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봉급 생활자의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예산안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간의 형평성 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세금의 본질적인 문제와 국가 차원의 세수 부족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확실한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과 방만하게 운영되는 공기업, 공룡처럼 거대한 힘으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버티고 있는한 문제는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쟁점이 아니라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지루하고 식상한 논의다. 다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철학이 결여된 위정자들에게 분노한 백성들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이기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텨온 것이다.


국가는 도덕의 힘으로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기에 필요하게 된 하나의 형태다. 여기에 또한 국가의 의도와 목적인 자유와 안전이 있다. - 상식, P. 25


  18세기 후반 인류 역사상 기억될 만한 두 가지 사건을 꼽으라면 미국의 독립(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페인은 이 두 가지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상식>을 썼다. 팜플릿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히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던 버크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진 <인권>은 1, 2부로 1791년과 179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수만부가 팔릴만큼 주목을 끌었으며 페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출판이 영구 금지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상식>과 <인권> 두 권의 합본 형태로 박홍규가 다시 번역한 <상식, 인권>은 그의 설명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작 중의 하나로 평가 받을만 하다. 진보니 개혁이니 현실 정치에서는 되먹지 못한 소리들만 개짖는 소리처럼 처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념과 갈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는듯 하다. 아니, 관심이 있어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그것들을 찾아내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국가와 사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국이었음을 감안할 때 페인의 팜플릿이 가지는 혁명적 발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놀랄만한 일이다.


인간의 평등권이라는 찬란하고 거룩한 권리는(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생존한 개개인에게마나 관련된 것이 아니라, 뒤를 잇는 사람들의 세대와도 관련된다. 각 세대는 그 앞서간 세대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와 같은 원칙에서 각 개인은 그 동시대인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 인권 1부, P. 134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는 페인의 저작은 그의 사상과 당시 역사와 사회를 관통하는 지적 능력을 통해 볼 때 엄청난 독서와 사색을 통한 반성적 사고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사고 방식과 국가와 인권의 문제를 이렇게 통쾌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개혁과 혁명을 논하고 그 태도를 살펴보는 책은 이제 차고 넘친다. 그러나 페인이 살던 18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루소같은 사상가를 통해 사회계약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나 지적 성과물이 제시되었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를,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 나타난 정신을 이렇게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는 저작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논쟁적 문체가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빛나는 정신을 가릴 수는 없다.


자연권은 인간이 존재하는 데 따르는 권리다. 이런 권리에는 모든 지적 권리와 정신적 권리, 그리고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 포함된다. - 인권 1부, P. 138


  인권은 자연권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인권이 자연권이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가치나 목적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이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인의 사상과 주장이 유토피아적 환상과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얼마든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개혁의 권리는 근본적 성격에서 국민에게 있고, 그 합헌적 방법은 그 목적을 위해 선출된 전국적 집회(공회)에 의해 개혁이 추진돼야 했다. 타락한 기관이 스스로 개혁한다는 생각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 인권 1부, P. 146


  그러므로 언제든 국민들은 정부와 정치를 개혁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 정치개혁은 주체는 그래서 언제든 국민의 몫이지 정치가의 몫이 아니다. 잘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살기 좋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토대는 대다수 국민들의 몫이다. 일부 부유층과 권력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는 기득권층의 논리가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정치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는 이야기다.


정치의 세계에서 개혁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다.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혁명의 시대의 특징이다. - 인권 1부, P. 217


자유는 지구 어디서나 박해를 받아왔고, 이성은 반역으로 간주되었으며, 공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했다. - 인권 2부, P. 230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념의 차이를 떠나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신체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을 짚어내자면 끝이 없다.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건전하고 비판적 사고는 끊임없는 이성의 계발과 차가운 자기 반성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 인권 2부, P. 247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 인권 2부, P. 269


  인간의 위대함은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데 있다고 믿는다. 고전속에 파묻힌 케케묵은 망령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이 뼈아픈 진리와 선언들을 되새겨 둘 만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를 바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순히 달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존재하는 금언으로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불행과의 접촉이 연민의 본질이다. 이 주제를 거론하면서 나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 인권 2부, P. 313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에 대한 평가는 각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은 잡다한 논의를 뒤로 한 채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역작이다. 나와 국가, 나와 정치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 옮긴이 박홍규는 페인을 ‘세계의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사상과 삶은 숭고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페인의 말은 “자유가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프랭클린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나, 바로 그 말이 단순한 미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자유주의자인 페인의 삶과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옮긴이 해설, P. 387



20051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망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생의 한 가운데 서서 받은 편지들을 꺼내보는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어느 한 구석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그대로 놓여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이메일 편지함 속 열자마자 닫아버린 편지들의 간격을 헤아려 보았다. 사는 일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누구에겐가 친밀하지 않아도 마음을 털어 놓거나 한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빛깔과 상관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근심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에 앉아 쉬고 싶거나 그 빈 터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싶은 것이다.

