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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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젖어 있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윤대녕의 소설은 사건 중심의 재미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독자를 책 속에 묻어 버리는 힘을 빼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든 그의 소설의 특징이든 분명한 것은 윤대녕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명하면서도 평범한 진술을 통해 감정을 배제한 채 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내면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스무살을 갓 넘겼을 때 윤대녕이 등단했고 그의 소설의 특징은 이십대의 화두처럼 뜨거웠다. 물론 개인적 만남과 느낌과 공감은 문학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그렇게 특별한 만남으로 기억된다. <은어 낚시 통신>이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는 한 작가를 ‘존재의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규정짓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일상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듯 했다. 인물들의 특징과 나이, 성장배경이나 직업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개연성과도 거리가 멀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근작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는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소설이다. 그 과거는 물론 작가의 과거이며 구체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는 청년 시절에 대한 마감 작업으로 보인다.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이 소설은 윤대녕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전환적 작품이 될거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음 소설에 대한 변화와 기대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생의 어느 한 나절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 소설은 많이 아프다.

  “고독한 자들은 말이 없지만 외로운 사람들은 대개 말이 많은 편이죠” - P. 132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소설에서 그리 특별한 주제가 아니다. 아니 문학에서 가장 흔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칫 감상에 젖어 허우적거리거나 공감할 수 없는 개인적 고백으로 지루한 하품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보여주기나 말하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여백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윤대녕은 그 울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젖는다.

  분량에 비해 소설의 내용과 구조는 단순하다. 소설가 영빈은 성수대교 붕괴현장을 같이 목격한 해연과 9년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다시 만난다.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의 사이인 그들은 자주 다니던 ‘히데코’라는 카페에서 재일교포 유미코를 만난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이혼하고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 휩쓸려간 아버지를 둔 해연과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등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겨 놓은 채 자살한 사건을 경험한 유미코는 나름의 상처가 죽음으로 기인한다.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을 둔 영빈은 병원에서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 아버지를 가끔 찾아뵙는 소설가로 등장한다.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실존 작가는 유미코의 고교 동창으로 등장하는데 영빈과 우연히 신촌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은 그곳에서 실존 인물인 사진 작가 김영갑을 가끔 만나며 낚시에 몰두한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간 유미코도 자살하고 제주로 내려온 날 해연은 영빈의 아이를 갖게 된다. 영빈의 자신의 몸에서 호랑이가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기전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찾아 바다를 내려다 본다. 그녀의 이름 해연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바다제비[海燕]라는 뜻이다.

  소설의 큰 축은 세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그 부딪힘으로 요약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세 사람이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들은 모두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겨지는지 살아있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나 이 상처들은 결국 타자에 의한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생채기는 아물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되지만 타인의 도움으로 그것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받은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라는 전언.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한 일들을 모두 수학 공식처럼 대입해서 풀어 낼 수 있는 생의 법칙은 없다. 다만 삶의 방향이나 생의 태도 자체를 수정하게 만드는, 도저히 그 트라우마로 인해 바꿀 수 없는 개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호랑이들을 찾아 나선 소설가의 노력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만약 그것이 날카로운 비명이거나 냉소적인 시선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지만 윤대녕은 마치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인물들의 목소리에 공허한 울림을 부여한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전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 P. 216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문장이다. 재기 발랄한 촌철 살인의 문장이 아니라 평범한 진술로 보이는 수많은 금언들이 숨어 있다. 나는 이 많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에 몰입했다. 행간을 건너뛰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는 가벼움과 나른함, 일상적 진술들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기 보다는 하늘에 대해 내뱉는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결국 영빈은 자신의 호랑이를 발견했고, 그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풀어 주는 것으로 자신과 화해한다. 그것이 영빈의 마지막 출조이며 제주에서 보낸 한 시절을 마감하는 순간이 된다. 영빈의 속내를 말해주는 윤대녕의 목소리가 통증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려 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영빈은 낚시대를 접고 남은 소주를 마시며 동이 터오기를 기다렸다. 그와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무연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 P. 422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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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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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어버린 젊었던 시인의 시를 대하는 느낌은 묘하다. 같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도 시인도 세월 따라 흘러간다. 마치 연예인들의 나이를 듣고 놀라는 것처럼 대상은 변함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상한 습성이 내게도 있는 듯 싶다. 등단 작품을 신문에서 읽고 눈여겨 보았던 시인 중의 한 사람인 박형준의 시를 오랜만에 읽는다. 그의 시에서 읽었던 투명함과 선명한 이미지들은 변함없이 탄탄한 느낌으로 그의 시를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차고 단단한 이미지의 결과 언어의 명징함만으로 버텨 보든지. 시처럼 개인적인 장르가 있을까. 아무리 시에 빌붙어 사는 비평가들이나 교수들이 갑론을박 해봐야 독자가 느끼는 몫은 따로 있다. 그것이 때로 꼭 맞아 떨어지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를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통속적이거나 심금을 울리는 감동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제각각의 꽃들로 피어나기를 독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형준의 시는 무미건조한 저물녘 가을 햇살 같다. 따뜻하지도 않으면서 미련이 남지도 않는다. 그저 기울어가는 저녁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파도리에서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는
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파도 속에서
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

