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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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의미를 밝히고 찾아내는 고단한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믿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고민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관찰하며 분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과 공감하는 부분들을 짜맞추어 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다 철학자인지 모르겠다.

  철학자 김용석을 처음 만난 것은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혼합의 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타난 이 생소한 철학자는 현대적 의미의 전방위적 대응력과 소화력을 자랑한다. 다양한 텍스트와 문화사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 역작으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내 머리의 한계가 그러하듯이 잊고 있다가 최근의 발간된 <두 글자의 철학>을 접하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공감과 깨달음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저자는 어느 순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는다. 두 글자! 그렇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두 글자들 속에 숨어 있는 비밀과 진실들을 찾아 나선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철학의 발견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했던 두 글자들 속에, 혹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자리 매김은 철학의 기본적 덕목이다. 저자는 일단 주변에 흩어진 두 글자를 모은다.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은 ‘인간의 조건’으로,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는 ‘감정의 발견’으로,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아부, 용기, 겸허, 체념’은 ‘관계의 현실’로 묶어 냈다. 나열된 스물 여섯 개의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 특유의 사유 방식과 각 개념에 대한 해석과 실례들이 덧붙혀져 읽을만한 텍스트로 손색이 없게 된다.

  한국의 ‘슬라보예 지젝’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의 개념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도구로 설명된다. 다소 모호하거나 지나치기 쉬운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현실성있게 다가온다. 어렵고 딱딱한 철학을 생활 속으로 불러내는 일은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철학 서적은 일반인을 위해서는 무의미하다.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는 왕자의 물음에 여우는 답한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여우는 왕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 술 더 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게 더 좋을 거야. …… 이를 테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가 다 되면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거야. ……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儀式)같은 게 필요하거든.”

  이 대목을 읽은 독자들에게 저자는 묻고 있다. 이 동화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누구를 진짜 길들인 것일까?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생각해보는 사소한 일들이 즐겁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추억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계의 현실’ 부제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보여주는건 아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를 비롯한 우리를 점검하고 반성해 보는 의미있는 이야기들, 아울러 그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바라본다.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공기의 흐름도 완만하다. 사실, 두 글자로 철학을 하든 세 글자로 철학을 하든 그게 무슨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자세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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