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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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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제목을 정할 때는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자 노력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이런 상투적 제목이 오히려 책을 제대로 표현하는 제목이므로 부득이 "SF 소설의 걸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사실 SF 소설이란 장르가 굉장히 마이너한 장르고 이 책을 포함해서 단 두 권 밖에는 읽어본 적이 없는 장르이므로 "걸작"이란 표현을 사용함에 딱히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SF 소설이 마이너한 이유는 간단하다. "SF 소설"이란 문구를 분설해보면 왜 그런지 명확해지는데 "SF"는 글쓴이 뿐만 아니라 읽은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과학 소양을 요구하고 "소설"이다 보니 이에 더하여 글쓴이의 수려한 글 쓰는 솜씨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문이과가 통합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 등이 변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문과는 문과, 이과는 이과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문과 출신이 SF 소설을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나마 이과 출신이 SF 소설을 쓰는 것이 대부분이나 나도 그렇지만 이과 출신은 수식에는 강할지 몰라도 글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SF 소설이 그 양도 적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한 장르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마이너한 SF 소설의 걸작으로 SF 소설의 장점을 보여주는 정말로 훌륭한 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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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er of Babylon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1장 4~9절 (공동번역)

현재 "바벨탑"은 기술적으로 또는 재정적으로 실현하기 어렵거나 지나치게 야심적이어서 성공할 수 없는 비현실적이나 공상적인 계획을 뜻하는 단어 혹은 과학이나 문명 등이 발전하여 금기시되는 영역까지 닿으려 할 때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에서는 금기시되는 영역까지 닿았음에도 성경과 달리 야훼가 이 탑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결국 원통형 인장처럼 하늘 끝까지 닿으면 다시 땅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며 "몇 십 세기에 걸쳐 역사한다고 해도 인간은 천지창조에 관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야훼의 업적은 밣겨지고, 그와 동시에 숨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 많은 연구 끝에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 정도임을 밝혀 냈으나 우리는 아직까지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 우주의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앞으로 수십 세기가 지난다고 하여도 "천지창조"에 관해 금기시되는 영역인 해당 내용에 대해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분명히 튼튼한 바벨탑을 세워 하늘 끝까지 세우고자 노력할 것이고 비록 하늘 끝까지 닿진 못하더라도 그 과실을 우리의 후손들이 누릴 수 있으리라.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네 인생의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는 절반쯤 읽고 나서야 책의 구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시계열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책을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단편은 두 개의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며, 그 중 한 가지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벌써 책의 구성에서 부터 시간의 흐름으로 원인과 결과로 구성되는 뉴턴역학과 달리 해석역학에 따라 책을 구성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자유의지와 전지(全知)는 양립 불가능함이 분명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딸이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유의지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라는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자유의지와 전지(全知)는 어떻게 보면 양립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그거야 말로 따분한 일 아닐까? 나라면 다른 선택을 하고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해당 결과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SF 소설의 걸작 중에 걸작이며 SF 소설은 황당무계한 헛소리들의 항연이라는 선입견을 무참하게 깨뜨릴 수 있는 책이다. 감히 평가하건데 올해 읽은 책 중에서 한 손가락에 꼽힐 수 있는 책이고 타인에게 과감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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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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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

 이 책의 초반부(1부)는 일반적인 애정소설과 다를 점이 없지만, 차이점은 바로 "책 읽어주기"에 있다. 가끔 조카들이 책 읽어달라고 조를 때, 책 읽어주는 것이 생각보다 귀찮고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런 점은 연인 사이에서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주인공은 한나의 강력한 부탁으로 사랑 행위 이전에 반드시 "책"을 한나에게 읽어주었다. 이러한 "책 읽어주기"는 2부 막바지에 이르러 그 의미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부인은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 - 첫 번째 부인

