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숲 사이 저 계단은 꿈길을 걸을 때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마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려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올라 문 앞에 섰다.
낡아서 기품있는 저 쇳덩이

나는 열쇠가 없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여인네 같은 낙선재는 단아하다. 그래서인지 단청조차도 없다. 눈 쌓인 낙선재에 가고 싶다. 불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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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1-14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 너무 좋아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dalpan 2008-01-14 18:13   좋아요 0 | URL
허허..그런가요? 찍어둔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면 저도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찍을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 말이지요. 세상엔 가만두고 보아도 괜찮은 것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낯익은 항일독립운동가 '홍범도(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극동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송되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 잡는 호걸'로 불리던 혁명가는 노년에 크질오르다 시의 조선극장 수위로 생활했다. 이 극장에서 초연한 희극 '홍범도'를 보면서도 아무리 연극을 잘해도 백발백중의 내 총솜씨는 흉내내지 못할 것이라며 호방하게 웃었다던 노혁명가는 먼 중앙아시아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0여년 전 타슈켄트, 알마아타 등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조명한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희생당한 많은 조선인(2-3만명이 가축용 열차로 이주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들을 보았고, 홍범도를 말년까지 모시게 계시던 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조선극장의 초라한 수위 홍범도를 알게 되었다.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이다. 물론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그러던 1998년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으로 향하며 데탕트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절, 처음으로 서울에서 기차타고 대륙으로 뻗어가는 꿈을 꾸었다. 우리의 현실만이 아니라, 나의 사고도 한반도 남쪽에 갇혀 있었던 것이리라. 이 때 마음으로 여행일정의 1차 수정을 하였다. 한반도 종단철도(TKR)을 타고 출발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로 갈아탄 후 샹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아직 결행하지 못한 아주 긴 여행이다.

낯선 곳에 다가섬! 그곳에서는 생활이며 일상이기에 당연한 것이 이방인에겐 늘 새롭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것에 시선을 보내고 차이를 느끼며 내 딛은 곳의 일상을 되돌아 보는 것. 여행이라는 단어에 늘 설레는 마음이 드는 이유이다. 거기에 시공을 넘나드는 비행기가 아니라, 지루할지언정 한발한발 변화의 폭을 하나씩 느껴가는 기차여행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저자는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했다.

추억한다는 것! 저자는 이십대에 꿈꾸던 짝사랑 같던 이상의 몰락을 눈으로 직접 보며 추억하려했다. 샹트페트르부르크 핀란드역의 레닌 동상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레닌 동상까지 낡은 소비에트제 카메라에 담으며 변혁의 꿈이 일상의 권태로 주저앉은 내면의 상흔을 보듬고 몰락과 변화과 공존하는 러시아를 구석구석 추억했다.

샹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으로 귀국해 인파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떠올리고,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과거의 뜨겁던 바람 대신 자본주의 물결로 넘실대는 살벌한 자본의 칼바람에서 도대체 혁명이 언제였냐고 되물으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바이칼 앞에서 숱한 역사를 삼키고 인내한 초자연의 힘에 압도당하며, 연해주에 부는 자본주의 중국의 물결로 훗날 극동의 힘의 재편을 점치기도 하며, 거리에서 만난 카레이츠에게서 과거 힘없는 조국의 역사에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이 책의 키워드는 이처럼 다양하다. 기차여행, 조르키와 키예프 같은 낡은 소비에트제 카메라, 레닌으로 대변되는 과거 소비에트의 추억, 연해주 중앙아시아 사할린의 카레이츠, 러시아 전역에 넘실대는 자본주의의 물결, 그리고 일상이라는 가랑비에 조용히 젖어 변해가는 많은 사람들.

