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품절


서경식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때의 관념적 질문이 아니라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실존의 문제였다. 그는 일본에 산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그는 '불편한' 이방인이다. '빼어난 일본어 표현'으로 일본에세이스트 클럽상까지 수상한 이 작가의 혀와 펜은 곧잘 일본이라는 국가, 국민의 벽을 난타하는 망치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살아왔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낯선 자이다. 또 국가, 국민에 대한 그의 비판이 '5,000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의 '성공신화'에 매달리는 한국인을 겨냥할 때 이 나라 역시 그를 외면할지도 모른다. 요컨데 그는 '재일조선인'이다.-7쪽

그는 '조선인'이라 차별받으면 또 '조선은 나쁜 게 아니라'며 위로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정체성을 물어왔다. (중략)
그 고통스러운 물음의 과정에서 위안부 할머니들과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역사의 증언자들은 그런 처지가 그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조선인이라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억압받았고, 그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끊질기게 물을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 모호성과 작위성, 역사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깨달은 그들은 그들의 고통이 인류가 20세기를 지나오면서 겪은 보편적인 고통임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역사, 인간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보편적인 물음으로 바꿔 물으며, 또 그것을 우리에게도 들려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물음의 과정에서 예술을 만났다. 그저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 바깥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 예술은 그가 형들을 가둔 남한 군부독재의 감옥, 일본이라는 감옥, 국가라는 감옥, 국민이라는 감옥, 현실이라는 감옥을 버텨낼 수 있는 한 움큼의 공기였다.-8쪽

오늘 여기에 조선말을 쓰는 김상봉하고 조선어를 잘 몰라서 일본어를 쓰는 서경식이 만나 소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단지 소통이 잘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소통해야 하면 어려워도 소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순서는, '공통의 언어가 있고 그 바탕에서 소통하게 된다'가 아니라 '소통의 필요가 있고 그로부터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져간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말에 영향받은 일본말이 되고 일본말에 영향받은 조선말이 되어가는 거죠. 그런 피진화의 과정은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서경식)-76쪽

저는 학자는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위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해요. 이광수와 최남선을 두고 한 말인데, 함석헌 선생은 그네들이 끝까지 울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상봉)-101쪽

광주에 오니 '5.18 정신을 계승하자'는 구호를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정신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5.18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잘못된 것이고 그런 물음에 '5.18 정신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규정을 답으로 내놓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은 결국 그런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 타인에 대한 태도 등을 이어나가고 살려나가고 펼쳐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5.18 정신의 살림과 펼침을 생각할 때, 저는 광주항쟁이라는 역사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재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소외되고 고립된 외부와 연대를 실천하려는 상상력이야말로 정신의 실체화, 물신화를 피해 5.18을 올바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요? (서경식)-114쪽

국가가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작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흔히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것을 두고 누군가 '그것은 향수일 뿐이다. 퇴행적인 노스탤지어다'라는 식으로 공격을 해요. 제가 미셸 클레이피라는 팔레스타인 난민 영화감독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노스탤지어야말로 우리의 무기다"라는 말을 장 주네가 했다고 해요. 국가가 우리 기억에 가한 폭력, 교육이나 문화를 모두 동원해 저지르는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 기억의 투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노스탤지어야 말로 마지막 무기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저는 역사에,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 온 듯한 느낌'이라고 했을 때도 수긍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기다. 국가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다'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서경식)-232쪽

요약하자면 이렇군요. 시민적 주체성이야말로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핵심인데 일본에서는 (국민이 되기 위해) 예속되어야 할 초자아로서의 천황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유로운 주체, 자유롭기 때문에 성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 거로군요. 말씀을 듣다 보니, 일본에서 천황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시민들이 국가에 대해 자율적, 주체적으로 자기를 정립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상봉)-312쪽

도식화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되니까, 좀더 이야기를 보태보겠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나름대로 천황제에 대한 저항이 있어왔습니다. 또 지금 일본 사람들에게 천황제에 관해 묻는다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냥 일상에서 문제가 안 되닌 별 문제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천황제를 문제 삼는 것을 지나치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0년대 들어 공산당조차 계급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으로 강령을 바꾸었고, 이제까지 줄곧 공공연히 반대해왔던 천황제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습니다. 천황제는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고 열광적이지도 않은 조용한 전체주의가 된 거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살기 좋아졌다'는 실감을 다수가 공유하는 게 문제일겁니다. 뭐랄까, 공범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거지요.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에 실패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20세기에는 주변 이웃들과 침략이라는 잘못된 방식을 통해서만 만났고, 1990년대에 '증언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그 때도 피해자들, 증언자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20세기 역사는 그렇게 (타자와의) 만남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실패해온 역사였습니다. (서경식)-312쪽

인간이 똑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것이 남에 대한 격분에 머무를 때는 고통이 타인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 대한 슬픔으로 전환될 때 그것이 비로소 우리를 참된 만남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는 것이죠. (서경식)-354쪽

헤겔이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건 사실은 아무리 좋게 봐도 오도된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다른 의미에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말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성적이 되어야 하고 '이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지 못할 때는 유토피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김상봉)-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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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 전2권 세상을 뒤흔든 368일
왕쑤 지음, 송춘남 옮김, 선야오이 그림, 웨이웨 이 원작 / 보리 / 2006년 11월
절판


(마오쩌둥의 아내였던 허쯔전은 만삭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으며, 장정 도중 구이저우의 외딴 집에서 딸을 순산하지만, 전쟁중인 상황이라 아기를 버려야만 했다.)