 한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은 화자의 생일을 한나가 잊어버리고 그 때문에 화자와 한나 사이에 말타툼 결과 화자가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싹싹 빌었을 때 시작되었다. 그 이후 화자는 "한나를 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마치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것과 유사한 에피소드이다.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것은 돌이켜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고, 수영장에서 친구와 놀다가 한나를 발견한 순간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아니함으로써 한나를 첫 번째로 부인한 것이고 그녀를 배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의로 자신을 망치고 있어.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입장이야. 그러면 넌 그 사람을 구하겠니? - 두 번째 부인

 한나가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숨기고자 했던 "문맹"을 화자는 결국 2부에서 깨닫게 된다. 문맹이란 점이 밝혀지면 한나는 종신형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생을 숨기고자 했던 치부인 "문맹"이 드러나게 된다. 화자는 결국 침묵하는 선택을 하였지만 나는 화자의 아버지의 말이 정론이라고 생각한다. 즉, 직접 한나와 이야기해서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화자는 다시 침묵함으로써 한나를 다시 한 번 배반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해. 물론 최종 결정은 본인한테 맡겨두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사람과 직접 말이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다."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 세 번째 부인

 미하엘은 10년간 문학 작품을 녹음해서 한나에게 보내면서도 한 번도 한나를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또한 녹음테이프에 문학 작품 이외에는 아무런 사신도 담지 않는다. 이것은 옮긴이가 지적했 듯 "그녀에 대한 부인이요 배반이라고 할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편지라고 함은 즉 "글"이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함은 "글"을 쓰지 않은 것이고 그 말은 여전히 한나는 글을 알지 못한다, 즉 "문맹"이라는 것, 더 나아나가 문맹이었던 시점의 과거의 한나를 사랑하고 기억할 뿐, 현재 교도소에 수감된 한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점을 함축한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3번 부인했어도 결국 베드로를 용서했지만, 초월자가 아닌 일반인인 한나는 미하엘이 자신을 3번 부인(배반)한 결과 그 끝은 결국 출소 당일 새벽 자살이라는 마무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수영장에서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면 그녀는 떠나지 않지 않았을까? 법정에서 한나를 직접 만나 도와주었다면 그녀가 종신형을 받아서 교도소에서 18년간 복역했을까? 한나에게 한 번이라도 편지를 썼다면 그녀가 출소하는 날 자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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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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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인 <일리아스><오뒷세이아>를 다 읽게 되었다. 왠만하면 앞서  <일리아스> 서평에 썼었던 중복된 내용을 피하려고 한다. 그래도 혹시라도 수많은 <오뒷세이아> 혹은 <오딧세이아> 번역본 중에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나라 번역 현실에 대한 설명을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번역본의 가장 큰 명제는 언제나 가장 좋은 번역본은 해당 언어에 능통하면서 해당 분야에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직접 번역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런 책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인문/사회 분야 책은 많은 옮긴이의 노력 끝에 좋은 번역서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대표적으로 나는 김만수 교수가 번역한 <전쟁론>의 번역본을 보고 이건 사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했었다. 최초로 독일어→한국어로 번역한 완역본인데다가 거의 책의 1/3을 차지하는 옮긴이의 주석은 옮긴이의 정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너무 많은 주석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긴 한다.)

 

