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살아있는 교육 2
이오덕 지음 / 보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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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는 지도가 가능한가’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어 과목에 포함되어 있는 쓰기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작문’이라는 과목으로 심화되어 있다. 국어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쓰기 교육이다. 하지만 쓰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거나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과문한 탓인가. 살아 있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어떤 것인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이다.

  40년 넘게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을 알기 쉽고 편안하게 풀어내시는 선생님의 글솜씨는 담백하다. 글쓰기에 관한 글 자체가 한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어휘가 없으며 뒤틀리고 어색한 표현이 없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숨쉬듯 읽어내려갈 수 있는 글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다소 딱딱하고 이론적일 수 있는 글쓰기 교육에 대한 방법과 실제가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대부분 초등학생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중고등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 더 필요할 듯한 책이다. 우리의 글쓰기 교육이 얼마나 제멋대로 혹은 왜곡된 형태로 진행되어 왔고 진행되고 있는지 너무나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내용이어서 시선 둘 곳이 마땅찮다. 10여년 전에 나온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교육과정의 변화에 따라 교과서도 많이 바뀌었고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어려움은 여전히 많은 아이들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어른들의 탓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분명히 이야기한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 책은 교사들을 위한 책도 아니고 학부모를 위한 책도 아니고 학생들을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들 삶을 점검하고 교육의 방법을 되짚어 보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고 우리 교육의 미래를 점검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결정된다면 글쓰기 교육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 같다.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솔직한 글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분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간 선생님께서 모아 놓은 학생들의 잘된 글과 잘못된 글들을 읽어 나가면서 내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고 무수한 ‘글짓기’가 떠올랐고 ‘백일장’이 생각났다. 과연 그랬구나. 정말 그랬었구나. 생각해보지 않고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주변의 모든 일들이나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많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 전체의 문제를 글쓰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작은 생각의 변화와 갈들이 시작되는 곳에 항상 문제의 실마리도 함께 놓여 있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막막해 보이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저 소박한 대답들을 늘어 놓을 뿐이다. 그것이 정답이고 글쓰기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이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어린시절 받았던 잘못된 글쓰기 교육 때문에 지금도 쓴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예전엔 이런 책이 심각한 내용이었지 하고 추억속의 이야기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는 ‘어떻게 살 것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이오덕 선생님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글쓰기 교육이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아니 교육의 큰 틀을 짜고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부터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님의 큰 뜻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마음 속 큰 스승의 깊은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이다.


200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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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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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도 군주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군주라는 지위는 군주국의 형태로 남아 있는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공화국에도 군주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그들의 지위와 역할이 많이 달라졌으나 변하지 않는 치세의 전략은 현재도 유효하다. 500여년 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만큼 군주와 백성 사이의 관계, 군주와 신하들 사이의 관계, 군주와 다른 군주와의 관계 등을 가장 현실적인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은 물론이고 외교 문제와 신하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고전은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만으로도 그 역할은 충분하다. <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당시의 이탈리아의 정치, 역사, 외교, 문화 등 폭넓은 시각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하고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배경지식의 역할 이외에는 다른 의미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로렌초에게 이 논문형태의 책을 헌사한 이유는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이었던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로 설정하여 피렌체의 굳건한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음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실 군주의 실전 지침서이면서 자신의 능력과 안목을 보여주기 위한 처절한 목적이 숨어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공화국 형태의 나라에서 군주는 대통령에 해당한다. 물론 그들이 가진 권리와 의무, 국민들과의 관계가 군주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 정치의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군주론>의 이야기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 흔히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군주의 냉혹함과 인색함, 잔혹함과 두려움의 덕목들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군주론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당시의 사회사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고 고민해본다면 도대체 마키아벨리의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군주가 지켜야할 덕목들에 대한 세인들의 오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된다.

  말하자면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의 혼탁한 소용돌이 속에서 강력한 군주국으로 나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갖추어야할 군주의 덕목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간관계와는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군주라는 특별한 자리에 오르기 위한, 혹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은 혼란한 국제관계에서, 그 힘의 논리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나름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시대와 상황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견해는 충분히 의미있고 수용될 수 있는 정도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설정하고 집필된 것으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에스퍄냐,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등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힘의 부침에 따라 몰락과 부활을 반복하는 군주들의 모습을 지켜본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과정과 군주의 몰락 과정 그리고 굳건한 기반을 다져가는 군주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16세기 중반의 이상적 군주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도 달라진다. 정치 형태도 달라지고 국제 관계도 변화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군주의 지위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른 자와 국민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측근들을 다루는 인간 관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충고들은 여전하다고 본다. 왜곡된 형태로 역사속의 인물이 잘못 이해되거나 한 권의 책이 지니는 의미를 과대 포장하거나 축소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있는 그대로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시 한번 미래를 위한 역사의 교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와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사회문화적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이 책은 훨씬 더 많은 논의와 해석이 가능한 책이라고 본다. <군주론>은 군주국의 종류와 성립에서 시작해서 야만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간곡한 권유에 이르기까지 전체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 18장은 <군주론>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인용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은 군주가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덕목들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군주들은 약속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며 기만을 통해 사람들의 혼을 빼놓?데 능숙한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수단이 있음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법률에 따르는 痼見?다른 한 가지는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군주는 짐승과 인간의 성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그러므로 군주는 짐승의 성품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짐승 들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의 성품을 선택해야 합니다. …… 현명한 통치자라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거나 약속하도록 만들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약속을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지켜서도 안됩니다. ……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어겨야하며, 자비심도 베풀지 말아야 하며 종교도 무시해야만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 군주는 운명의 방향과 자신에게 닥쳐오는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 군주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신앙심 깊은 사람으로 보여야만 합니다. (본문 146~150페이지)

