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가난한 대학원생 그는 입학 때 샀다던 에스콰이어 검은색 책가방을 늘 들고 다녔다. 모서리가 날강날강 닳고 코를 대면 구무렁한 가죽냄새가 풍겨나오는 그 가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와 모종의 미래를 꿈꾸던 대학 졸업반 새초롬한 그녀는 그를 만나는 날이면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하는, 말하자면 약간의 권태기 같은 시기에 줄을 타듯 대롱대롱 매달려 혼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취업 걱정도 조금 되고 결혼이라는 단어도 떠올리며, 좀 더 나은 미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헛된 생각들도 하며 하루하루 내달리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생리통으로 몸이 좋지 않아 아랫목에 배를 대고 엎드려 누워있자니 그가 긴 골목을 걸어오는 것 같은 발자국, 분명한 환청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고 아직까진 마지막 경험이었다.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밤에 긴 편지로 못다한 이야기를 했고 만나지 못한 날에는 스프링 노트 일기장에 만년필로 빽빽하게 뭔가 적어대기도 하며 연애 ‘감정’에 빠져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 감정의 문제였던 것 같다. 유치하고도 사랑스러웠던 그들.
그녀의 집에 그는 좀 자주 오는 편이었다. 예비처제더러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하고 그 가락에 맞춰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재끼곤 했는데 자주 부르던 노래제목이 바로 '철없는 아내'였다는 것. 왜 그 노래 부르길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제대로 골랐던 것 같다. 노래방의 기계음에 맞춰 기계의 박자와 음정에 끌려가야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멋대로 꺾고 늘이며 노래 부르길 좋아했다. 그는 미성을 가졌다. 그 고운 음색에 끌렸던 그녀는, 화이트데이 때 사탕 하나 사줄 줄 모르고 길가에 앉아 모종을 팔던 어떤 할머니에게서 춘란 한 촉을 사서 뿌듯해하던 그에게 서운해 속으로 울었던 때도 있었으니. 또 하루는 그가 대학원 논문 준비를 위해 수동타자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그녀의 집에 왔다. 그날은 엄마에게 허락 받고 밤샘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먹끈을 갈아끼워가며 타닥타닥 토닥토닥 경쾌한 수동타자기 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던 그녀는 꼬박 졸기도 했던가. 그렇게 새벽이 밝아왔다.
둘은 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로 갔다.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까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아예 침묵의 대화로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을 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집 앞까지 10분여를 걷고 다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나가고 그러다 캄캄해졌다. 가랑비가 오는 날이면 일부러 우산을 쓰지 않고 그 비를 맞았다.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촉촉이 젖고 등짝에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정도로 비를 맞고 걷는 가난한 연인의 데이트. 지금은 자동차가 있고 핸드폰이 있고 이메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이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다. 그와 그녀는 그로부터 2년 후 결혼식을 치른 옆지기와 나.^^ 올 3월이면 20주년이 된다, 어느새?
핸드폰! 지금은 유치원생도 가지고 있는 그게 없었던 시절의, 웃지 못 할 일화가 있다. 우리가 만나곤 했던 장소는 주로 대학교 앞 혹은 서로의 집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서면(부산의 다운타운)의 어느 찻집에서 만나고 싶었다. 지금은 그 찻집의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 둘은 시간약속을 했고 학과사무실에 있던 그에게 내가 정한 찻집 이름을 분명 말해 줬는데 어디선가 혼선이 생겼다. 그와 나는 각자 다른 찻집에 앉아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는 나대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이러며 부아가 났고 그래도 일이 좀 늦어지나 보다 하며 기다렸는데 그는 그대로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결국 그의 집으로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고 우리집에도 전화해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곳을 말해 놓았다. 찻집 카운터 전화기에 몇번을 더 불이 나게 왔다갔다, 어떻게어떻게 연락이 닿아 거의 두 시간 가량이 지난 시각에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부글부글 화도 났지만 어쩐 일인지 기다림에 지친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핸폰만 있었더라면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일이다. ^^
서로 주고 받았던 수많은 편지들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일기장만 한 권 서랍 맨 아래쪽에 누워있다. 손으로 깨알같이 써서 주고받았던 편지를 차곡차곡 상자에 담고, 가랑빗속을 거닐며 깔깔거리고, 약속을 해놓고도 연락이 닿질 않아 애를 태우며 동동거리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는 건 무슨 영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