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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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가진 정신의 깊이는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보통 사람을 판단할 때는 피상적인 모습과 한 두가지 인상에 좌우될 뿐 그 사람이 지닌 다면적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회적이고 계산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어쩌면 더 편리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노력과 관찰, 그리고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책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 활자화된 문자를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스키마를 통해 지식을 풍부하게 하며 행간에 숨겨 둔 미세한 떨림까지 확인하게 되면 독서를 더할 나위없이 즐거워진다. 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기 된다. 가을이기 때문일까?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 어떤 산문보다도 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에 푹 젖어 사방으로 퍼지는 낙엽향처럼 진하게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의 둘째, 셋째 형인 서승과 서준식은 박정희 ․ 전두환 군사정권아래 각각 17년과 19년을 복역하고 풀려난 사상범이었다. 갓 스무살 대학생이 접했던 이 상황은 일본에 살고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무게뿐 아니라 가족사의 치명적 고통으로 옥중에 두 자식을 남겨둔 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개인적 아픔을 겪게 된다.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저자의 글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미ƒ筆寵㈆括?‘반항하는 노예’를 보는 것을 의무로 치부해 두었으며, 그 조각은 바로 형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보낼 엽서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노예’의 주위를 돌고 있을 때 가슴 속에 몰아친 광풍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에 대한 감상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의 아픔이자 시대의 아픔까지 녹아있는 기억될만한 특별한 감상이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겨진 1983년에 누이와 첫 유럽여행에서 촉발된 그의 서양미술 순례는 이후 1990년까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계속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의 관심으로서는 도가 지나치다. 그래서 나이 사십에 펴낸 미술 관련 서적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부칠만한 깊이과 안목이 읽을 수 있다. 진부한 표현과 화려한 수사가 없이 깔끔한 미감을 자랑하는 그의 글들은 단정해서 오히려 슬픔을 자아낸다. 길지 않은 문장과 그림에 대한 소박한 표현들이 작가 안에 숨어 있는 깊이와 조응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신선하고 새로운 눈으로 작품들을 대면하게 한다.

  유럽의 각 도시별 미술관에서 본 그림 중 인상적인 그림들을 골라 쓴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모았기 때문에 책 전체가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점은 있다. 일관성 있게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쑤띤의 ‘데셰앙스’,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 영국 앤드 알버트 박물관의 ‘상처를 보여주는그리스도’ 등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게르니카나 수태고지와 같은 대표작도 소개하고 있으나 작가의 여정과 개인적 감상, 80년대 한국적 현실과 교차 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단순한 그림 쫓아다니기 여행이나 관광과는 다른 차원의 여행으로 비춰진다.

  몇 년간 떠돌아다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선 유렵의 미술관들만 실컷 둘러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금도 꾼다. 서준식은 8년간 여섯차례에 걸쳐 미술관 순례를 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이론과 역사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감상했다면 미술 을 ‘그림을 보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와 감상은 물론, 작가 서준식의 시선을 따라 그의 미술에 대한 취향과 감상을 따라가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간접 체험보다 직접 체험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지만 언젠가 만들어질 기회를 위해 잠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200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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