학 작품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었고 그곳에서 겪은 이야기를 수필로 쓴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지 오웰의 글을 한 번 읽어 보기를 소망했었다. 모든 남자가 그렇듯이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고 특히 기존 전쟁과 다른 양상을 보인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었다.

 일단 조지 오웰의 수필을 모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간단히 [스페인 내전]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는 순리인듯 싶다. 모든 글이 그렇듯이 시대 상황이나 배경을 미리 알아야 이해하기 쉬운 법이다. 스페인 내전은 기존의 전쟁과 양상이 다른 전쟁이었다. 적법한 선거에 의해 세워진 좌파 정부와 우파 군부 반란군 사이에 의해 일어난 전쟁으로 각국이 참전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전초전 성격을 띄었으며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군부 반란군에 대항하여 정부 편에서 총을 들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지 오웰처럼 총을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블로 피카소처럼 게르니카 학살에 대한 분노로 <게르니카>라는 명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앤터니 비비가 쓴 <스페인 내전>이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감히 말하건대 국내에 소개된 책 중에서는 가장 스페인 내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잘 분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을 살펴보면 조지 오웰의 수필 중에서 29편을 뽑아 소개한 책이다. 사실 조금 안타까운 점은 조지 오웰의 모든 수필을 전부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옮긴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29편을 선정하여 [편역]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총 29편의 에세이는 각각 독립적인 것이므로 인상깊었던 <과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와 영어>,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이렇게 총 4편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갈까 한다. 

 먼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조지 오웰은 일반 대중에게 좀 더 많은 과학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J. 스튜어트 쿡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 협소한 의미의 '과학자'가 비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여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길 근거는 빈약한 점이 사실이다.(p.217) 또한 우생학으로 대표되는 '인종 과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인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은 "대중에 대한 과학 교육이 결국 문학이나 역사를 희생해가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을 더 가르치는 것이 될 경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주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p.218)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과학 교육을 받은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이는 인문/사회 과학이 자연 과학보다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편견이 들어간 주장이며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문/사회 과학을 주로 배운 사람들 중에 악인이 없는가? 조지 오웰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히려 이런 주장은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전인 교육, <통섭> 등을 통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 시대에는 이렇게 구분 지어 하나 만을 강조하는 교육은 반쪽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불과할 것이다.  

 이어서 <정치와 영어>라는 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1.익히 바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네는 반드시 뺀다. 3.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 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라는 자신이 글을 쓰면서 6가지의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즉 그는 지금의 정치 혼란이 언어의 타락과 결부되어 있으며, 언어 문제부터 건드림으로써 상황을 개선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바(p.275) 오늘날 아무나 '정의', '공정'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우리 나라 현실에서 한 번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글쓴이의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라고 봐도 옳겠다. 나 역시 1년에 100여권의 서평을 써 왔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책을 읽고 정리하기 위해 서평을 써 왔지만 시간이 흐르니 일종의 직업과 같이 되어 버려 진짜 제대로 된 서평을 쓰려면 책을 읽고 나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후 써야 하지만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다가 아무래도 공짜로 책을 제공받고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나쁜 말을 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런 상황 하에서도 되도록 정당한 평가를 하고 단순히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따름이다.

  <나는 왜 쓰는가>는 가장 유명한 수필로 여겨진다. 내가 이 서평의 제목을 이와 대구를 이루어 <나는 왜 읽는가>로 적은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이 수필에서 지난 1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며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른바 순수한 문학 작품을 싫어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현실과 격리되어 <아름다움>만을 논하는 문학을 볼 때면 과거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제국주의 하에 고통 받고 있을 때 현실을 회피하여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방조한 여러 작가들이 떠오른다. 물론 너무 정치적 색깔을 띄는 작품도 역겨운 것이 사실이지만 <아름다움>이라는 '위선' 아래 현실을 외면하는 작품보다는 차라리 솔직해 보이는 것이 나아 보인다.

  결국 이와 비슷한 이유로 해서 <나는 왜 읽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읽는 것을 통해 불의를 감지하고 '의문'을 품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화 Matrix의 명대사 "It's the question that drives us."가 바로 내가 책을 읽는 이유라고 하겠다. 

 앞서 살펴본 수필 <어느 서평자의 고백>에서와 같이 나 역시 냉철히 이 책을 평가하건데 비록 편역이나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많은 조지 오웰의 수필을 최초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식상한 표현이지만 강력 추천한다는 말 외에는 다른 단어를 찾기 힘들다. 뭐… 6번째 규칙에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된다면 위의 원칙들을 과감히 깬다는 규칙이 있는 바 조지 오웰이 무덤에서 일어나 내 서평을 읽는다고 해도 이런 표현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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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저번에 <루쉰>을 읽은 후 루쉰과 동시대의 동아시아 3국의 근대 문학 작가를 만나기로 결정한 후 일본의 근대 문학 작가로 나쓰메 소세키를 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문학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나쓰메 소세키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근대, 특히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후반 사이의 동아시아 3국의 근대 문학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이른바 <타인본위>에 반대되는 <자기본위>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중심 사상이 잘 담겨 있는 강연집이다. 다른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이런 <자기본위> 사상을 잘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왜 자신이 자기본위라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이런 자기본위 사상은 국가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나쓰세 소세키의 다른 글에 보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무비판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의해 고생받던 식민지 국민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가장 위대한 일본 근대 문학 작가로 칭송받는 만큼 꼭 그를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로 이 책과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아래 글은 내가 독서모임에서 발표하기 위한 글로 서평과 관계 없는 글이니 그냥 가볍게 무시해주면 될 것이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일반 독자가 보통 소설을 읽듯 그냥 그대로 지나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 작가가 그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는가',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가' 정도는 이해하기를 바라게 된다. (p.7)

