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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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어버린 젊었던 시인의 시를 대하는 느낌은 묘하다. 같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도 시인도 세월 따라 흘러간다. 마치 연예인들의 나이를 듣고 놀라는 것처럼 대상은 변함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상한 습성이 내게도 있는 듯 싶다. 등단 작품을 신문에서 읽고 눈여겨 보았던 시인 중의 한 사람인 박형준의 시를 오랜만에 읽는다. 그의 시에서 읽었던 투명함과 선명한 이미지들은 변함없이 탄탄한 느낌으로 그의 시를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차고 단단한 이미지의 결과 언어의 명징함만으로 버텨 보든지. 시처럼 개인적인 장르가 있을까. 아무리 시에 빌붙어 사는 비평가들이나 교수들이 갑론을박 해봐야 독자가 느끼는 몫은 따로 있다. 그것이 때로 꼭 맞아 떨어지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를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통속적이거나 심금을 울리는 감동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제각각의 꽃들로 피어나기를 독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형준의 시는 무미건조한 저물녘 가을 햇살 같다. 따뜻하지도 않으면서 미련이 남지도 않는다. 그저 기울어가는 저녁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파도리에서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는
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파도 속에서
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

  서해 바다, 파도리에서 건져 올린 한 편이다. 건조한 일상에서 비춰지는 개인사는 행간을 건너뛰며 깨끗하게 다가온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의 숨소리와 표정이 살아온다. 그 평화로움과 따스함이 함께 전해진다. 그러나 ‘물새알들이 떠밀려’ 오는 것으로 끝났다. 찰나의 이미지를 칼날처럼 들이 대지도 못했고 깊은 여운이 남지도 않는다. 다만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빛’의 이미지다. 가을빛과 겨울빛이 다르고 순간순간 망막에 투영되는 모든 빛의 현란함이 눈을 아리게 한다. 우리 모두의 몸을 감싸는 빛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창이 된다.

호수가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있었죠

잔잔한 물결 위에
날개를 펴고 죽은 잠자리
그물망에 맺힌 가을빛 - <가을빛>중에서

내 방 창문 너머로
오후의 환한 손님이 찾아왔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묵
찻잔 속의 물을 핥고 있다 - <겨울빛>중에서

  빛은 이렇게 계절 속에서 찾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파고든다. 내가,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집들 속으로 거침없이 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때때로 집없는 이의 집에도 머무는 것이 창에 번지는 빛이다.

오전, 창에 번지는 빛

눈덩이 쌓인 골목

광선 한줄기
꽉 닫힌 집
창변에 머문다

집 없는 이의 집

  가을을 넘어 겨울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한 낮의 무심한 빛들이 다르게 보이는 어느 날이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과 거리가 먼, 문득 모든 감정의 결들에 스며들지 않던 암흑과 침묵들. 정전된 도시의 밤하늘처럼 고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 박형준의 시를 꺼내보는 것은 어떨지.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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