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연대기 1 (양장) - 창건과 혼란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양장본 Set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서평을 통해 살펴 본 바 여기서는 제 1권에 대해서만 살펴볼까 한다. 1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것부터 470년 뒤 샤를마뉴(알고보니 이름이 샤를이고 마뉴는 존칭으로 붙이는 말이라고 한다.) 대제가 800년에 서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까지의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 이 책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크게 기독교 분열 문제와 황제 등극 문제 그리고 이민족 침입에 대한 방어 문제이다.
 

 일단 기독교 분열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비잔티움 제국 황제는 언제나 이단 문제로 골머리를 썩여 왔다. 초창기에는 아리우스파 이단 문제가 있었으며 이어서 단성론과 양성론 사이의 문제가 있었다. 먼저 아리우스파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의 견해를 따르는 종파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영원하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특정한 시기에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조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인간이라 해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언제나 복종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Trinity)를 재확인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나 이후 계속되는 이단 문제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론은 억지스러운 면이 많다. 그래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에도 게르만족에게 널리 퍼졌으며 특히 이슬람교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참고로 여호와의 증인도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이어서 단성론과 양성론 문제인데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견해이고 양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결국 단성론이 이단으로 선고받았으나 이는 이단 정죄를 위한 공의회 참석 인원이 양성론자 위주였고 특히 그들을 매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서 제국의 힘이 분열되자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단의론(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을 가지지만 단일한 의지를 가진다는 내용)를 펼쳐 그들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단의론은 양자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파와 단성론자를 정죄함으로써 종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던 찰나에 이제는 성상 파괴 문제가 다시 붉어졌다. 십계명에 의하면 우상 숭배를 하면 안되는 것 이었는바 레온 3세 황제는 성상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서로마 교황이 이를 비난하면서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분열이 초래되었고 제국은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십계명을 잘 살펴보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당시 만연되어 있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었지 성상도 만들지 말라고 보기는 힘들다. 어찌되었건 시도 때도 없이 종교 문제는 황제의 커다란 골치거리 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결속을 방해하였다. 이를 보면 우리 나라는 종교 문제로 현재 큰 갈등을 겪지 않는다는 점이 축복으로 보인다. 종교 문제는 신념과 연관되어 나라를 분열케 하고 이는 곧 국력 약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2MB는 너무 대놓고 기독교 편향 정책을 펴는 바 멀지 않은 미래에 종교 갈등이 심화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연 우리도 종교 문제로 피를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2MB는 역사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이어서 황제 등극 문제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보면 언제나 황제 등극 과정이 암살, 쿠테타 등으로 얼룩져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황실 핏줄이 잘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처다부제를 통해 형제끼리 싸움이 있었을지언정 황실 핏줄이 완전히 끊겨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자가 황제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국교였던 로마 제국의 경우 일처일부제였고 그 결과 황실 핏줄이 끊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동아시아와 달리 황실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황족으로 여겨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황족 여자의 경우 언제나 황제 위를 노리는 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황제가 죽으면 언제나 피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문제는 이민족 문제였다. 초창기 문화면이나 군사력면에서 근처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로마 시절에 비해 비잔티움 제국은 근처에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적국이 많았다. 동쪽에는 아르메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슬람 세력이 있었으며 카타니아 지방에는 '신의 징벌'이라고 불리던 훈족 아틸라 등 이제 군사적으로도 비잔티움 제국은 이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비록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에 벨리사리우스라는 명장의 힘으로 이탈리아를 다시 수복하였으나 이미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어를 사용한데 비해 이탈리아는 여전히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이미 문화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 이탈리아 지방은 유스티아누스 사후 다시 이민족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를 보면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로마/그리스 시절의 모든 영광을 잊어 버리고 악덕만 남은 나라라고 혹평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은 종교 문제, 황제 등극 과정에서 얼룩진 피,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는 바 비잔티움 제국은 이런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로마 문화를 계승하여 이를 보전하였고 동쪽에 있는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제 2권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와 몰락을 이어서 계속 살펴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잔티움 연대기 세트 (반양장) - 전3권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책을 고를 때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현혹되면 돈만 날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 역시 최초에 이 책을 서점에서 보았을때 예쁜 양장본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손이 이 책을 향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계사에 있어서 비잔티움 제국, 우리 나라에서는 관용적으로 비잔틴 제국이라 표기하는 동로마제국 역사는 거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출판사도 잘 알려진 출판사도 아니었는데다가 책을 보면서 '빈 수레가 요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마음 속 한 편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옮긴이가 남경태라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이 책을 보게 되었다.(이 서평은 각 단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트 전체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 책 이전에 이른바 '패러다임'을 잡고 있던 책인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먼저 번역과 편집 부분만 서로 비교해 보자. 이 책 번역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는데 '처음 완역한 것으로는 괜찮은 편이나 영어 직역투 번역은 아쉽다.'는 태도가 일반적인 것 같다. 이에 비해 이 책에서 번역 문제를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는바 이는 결정적으로 옮긴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번역자는 단순히 영어에만 능통한 전문번역가인데 비해 <비잔티움 연대기>의 번역자인 남경태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많은 책을 출판하고 번역을 꾸준히 해온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어 번역의 질에서는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편집을 살펴보면 <비잔티움 연대기>의 각 권 앞에 지도와 연표, 그리고 주요 인물과 주요 사건을 실어 놓은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가끔 너무 많은 인물과 지역명이 나올 때 마다 맨 앞의 지도와 연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비록 옮긴이의 주석은 각 장 아래에 있는데 비해 원 글쓴이의 주석은 전통적인 편집 방식에 따라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바 주석 나올 때마다 맨 뒤를 살펴보는 일은 굉장히 불편하였다. 읽는이를 좀 더 배려해서 각 장 밑에 주석을 위치시키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로마제국 쇠망사>는 양 옆에 주석을 배치하여 읽는 데 불편이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이 역시 부득이하게 <로마제국 쇠망사>와 비교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1776년에 영국에서 <로마제국 쇠망사>가 먼저 출판되어 로마 역사에 대한 기본 자료로 이른바 '패러다임'을 잡고 있다가 J.J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1988년에 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바탕으로 출판된 책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에서는 반대로 <비잔티움 연대기>가 먼저 완역되어 2007년에 소개된 후 2008년에 <로마제국 쇠망사> 역시 1년 후 완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기존에 <로마제국 쇠망사>가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완역본이 아니라 편집본이었다.)

