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
김현경 지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6월
품절


1994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가 그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명색이 방송사에 몸담고 있던 나는 불안감만 느꼈을 뿐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략) 워싱턴으로 출장 간 남편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여기는 한국에 전쟁 난다고 난린데 거기는 괜찮으냐"고 묻는 것뿐이었다. (중략) 워싱턴에서는 수십년 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반도 전쟁계획 '작전계획 5027'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그해 4월 중순 패트리엇 미사일이 실전배치되었고 공격용 아파치 헬기도 들어왔다. (중략) 그해 5월 셋째주 주한미군은 NEO (비전투원 소개작전)를 실시했다. 비상시 미국 민간인들을 안전한 다른 나라로 대피시키는 훈련이다. (중략) 우리 정부는 미군에 '소개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좋지만 조용히 해달라'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중략) 결국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면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양국의 대립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한반도의 위기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으로 급변할 수 있었다. (중략) 기자가 되기 직전의 일이었지만 당시 무지했던 나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은 나로 하여금 한반도 주변 정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생활필수품이나 금 사재기를 하던 일부 계층을 비난만 하던 언론. 대북제재는 북한을 대화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연일 대북 강경책을 내놓던 정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지급될 방독면이 없는지도 모른 채 정부를 믿고 생업에 충실하던 선량한 국민들. 한반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36-40p쪽

금강산 관광을 위해 통일전망대에서 철책에 이르는 군사도로는 버스가 다닐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보수진영에서 남북 도로 연결이 남침 진격로를 열어준다고 펄펄 뛰는 게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듯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시기 임시 개통된 경의선 남북연결 도로는 더욱 심각하다. 1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에 바로 서울이 있지 않은가. 1950년 6.25 당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유유히 진격해온 인민군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 군사 당국은 걱정이 될 법도 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금강산 연결 육로와 개성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는 북한의 보수 진영과 군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천 상륙작전 뒤 압록강 인근까지 밀린 경험이 있는 북한군은 남북연결 육로를 '북침로'로 여겼다고 한다. (중략) 남북이 철도도로 연결에 합의했을 때 북한 군부의 위기감은 남쪽 보수 인사들의 걱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늘 같은 '장군님' 명령이라 해도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로 달리면 불과 2시간. 북침 진격로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우회로도 없는 데다 공군력에서도 열세인 만큼 북한 군부의 고민은 더욱 컸다. 서부전선의 군사 작전 계획을 변경하고 포 진지를 이동한 뒤에야 어렵사리 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60p쪽

남북관계 개선이 우리의 정신을 해이하게 한다는 일부 보수 인사들의 발언과 북한에서 빚어진 소동이 어찌나 닮아 있는지. 그러나 남쪽은 도로만 개방했을 뿐 땅을 내놓지는 않았다. (중략) 개성공단 예정지는 배후단지를 포함해 총 2000만 평. 이곳에 우리 공장들이 들어가고 있으니 군사분계선을 그만큼 북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북한군은 공단 개발을 위해 지하의 군사시설과 무기를 모두 옮겨야 했다.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해상 호텔과 해상 골프연습장. 해수욕장과 횟집 등이 들어서 있는 장전항은 북한의 최전방 천혜의 군사항이다. 한 퇴역 군인은 과거 정보부대가 가장 갖고 싶어했던 정보 중 하나가 장전항 사진이라고 했다. 그런 장전항에 남쪽의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중략) 최전방 군사항을 내준 북한 해군의 속은 얼마나 쓰렸겠는가? (중략) 앞으로는 내륙 쪽 내금강까지 개방하기로 했으니 북쪽 군부의 걱정은 늘어가고 있다. 남쪽에서 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62p쪽

우리가 북한에 퍼주는 돈은 눈에 보이지만 남북관계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략) 핵문제나 남북관계로 인해 북한만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는 주장은 분명 착각이다. 북한의 한 해 예산은 삼성전자의 1/4분기 매출 정도이다. 이렇게 엄청난 경제규모의 차이로 볼 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안정으로 우리가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는 북한이 얻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되로 주고 말로 퍼오는 격이다.-69p쪽

2000년 6월 13일 평양.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순안공항으로 직접 영접 나왔다. 그리고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를 직접 찾아와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언론은 김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측근들이 "김대통령을 직접 찾아다니는 것을 반대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용순 비서가 자꾸 빨간 불을 켜는데 새총으로 빨간 신호등을 깨버리겠다고 하고 이리 찾아왔노라"고 했다. (중략) 그의 발언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도 수많은 빨간 신호등에 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은 대남적화를 언급한 노동당 규약과 강령을 바꿀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도 (노동당) 규약은 고쳤으나 1945년에 만들어진 강령은 안 바꿨습니다. 그런데 강령은 해방 직후 것이어서 과격적, 전투적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주석님과 함께 일하신 분들도 많고 연로한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강령을 바꾸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도 함께 물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강령을 바꾸면 내가 숙청한다고 그럴 것입니다."-90p쪽

