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에게 늘 경의를 표했다. 세월은 늘 그것들이 갖고 있는 낡음에 가치를 부여했다. 이 레닌의 동상이야말로 그러한 경의의 지표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의 태생은 복제물이지만 세월에 의해 오직 한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마냥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우리 삶의 한 페이지에 끼워져 생생하고 변치 않는 시간을 조망하고 있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46쪽
그렇다면 내 어떤 행위의 기억들이 불면을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와서 이십대를 추억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사랑했지만 볼 수 없었고, 느껴보려 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짝사랑이 내 뇌 속 심연에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흔은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날카롭게 배신하고 간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고자 했던 내 의지의 종말 때문이다. 시간은 그 짝사랑의 고통을 중화시켰다. 변혁은 개혁이 되고, 개혁은 개량이 되고, 개량은 권태가 되었다. 나의 불면은 그 일상의 권태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62쪽
지금 모스크바에는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과거 소비에트의 붕괴와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이 불었다면, 지금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재편이라는 칼바람이다. 물고 뜯는 비정한 바람인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방인에 비친 모스크비치들은 놀랄 만치 적응을 잘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언제 혁명을 했었나 되묻고 있다. (모스크바에서)-104쪽
에벤키인들의 솟대. 그 형식과 상징성에서 우리네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부랴트인들과는 달리 퉁구스어계에 속하는 에벤키인들의 언어에는 '아리랑'과 '쓰리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맞이하다'는 뜻과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리랑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우리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울란우데에서)-193쪽
블라디보스토크 위쪽의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고려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 시절 강제 이주되면서 비어버린 당에 들어온 이들은 사할린에서 살던 고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통적으로 연해주 고려인 하면 사할린 출신들을 뜻한다. 이들은 한국어를 거의 못할 뿐더러 문화도 잊었다. 요즘 우수리스크에 한글 간판이 들어서고 한국어가 흘러나오게 된 것은 이들이 아니라 중국 조선족들 덕분이라고 한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최근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민족주의가 심화되면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들 중 나이 많은 이주 1세대나 2세대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삶의 기반을 버리고 또다시 이주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몇 해 전 타슈켄트에서 만난 고려인 노인은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소? 그래도 우린 집도 짓고 농사도 지었지. (중략) 연해주로 돌아간다고 무슨 걱정이 있겠소. 땅 많겠다. 내 먹을 것만 지으면 되는 거 아니오. 다만 여기 남은 아이들이 걱정이지."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어디에서 왔나?" "하노이에서 왔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나?" "전에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벌목이나 어업 노동자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은 주로 장사를 한다." 이 여성들은 환전상이었다. 주로 중국 위안과 루블을 교환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사회주의 맹주들이 모여 자본주의 시장을 열고 있었다. 참 시대의 아이러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8쪽
개발 초기, 부두나 건설 현장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주로 아무르 만이 보이는 산비탈 포그라니치나야 거리의 '개척리 마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1910년을 전후해 이 마을은 한동안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중략) 그러나 1911년 러시아 정부는 콜레라 근절을 이유로 이곳에 살던 한인 수천 명을 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다. 이후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라게르 산비탈 서쪽에 '신한촌'을 만들어 정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곳에서도 신한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241쪽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이듬해 일본인은 정전협정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유민으로 남은 카레이츠(고려인)들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귀국선을 기다렸다. 그러나 귀국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사할린에서)-26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