 하지만 자연과학 책의 번역 현실은 굉장히 취약하다. 대표적으로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책 중 최악의 번역본으로 꼽는 책이 바로 도올 김용옥의 형님인 김용준 선생이 번역한 <부분과 전체>이다. 이건 진짜 번역도 책도 아니다!! 대체 왜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별점을 높게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김용준 교수의 다른 '한글' 책들은 굉장히 좋은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 챕터는 구어체를 쓰고 다른 챕터는 문어체를 쓰는 등 딱 봐도 각 챕터마다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줘서 번역한 것이 눈에 띄는데 왜 사람들은 별점을 높게 주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데 이 책이 <서울대 100권 추천 도서>에 포함된 것을 보고 내가 멍청해서 이해 못 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높은 평점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꾸준히 좋은 번역본과 옮긴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올바른 번역을 우리나라에 뿌리 내리기 위한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감히 나는 그리스/라틴 고전 번역에 있어서 현존하는 가장 좋은 옮긴이는 <천병희> 교수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 가장 깔끔하다는데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YES24에 올라온 천병희 교수의 번역관을 아래 그대로 옮겨 왔다.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배우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입학하자마자 취업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라틴 고전을 편역하는 수준을 넘어 원전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잘된 우리말 번역이 잘된 영역이나 독역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원전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어를 배운 지가 벌써 50년이 훨씬 넘었고 번역할 때면 영역 몇 가지와 독역 몇 가지를 참고하니까 계속해서 독일어와 함께하는데도,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잘된 독역이라도 읽어 보면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일 경우 말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길은 해당 언어를 배워 원전을 읽는 것이고 차선책으로는 한글 완역본을 읽는 것이고 그조차 안 되면 영역본이나 중역본을 읽으라는 말이다. 그 만큼 자신의 번역본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지만 이 책에서도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2006년에 주석을 첨가하면서 증가된 주석 번호를 그대로 두어 잘못된 주석을 찾아가게 하는 잘못은 여전하다. 또한 왠만하면 지도 하나 정도는 첨부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단순히 어떤 지명이 어디에 있다고 주석에서 설명하면 그냥 읽고 넘어가지만 지도가 같이 있다면 좀 더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일리아스>와 비교해보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뒷세이아>는 일종의 모험담에 가까워서 단순히 영웅담에 그쳤던 <일리아스> 보다는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나는 이 두 개의 서사시가 같은 인물이 썼다는 점에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이미 지적했고 이 책 뒷편에 있는 [호메로스의 작품과 세계]라는 글에서도 말하듯이 이상화된 자연이 있는 <일리아스>와 달리 <오뒷세이아>에서는 자연의 힘 앞에 주인공은 무력하며 비유 역시 <오뒷세이아>에서 훨씬 적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일리아스>에서는 사납고 자제력 없고 굽힐 줄 모르고 오직 불멸의 명성만을 추구하는 아킬레우스가 이상적 인물로 그려져 있는 데 반해 <오뒷세이아>에서는 참을성 많고 임기응변에 능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오뒷세우스가 이상적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일리아스>가 쓰여질 당시에는 용감한 군인이 필요했던 사회적 배경에 비해 <오뒷세이아>가 쓰여질 당시에는 참을성과 임기응변에 능하고 모험심이 강한 바다 사나이가 필요했던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멘토(Mentor)가 오뒷세우스가 트로이아로 떠나며 자기의 재산을 관리해 줄 것을 부탁한 친구로 후에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훌륭한 조언도 해준 맨토르(Mentor)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만큼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미치는 영향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 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와 함께 호메로스가 안내하는 세계로 탐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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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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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라틴 고전을 읽으려고 큰 서점에 가서 살펴보면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떤 번역본이 가장 좋은 번역본인지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라틴 고전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번역본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번역자가 <천병희> 선생님인 것을 찾는 것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라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 분의 번역이 가장 깔끔하다는 것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여기서도 깔끔한 번역과 편집은 빛을 발한다. 특히 행을 표시하고 우리나라와 원문 사이의 행을 최대한 맞출려고 노력한 점이나 현존하는 그리스 문헌이 아티케 방언을 따르고 있으므로 번역본에서도 아티케 방언을 사용한 점이나 자음이 중복되는 경우 둘 다 읽어주는 것은 최대한 원어와 비슷하게 음절 표기를 하려는 노력이 보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즉 오디세이아→오뒷세이아 이렇게 표시하여 낯설게 느껴지지만 라틴어어 그리스어는 모든 자음을 있는 그대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다만 2006년에 개정판을 내놓으면서 주석을 추가한 것 같은데 제 19권의 4번째 주석은 제 8권의 9번 주석을 참고해야 하는데 제 8권의 8번 주석을 참고하라고 적혀 있어 추가한 주석 증가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깔끔하게 번역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그마한 오탈자나 잘못된 표시가 있는 경우 그 책에 대한 인상이 바뀌기 쉽다. 개정판에서는 이를 수정하기를 바란다.