당시 언론사 사장단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김 위원장에게 이제 다른 나라를 거치지 않고 직항 비행기로 바로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정일 위원장은 그 제안을 즉석해서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했다.
"직항로 문제는 정부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고 군부가 문제인데, 군대문제는 내가 말해야 직항로가 열리게 돼 있습니다. 직항로를 열면 비행기에서 특수 카메라로 다 사진을 찍는다고 군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인공위성이 다 우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비행기 타고 찍는다는 게 문제될 게 있는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말을 뜯어보면 북한 정부와 군부 간에는 노선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강경 군부의 우려와 반대는 김정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을 알게 된다. -93p쪽

2002년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북일정상회담을 하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다. 발뺌할 줄 알았던 외부 세계는 놀랍고 과감한 '고백'을 잠시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반북정서가 해일처럼 일기 시작했다. 그때 북한의 한 고위인사에게 "왜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일꾼들은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이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혀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서 과거사를 모두 청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93-4p쪽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6월 3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북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의 의제와 절차문제 등을 협의했다. 바로 그 때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호치민 베트남 주석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금수산궁전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의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의전을 지켜달라면서 자신도 서울에 가면 반드시 국립묘지를 참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남쪽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이 하지 못한 '참배 이벤트'를 북측이 먼저 보란 듯이 해냄으로써 자신의 통 큰 결단과 절대적 지위를 과시한 셈이다.
상대국의 국립묘지 방문은 아마도 '인정과 존중'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남북에게 참배란 과거에 대한 유감 표명이자 발전적인 미래로 나가자는 조심스럼 메세지일 것이다. 남쪽에게는 시기상조였지만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2000년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110p쪽

분단 61년, 남북대화 35년 동안 남북은 참 많이 싸웠고 대화도 많이 했다. 다툼의 방식도 많이 변했다. 대결의 시대 남북의 상호 비방은 치열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를 '괴뢰'로 불렀고 그 지도자를 '살인마'로 칭했다. 적대적인 말은 적대적인 행동을 불러왔고 그 행동은 또다시 험한 말을 낳았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었고 상대방은 '박살'내거나 '각을 떠야 할' 원수였다. (중략) 이런 말싸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당당하게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며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귀측'에 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화는 수시로 중단됐고 그럴 때면 남북은 담을 쌓았다. 대화의 통로 자체가 붕괴되기도 했다. 그러다 할 말이 생기면 멀쩡한 직통전화나 남북연락관을 놓아둔 채 관영 라디오를 통해 자기의 입장을 전파로 날려 보냈다.-138p쪽

북한의 고민은 결국 갈지자 행보가 되어 나타난다. 휴대전화를 개통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금지한다. 정보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보화시대에 컴퓨터를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홍보하면서도 인터넷을 개방하지 못한다. 당국이 엄선해주는 정보만 받으라고 하니 전문가들은 답답해서 죽을 노릇이다. 경제는 바뀌어도 사상 교육은 더욱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위협에 맞서서 국방력도 계속 늘려야 한다. 변화가 체제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건 세상이 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해야 하지만 변하면 안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갈지 자 행보 속에서도 북한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돈맛을 알기 시작한 주민들은 이미 화폐경제와 시장에 익숙해졌다. 변화의 핵심은 북한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국은 '더 높이 더 빨리' 뛰라고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다-196p쪽

