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천안문에 걸린 대형 마오쩌둥 초상과 주석 기념관에 안치된 시신이 그것이다. (중략) 1980년 덩샤오핑은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 비록 毛 주석이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창립자입니다. 그의 공적과 과오를 비교할 때 과오는 이차적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국 인민들이 겉으로는 4인방을 욕하지만 속으로는 毛까지 합친 5인방을 탓하는 것 아니냐는 가위 불경죄에 해당할 반문에 鄧은 다시 "毛 주석의 착오와 린뱌오나 4인방의 문제의 성질은 다른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즉 毛의 오류는 좌경의 '정치적' 실수였지만, 林과 4인방의 죄행은 '반혁명적' 권력 탈취였다는 식으로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28p쪽
간쑤성 란저우는 서부 대개발의 '뉴 프런티어'였고, 신공항은 그 가시적 성과였다. 란저우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우루무치를 연결하는 1,0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 공사가 완공되면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에 현대판 '실크로드'가 개통된다. 란저우에서 상하이까지 중간중간에 잘린 1,500킬로미터 철로가 이어지면 중국판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릴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시 연변은 밤새워 불을 밝히고 길을 뚫는 공사장 소음으로 귀가 먹먹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 우리의 개발현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40p쪽
개발의 망치 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점에서 서부 취재는 우리 여행에서 가장 '생산적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서부 대개발을 '정치적' 관점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댐과 도로와 발전소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계획은 어마어마한데, 그 비용의 큰 몫을 외자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시설 투자까지 하며 그 척박한 땅으로 들어갈 외자는 많지 않으리라는 것이 각지에서 만난 경제계 인사들의 평가였다. (중략) 정부 역시 그런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소문은 크게 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식도 있다. CDMA 사업참여를 바라는 한국 기업들에게 중국 정부는 서부 개발에 돈을 대라는 사실상의 '협박'이었다. 어쩌겠는가? 받아야지!-47p쪽
회족(回族)임을 나타내는 하얀 터번의 노인에게 빌딩 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서부 대개발' 간판을 가르켰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시가 아니라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이리라. 이렇게 '서부 내의 서부'가 또 있었다. (중략) 모두가 가난할 때는 불만이 잘 표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쪽이 갑자기 잘나가서 다른 한쪽이 뒤처지면 불만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무슨 방안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을 그(정부관리)는 단칼에 잘랐다. :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 그게 시장경제 아닙니까?" 멍청한 녀석한테 한 수 가르쳤다는 흐뭇한 표정이었다.-51p쪽
하나 놀라운 것은 毛와 鄧의 생가가 그야말로 '하꼬방' 수준이라면, 劉의 기념관은 마치 궁궐처럼 꾸며놓았다는 점입니다. 鄧은 친필휘호가 여기저기 붙은 것으로 보아서 그는 劉의 생애와 사상 복원에 대단한 정성을 쏟은 듯합니다. 그것은 불우하게 떠난 동지에게 보내는 저승 선물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毛에 맞선 劉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내세우려는 간접 '시위'일지도 모릅니다. 진짜 9단들 아닙니까? 미친 세월이 갈라놓았을 뿐, 毛든 劉든 鄧이든 각기 자신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했다는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나라 밖의 행객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63-4p쪽
지난 세기말까지 생산력을 4배로 늘려 1조 달러의 국내총생산을 이루려는 것이 경제 대장정의 제1차 목표였다. 그 1조 달러를 13억으로 나누면 800달러쯤 되는데, 이것이 鄧이 겨냥한 중진국 수준이었다. 지난해 중국의 인당 국내총생산은 850달러였으니 본래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중략)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부자 반열에 들 수가 없다. 鄧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의 경험은 우리에게 빈궁은 사회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는 빈궁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가난한 공산주의를 가지더라도 부유한 자본주의는 가지지 않겠다"던 문혁의 '오류'를 겨냥해서 그는 "가난한 공산주의 따위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산주의 사회는 물질이 최대한으로 풍부한 사회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 나왔다. (중략) 양대 기본점의 하나는 개혁개방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4대 기본원칙의 견지이다. 시장 중심의 경제 건설을 담보할 안전 장치로서 후자는 다시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 민주 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毛 사상의 견지를 포괄한다. 까마득한 옛날 1965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조심스럽게 제창한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 목표를 고집스럽게 재창하면서 鄧은 2050년 15억 인구에 인당 소득 4,000달러를 곱한 국내총생산 6조 달러 달성을 현대화 장정의 목표로 상정했다. 현재의 속도라면 목표의 조기달성, 초과달성이 충분히 가능하다.-72-4p쪽