  서해 바다, 파도리에서 건져 올린 한 편이다. 건조한 일상에서 비춰지는 개인사는 행간을 건너뛰며 깨끗하게 다가온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의 숨소리와 표정이 살아온다. 그 평화로움과 따스함이 함께 전해진다. 그러나 ‘물새알들이 떠밀려’ 오는 것으로 끝났다. 찰나의 이미지를 칼날처럼 들이 대지도 못했고 깊은 여운이 남지도 않는다. 다만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빛’의 이미지다. 가을빛과 겨울빛이 다르고 순간순간 망막에 투영되는 모든 빛의 현란함이 눈을 아리게 한다. 우리 모두의 몸을 감싸는 빛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창이 된다.

호수가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있었죠

잔잔한 물결 위에
날개를 펴고 죽은 잠자리
그물망에 맺힌 가을빛 - <가을빛>중에서

내 방 창문 너머로
오후의 환한 손님이 찾아왔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묵
찻잔 속의 물을 핥고 있다 - <겨울빛>중에서

  빛은 이렇게 계절 속에서 찾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파고든다. 내가,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집들 속으로 거침없이 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때때로 집없는 이의 집에도 머무는 것이 창에 번지는 빛이다.

오전, 창에 번지는 빛

눈덩이 쌓인 골목

광선 한줄기
꽉 닫힌 집
창변에 머문다

집 없는 이의 집

  가을을 넘어 겨울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한 낮의 무심한 빛들이 다르게 보이는 어느 날이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과 거리가 먼, 문득 모든 감정의 결들에 스며들지 않던 암흑과 침묵들. 정전된 도시의 밤하늘처럼 고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 박형준의 시를 꺼내보는 것은 어떨지.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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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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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이 짙은 먹구름을 껴안고 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렸고 아침 안개가 짙게 하루가 시작되는 날 사람들은 대부분 내일을 계획하기보다 과거의 시간을 더듬는 일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끈한 커피와 감미로운 음악도 좋고 적당한 속도로 국도를 달리는 일도 어울리는 날이다. 시간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글쓰기다. 여전히, 살아야 한다면 글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라는 스티븐 킹의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최근의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이지만 이 책은 가장 미국적이고 상업적이다. 우선 이 책은 소설 작법에 관한 실전 교범이라 할만하다. 모든 글쓰기는 동일한 측면이 있다. 그 원칙과 방법들에 대해서도 스티븐 킹은 가장 정확하고 쉽고 편안하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곧바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소설 창작론으로 연결된다. 먼저 단숨에 그의 글들이, 그의 책이 읽히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책의 구성과 문체가 놀랍다. 스티븐 킹은 먼저 ‘이력서’를 통해 자신의 유년시절과 작가로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까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연장통’을 통해 글쓰기의 도구인 어휘와 문법에 관해 명확하게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핵심인 ‘창작론’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실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초보자가 범할 수 있는 오류들을 꼼꼼하고 알기쉽게 지적해 준다.