 

 어찌되었든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간직한 모든 미덕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고 이는 로마 제국의 도덕적 타락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J.J 노리치는 비잔티움 제국은 서진하는 이슬람 문화를 막아주는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고 학문의 빛이 꺼질 때 콘스탄티노플의 학자들이 그리스 고전을 잘 보전한 덕택에 실전(失傳)되지 않고 서유럽에 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은 간단하게 제목에서 부터 알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책 제목은 로마제국 '쇠망사'이다. 즉, 로마제국이 어떻게 망해가는지 중심을 두고 서술한 책이고 비잔티움 제국은 단지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 있는 국가라고 보는 것인데 비해 J.J 노리치의 책 제목은 '비잔티움 연대기'이다. 즉, 로마와 다른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전혀 다른 제국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사라고 볼 수 있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비잔티움 연대기>를 읽어 나가면 시간의 흐름과 무관심 속에 숨겨져 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단 명쾌한 철학 간단 명쾌한 시리즈
고우다 레츠 지음, 이수경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철학이 무엇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이 책을 읽은 분들 중에도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이 직접 도움이 되는 예는 하나도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일에 갑자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의 삶에 신선한 기쁨과 감동을 준다. 지금까지 알던 세계와 내 생각이 바뀌고,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반대로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빛을 잃는다. 이처럼 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철학의 효용-(p.414~415) 
 