 

 여기서 '연구자'라는 단어를 '수능 출제위원'으로, '일반 독자'를 '수험생'으로 바꾸어 보자. 왠지 묘하게 말이 되지 않는가? 학교 수업과 수능에 있어서는 이런 관점이 더 작품 감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다. 물론 옮긴이 역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작품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어느 정도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 이해가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흔히 우리는 위 두 가지 작품 감상 방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조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먼저 배경지식이나 해설 없이 작품을 읽고 스스로 작품을 읽고 느낀 후에 다시 배경지식이나 해설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지 않을까? 나는 비록 문학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책을 읽고 서평 쓸 때 먼저 내 생각을 충분히 담은 서평을 쓴 다음에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잘 쓴 서평을 읽고 책을 읽은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각에 몰입되어 나만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지 않을까 기대하며 희망을 품기보다는 내 쪽에서 탐조등을 사용해서 오직 한 줄기 빛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밝게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중략… 나는 '내 손에 단 한 자루의 송곳만 있으면 어딘가 한 군데 뚫어 보여주고 싶은데'하며 조바심쳤지만 공교롭게 그 송곳은 남이 전해주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발견할 수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중략… 이때 나는 비로소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나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p.50~51)

 

 그나마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화두를 잡은 나쓰메 소세키는 축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줄기 빛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며 더 나아가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나쓰메 소세키가 찾은 송곳(나쓰메 소세키에게 있어서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더 비관적인 것은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상태를 당연해 하는 것이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대기업 혹은 공무원이 되는 안정적인 삶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대학교 가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의 삶이 지표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 역시 취직 전쟁, 학점 전쟁, 스펙 전쟁일 뿐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덜질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물론 내가 게을러서 책이나 경험보다는 농구에 빠져 지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나는 변리사 합격하면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돈으로 인한 자유'를 얻어 나에게 맞는 '송곳'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기대는 좌절될 것 같아 두렵지만 반드시 나 역시 '송곳'을 찾아 한 줄기가 아닌 태양을 밝게 보고 말 것이다.

 

 

 

 

  타인본위라는 것은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남 흉내 내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p.52)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는 술을 예로 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였지만 나는 술(특히 와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와인의 경우 유명한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의 점수(이른바 파커 포인트)에 의해 가격과 판매량이 변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다만 나는 이런 상황이 '로버트 파커의 입맛대로 획일화'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맛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류 공통의 기준이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글 대로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타인본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학 뿐만 아니라 술, 특히 와인에 있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좋아하거나 혹은 자신의 성질에 맞는 일을 만나게 되면 다른 이를 권력 혹은 금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맘에 들게 변화시키려 합니다.…중략…"나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데 저 친구가 왼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괘씸하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p.61)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 오른쪽인데 친구가 왼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권력'과 '금력'으로 친구를 오른쪽으로 걷게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하여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결정하여 내가 태도를 바꾸거나 친구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오늘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토론하여 바른 길로 걷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른바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 생각이 옳은지 토론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국민을 권력과 금력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토론이 전제가 된 타인이나 나의 변화는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은 자신의 개성을 타인의 머리 위에 강요하는 도구이고 금력은 개성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유용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극히 유용한 것으로 만일 인격이 없는 자가 무턱대고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타인을 방해하게 되고, 권력을 사용하려 하면 남용으로 흐르게 되고, 금력을 사용하려 하면 사회 부패를 초래합니다.(p.61, 65)

 

 먼저 여기서는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간략히 해야 겠다. 권력과 운을 맞추기 위해 금력이란 말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금력 보다는 '돈'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매끄러웠을 것 같고 '개성을 발전시킨다'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직역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좀 더 부드럽게 의역하는 점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 길이 아닐까 한다. 각설하고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는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 역시 인격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과연 권력 남용과 사회 부패가 개인의 인격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록 인격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는 경우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사회 부패를 줄일 수 있는 것 아닐까? 내 생각에는 권력 남용과 사회 부패의 경우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위험해지면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고 국가가 태평하면 개인의 자유가 확장된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인격이 존재하는 이상,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국가가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는데도 단지 개성의 발전만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p.71)

 

나쓰메 소세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인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 개인주의를 취하면서도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축소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주의를 관철하고자 한다. 일부 사람들은 국가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로 취급하고 개인보다 국가를 더 우선시하고 있다. 그러나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에 대한 추론으로부터 '사람들이 스스로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홉스는 절대 권력으로 거듭난 '국가'를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른바 '자연권'이란 것을 통해 개인의 생명과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한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나 역시 국가는 계약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그 누구도 계약에 개인의 생명과 이익을 국가에게 넘기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개인의 생명과 이익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발 양보해서 설혹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다고 해도 국가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국가와 모국어를 선택한 적이 없고 우연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게 되었고 의무 교육을 받음으로써 한글을 내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의지 혹은 선택과는 무관한 국가가 위급한 상황이라고 나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것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국가가 위급한 경우에는 국민을 헌신짝 처럼 버리는 것을 나는 우리 나라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아 왔다. 임진왜란 때 이른바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에서 의주로 도망치고 중국으로 향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선조나 근래에는 한국전쟁 초기에 절대 수도 서울을 버리지 않겠다고 라디오 방송까지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날 도망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한강 다리를 건너던 수백 명의 국민을 몰살시킨 것이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 말 했듯이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바 국가가 위험해지면 자진해서 개인의 자유를 내놓을 것이 아니라 일단 도망쳐서 한 몸 부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인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비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달리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개인주의를 관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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