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낯익은 항일독립운동가 '홍범도(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극동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송되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 잡는 호걸'로 불리던 혁명가는 노년에 크질오르다 시의 조선극장 수위로 생활했다. 이 극장에서 초연한 희극 '홍범도'를 보면서도 아무리 연극을 잘해도 백발백중의 내 총솜씨는 흉내내지 못할 것이라며 호방하게 웃었다던 노혁명가는 먼 중앙아시아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0여년 전 타슈켄트, 알마아타 등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조명한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희생당한 많은 조선인(2-3만명이 가축용 열차로 이주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들을 보았고, 홍범도를 말년까지 모시게 계시던 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조선극장의 초라한 수위 홍범도를 알게 되었다.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이다. 물론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그러던 1998년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으로 향하며 데탕트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절, 처음으로 서울에서 기차타고 대륙으로 뻗어가는 꿈을 꾸었다. 우리의 현실만이 아니라, 나의 사고도 한반도 남쪽에 갇혀 있었던 것이리라. 이 때 마음으로 여행일정의 1차 수정을 하였다. 한반도 종단철도(TKR)을 타고 출발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로 갈아탄 후 샹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아직 결행하지 못한 아주 긴 여행이다.

낯선 곳에 다가섬! 그곳에서는 생활이며 일상이기에 당연한 것이 이방인에겐 늘 새롭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것에 시선을 보내고 차이를 느끼며 내 딛은 곳의 일상을 되돌아 보는 것. 여행이라는 단어에 늘 설레는 마음이 드는 이유이다. 거기에 시공을 넘나드는 비행기가 아니라, 지루할지언정 한발한발 변화의 폭을 하나씩 느껴가는 기차여행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저자는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했다.

추억한다는 것! 저자는 이십대에 꿈꾸던 짝사랑 같던 이상의 몰락을 눈으로 직접 보며 추억하려했다. 샹트페트르부르크 핀란드역의 레닌 동상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레닌 동상까지 낡은 소비에트제 카메라에 담으며 변혁의 꿈이 일상의 권태로 주저앉은 내면의 상흔을 보듬고 몰락과 변화과 공존하는 러시아를 구석구석 추억했다.

샹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으로 귀국해 인파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떠올리고,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과거의 뜨겁던 바람 대신 자본주의 물결로 넘실대는 살벌한 자본의 칼바람에서 도대체 혁명이 언제였냐고 되물으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바이칼 앞에서 숱한 역사를 삼키고 인내한 초자연의 힘에 압도당하며, 연해주에 부는 자본주의 중국의 물결로 훗날 극동의 힘의 재편을 점치기도 하며, 거리에서 만난 카레이츠에게서 과거 힘없는 조국의 역사에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이 책의 키워드는 이처럼 다양하다. 기차여행, 조르키와 키예프 같은 낡은 소비에트제 카메라, 레닌으로 대변되는 과거 소비에트의 추억, 연해주 중앙아시아 사할린의 카레이츠, 러시아 전역에 넘실대는 자본주의의 물결, 그리고 일상이라는 가랑비에 조용히 젖어 변해가는 많은 사람들.

횡단에 한 달이라는 긴 시간과 유럽과 아시아를 건너뛰는 넓은 공간이었으니 수 많은 이야기가 당연하다는 생각이나, 이십년전 가졌던 이상과 변화하는 현실을 중심에 두고 카메라 파인더 속에 담담한 눈빛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일관되게 보고 싶어했던 저자만의 여행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내게는 언젠가 타 보기를 꿈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좋은 지침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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