   
 흔히 철학에 대해서 드는 생각은 '너무 어렵다.' '실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철학책 읽을 시간에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우겠다.'라는 생각들이다. 물론 철학은 어렵고 실생활과 관련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 우리가 던지는 고민들, 예컨대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고민들은 이오니아 시절부터 철학자들이 고민해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언젠가는 반드시 접해야 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철학을 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서양 철학의 경우 비교적 번역이 잘 되어 있고 철학자들이 쓴 책들이 설명하듯이 되어 있어 그대로 글쓴이의 흐름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나 대륙 합리론이나 대륙 관념론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다양한 철학 사조가 존재하여 접근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동양 철학은 글 자체 보다는 주석이 중요한데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하여 누구의 주석을 따라가야 좋을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과의 만남에 있어서 도움이 되어줄 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효용이 나타난다. 이 책은 만물의 근원 탐구에서 '선한 삶'의 탐구로 발전한 고대 그리스 철학, 기독교의 탄생부터 근대 개막까지 이어진 중세 철학, 철학의 주제가 신에서 인간으로 바뀐 근대 철학, 실존주의, 기호학, 구조주의 등이 나타난 현대 철학,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여는 인도 철학, 이슬람 철학, 중국 철학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명 당 4쪽을 넘지 않는 분량으로 간략히 그들의 철학을 소개해주고 있고 특히 철학자 한 명마다 그들의 사상을 집약한 삽화를 통해 쉽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또한 많은 철학사 책들에서는 빠져있는 현대 철학(예컨대 생명윤리, 페미니즘, 인티그럴 사상)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점은 이 책의 뛰어난 점이라고 하겠다. 다만, 상대적으로 동양 철학에 대한 비중이 너무 작고 마치 윤리책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점은 아쉽다. 일단 이 책을 먼저 읽어 철학에 대한 개념을 잡은 후에 안광복 선생이 쓴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러셀이 쓴 <서양 철학사>, 풍우란의 <중국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를 읽어 나간다면 어렵다고 여겨지는 철학에 접근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페르시아(Persia)하면 단순히 유럽을 침공하던 중에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마라톤 전투에서 완패하고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는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페르시아는 아래와 B.C 500년 경 아래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였다. 그저 단순히 역사에 패배자로 남고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대상에 그칠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 자세히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서술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구입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서는 우리는 영화 [300]을 통해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아래 그림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도움이 될만한 그림이다. 즉, 초강대국 페르시아는 약 20~50만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공격하였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의 방진의 힘에 의해 경장갑을 입고 있던 페르시아 육군이 괴멸하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을 추격하다 살라미스 만에서 괴멸됨으로써 그리스 정복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보면 중장보병의 힘이 드러난 마라톤 전투는 그 의미가 크며 페르시아가 보여준 정보력에 대해서는 감탄은 자아나게 한다.


 
 이렇게 글쓴이는 실감나게 페르시아 전쟁을 책을 통해 재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과거 B.C300~500년 무렵의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거의 헤로도토스에 의지하여야 하며 존재하는 사료 역시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이성적으로 수많은 사료를 서로 비교 분석하여 그 당시의 역사를 비교적 있는 그대로 이 책에 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부담되는 책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혀 나가는 역사 소설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서술 방법 역시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읽는 내내 글쓴이의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은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완전히 도식화된 선(그리스)과 악(페르시아)의 싸움 공식에 함몰되어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상대적 약자인 그리스가, 전제정치를 하고 있으며 초강대국인 페르시아에 그들의 놀라운 용기와 지략으로 승리하여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너무도 일방적인 서술에 그치고 있다. 사료 분석에 있어서는 굉장히 공정하고 많은 노력을 한 글쓴이가 어째서 이런 서술을 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사실상 국내에 페르시아에 대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페르시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글쓴이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렇게 글쓴이는 실감나게 페르시아 전쟁을 책을 통해 재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과거 B.C300~500년 무렵의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거의 헤로도토스에 의지하여야 하며 존재하는 사료 역시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이성적으로 수많은 사료를 서로 비교 분석하여 그 당시의 역사를 비교적 있는 그대로 이 책에 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부담되는 책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혀 나가는 역사 소설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서술 방법 역시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읽는 내내 글쓴이의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은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완전히 도식화된 선(그리스)과 악(페르시아)의 싸움 공식에 함몰되어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상대적 약자인 그리스가, 전제정치를 하고 있으며 초강대국인 페르시아에 그들의 놀라운 용기와 지략으로 승리하여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너무도 일방적인 서술에 그치고 있다. 사료 분석에 있어서는 굉장히 공정하고 많은 노력을 한 글쓴이가 어째서 이런 서술을 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사실상 국내에 페르시아에 대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페르시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글쓴이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기를 바라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처음에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을 때 들었던 생각은 차라리 1권과 2권을 함께 묶어서 양장본으로 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그림을 넣기 위해 반들반들한 종이를 사용하였는데 이 경우 양장본이 아닌 경우 쉽게 제본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권과 2권 따로 내놓은 것 역시 따로 따로 판매하여 수익을 극대화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오주석 선생 사후 오주석 선생 유고간행위원회에서 유고를 모아서 출판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하나로 묶어서 내는 것 역시 좋은 모양새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책은 유고를 묶어서 낸 것이기 떄문에 1권에 총 12개의 옛 그림이 소개된 데에 비해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작가 미상의 <이채 초상> 이렇게 6개의 작품만 소개되고 있다.