2000년 8월, 평양 2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다시 만난 그는 전금진이라는 본명으로 회담에 나왔다. 그는 베이징의 4성급 호텔 일반실이 아닌 북한 최고의 고려호텔 스위트룸에 묵으며 회담을 지휘했다. 대동강 유람선상에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1998년 회담을 진솔하게 회고했다.
"내 그때 조국으로 돌아가며 피눈물을 흘렸소. 남북대화 30년에 회담 탁자를 치며 고함을 치긴 그때가 처음이었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슬프고 분하게 했을까? 판문점에서 국회의장들과도 자신만만하게 회담하던 그는 굶주린 주민들을 대표해 베이징에 나와 비료를 얻기 위해 10여일이나 회담에 매달렸다. 회유도 해보고 소리도 쳐봤지만 그도, 그의 조국도 힘은 없었다. 받고자 하는 것은 많았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패장이 돼 빈손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서 그는 없는 자의 설움을 통감했으리라.
서글픈 회상도 잠시, 그는 웃는 낯으로 남쪽 인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S선생이 가장 악질이었소. 그때 다 될 뻔했는데 거기서 트는 바람에 안 된 거요. 그런데 이제 다시 마주앉아 이렇게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202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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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밥상 - 유기농 대표농부 10집의 밥상을 찾아서
안혜령 지음, 김성철 사진 / 소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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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뿐이랴. 이들 보기에 사람은 "탐욕으로 가득한 존재"인즉, 불가의 가르침으로 보자면 스스로 번뇌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부부는 무수한 욕망을 다 떨구어 몸과 마음이 비면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라 여긴다. 마음이 이러할진대 이들 사는 모양새가 번듯할 리가 없다. 이들 보기에는 세상에 따로 "더러운 게 없다". "원리를 따지면 근본이 다 같은데" 집이고 옷이고 굳이 빛내고 치장하려 애면글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요란한 바깥세상 훔쳐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 구식 텔레비젼 하나 있으되 안테나를 달지 않고 있다. 라디오 한 대면 족한 것을.-20p쪽

주위를 둘러보면 "참 우리가 제일 편하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 자유롭고 마음 편하여 이즈음 이들은 "사는 맛"이 난다. 이제, 그 맛의 마지막 경지, "죽음을 가깝게 맞을 준비"를 생각한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닌 농장, 자식에게 물려줄 일도 없고 남길 것도 없으되, 행여 아직도 비워내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지 모를 삶의 흔적들을 "깨끗이 훌훌 털고 죽음을 맞는 길"을 새겨본다. 간결하게, 단순하게.-34p쪽

농사라는 글자를 보자. '농農'은 별 신辰 자에 노래 곡曲 자가 합쳐진 말이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별의 노래라는 뜻인데, 별의 노래가 무엇일까. 그는 하늘의 기운, 전 우주의 기라고 본다. 곧 농사란 하늘의 기운에 따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농사에 대한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가 쓰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곧 생명역동농법은 독일 사람이 만든 농법으로 해마다 천체를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농사력을 만들어 쓰는 것인데, 우리 조상들이 쓰던 농사력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65p쪽

그 생명을 키우는 사람, 농부는 또한 평화를 짓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평화의 '화'라는 글자는, 벼 화禾 자에 입 구口 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쌀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쌀이 아무렇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입에 고루 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밥을 고루 나눠먹는 것이 평화라는 말이니, 새겨볼수록 진리임이 사무친다.-66p쪽

강대인 씨가 벼를 대하는 지극한 마음과 다르지 않을 터, 기는 하늘과 땅과 벼 사이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두루 영향을 미치니, 사람을 살리는 농법은 사람을 사리는 밥상으로 이어진다. 몸이 안 좋거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할 때 만든 음식이 맛이 없다는 것은 음식 해 본 사람은 누구라도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니, 그이는 나아가 식구들 몸과 마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할 때면 늘 밝은 마음을 가진다. 부엌 또한 늘 밝아야 한다고 집 동쪽에 자리잡게 하는 것도 그런 이치에서다.-77p쪽

유기농업을 한다는 것은 삶의 근본을 바로잡는 일인즉, 농사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철희 씨가 먹을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를 기르면서였다. 요즘에야 으레 인공수정하기 십상이지만 풀어놓고 기르는 소들은 암소가 발정날 때 황소를 넣어주면 그만이다. 몇 년이라도 황소가 힘이 있는 한 끄떡없다. 그런데 축사 안에 붙잡아 매놓고 사료를 먹이는 소는 생식 능력이 몇 차례면 끝난다. 또 그런 암소는 새끼를 계속 낳지 못한다. 사료에 들어가는 항생제 때문이다. 소도 안됐거니와, 사람의 입장에서도 답답한 것이 사람이 먹는 게 그 고기뿐이더냐. 그걸 보면서 "지금 사람 먹고 사는 게 참 한심하다"고 한탄한다.-139p쪽

임락경 씨는 발효의 원리란 "곰팡이를 먹는 것"이라 한다. 메주를 띄울 때 피는 곰팡이는 메주가 어느 정도 숙성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신호다. 흔히 곰팡이는 네 종류로 나뉘는데, 흰 공팡이가 해독제로서 가장 좋다. 메주에 노랑 곰팡이가 피었다면 이는 "메주가 춥다"는 뜻이다. 즉, 메주 띄우는 방 온도가 좀 낮다는 신호로 방 온도를 조금 높여 준다. 파랑은 "메주가 감기기가 있다"는 신호다. 썩 좋지 않다는 것인데, 다만 이게 흰 곰팡이와 섞이면 해독이 된다고 한다. 까만 곰팡이는 "독"이다. 메주가 썩은 것이다. 이건 버려야 한다.-170p쪽

