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시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젖어 있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윤대녕의 소설은 사건 중심의 재미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독자를 책 속에 묻어 버리는 힘을 빼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든 그의 소설의 특징이든 분명한 것은 윤대녕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명하면서도 평범한 진술을 통해 감정을 배제한 채 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내면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스무살을 갓 넘겼을 때 윤대녕이 등단했고 그의 소설의 특징은 이십대의 화두처럼 뜨거웠다. 물론 개인적 만남과 느낌과 공감은 문학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그렇게 특별한 만남으로 기억된다. <은어 낚시 통신>이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는 한 작가를 ‘존재의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규정짓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일상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듯 했다. 인물들의 특징과 나이, 성장배경이나 직업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개연성과도 거리가 멀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근작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는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소설이다. 그 과거는 물론 작가의 과거이며 구체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는 청년 시절에 대한 마감 작업으로 보인다.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이 소설은 윤대녕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전환적 작품이 될거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음 소설에 대한 변화와 기대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생의 어느 한 나절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 소설은 많이 아프다.

  “고독한 자들은 말이 없지만 외로운 사람들은 대개 말이 많은 편이죠” - P. 132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소설에서 그리 특별한 주제가 아니다. 아니 문학에서 가장 흔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칫 감상에 젖어 허우적거리거나 공감할 수 없는 개인적 고백으로 지루한 하품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보여주기나 말하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여백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윤대녕은 그 울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젖는다.

  분량에 비해 소설의 내용과 구조는 단순하다. 소설가 영빈은 성수대교 붕괴현장을 같이 목격한 해연과 9년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다시 만난다.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의 사이인 그들은 자주 다니던 ‘히데코’라는 카페에서 재일교포 유미코를 만난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이혼하고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 휩쓸려간 아버지를 둔 해연과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등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겨 놓은 채 자살한 사건을 경험한 유미코는 나름의 상처가 죽음으로 기인한다.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을 둔 영빈은 병원에서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 아버지를 가끔 찾아뵙는 소설가로 등장한다.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실존 작가는 유미코의 고교 동창으로 등장하는데 영빈과 우연히 신촌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은 그곳에서 실존 인물인 사진 작가 김영갑을 가끔 만나며 낚시에 몰두한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간 유미코도 자살하고 제주로 내려온 날 해연은 영빈의 아이를 갖게 된다. 영빈의 자신의 몸에서 호랑이가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기전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찾아 바다를 내려다 본다. 그녀의 이름 해연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바다제비[海燕]라는 뜻이다.

  소설의 큰 축은 세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그 부딪힘으로 요약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세 사람이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들은 모두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겨지는지 살아있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나 이 상처들은 결국 타자에 의한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생채기는 아물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되지만 타인의 도움으로 그것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받은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라는 전언.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한 일들을 모두 수학 공식처럼 대입해서 풀어 낼 수 있는 생의 법칙은 없다. 다만 삶의 방향이나 생의 태도 자체를 수정하게 만드는, 도저히 그 트라우마로 인해 바꿀 수 없는 개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호랑이들을 찾아 나선 소설가의 노력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만약 그것이 날카로운 비명이거나 냉소적인 시선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지만 윤대녕은 마치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인물들의 목소리에 공허한 울림을 부여한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전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 P. 216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문장이다. 재기 발랄한 촌철 살인의 문장이 아니라 평범한 진술로 보이는 수많은 금언들이 숨어 있다. 나는 이 많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에 몰입했다. 행간을 건너뛰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는 가벼움과 나른함, 일상적 진술들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기 보다는 하늘에 대해 내뱉는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결국 영빈은 자신의 호랑이를 발견했고, 그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풀어 주는 것으로 자신과 화해한다. 그것이 영빈의 마지막 출조이며 제주에서 보낸 한 시절을 마감하는 순간이 된다. 영빈의 속내를 말해주는 윤대녕의 목소리가 통증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려 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영빈은 낚시대를 접고 남은 소주를 마시며 동이 터오기를 기다렸다. 그와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무연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 P. 422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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