횡단에 한 달이라는 긴 시간과 유럽과 아시아를 건너뛰는 넓은 공간이었으니 수 많은 이야기가 당연하다는 생각이나, 이십년전 가졌던 이상과 변화하는 현실을 중심에 두고 카메라 파인더 속에 담담한 눈빛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일관되게 보고 싶어했던 저자만의 여행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내게는 언젠가 타 보기를 꿈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좋은 지침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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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절판


역사는 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에게 늘 경의를 표했다. 세월은 늘 그것들이 갖고 있는 낡음에 가치를 부여했다. 이 레닌의 동상이야말로 그러한 경의의 지표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의 태생은 복제물이지만 세월에 의해 오직 한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마냥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우리 삶의 한 페이지에 끼워져 생생하고 변치 않는 시간을 조망하고 있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46쪽

그렇다면 내 어떤 행위의 기억들이 불면을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와서 이십대를 추억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사랑했지만 볼 수 없었고, 느껴보려 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짝사랑이 내 뇌 속 심연에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흔은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날카롭게 배신하고 간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고자 했던 내 의지의 종말 때문이다. 시간은 그 짝사랑의 고통을 중화시켰다. 변혁은 개혁이 되고, 개혁은 개량이 되고, 개량은 권태가 되었다. 나의 불면은 그 일상의 권태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62쪽

지금 모스크바에는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과거 소비에트의 붕괴와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이 불었다면, 지금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재편이라는 칼바람이다. 물고 뜯는 비정한 바람인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방인에 비친 모스크비치들은 놀랄 만치 적응을 잘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언제 혁명을 했었나 되묻고 있다. (모스크바에서)-104쪽

에벤키인들의 솟대. 그 형식과 상징성에서 우리네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부랴트인들과는 달리 퉁구스어계에 속하는 에벤키인들의 언어에는 '아리랑'과 '쓰리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맞이하다'는 뜻과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리랑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우리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울란우데에서)-193쪽

블라디보스토크 위쪽의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고려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 시절 강제 이주되면서 비어버린 당에 들어온 이들은 사할린에서 살던 고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통적으로 연해주 고려인 하면 사할린 출신들을 뜻한다. 이들은 한국어를 거의 못할 뿐더러 문화도 잊었다. 요즘 우수리스크에 한글 간판이 들어서고 한국어가 흘러나오게 된 것은 이들이 아니라 중국 조선족들 덕분이라고 한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최근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민족주의가 심화되면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들 중 나이 많은 이주 1세대나 2세대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삶의 기반을 버리고 또다시 이주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몇 해 전 타슈켄트에서 만난 고려인 노인은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소? 그래도 우린 집도 짓고 농사도 지었지. (중략) 연해주로 돌아간다고 무슨 걱정이 있겠소. 땅 많겠다. 내 먹을 것만 지으면 되는 거 아니오. 다만 여기 남은 아이들이 걱정이지."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어디에서 왔나?"
"하노이에서 왔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나?"
"전에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벌목이나 어업 노동자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은 주로 장사를 한다."
이 여성들은 환전상이었다. 주로 중국 위안과 루블을 교환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사회주의 맹주들이 모여 자본주의 시장을 열고 있었다. 참 시대의 아이러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8쪽

개발 초기, 부두나 건설 현장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주로 아무르 만이 보이는 산비탈 포그라니치나야 거리의 '개척리 마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1910년을 전후해 이 마을은 한동안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중략) 그러나 1911년 러시아 정부는 콜레라 근절을 이유로 이곳에 살던 한인 수천 명을 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다. 이후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라게르 산비탈 서쪽에 '신한촌'을 만들어 정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곳에서도 신한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241쪽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이듬해 일본인은 정전협정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유민으로 남은 카레이츠(고려인)들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귀국선을 기다렸다. 그러나 귀국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사할린에서)-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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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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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은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읽은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 속의 책을 보면서도, 즐거울 것만 같은 여행계획을 짜다가도, 무던히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일체의 실망감과도 다르고, 정처없는 무기력감과도 다르다. 미적분을 열심히 공부하던 수학 수업시간에 이거 배워서 어디다 쓰나?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뜸금없는 좌절감이랄까? 여기에 나만 그런가?라는 생각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외로움으로까지 몰아붙인다.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이라는 것은 희망하고 갈구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해서 오는 실망감에서 보다는 그것을 향한 자신의 의지의 종말을 목도할 때 불쑥 튀어나온다. 무의미하던 인생이라는 카드의 패를 하나씩 뒤집어 놓는 것에 대해 불안하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이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무의미가 유의미가 되는 것도 카드 뒤집는 것만큼 단순한 일이다.