 

 일단 가장 먼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이미 소개했던 내용이라 특별히 따로 언급할 것이 없지만 글쓴이는 일제 시대 일본의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호랑이 박멸 작전에 의해 한국 호랑이가 멸종된 것은 한민족의 정신, 그 기개와 기상이 허물어졌음을 상징한다(p.22)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호랑이를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생물학적으로 보면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유전적으로 극히 미비한 것이나 나는 호랑이 보다는 인간의 생명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호랑이의 수난은 굳이 일제 시대가 아니더라도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글쓴이는 <송하맹호도>의 표구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은은한 옥색의 우리 나라 전통 표구가 아니라 화려한 비단으로 치장된 표구로 인해 그림 관람에 적잖은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일본식으로 표구된 옛 그림을 대할 때에는 원래의 여백이 좀 더 넓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감상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다.(p.55)

 

 그리고 <마상청앵도> 역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이미 살펴본 바 넘어가도록 하고 이 책으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선의 <금강전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 금강전도는 한마디로 '이상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원형을 그리고 있으며 이상한 형태로 '제시'를 배열해 쓰고, '기년명' 그리고 '작품 제목'과 '작가 호'를 따로따로 적은 관지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아래 사진은 문화재청 홈피에서 가져온 것인데 제시 윗부분이 짤려있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이를 주역의 심오한 이치가 담긴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즉, 아래 그림을 살펴보면 태극을 세워놓은 모양이고 제시 역시 주역으로 해석하여 조선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다가올 이상세계를 기원하다는 깊은 뜻까지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p.135) 덕택에 책에 갑작스레 주역 내용이 나와서 당황을 하였으나 같은 그림을 보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그림을 보는 기쁨이 아닐까? 다만 조금 억지로 주역을 꿰맞춘듯한 느낌도 있지만 이런 해석은 나름 일리있고 흥미있다. 





 그리고 글쓴이는 [조선과 이조]라는 글을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음악을 듣고, 남의 술을 마시며, 남의 춤을 추면서 심지어 영어를 국어로 쓰자고 하는 우리가 주체적인가? 내 땅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들여놓고, 저들이 우리 땅을 더렵혀도 말 한 마디 못하며, 저들이 내 백성을 다치게 해도 따지지 못하는 우리가 더 독립적인가?… 이 모든 상황을 옛날과 비교해서 누가 조선을 사대주의 국가라 말하는가? 나는 두렵다!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후손의 나라가 과연 백 년이나 가겠는가?"(p.207) 이렇게 아주 열변을 토하시던데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쓴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음악을 듣고 남의 술을 마시고 남의 춤을 추는 것은 과거 우리의 전통 옷, 음악, 술, 춤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짐에 따른 당연한 결과 아닌가? 시대의 흐름에 뛰쳐진 것에 대해 반성은 없고 단순히 시대 한탄만 하고 있으면 불만만 많은 늙은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또한 현재 우리 나라가 주체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젊은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인 글쓴이 세대 사람들 잘못에 있다. 마지막으로 나라가 백년 못가도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국민을 위하지 않는 라라라면 차라리 망하는게 좋은 것이다. 이렇게 가끔 맹목적으로 전통에 대한 일편단심 사랑만 보여주는 글쓴이의 글을 읽을 때면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오주석 선생 사후 처음 유고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유고를 책으로 묶는 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문장의 흐름 역시 다듬어 지지 않았는데 과한 손질을 하면 고인에 대한 누를 끼칠 가능성이 높아 그 작업이 굉장히 힘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분들의 도움과 편집자의 탁월한 능력으로 미리 알지 못하면 유고라고 알 수 없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책이 나온 것에 대해 독자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기쁠 따름이다. 다만, 다시는 오주석 선생의 글을 볼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누군가 오주석 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