  소설을 써서 대중적인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몇가지 염두해 둬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 나라의 문단 실정과 상황, 출판계의 출판 관행들과는 동떨어진 그의 경험과 노력들은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 또한 <유혹하는 글쓰기> 자체가 또 하나의 소설이다. 솔직하게 쓰라거나 많이 읽고 많이 쓰라거나 혹은 쓸데없는 부사를 쓰지말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고 매일 쓰며 배경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대화를 쓸 때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라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상식선에서 알만한 내용들이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은 글쓰기에 관한 책도 이렇게 재미있고 흡인력있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글은 그만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지루하지 하게 하지 마라고 수없이 외쳤던 <네 멋대로 써라>의 데릭 젠슨의 외침부터 스티븐 킹의 가르침대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연습을 거듭하고 몇가지 유의사항을 염두에 두면 작가가 될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들은 작가의 역량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하지 않은 느낌이다. 물론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한 이야기만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 자신을 점검해 볼만 충고와 고언을 아끼지 말았어야 한다. 글은 아무나 쓰지만 모두 다 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무엇을 쓸 것인가, 나는 왜 써야 하는가, 나는 쓸 능력이 있는가 하는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면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글을 쓰겠다는 억지도 우습지만 고민하지 않는 글쓰기는 있을 수 없다. 자기 만족을 위해 스티븐 킹의 말대로 글쓰는 것 자체가 즐겁고 유쾌하며 행복해지기 위해서만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대중적 인기로 엄청난 판매량과 영화 판권등으로 돈방석에 앉아 40여권이 넘는 소설을 펴낸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실전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도 많지만 소설처럼 읽고 서너 마디를 기억할 정도 이외에는 남는게 별로 없다.

  <미저리>, <그린마일>, <쇼생크탈출> 등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의 원작자가 쓴 글쓰기에 관한 책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재밌는 ‘소설 창작론’에 관한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그것이 스티븐 킹의 의도였다면 이번에도 그는 성공했다. 가상 독자를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데는 분명히 상업적 영향력과 판매부수를 염두에 둬야 한다. 킹 자신은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고 쓰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글쓰기 방식은 철저하게 자본에 기대고 있다. 물론 어떤 작가도 독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읽힐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킹이 제시하는 방법과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이라는 형식과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시선과 목적이 사뭇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책들이 요즘 재밌게 다가온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처럼 철저하게 고답적인 방식의 글쓰기 강의가 있는가 하면 같은 소설가이면서도 문화적 토양과 시대가 다른 소설가의 글쓰기에 관한 견해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독자들은 다만 내가 목적한 글쓰기의 방향과 시선을 유지한 채 다양한 법들을 섭렵하고 내 몸에 맞는 옷과 펜을 고르고 써야겠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살아가지만 모두가 다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내 글쓰기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200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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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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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가진 정신의 깊이는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보통 사람을 판단할 때는 피상적인 모습과 한 두가지 인상에 좌우될 뿐 그 사람이 지닌 다면적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회적이고 계산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어쩌면 더 편리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노력과 관찰, 그리고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책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 활자화된 문자를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스키마를 통해 지식을 풍부하게 하며 행간에 숨겨 둔 미세한 떨림까지 확인하게 되면 독서를 더할 나위없이 즐거워진다. 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기 된다. 가을이기 때문일까?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 어떤 산문보다도 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에 푹 젖어 사방으로 퍼지는 낙엽향처럼 진하게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의 둘째, 셋째 형인 서승과 서준식은 박정희 ․ 전두환 군사정권아래 각각 17년과 19년을 복역하고 풀려난 사상범이었다. 갓 스무살 대학생이 접했던 이 상황은 일본에 살고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무게뿐 아니라 가족사의 치명적 고통으로 옥중에 두 자식을 남겨둔 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개인적 아픔을 겪게 된다.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저자의 글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미ƒ筆寵㈆括?‘반항하는 노예’를 보는 것을 의무로 치부해 두었으며, 그 조각은 바로 형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보낼 엽서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노예’의 주위를 돌고 있을 때 가슴 속에 몰아친 광풍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에 대한 감상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의 아픔이자 시대의 아픔까지 녹아있는 기억될만한 특별한 감상이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겨진 1983년에 누이와 첫 유럽여행에서 촉발된 그의 서양미술 순례는 이후 1990년까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계속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의 관심으로서는 도가 지나치다. 그래서 나이 사십에 펴낸 미술 관련 서적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부칠만한 깊이과 안목이 읽을 수 있다. 진부한 표현과 화려한 수사가 없이 깔끔한 미감을 자랑하는 그의 글들은 단정해서 오히려 슬픔을 자아낸다. 길지 않은 문장과 그림에 대한 소박한 표현들이 작가 안에 숨어 있는 깊이와 조응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신선하고 새로운 눈으로 작품들을 대면하게 한다.