시장이 이처럼 계속 행운을 선사하는 한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기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가 함정이다. 이익이 나면 따르고, 이익이 없으면 버리는 것이 시장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실직이든 물가 고통이든 그것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데, 중국 인민은 아직 그 위험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鄧은 내다보았으니, 즉 멈출 데서 멈추지 않은 신경제정책의 탈선 말이다. 그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던 레닌의 생각은 비교적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에 소련의 격식은 경화되었습니다."라고 진단했다. 소련이 걸린 그 동맥 경화를 예방하기 위해 鄧은 집체 소유 견지와 빈부 격차 해소를 계속 강조했다.-77-8p쪽
흑묘백묘 조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抓住老鼠 就是好猫)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게 좋은 고양이다. (鄧, 82p)-82p쪽
영요사회주의적초(寧要社會主義的草) 불요자본주의적묘(不要資本主義的苗) 사회주의의 잡초를 키울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틔우지 말라. (毛의 鄧 비판)-86p쪽
鄧의 고양이 이론을 한마디로 작살낸 것은 고위 정치가도 아니고 저명한 학자도 아니었다. 음식점의 20대 종업원이었다. 毛 주석에게 공과가 있다면 鄧에게도 있을텐데 그의 과오가 무엇이냐는 우리 질문에 그는 "온포(溫飽) 단계를 지나 이제 자동차까지 살 수 있어 흑묘백묘의 총체적 방향은 좋았으나, 관원들이 사상적으로 변한 것 같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쥐 잡는 일에만 빠져 고양이의 잘못을 못 본다는 항의일 텐데, 그러면 무엇이 고양이의 잘못이냐고 다시 묻자 그는 "금전의 자극으로 사상이 변질된 공무원의 부패"를 들었다.-89p쪽
1979년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는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젠성의 샤먼에서 '수출 특구'를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이들은 '경제 특구'로 개칭한 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경제 특구 조례를 비준했다. 1988년 하이난성을 추가해서 현재 중국의 특구는 모두 5개이다. 특구 발전의 제일 조건은 통제가 아닌 개방이며, 따라서 특구에서의 외국 자본에 일정한 특혜를 부여하고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주의 공유제조차 '신축적'으로 운용한다. 1984년 鄧이 피력한 소신에 따르면 '특구는 창구'로서 기술의 창구이고, 관리의 창구이고, 지식의 창구이고, 대외 정책의 창구이다.-97p쪽
당시 4개의 경제 특구를 지정하는 과정에 선전은 홍콩의 이웃이고, 주하이는 마카우와 가깝고, 산터우는 동남아에 차오저우 사람이 널렸고, 샤먼은 화교 중에 민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우선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인연을 고려했었다.-103p쪽
시내를 가로지르는 황푸(黃浦)강과 쑤저우(蘇州)하가 만나는 모서리 강둑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섰고,그 뒤에 상하이맨션 호텔이 있다. 지금은 468미터의 둥팡밍주(東方明珠) 탑이나 88층짜리 진마오 빌딩 등의 마천루 그늘에 가렸지만 지난 60여 년의 영화는 누구도 비기지 못할 것이다. (중략) 낮에 갔다가 야간 촬영을 위해 다시 들렀는데 확실히 동부의 불빛이 더 찬란해 보였다. 그 빛의 혜택을 어서 서부까지 펼치는 '상하이판 서부 대개발'이 시급한 과제란다. 중국인들은 양쯔강을 흔히 용에 비유하는데 상하이가 머리, 푸둥은 그 눈에 해당한다. 용의 머리를 두들겨 6300킬로미터 밖의 칭하이성 꼬리까지 요동치게 하려는 작전이 풍수지리로 본 서부 대개발이다.-103-4p쪽
지난 10월 江주석은 대만의 중국통일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깜짝 놀랄 제의를 했다. 국호 문제로 대만에서 불만이 많다니 "중화인민공화국이니 중화민국이니 복잡하게 부를 것 없이 그저 중국으로 쓰면 어떠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진핑 연맹 주석은 "江주석의 통 큰 제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답했다. 대만의 천수이벤 총통은 이 큰일날(!) 얘기를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단다. 중국의 정치 공세야 어찌되었든 대만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 같으면 단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릴 일들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지기 때문이다.-120p쪽
중국과 대만의 신판 '국공 합작' 소문이 파다하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대만 기업인이 50만이 넘는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본토에 대한 대만의 누적 투자가 공식 집계로 최소한 400억 많게는 600억 달러 정도지만, 제3국에서 세탁한 금액까지 합치면 그 2배는 되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었다. 그렇다고 대만이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도 아니다. 대만의 대중국 수입은 50억 달러에 불과하나 수출은 255억 달러에 육박한다. 그 매력과 이익을 어찌 정치적 이유로 간단히 버리겠는가?-122p쪽
홍콩과 대만은 중국의 눈으로 보자면 제국주의와 냉전의 산물로서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닐 것이다. 명분과 기분이야 어떻든 이제 그들은 중국의 '보물'이 되었다. 홍콩이 개혁/개방 학습의 가정교사였다면, 앞으로 대만은 자본주의 실습에 숙달된 조교로 나설 공산이 크다. 기업이 당장 노리는 것은 영리겠지만, 그 뒤에는 중국의 이익이라는 한층 깊은 계산이 따라붙는다. 민족이란 본시 그래야 하는 법이거늘.... 연방제니 연합제니 그 알량한 명분에 매달려 민족의 대계를 그르치는 청맹과니들에게 일국양제에 담긴 허허실실의 지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123p쪽
1980년대 수교조차 없던 중국에 학회 참석을 핑계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金 사장(삼성그룹 중국본사 사장)은 오늘까지 중국과 계속 인연을 맺고 있다. "처음 1년쯤 되니까 중국을 다 아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나 그 뒤 점점 멍청해지더니,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헤매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중국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어느 한 면을 보고 그것을 전부로 오해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중국의 도시 몇 개를 둘러보고는 이 글을 쓰는 나도 무척 마음이 켕긴다. 그는 개혁/개방에 대해서도 우리의 경제적 관심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저들의 정치적 계산에 유의하기를 주문했다. 사회 불안의 조짐이 보이면 경제 발전을 잠시 멈추고 그 혼란을 막을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162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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