 

 각설하고 먼저 글쓴이인 호메로스(Homeros)에 대해 살펴보면 이른바 <호메로스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호메로스가 과연 한 명이냐 다수냐 하는 문제인데 처음에는 다수라는 의견이 힘을 받다가 근래 한 명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어 현재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찌되었건 다수의 학자는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 말경에 활동하였으며 활동 장소는 이오니아 지방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그가 남긴 서사시 두 편이 바로 <일리아스><오뒷세이아>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은 이른바 [트로이아 서사시권]에 속해있다. 즉, 우리가 아는 '가장 예쁜 여신에게'라고 쓰여진 황금 사과로부터 트로이 전쟁,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여행 등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포함하는 총 8개의 서사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맨 처음 <일리아스>를 읽을 때 황당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부터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불화부터 <일리아스>는 시작되어 헥토르의 장례로 끝나는 것이다. 미리 신화나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난감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트로이의 별명인 'Ilios'부터 유래된 <Ilias>는 1500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쳐 호메로스는 최고(最古)의 시인으로 숭상 받고 있는 것이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비판한 점도 있지만… 이 서사시가 대략 기원전 8세기 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플롯이나 구성 등에 대한 비판은 부적절해 보인다. 게다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우연히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꾸준히 인용되고 읽혀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서사시이다. 현재 우리 나라 글 중에 기원전 8세기의 것이 남아 있는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남아 있는 고전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점보다는 장점에 중심을 두고 읽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철학자 플라톤은 비교육적이라고 호메로스를 비판했지만 <일리아스>가 주는 교훈에 집중해서 읽는다면 기존 문학과 다른 서사시가 주는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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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1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으로 암향부동님의 서재에 와서 모든 글을 읽지는 않았지만
부동님이 읽으신 책들 중에 고전 몇 권 보이네요ㅎㅎ
저도 사실 고전을 좋아하거든요^^ 부동님의 <일리아드> 리뷰를 읽으니깐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읽고 싶어지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암향부동 2010-10-12 14:14   좋아요 0 | URL
아무도 읽지 않는 것이 고전이라고 어떤 철학자는 이야기했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전이라면 시대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고전을 좋아해서 꾸준히 읽고 사 모으고 있습니다만… 대학생인지라 돈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네요. 특히 천병희 선생님의 책은 출판 후 1년 6개월이 지나도 급격히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책인지라 부담이 좀 되더군요.
그래도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은 천병희 선생님이 첫 손가락에 꼽히시는 만큼 꾸준히 책을 읽고 모아갈 생각입니다.^^ Cyrus님의 서재에서도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명상록>에 대한 서평이 있더군요.