어느 나라든 발효식품이 있다.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이 발효식품이며 치즈와 포도주 또한 그렇다. 우리는 주식인 밥이 발효식품이 아니기 때문에 반찬으로 "여러 가지 발효식품을 동원한다". 김치가 그렇고, 된장, 간장, 고추장이 그렇고, 말린 나물들이 그렇고 말린 생선이 그렇다. 떡은 꿀이나 조청을 찍어 먹고, 고구마는 배추김치나 김칫국을 곁들여 먹고, 고기는 미리 재어 놓았다가 먹는 것이 다 발효의 원리를 밥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다.-17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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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 탐사와 산책 3
정운영 지음, 조용철 사진 / 생각의나무 / 2001년 12월
절판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천안문에 걸린 대형 마오쩌둥 초상과 주석 기념관에 안치된 시신이 그것이다. (중략) 1980년 덩샤오핑은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 비록 毛 주석이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창립자입니다. 그의 공적과 과오를 비교할 때 과오는 이차적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국 인민들이 겉으로는 4인방을 욕하지만 속으로는 毛까지 합친 5인방을 탓하는 것 아니냐는 가위 불경죄에 해당할 반문에 鄧은 다시 "毛 주석의 착오와 린뱌오나 4인방의 문제의 성질은 다른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즉 毛의 오류는 좌경의 '정치적' 실수였지만, 林과 4인방의 죄행은 '반혁명적' 권력 탈취였다는 식으로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28p쪽

간쑤성 란저우는 서부 대개발의 '뉴 프런티어'였고, 신공항은 그 가시적 성과였다. 란저우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우루무치를 연결하는 1,0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 공사가 완공되면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에 현대판 '실크로드'가 개통된다. 란저우에서 상하이까지 중간중간에 잘린 1,500킬로미터 철로가 이어지면 중국판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릴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시 연변은 밤새워 불을 밝히고 길을 뚫는 공사장 소음으로 귀가 먹먹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 우리의 개발현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40p쪽

개발의 망치 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점에서 서부 취재는 우리 여행에서 가장 '생산적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서부 대개발을 '정치적' 관점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댐과 도로와 발전소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계획은 어마어마한데, 그 비용의 큰 몫을 외자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시설 투자까지 하며 그 척박한 땅으로 들어갈 외자는 많지 않으리라는 것이 각지에서 만난 경제계 인사들의 평가였다. (중략) 정부 역시 그런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소문은 크게 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식도 있다. CDMA 사업참여를 바라는 한국 기업들에게 중국 정부는 서부 개발에 돈을 대라는 사실상의 '협박'이었다. 어쩌겠는가? 받아야지!-47p쪽

회족(回族)임을 나타내는 하얀 터번의 노인에게 빌딩 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서부 대개발' 간판을 가르켰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시가 아니라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이리라. 이렇게 '서부 내의 서부'가 또 있었다. (중략) 모두가 가난할 때는 불만이 잘 표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쪽이 갑자기 잘나가서 다른 한쪽이 뒤처지면 불만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무슨 방안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을 그(정부관리)는 단칼에 잘랐다. :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 그게 시장경제 아닙니까?" 멍청한 녀석한테 한 수 가르쳤다는 흐뭇한 표정이었다.-51p쪽

하나 놀라운 것은 毛와 鄧의 생가가 그야말로 '하꼬방' 수준이라면, 劉의 기념관은 마치 궁궐처럼 꾸며놓았다는 점입니다. 鄧은 친필휘호가 여기저기 붙은 것으로 보아서 그는 劉의 생애와 사상 복원에 대단한 정성을 쏟은 듯합니다. 그것은 불우하게 떠난 동지에게 보내는 저승 선물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毛에 맞선 劉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내세우려는 간접 '시위'일지도 모릅니다. 진짜 9단들 아닙니까? 미친 세월이 갈라놓았을 뿐, 毛든 劉든 鄧이든 각기 자신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했다는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나라 밖의 행객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63-4p쪽