  전체 문맥 속에서 그리고 당시의 사회역사적 관점으로 외교 관계까지 들여다 보고 마키아벨리가 열망했던 강력한 군주를 통한 조국 이탈리아의 대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또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관계의 덕목과 민주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님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권력과 강력한 왕권을 위한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으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군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논쟁속에 휩싸여 있고 오해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혹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거나 반대하는 지침서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0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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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 반민주주의자에 대한 민주주의 재판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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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교 다닐 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배웠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철학자가 한 말이므로 무조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독재 정권의 통치 수단에 교묘히 이용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1995년에야 교과서에서 그 말이 사라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라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화인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철학의 수호자로서 아테네인들에게 누명을 쓰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그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좀 더 공부하거나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일이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고 처음 주장하기 시작한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가 ‘이성’의 철학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철학의 아버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저자는 차근차근 조목조목 따져나가고 있다.

  최근 많은 교양인(?)들을 위해 백과사전 요약식의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바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이다. 저자는 우선 이 책을 인용하며 슈바니츠가 유일하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대화법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도 아니고 막가파식 대화법으로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추궁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 늘어지는 대화법을 통해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를 깨우쳐 줄 뿐이라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이런 놈을 만나면 말을 하지 않거나 주먹질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물론 비판할 만한 철학도 없는 사상가가 소크라테스라고 말한다. 글 한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철학자를 제자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서 되살려내고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철인 정치를 주장한 반민주주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에 의해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문제는 두 사람의 저서를 통해 확인하면 될 문제고 이 책에서는 크세노폰의 <회상>, <변론>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등이 주된 참고 문헌이 된다. 이외에도 그리스의 희곡들과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헤로도토스의 <역사>등 충실한 자료 분석을 통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의자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이다. 그의 철학과 죽음에 대한 오해가 2천 4백년이 지나도 바로 잡히지 않고 비민주적인 철학과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되어 온 사실을 비판한다. 그래서 저자는 직접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고 소크라테스가 재판받은 장소를 확인하며 그리스의 하늘과 땅과 그 곳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한 인문주의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바로 알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그의 선언대로 소크라테스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의미의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다.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그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 재판이 마치 정치적인 희생양을 만든 재판인 양 다루어져 왔다. (본문 42페이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의 의미를 면밀히 검토한 후 가장 많은 부분에 그리스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검증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분석과 부당함을 제시한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파탄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맺는다.

  책 전체의 논리성은 저자 나름의 방식임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고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통념을 완전히 되엎을 만한 이러한 주장과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들을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에 대한 저자 개인의 경험과 반감은 이 책과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에서 드러나는 전문 재판관의 문제를 그리스의 민중재판 과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며 - 이를테면 배심원 제도나 참심제도 -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방법론까지 폭넓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전체에 밑줄을 긋는다.

  비판이라는 말은 가치 중립어이다. 비난과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건전한 비판의식과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의 자유가 밑바탕이 된 사회에서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제 좀 더 폭넓은 시각과 주장들이 나와 줄 것을 믿는다.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에게 한발 다가섰다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고 두 발 물러서게 만든 재미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박홍규의 교수의 한마디가 이 책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같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 주눅(?) 들었던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존경심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민주주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언행을 한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행위는 응당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언행 때문에 그가 고발당하고 사형에 처해진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그리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횡세서 그나마 차선의 방법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푼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여전히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반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를 적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본문 80)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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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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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더 이상 삶의 진실과 깊은 감동을 담아내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까? 권지예를 처음 만난건 물론 ‘이상 문학상’이라는 권위를 통해서다. 2002년 ‘뱀장어 스튜’로 이상 문학상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그것으로 첨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소설집 ‘꽃게 무덤’으로 두 번째 만났다. 이제는 여류 시인이나 여류 소설가라는 말이 사라졌다. 희귀하지도 특별한 테마만을 다루지도 않기 때문에 그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졌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깊이와 넓이, 혹은 날카로움과 감동이 무딘 소설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는 일은 고역이다.