cyrus 2010-10-12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 두 권을 예전에 천병희 교수의 저작 할인 이벤트 때 지를려라다가,,, 적지 않은 가격 때문에 잠시 접었답니다^^;;ㅎㅎ
하지만 여유만 된다면 한 권씩 사두려고 합니다. 그만큼 오래 읽을 수 있는 고전이고,
소장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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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나 역시 '만화'에 대한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편이 아니다. 어렸을 적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만화책이나 보고 니가 어린애냐?"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부모님 말을 잘 듣던 '착한' 나로서는 중학교 입학 이후 만화책을 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런 선입견을 2차례에 걸쳐 깨드려 준 것이 바로 스포츠 만화인 <슬램덩크(Slam Dunk)>와 웹툰 들이었다. 첫 번째로 나에게 만화의 재미를 알려 준 것이 바로 슬램덩크였다. 당시 미친 듯이 농구에 빠져있던 나는 슬램덩크가 주는 농구의 재미에 열광했었다. 이 때 비로소 '만화'가 반드시 비현실적이라거나 비교육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 두 번째로 만화의 을 알려준 것이 여러 웹툰들이었다. 맨 처음 만난 웹툰에 대한 관심은 <마린블루스>에서 시작하여 이후 강풀의 <26년>을 보고 난 만화가 비로소 '힘' 을 가질 수 있고 '메세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 세 번째로 나에게 만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려 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여전히 "만화=재미"라는 등가공식을 당연시 하던 나에게 이 책은 만화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만 그림으로 다를 뿐 안에 담긴 메세지는 다른 책과 다르지 않음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지고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그림이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오히려 글보다 효과적이라 만화라는 형식을 사용했을 뿐 실제 주는 메세지는 글보다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만화책을 '본다'는 표현보다는 '읽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예컨대 이 단편집에 두 번째로 실린 <자살 방조>라는 만화를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내 군 생활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작전행정병으로 과도한 업무와 구타에 시달리던 나에게 이 만화 속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의자'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 주인공은 작전과장을 비롯한 간부였다. 오직 의자와 같이 사병을 비품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씻기거나 재우지 않고 일을 시키는 모습이 묘하게 만화에 그대로 대입되었다. 특히 "넌 문을 잠그고 내무실로 가서 잠이 들지. 그리고 다음날 어제와 다름 없는 사무실을 보곤 밤 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는 건가?"라는 의자의 이야기는 군 생활에서 내가 간부에게 하고자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저녁 점호와 다음날 아침 점호에 변함없이 참석하는 병사를 보면서 정말 내무실에서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믿는건가? 실제 점호 시간 이후 이어지는 폭언과 구타, 그리고 선임병 근무 대신 투입되어 한 숨도 눈을 붙이지 못해도 내가 뛰어난 작전병의 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당직사령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아기공룡 둘리에 대한 오마쥬인 <공룡 둘리>를 읽으면서 나는 불청객 취급받는 둘리와 그 친구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공장에서 일하던 둘리는 프레스에 의해 손이 잘리지만 공장주는 "이 민증도 없는 새끼!!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어!! 당장 나가!!"라고 오히려 윽박지르고 친구라고 믿었던 철수는 "오갈 데 없는 것들 데려다가 먹이고 재워줬더니… 친구!? 내가 니 친구냐?"라며 둘리는 폭행한다. 그리고 또치는 몸을 팔게 되고 마이콜은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고 도우너는 외계인 연구소에 의해 해부되게 된다. 특히 "어디에 있든 상관없잖아? 어차피 불청객들인데…"이라는 또치의 말은 우리 나라에서 '불청객' 취급받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말 다름이 아니다. 결국 당시 한번 빙하기가 와서 현실을 피할 수 있는 잠에 빠지기를 원하는 둘리의 모습…. 과연 둘리는 다시 한 번 찾아온 빙하기 후 깨어났을 때 희망을 볼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선택>이란 만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쫓겨나야 했던 철거민에 대한 만화인데… 사실 나 역시 만화 내의 건설소장이 하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동감을 하고 있다. "세 들어 살다 철거 된다니께 집 내놓으라는 것도 도둑놈 심보고… 그러구 지들이 저런다고 국가에서 날 받아 논 월드컵을 도로 물릴겨? 다아 빨갱이 새끼들이지…. 고생들을 안 해봐서 그려"라는 말 중 빨갱이니 고생을 덜 해서 그렇다는 말은 헛소리지만 앞에 두 문장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철거민에게 어떤 권리가 보장되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법적으로 세 들어 살다가 계약 기간이 다 되거나 주인이 이사 비용 및 잔여 기간 주거 비용을 지급하는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정당하게' 세입자로 하여금 집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으로 할고 있다. 그렇다면 집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한 요구 아닐까? 혹여 이런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에는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뽑아 철거민 보호에 관한 법률을 통해 법적으로 보호 받는 것이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못 살고 못 배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득권 정당에 투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도 스스로 불러 온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바로 나치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올 것이다.



 결국 이 만화는 재미 보다는 메세지를 담은 책으로 '보는' 만화책이 아니라 '읽는' 만화책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 만화책은 비교육적이라는 선입관에 빠져 있다면 이 책과 함께 새로운 만화를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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