지난 세기말까지 생산력을 4배로 늘려 1조 달러의 국내총생산을 이루려는 것이 경제 대장정의 제1차 목표였다. 그 1조 달러를 13억으로 나누면 800달러쯤 되는데, 이것이 鄧이 겨냥한 중진국 수준이었다. 지난해 중국의 인당 국내총생산은 850달러였으니 본래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중략)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부자 반열에 들 수가 없다. 鄧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의 경험은 우리에게 빈궁은 사회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는 빈궁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가난한 공산주의를 가지더라도 부유한 자본주의는 가지지 않겠다"던 문혁의 '오류'를 겨냥해서 그는 "가난한 공산주의 따위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산주의 사회는 물질이 최대한으로 풍부한 사회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 나왔다. (중략) 양대 기본점의 하나는 개혁개방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4대 기본원칙의 견지이다. 시장 중심의 경제 건설을 담보할 안전 장치로서 후자는 다시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 민주 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毛 사상의 견지를 포괄한다. 까마득한 옛날 1965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조심스럽게 제창한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 목표를 고집스럽게 재창하면서 鄧은 2050년 15억 인구에 인당 소득 4,000달러를 곱한 국내총생산 6조 달러 달성을 현대화 장정의 목표로 상정했다. 현재의 속도라면 목표의 조기달성, 초과달성이 충분히 가능하다.-72-4p쪽

시장이 이처럼 계속 행운을 선사하는 한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기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가 함정이다. 이익이 나면 따르고, 이익이 없으면 버리는 것이 시장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실직이든 물가 고통이든 그것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데, 중국 인민은 아직 그 위험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鄧은 내다보았으니, 즉 멈출 데서 멈추지 않은 신경제정책의 탈선 말이다. 그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던 레닌의 생각은 비교적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에 소련의 격식은 경화되었습니다."라고 진단했다. 소련이 걸린 그 동맥 경화를 예방하기 위해 鄧은 집체 소유 견지와 빈부 격차 해소를 계속 강조했다.-77-8p쪽

흑묘백묘 조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抓住老鼠 就是好猫)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게 좋은 고양이다. (鄧, 82p)-82p쪽

영요사회주의적초(寧要社會主義的草)
불요자본주의적묘(不要資本主義的苗)
사회주의의 잡초를 키울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틔우지 말라. (毛의 鄧 비판)-86p쪽

鄧의 고양이 이론을 한마디로 작살낸 것은 고위 정치가도 아니고 저명한 학자도 아니었다. 음식점의 20대 종업원이었다. 毛 주석에게 공과가 있다면 鄧에게도 있을텐데 그의 과오가 무엇이냐는 우리 질문에 그는 "온포(溫飽) 단계를 지나 이제 자동차까지 살 수 있어 흑묘백묘의 총체적 방향은 좋았으나, 관원들이 사상적으로 변한 것 같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쥐 잡는 일에만 빠져 고양이의 잘못을 못 본다는 항의일 텐데, 그러면 무엇이 고양이의 잘못이냐고 다시 묻자 그는 "금전의 자극으로 사상이 변질된 공무원의 부패"를 들었다.-89p쪽

1979년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는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젠성의 샤먼에서 '수출 특구'를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이들은 '경제 특구'로 개칭한 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경제 특구 조례를 비준했다. 1988년 하이난성을 추가해서 현재 중국의 특구는 모두 5개이다. 특구 발전의 제일 조건은 통제가 아닌 개방이며, 따라서 특구에서의 외국 자본에 일정한 특혜를 부여하고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주의 공유제조차 '신축적'으로 운용한다. 1984년 鄧이 피력한 소신에 따르면 '특구는 창구'로서 기술의 창구이고, 관리의 창구이고, 지식의 창구이고, 대외 정책의 창구이다.-97p쪽

당시 4개의 경제 특구를 지정하는 과정에 선전은 홍콩의 이웃이고, 주하이는 마카우와 가깝고, 산터우는 동남아에 차오저우 사람이 널렸고, 샤먼은 화교 중에 민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우선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인연을 고려했었다.-103p쪽

시내를 가로지르는 황푸(黃浦)강과 쑤저우(蘇州)하가 만나는 모서리 강둑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섰고,그 뒤에 상하이맨션 호텔이 있다. 지금은 468미터의 둥팡밍주(東方明珠) 탑이나 88층짜리 진마오 빌딩 등의 마천루 그늘에 가렸지만 지난 60여 년의 영화는 누구도 비기지 못할 것이다. (중략) 낮에 갔다가 야간 촬영을 위해 다시 들렀는데 확실히 동부의 불빛이 더 찬란해 보였다. 그 빛의 혜택을 어서 서부까지 펼치는 '상하이판 서부 대개발'이 시급한 과제란다. 중국인들은 양쯔강을 흔히 용에 비유하는데 상하이가 머리, 푸둥은 그 눈에 해당한다. 용의 머리를 두들겨 6300킬로미터 밖의 칭하이성 꼬리까지 요동치게 하려는 작전이 풍수지리로 본 서부 대개발이다.-103-4p쪽