들것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등비우와 허우정은 방에 들어갔다. 한참 울던 아기는 짚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허우정은 은전 서른 닢을 아기 곁에 놓고 아편 두 덩이는 사발 안에 넣어 두었다. 언제나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등비우는 바닥이 더러운 것을 보자 빗자루를 들고 깨끗이 쓸어 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종이를 펴 놓고 편지를 썼다.

집주인님께.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노농 홍군입니다. 절대 토호나 악덕 지주들이 하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은 싸워야 하는 때라서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아이를 길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적지만 은전 서른 닢과 아편 두 덩이를 받아 주십시오. - 홍군 휴양중대 등비우 드림 -

등비우는 편지가 없어질까 봐 무거운 물건으로 짓눌러 놓고 대열을 따라나섰다.-상권 331쪽

(1935년 5월 29일 새벽6시, 쓰촨 루딩 교)
마침내 부대는 6시 전에 루딩 교에 이르렀다. (중략) 다릿목에는 모래주머니로 쌓은 사격진지가 있고 그 사이로 거무스레한 총구멍이 보였다.
홍군 수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그 유명한 쇠사슬 다리를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리 위에 깔았던 널빤지는 모두 걷어 버리고 쇠사슬 열세 가닥만 사납게 흐르는 강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밤 비바람을 무릅쓰고 흙탕물에 뒹굴면서 목숨 걸고 달려왔는데, 그것이 이 차디찬 쇠사슬 몇 가닥을 위해서였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양청우와 왕카이샹은 머리가 다 쭈뼛하여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하권 92쪽

산(자진산, 4260미터)이 높아질수록 바람은 더 차가웠다. 커다란 태양은 얼음으로 만들었는지 따뜻한 기운이 전혀 없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홍타오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계속 이를 딱딱 부딪쳤다. 차이창이 스웨터를 벗어 홍타오에게 입혀 주었다. 하지만 몸이 너무 허약했던 홍타오는 차이창과 두톄추이의 부축을 받으며 100미터쯤 올라가다가 다리맥이 풀려 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차이창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홍타오, 안 돼요, 앉으면 안 돼요."
차이창이 홍타오를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섰다가는 금방 다시 주저앉았다. 홍타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차이 누님, 안 되겠어요. 제가 누님을 잘 돌봐 드리지 못했어요."
"홍타오, 저기 봐요. 산꼭대기에 다 왔어요."
홍타오는 어린애처럼 순진한 눈을 크게 뜨고 차이창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 엄마한테 편지를 써 주세요."
그러고는 두터운 눈 위에 쓰러졌다. 차이창은 홍타오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중략) 홍타오는 차이창의 자줏빛 스웨터를 입고 설산에 잠들었다.-하권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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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절판


역사는 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에게 늘 경의를 표했다. 세월은 늘 그것들이 갖고 있는 낡음에 가치를 부여했다. 이 레닌의 동상이야말로 그러한 경의의 지표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의 태생은 복제물이지만 세월에 의해 오직 한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마냥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우리 삶의 한 페이지에 끼워져 생생하고 변치 않는 시간을 조망하고 있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46쪽

그렇다면 내 어떤 행위의 기억들이 불면을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와서 이십대를 추억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사랑했지만 볼 수 없었고, 느껴보려 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짝사랑이 내 뇌 속 심연에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흔은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날카롭게 배신하고 간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고자 했던 내 의지의 종말 때문이다. 시간은 그 짝사랑의 고통을 중화시켰다. 변혁은 개혁이 되고, 개혁은 개량이 되고, 개량은 권태가 되었다. 나의 불면은 그 일상의 권태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62쪽

지금 모스크바에는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과거 소비에트의 붕괴와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이 불었다면, 지금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재편이라는 칼바람이다. 물고 뜯는 비정한 바람인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방인에 비친 모스크비치들은 놀랄 만치 적응을 잘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언제 혁명을 했었나 되묻고 있다. (모스크바에서)-104쪽

에벤키인들의 솟대. 그 형식과 상징성에서 우리네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부랴트인들과는 달리 퉁구스어계에 속하는 에벤키인들의 언어에는 '아리랑'과 '쓰리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맞이하다'는 뜻과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리랑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우리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울란우데에서)-193쪽