주인공 '복귀'는 노름판을 찾아와 집으로 가자며 무릎 꿇고 빌던 아내 '가진'을 두들겨 패 내쫒고 결국 대대로 물려 온 가산을 탕진하고서야, 아니 어쩌면 평소 불한당처럼 욕을 보였던 장인이 아내 '가진'마저 앗아갔을 때 비로소 무의미했던 삶이, 살아가야한다는 태생의 무게로 지워져 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들 '유경'과 딸 '봉하'를 보낼 때도.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무엇으로 행복한가? 왜 살아가는가?

비록 사람따라 수 만 가지의 대답이 있겠으나, 부모의 힘으로 커가고 머리가 굵어 결혼하고 자식놓고 바쁘게 살아가다 하나씩 둘씩 가까운 인연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인간 대부분이 겪는 보편적 인생행로이며,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의 보따리다.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活着)>은 중국혁명과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관통하는 시기에 농민으로 몰락한 지주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도식적인 설명이고 내게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내고도 견디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짚어준 눈물어린 슬픈 글이다. 이제까지 읽은 위화의 글이 그렇듯 인간의 삶이라는 긴 여정이 주인공이지 역사는 인간 삶의 변수일뿐이다. 그럼에도 글은 역사와 괴리되지 않고 개인의 삶의 질곡을 역사 속에서 투영하고 풍자하고 관조한다. 위화의 글에 빠져드는 이유이다.

글쓰는 과정에서 작가는 깨달았다고 한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늙은 노인 복귀와 또 다른 복귀인 늙은 소처럼, 이미 태어나 짊어진 짐같은 인생을 어느날 불현듯 덤으로 더 살고있다고 느껴질 때, 그 때면 나도 이런 글 하나 쓸 수 있을까?

**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리뷰에서처럼 <살아간다는 것>이었으나, 리뷰를 올리는 시점에서는 절판이 되었고, 이 소설을 영화화한 <인생>을 소설의 제목으로까지 바뀌어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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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1-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의 이름이 '유경'이로군요. 흐음.

dalpan 2008-01-07 10:26   좋아요 0 | URL
다락님 땜에 아침부터 웃었습니다. 하하하.. 어찌그리 콕 찝어낸대요.

다락방 2008-01-07 13:55   좋아요 0 | URL
쉿!
이러다 다른사람들도 제가 무슨말 하는지 알면 어떡해요.
훗 :)

프레이야 2008-01-22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아간다는 것'으로 읽었어요.
짐 같은 인생을 덤으로 더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와닿는 표현이에요.
늙은 촌부 복귀와 그의 소, 사람은 그렇게 '덤'과 동행하며 사나 봅니다.
굿모닝 달판 님^^

dalpan 2008-01-22 12:12   좋아요 0 | URL
이른 아침부터 오셨네요. 잘 지내시지요?
석양지는 나무그늘에 늙은 촌부와 늙은 소 한마리.
참 흔한 장면일듯한데 그게 그렇게 사연이 많더군요.
사람 인생이라는게 그래서 다 소중한가 봅니다.
 

아! 이제서야 겨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춥긴했지만, 단단히 무장하고 해 바뀐 새벽에 뛰었다. 올해내내 과연 며칠이나 이렇게 뛸까 생각도 했지만 이제 지워버렸다. 그냥 뛰면 되는 것을...
 

[ 이름모를 분의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 해가 뜨지않은 탄천...]

수십통의 문자메세지와 수십통의 연하장과 수십통의 연하메일을 받고서야 뒤돌아 본다. 세상 헛살지는 않았구나... 내내 그 생각을 하며 입 꾸욱 다물고 뛰었다. 때로는 애정어린 표현으로 때로는 근심어린 마음으로, 때로는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올해만큼 그리 감사한 적이 없었다싶고, 눈물겹게 감사한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 차갑던 공기에도 뛰는 동안 훈훈해져 오는 몸처럼, 또 열심히 뛰어야 그들에게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내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한,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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