지난 10월 江주석은 대만의 중국통일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깜짝 놀랄 제의를 했다. 국호 문제로 대만에서 불만이 많다니 "중화인민공화국이니 중화민국이니 복잡하게 부를 것 없이 그저 중국으로 쓰면 어떠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진핑 연맹 주석은 "江주석의 통 큰 제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답했다. 대만의 천수이벤 총통은 이 큰일날(!) 얘기를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단다. 중국의 정치 공세야 어찌되었든 대만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 같으면 단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릴 일들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지기 때문이다.-120p쪽

중국과 대만의 신판 '국공 합작' 소문이 파다하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대만 기업인이 50만이 넘는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본토에 대한 대만의 누적 투자가 공식 집계로 최소한 400억 많게는 600억 달러 정도지만, 제3국에서 세탁한 금액까지 합치면 그 2배는 되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었다. 그렇다고 대만이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도 아니다. 대만의 대중국 수입은 50억 달러에 불과하나 수출은 255억 달러에 육박한다. 그 매력과 이익을 어찌 정치적 이유로 간단히 버리겠는가?-122p쪽

홍콩과 대만은 중국의 눈으로 보자면 제국주의와 냉전의 산물로서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닐 것이다. 명분과 기분이야 어떻든 이제 그들은 중국의 '보물'이 되었다. 홍콩이 개혁/개방 학습의 가정교사였다면, 앞으로 대만은 자본주의 실습에 숙달된 조교로 나설 공산이 크다. 기업이 당장 노리는 것은 영리겠지만, 그 뒤에는 중국의 이익이라는 한층 깊은 계산이 따라붙는다. 민족이란 본시 그래야 하는 법이거늘.... 연방제니 연합제니 그 알량한 명분에 매달려 민족의 대계를 그르치는 청맹과니들에게 일국양제에 담긴 허허실실의 지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123p쪽

1980년대 수교조차 없던 중국에 학회 참석을 핑계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金 사장(삼성그룹 중국본사 사장)은 오늘까지 중국과 계속 인연을 맺고 있다. "처음 1년쯤 되니까 중국을 다 아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나 그 뒤 점점 멍청해지더니,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헤매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중국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어느 한 면을 보고 그것을 전부로 오해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중국의 도시 몇 개를 둘러보고는 이 글을 쓰는 나도 무척 마음이 켕긴다. 그는 개혁/개방에 대해서도 우리의 경제적 관심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저들의 정치적 계산에 유의하기를 주문했다. 사회 불안의 조짐이 보이면 경제 발전을 잠시 멈추고 그 혼란을 막을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162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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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권만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절판


(무사도에 영향을 준 사상이 불교, 유교 등임을 설명하며)
지금까지 서술한 것처럼 그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 무사도가 스스로 흡수하고 동화된 본질적인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날을 지새우던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의 삶에 확고한 불굴의 교훈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본인의 선조인 무사들의 건전하면서도 순박한 성격은 고대 사상의 큰 길, 혹은 좁은 길에서 평범하지만 단편적인 교훈의 이삭들을 주워 모아 풍요로운 정신의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그 교훈으로부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인간의 길을 형성하였다.-44p쪽

일본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개항 후 일본이 단 몇 년 만에 봉건제를 폐지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무사들은 가산을 몰수당한 대가로 받은 공채를 상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고결하고 정직한 무사였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공업 분야에서 이해타산이 빠른 상인들과 경쟁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장사 수완으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큰 실패를 겪었다. (중략)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미 부의 길과 명예의 길은 같지 않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90p쪽

그리피스(Griffis : 미국의 목사)는 "중국의 유교가 부모에 대한 복종을 인간의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유교는 주군에 대한 충성을 그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108p쪽

용(勇)의 단련은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는 인내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며, 예(禮)의 교훈은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어 타인의 쾌락이나 안정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려 금욕적인 심성을 낳았으며, 마침내 외형적 금욕주의라고 해도 좋을 일본의 국민성을 형성시켰다.-127p쪽

무사들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쁨과 분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강한 성격을 보장해주는 원칙으로 여기며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시켰다.-128p쪽

