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나에게 인생 최고의 영화가 무엇인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순간의 말성임도 없이 CGV 목동에서 SK 텔레콤 무료 영화표를 통하여 보았던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를 이야기한다. 당시 메멘토 (Memento), 인섬니아 (Insomnia) 등으로 당시 떠오르는 감독으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크리스토퍼 놀란 (Christopher Edward Nolan)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를 통하여 거장으로 자리 매김 하였으며,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는 정말 영화 역사에 한 획은 그은 걸작 (masterpiece)임이 분명하다.


다만, 그 이후에 보았던 인셉션 (Inception)과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는 분명 훌륭한 영화였지만,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와 같은 걸작 (masterpiece)이라고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뭔가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에서 보여줬던 날카로운 한 자루의 칼을 보는 듯한 영상미와 문제의식이 이후 영화에서는 무뎌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놀란을 만날 기회는 아쉽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오펜하이머 (Oppenheimer)"를 통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2012년에 개봉했으니 약 10년 만에 다시 "오펜하이머 (Oppenheimer)"를 통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을 만나게 되면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할 정도인데, 10년의 변화에 대해 기대감 반, 우려 반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Mr.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I don’t want to see that son of a bitch in this office ever again."

—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Oppenheimer told Truman ‘I have blood on my hands’ after atomic bombs - The Washington Pos


"Mr.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대통령 각하, 저는 제 손에 피가 묻어 있음을 느낍니다."라고 트루먼에게 오펜하이머가 말했을 때 트루먼의 생각과 반응을 예상하긴 어렵지 않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으로서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원자폭탄이 나치가 아니라 일본에 투하되서 갑자기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느낀 것일까? 만약 원자폭탄이 일본이 아니라 나치 독일에 떨어졌다면 과연 똑같이 "제 손에 피가 묻어 있음을 느낍니다"라고 대통령에게 말했을까? 트루먼의 손에는 더 많은 피가 묻어 있고, "The buck stops here."라고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있을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오펜하이머의 발언은 말 그대로 징징대는 과학자 (“crybaby scientist” )의 발언일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발언 이후 트루먼의 얼굴이 굳으면서 트루먼이 오펜하이머의 손에 묻은 피를 닦으라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눈 앞에 흔드는 장면인데 트루먼의 가소로운 심정을 잘 나타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역설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이 오펜하이머의 "복수심"으로 인한 것임을 명백히 할 뿐이다. 나치의 항복 이후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정치적, 과학적 입지를 이용해서 원자폭탄 또는 수소폭탄 개발을 막으려 했던 것을 보면, 오펜하이머에겐 폭탄이 "어디에" 떨어지느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영웅으로 죽거나,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할 때까지 살아남거나.

— 영화 다크 나이트 중


10년이 지난 후 만난 크리스토퍼 놀란은 분명 실망스러웠다. 전기 영화이니 각색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오펜하이머의 내면 묘사는 수박 겉핥기와 다름이 없었으며, 흑백과 컬러로 시점을 다르게 하는 기술은 이미 메멘토에서 보여준 바가 있어서 식상할 따름이었다. 대체 이 영화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무엇을 말하고 한 것일까?매카시즘에 대한 비판? 자신도 모르게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든 과학자의 고뇌? 스트로스 제독의 상무장관 낙마를 통한 사필귀정?

뭐 하나 설득력이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분명 오펜하이머는 스스로 만드는 무기가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무기임을 알고 있었으며, 매카시즘에 대해서는 오펜하이머의 과거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부적절한 처신, 더 크게 보면 과거 중수소를 소련에 수출함에 있어서 스트로스 제독을 공개적으로 비웃은 것에 대한 업보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방사선 동위원소 수출에 있어서는 결국 스트로스 제독이 옳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영웅으로 죽거나, 악당이 된 자신을 마주할 때까지 살아남거나." 라는 다크 나이트의 명대사가 유독 생각나는 영화 "오펜하이머"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