블라디보스토크 위쪽의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고려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 시절 강제 이주되면서 비어버린 당에 들어온 이들은 사할린에서 살던 고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통적으로 연해주 고려인 하면 사할린 출신들을 뜻한다. 이들은 한국어를 거의 못할 뿐더러 문화도 잊었다. 요즘 우수리스크에 한글 간판이 들어서고 한국어가 흘러나오게 된 것은 이들이 아니라 중국 조선족들 덕분이라고 한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최근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민족주의가 심화되면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들 중 나이 많은 이주 1세대나 2세대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삶의 기반을 버리고 또다시 이주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몇 해 전 타슈켄트에서 만난 고려인 노인은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소? 그래도 우린 집도 짓고 농사도 지었지. (중략) 연해주로 돌아간다고 무슨 걱정이 있겠소. 땅 많겠다. 내 먹을 것만 지으면 되는 거 아니오. 다만 여기 남은 아이들이 걱정이지." (하바로프스크에서)-214쪽

"어디에서 왔나?"
"하노이에서 왔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나?"
"전에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벌목이나 어업 노동자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은 주로 장사를 한다."
이 여성들은 환전상이었다. 주로 중국 위안과 루블을 교환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사회주의 맹주들이 모여 자본주의 시장을 열고 있었다. 참 시대의 아이러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218쪽

개발 초기, 부두나 건설 현장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주로 아무르 만이 보이는 산비탈 포그라니치나야 거리의 '개척리 마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1910년을 전후해 이 마을은 한동안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중략) 그러나 1911년 러시아 정부는 콜레라 근절을 이유로 이곳에 살던 한인 수천 명을 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다. 이후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라게르 산비탈 서쪽에 '신한촌'을 만들어 정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곳에서도 신한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241쪽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이듬해 일본인은 정전협정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유민으로 남은 카레이츠(고려인)들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귀국선을 기다렸다. 그러나 귀국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사할린에서)-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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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절판


프리모 레비 : 미래를 위한 증인

토도로프는 수용소 생존자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수치심'을 실마리로 삼아 레비의 죽음을 고찰하고 있다. 첫째, 기억으로서의 수치심. 자신의 의사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와 자기 붕괴에 빠진 희생자의 수치심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흡사 강간당한 여성의 수치심처럼,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은 강간을 저지른 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도리어 희생당한 사람이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둘째,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레비는 만년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형을 죽인 카인이라는 의혹, 누구나 자신의 이웃을 밀어내고 그를 대신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혹이 마음을 갉아들고 구멍을 뚫는다'고. 그리고 셋째, 인간이라는 수치심. '인간이 아우슈비츠를 건설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죄이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같은 인간인 나 역시 유죄가 아닌가'하는 의식이다.-122쪽

갓산 카나파니 : 팔레스타인의 초상

언제가 되어야 자네는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이나 실수를 더이상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삼지 않을 것인가.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잘못은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과 실수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정당화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129쪽

하라 다미키 : 온몸이 기도가 되어

아내가 발병한 이후 하라의 작품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원폭 피해 뒤에 '여름꽃'을 발표하기까지 소설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내 만일 아내와 사별한다면, 딱 1년만 더 살리라.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 권의 시집을 남기기 위하여..."라는 시구는 분명 거짓 없는 심경이었다.-178쪽

김구 : 파란만장한 역사의 파노라마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인연은 임시정부에서 다시 맺어져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감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한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 독립운동계의 정신적 대모였으며, 동생 안정근은 연락과 재정 업무를 담당한 임시정부의 핵심으로 해방 후에는 김구의 밀서를 들고 김일성, 김두봉과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냈다. 막내동생 안공근도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며, 안정근의 둘째딸 안미생은 김구의 비서로 일하며 훗날 그의 며느리가 되었다. 안공근의 큰아들 안우생 역시 한국청년전위단 등의 핵심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구 암살 후에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안중근 가문은 그러나 5.16 후 군사정권에 의해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안경근이 7년형을, 숙부 안태건의 손자 안민생이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탄압을 받았다.-241쪽

박노해 : 노동의 새벽을 노래한 얼굴 없는 시인

세계를 뒤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은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랫소리도 순식간에 떠나보냈다.
(.....)
죽음 같은 자기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 데도 아무 데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울림으로 맥놀이쳐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 그해 겨울나무-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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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절판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해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인가...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향해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음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헌은 허리에 찬 환도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김상헌은 울음 대신 물었다.

-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느냐?
-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중략)

김상헌은 돌어서는 사공을 불러 세웠다. 김상헌이 다시 물었다.
-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궁색해도 너를 거두어주마.
나는 예조판서다... 새어 나오려는 말을 겨우 감추었다. 사공은 다시 대답했다.
- 아니오.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
- 가야 하겠구나. 그럼 가거라.
-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쪽이 빠릅니다. 그럼...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으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은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4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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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헌이 사공을 단칼에 내리치던 장면이군요. 가장 서슬 퍼른 묘사였어요.
님, 새로 단장한 서재가 아기자기한 레이스 식탁보처럼 예뻐요.^^

dalpan 2007-06-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런가요? 전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게 싫어 아직도 구닥다리 서재를 쓰고있어서 말씀하고나서야 식탁보를 봤답니다. 하하하.. 날잡아서 새 서재에 적응해야겠네요. 배혜경님의 노란 봄꽃무더기(빅 피쉬)는 항상 눈에 밟혀 아름답단 말씀을 드리려 했었습니다. 저 장면도 참 무참한 장면이었지요? 퍽퍽! 그래도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