일본인이 할복을 전혀 불합리하게 느끼지 않은 것은 단지 연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할복을 할 때 신체의 특정 부위를 골라 칼을 댄 것은 그곳에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 신념에서 기인했다. (중략) 이런 신경생리학의 학설이 받아들여진다면 할복의 논리는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저는 제 영혼이 들어있는 곳을 열어 당신에게 그 상태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 영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해 주기를 바랍니다."-136-7p쪽

극동 연구가인 헨리 노먼(Henry Norman)은 일본이 동양의 다른 국가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 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이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노먼은 현재의 일본을 건설하고 장래의 일본의 운명을 추진하는 원동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일본의 변모는 오늘날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중대한 사업에 다양한 동기가 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만약 그중에서 가장 주된 힘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든 주저없이 무사도의 손을 들 것이다.-187p쪽

동양의 제도와 그 민족을 자세히 관찰한 M. Townsend는 "우리는 늘 유럽이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만 들어왔을 뿐, 이 섬나라의 변화가 순전히 자발적이었음을 잊고 있다. 유럽이 일본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 유럽의 문무에 걸친 제도들을 배워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몇 년 전 터키가 유럽에서 대포를 수입한 것처럼 일본은 유럽의 기계과학을 수입했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말한다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영국이 중국에서 차(茶)를 수입했다고 해서 영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89p쪽

유럽과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유럽의 기사도가 봉건제도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기독교에 의해 양육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데 반해, 일본의 무사도는 자신을 양육해 줄 위대한 종교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모인 봉건제도가 붕괴하자 무사도는 고아로 남아 자립적으로 살아가야 했다.-19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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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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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산의 책 42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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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한 물리, 의학서를 회독하는데 있어서도 해석을 해주거나 소리 내어 읽어줄 사람은 없었다. 몰래 가르치는 것도 묻는 것도 서생 사이에서는 수치로 여겼기에 절대로 이것을 어긴 자는 없었다. 오로지 자기 혼자서 독파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문법을 토대로 사전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104p쪽

회독 날이 가까워지면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시험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열심히 공부했다. 책을 잘 읽느냐 못 읽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재능에 달려있기도 했다. 어쨌든 주위를 속이면서 적당히 몇 년 지내고 나면 승급이 된다거나 졸업을 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진정한 실력을 기르는 수업을 했으므로 숙생들은 원서를 잘 읽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106p쪽

(영국 패러데이 전기학설에 대한 원서를 빌려보고)
"이 책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보는 건 중단하고, 자 베끼자." (중략) 오가타의 서생들은 사본 제작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한 사람이 원서를 읽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듣고 받아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읽고 한 사람은 쓰기 시작했다. 쓰는 사람이 다소 지쳐 붓놀림이 둔해지면 즉시 다른 사람이 교대하고, 지친 사람은 아침이건 낮이건 즉시 잠을 자는 방식으로 밤낮 없이 밥 먹는 시간도 담배 피우는 시간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그 결과 대략 2박3일에 걸쳐 전기에 관한 부분은 물론 그림도 베끼고 교정까지 보았다.-111-2p쪽

무엇 때문에 고학을 하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다.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난학 서생이라고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할 뿐인지라 이미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밤낮으로 고생하며 어려운 원서를 읽고 좋아할 뿐 정말로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시 서생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그 즐거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서양의 새로운 문명이 기록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전국에서 우리밖에 없다. 우리 동료들만 가능한 일이다 하면서,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조의조식, 언뜻 보기에는 볼품없이 초라한 서생이지만, 왕성한 지식과 고고한 사상만큼은 왕족귀인을 눈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였다.-113p쪽

어쨌든 당시 오가타 서생들은 십중팔구 목적도 없이 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목적이 없는 덕분에 오히려 에도의 서생들보다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서생들 역시 학문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 오히려 학업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면학하는 중에는 그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상일 것이라는게 나의 결론이다.-115p쪽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보자는 결정이 내려진 건 안세이 6년(1859년) 겨울이었다. 즉 (미국 페리 제독의) 증기선을 눈으로 본 뒤로 7년,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항해술을 전수받기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결정을 내려, 드디어 이듬해인 만엔 원년(1860년) 정월에 출항하게 된 것이다. (중략) 지금의 조선인, 중국인, 혹은 동양 전체를 살펴보아도 불과 5년 동안 항해술을 배워서 태평양을 횡단하겠다는 계획과 용기를 보인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136p쪽

당시는 물가가 싸서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남은 돈을 모두 갖고 가서, 런던 체류 중에 다른 것은 제쳐놓고 오로지 영서만 사 갖고 왔다. 이것이 일본에 영서를 수입한 최초의 일로, 그로 인해 일본에서도 영서를 자유로이 사용하게 되었다.-151p쪽