  9편의 장편을 묶어 놓은 이 책은 예스 24 이벤트에 소 뒤걸음으로 당첨되어 받은 25권의 소설중 하나다. 이제 10여권 남았다. 심심할 때마다 한권씩 빼 읽어면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 서른까지는 소설책은 절대로 돈주고 사지 않는다는 쓸데없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소설이라고 일부러 안사지는 않는다.

  이 책의 첫 소설과 두 번째 소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 정도만 읽을만하다는게 개인적인 소감이다. 단편들 사이의 공력이 고르지 못하다. 문장과 표현 주제와 깊이가 제각각이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집이란 한 시대를 혹은 한 시절을 묶는 의미일 것이다. 집중적인 주제와 세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아니어도 무언가 집요한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이거나 화려한 말빨이거나 전혀 새로운 소재이거나 독자의 눈물을 찍어내게 하는 감동이거나 무언가 한가지는 던져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무딘 사람인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다. 소설을 읽다 하품을 하기는 오랜만이다.

  권지예의 소설을 가르는 일관된 상징은 물과 불로 읽힌다. 그리고 그 두개의 상징이 결합된 요리가 그것이다. ‘물의 연인’에서 보여주는 세월을 뛰어넘는 남녀간의 사랑은 물과 불의 이미지로 상승과 하강을 통해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전한다. ‘산장카페 설국 1km’는 드라마 단막극처럼 인물들 사이의 갈등보다는 사건에 주목하고 있지만 과정도 결말도 식상하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를 통해 인간 관계의 소통과 의미를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하려는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삶에 대한 권태와 일상속에서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울림들을 작가는 꽃게와 뱀장어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어지는 ‘우렁각시는 어디로 갔나, 비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봉인’등은 작가의 일상적 경험을 토대가 됐든 아니든 시간 낭비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제일 나쁜 질문이 이것이다. 작가에게 던지는 질문, 그래서?

  아무나 소설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성의 자의식과 결혼 후의 불륜, 가정과 성을 주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집은 가슴도 머리도 적셔주지 못한다. 심하게 말하면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통해 권지예의 소설을 분석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우리 소설사에서 새로움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는 일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새로움도 없고 그 가치가 어디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납득할 수가 없다.

  가을 하늘이 흐린만큼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을 기대하는 헛된 욕망이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푸른 하늘보다 어두운 하늘이 편안할 때가 많다.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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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즐거움 - 문화적 교양인이 되기 위한 20가지 키워드
박홍규 외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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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육체적 공복감을 채우고 나면 정신적 공복을 채우기 위해 목말라 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통시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면서 공시적 관점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예술이 걸어온 길들을 더듬고 나와의 관계를 확인 일, 그것이 교양이 아닐까?

  그러나 교양이 문화 일반에 대한 얄팍한 백과사전식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그것을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소화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각 분야의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자고 일어나면 묵은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로 지식과 정보에 목말라하며 속도에 대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이런 시대에 교양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북하우스에서 나온 <교양의 즐거움>은 현학 취미가 아닌 사람들에게 교양을 위한 작은 지침서 혹은 안내서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잡다한 정보의 지식의 나열을 위한 잡문들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한길사에서 2003년에 나온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이라는 책은 53명의 필자가 철학과 인문학, 사회학과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그 분야의 권위자들과 대표 저작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으로 기가 질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칼날같은 시선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듯 하지만 그 많은 쟁점들을 기억하거나 다시 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교양의 즐거움>은 오히려 작은 책이다. 2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학, 철학, 미술, 사진, 만화, 사진, 건축, 음악,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잡다하다는 느낌이 없다. 우리 나라 최고의 필력을 자랑한다는 필자들의 소개답게 주제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을 새로 손보았다는 이 책은 편집장의 주문대로 ‘아카데믹’과 ‘저널리스틱’의 중간쯤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는 면에서 성공한듯 싶다.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흥미위주의 가벼운 내용은 넘어서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인 용어와 접근을 배제하여 일반인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항목별로 그 분야의 역사와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일반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적 상황이다. 외국의 번역서는 그야말로 교양으로 그칠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현재 우리 상황에 접목되고 있는, 혹은 활발하게 논의되거나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까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국내 학자들의 글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어떤 책이든 한 권의 분량에 20개의 주제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량의 문제는 감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내서와 참고서를 통해 각 분야의 길잡이 노릇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은 후에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잡다한 지식과 쓸데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채워 그 효용 가치를 논하는 일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하나의 지식과 교양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현실 생황에 적용된다는 문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교양은 실용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으나 사회를 보는 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교양을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그 준비 단계나 가벼운 몸풀기 정도에 값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선한 야채로 에피타이저를 즐기듯이 읽기에 가장 적합한 책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은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한 일이다. 고개를 너무 높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는 일도 문제지만.


2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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