  유럽의 각 도시별 미술관에서 본 그림 중 인상적인 그림들을 골라 쓴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모았기 때문에 책 전체가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점은 있다. 일관성 있게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쑤띤의 ‘데셰앙스’,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 영국 앤드 알버트 박물관의 ‘상처를 보여주는그리스도’ 등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게르니카나 수태고지와 같은 대표작도 소개하고 있으나 작가의 여정과 개인적 감상, 80년대 한국적 현실과 교차 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단순한 그림 쫓아다니기 여행이나 관광과는 다른 차원의 여행으로 비춰진다.

  몇 년간 떠돌아다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선 유렵의 미술관들만 실컷 둘러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금도 꾼다. 서준식은 8년간 여섯차례에 걸쳐 미술관 순례를 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이론과 역사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감상했다면 미술 을 ‘그림을 보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와 감상은 물론, 작가 서준식의 시선을 따라 그의 미술에 대한 취향과 감상을 따라가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간접 체험보다 직접 체험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지만 언젠가 만들어질 기회를 위해 잠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200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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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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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의미를 밝히고 찾아내는 고단한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믿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고민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관찰하며 분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과 공감하는 부분들을 짜맞추어 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다 철학자인지 모르겠다.

  철학자 김용석을 처음 만난 것은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혼합의 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타난 이 생소한 철학자는 현대적 의미의 전방위적 대응력과 소화력을 자랑한다. 다양한 텍스트와 문화사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 역작으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내 머리의 한계가 그러하듯이 잊고 있다가 최근의 발간된 <두 글자의 철학>을 접하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공감과 깨달음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저자는 어느 순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는다. 두 글자! 그렇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두 글자들 속에 숨어 있는 비밀과 진실들을 찾아 나선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철학의 발견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했던 두 글자들 속에, 혹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자리 매김은 철학의 기본적 덕목이다. 저자는 일단 주변에 흩어진 두 글자를 모은다.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은 ‘인간의 조건’으로,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는 ‘감정의 발견’으로,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아부, 용기, 겸허, 체념’은 ‘관계의 현실’로 묶어 냈다. 나열된 스물 여섯 개의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 특유의 사유 방식과 각 개념에 대한 해석과 실례들이 덧붙혀져 읽을만한 텍스트로 손색이 없게 된다.

  한국의 ‘슬라보예 지젝’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의 개념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도구로 설명된다. 다소 모호하거나 지나치기 쉬운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현실성있게 다가온다. 어렵고 딱딱한 철학을 생활 속으로 불러내는 일은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철학 서적은 일반인을 위해서는 무의미하다.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는 왕자의 물음에 여우는 답한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여우는 왕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 술 더 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게 더 좋을 거야. …… 이를 테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가 다 되면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거야. ……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儀式)같은 게 필요하거든.”

  이 대목을 읽은 독자들에게 저자는 묻고 있다. 이 동화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누구를 진짜 길들인 것일까?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생각해보는 사소한 일들이 즐겁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추억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계의 현실’ 부제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보여주는건 아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를 비롯한 우리를 점검하고 반성해 보는 의미있는 이야기들, 아울러 그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바라본다.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공기의 흐름도 완만하다. 사실, 두 글자로 철학을 하든 세 글자로 철학을 하든 그게 무슨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자세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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