런던에 있을 때, 어느 교회의 사람이 교회이름으로 의원에게 건의했다면서 그 초고를 일본사절에게 보내왔다. 내용인즉슨 재일본 영국공사 올콕이 신흥국가인 일본에서 극심한 횡포를 부린다, 마치 무력으로 정복한 국민을 대하듯 한다 운운하며 각종 증거를 들어 공사의 죄를 비난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 건의서를 보고 가슴이 아주 후련하였다. 이제까지 외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일본의 약점을 파고들어 일본인의 불문살벌을 틈타 갖가지 무리한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몹시 난처하였다. 그런데 그 본국에 와보니 사람들이 무척 공명정대하고 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평생의 소신인 개국일편의 설을 견고히 한 적이 있다.-154-5p쪽

도쿠가와 정부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일례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체임버스의 경제론을 한 권 갖고 있던 나는 무슨 이야기 끝에 대장성의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그 경제서 이야기를 했고, 그는 무척 기뻐하며 부디 목차만이라도 좋으니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그 목차를 서둘러 번역하던 중, 'competition'이란 단어에 부딪쳐 이리저리 궁리 끝에 '경쟁(競爭)'이라는 번역어를 만들어내 처리했다. 그는 무척 감명을 받은 듯했다. "아니, 여기 '다투다'(爭)라는 글자가 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이냐니? 이건 별다른 게 아니다. 일본의 상인들이 하는 것처럼 옆에서 물건을 싸게 팔면 이쪽 가게에서는 그보다 더 싸게 팔아야 하고 (중략) 서로 경쟁을 벌여 그 결과 물가를 제대로 정해질 뿐 아니라 금리도 정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경쟁이라고 한다." "음, 그런가. 서양의 방식은 엄격하군." (중략) "과연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되기는 하나, 아직 아무래도 '다투다'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린다. 이래서는 로주님께 보여드릴 수가 없다."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낌새를 살펴보니, 경제서 안에서 사람들끼리 양보하는 내용을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예컨데 장사를 하면서도 충군애국, 국가를 위해서는 공짜로도 판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다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215p쪽

(게이오주쿠 숙생들에게)
"오래전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는 본국은 물론이고 인도지역까지 모두 점령당해 국기를 게양할 곳이 없어졌지만, 전세계에 단 한 곳만 남아 있었다. 바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이다. 데지마는 예전부터 네덜란드인의 거류지로, 유럽 전쟁의 영향도 일본에는 미치지 않아 데지마의 국기는 항상 하늘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왕국은 단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다며,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은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게이오주쿠는 일본의 양학을 위해 네덜란드의 데지마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온갖 소동이나 난리에도 불구하고 양학의 명맥을 굳게 지켜왔다. 게이오주쿠는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이 주쿠가 건재하는 한 대일본은 세계 속의 문명국이라 할 수 있다. 긍지를 가져라."-236p쪽

원래 나의 교육방침은 자연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수(數)와 이(理) 두가지를 근본으로 하여, 세상만사 모든 일의 처리를 이로부터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도덕론에 있어서는 인간을 만물 중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절대로 비열한 짓이나 방정치 못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불인·불의·불충·불효 같은 못된 짓은 누가 부탁하건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서건 하지 않겠노라고, 항상 몸을 고귀하게 간직하며 이른바 독립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목표를 정했다. 이 목표에만 전념한 이유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그 진보의 속도에 정말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도덕의 가르침이 있고 경제에 관한 지식도 있고 문무에 제각기 장단점이 있으면서도, 일단 그 국세를 살펴보면 부국강병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면에서 동양은 서양의 밑에 놓이게 된다. 국세의 정도는 국민의 교육수준에서 나온다고 본다면, 분명히 쌍방의 교육법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유교주의와 서양의 문명주의를 비교해보니,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이 두가지가 없었다. -239p쪽

무슨 이유에서 예전에는 번에 대해 그토록 비열하던 사내(후쿠자와 본인)가 훗날에는 모처럼 주겠다는 후치마이조차 완강히 사양하게 된 것일까? 사양하지 않더라도 비웃을 사람은 없는데, 전혀 딴 사람이 된 듯, 얼마 전까지 마치 조선인 같았던 녀석이 주겠다는 물건을 기세등등하게 마다하고 백이숙제 같은 고결한 선비로 변모한 것은 정말로 대단한 변화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필경 봉건제도의 중앙정부를 타도하자, 그와 더불어 개인의 노예근성도 일소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303p쪽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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