  노향림의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 울림은 사물에게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세심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라 명명하는 것들에 대한 찬사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노향림에게 모두 바쳐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언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인중의 하나다. 그만큼 탁월한 감수성과 언어의 명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등 그의 전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시의 모범 답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나친 감수성과 말재주는 오히려 시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나 노향림은 그 위험성을 극복하고 있다.

  시에 있어 서정(敍情)이란 서경(敍景)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그의 시에선 종소리가 들리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만나며 폭설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모든 풍경들이 소리와 빛깔로 빛난다. 무색 무취의 기막힌 물맛을 길어올리는 샘과 같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깨끗해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 시집은 그 맑은 서정으로 빛난다. 

  한 권의 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느낌이 제각각이겠지만 사소한 이름으로 불려진 주변 사물들에 대해, 낯익거나 낯선 장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감각하며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때로 힘겹거나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환호하고 싶을 때, 생의 한 순간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은 아닐까. 마음의 바람결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낯설지 않은 풍경과 가슴 한구석의 뭉클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서정시를 읽는 이유다.

  긴 수식과 화려한 포장을 뜯어내고 잠시 눈을 감고 생의 구차함을 잊어버리는 환각 효과를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렇게 똑같은 자세로 앉아 두통을 앓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신선한 향기같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우리가 시에게 바라는 일은 없다. 그러니 무거운 책임과 가벼운 소홀함 사이에서 물방울을 튀기듯 잠시 깔깔거리거나 먼 데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수리의 저녁

물안개 핀 양수리의 저녁
바람이 수척한 풀들을 강쪽으로 밀어낸다
가두리 양식장의 노인은 돌아오지 않고
갇힌 물 위를 낮게 낮게 나는 새들의
몸에선 프로펠러 소리가 난다
몇 마리는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틈에서 곁눈질을 한다
창백하게 질린 수은등이 납빛 얼굴로
포복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비늘 냄새를 터는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 위에서 반짝이기만 하는 시간들
단 한발짝도 건너오지 못하는
이 먼 그리움



2005111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11-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6-11-0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늘에서야 이사가 끝났습니다. 좋은 이웃들 많이 만나 한 수 배울까 싶습니다. 놀러 가겠습니다.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속성 중 하나인 불안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만큼 감성과 이성 모두를 자극하는 것도 없을듯 싶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가 펴낸 저작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저로 기억될만하다. 단지 시류에 영합하거나 얄팍한 상술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철학에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때로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내용의 깊이와 사색의 넓이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어렵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진정한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칭찬을 덧붙일 수 있는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책들은 원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원제는 였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원제는 이었다. 번역서의 제목이 판매부수를 결정한다는 통설처럼 이 책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의 경우 제목이 바뀌어 재출판 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우에 해당한다. <불안>의 원제는 이다. 원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 대해 한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책장을 열어야 한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구성을 단순화한 것이 눈에 띤다. 크게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법’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해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나누어 진단하고 있다. 그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P. 38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 P. 81

  사회적 ․ 경제적 지위에서 느끼는 불안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 이후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물질적 궁핍에 대한 것이다. ‘돈’, 혹은 ‘부’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조금씩 다르게 논의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극히 드물다. 종교적 삶을 택했거나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는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게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을 유발한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라는 보통의 말은 그래서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이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다. 욕망도 규격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 P. 124

  그렇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그러나 그 하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욕망을 없애는 방법과 하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 둘 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것은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욕망의 절제라니? 그것도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정 수준에서 절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기 변명과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병든 영혼에 대한 처방전은 아니다. 그저 그 원인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안’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도감은 무척 크게 느껴진다.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대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해법’에 대해서는 공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우?철학과 예술이 주는 위안 그것이다. 사유하는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불안은 물론 극복되거나 치유될 수도 있다. 정치와 기독교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와 기독교가 가중시킨 ‘불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사회적 불안에 누구보다도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개인의 삶에 대적 영향을 끼친 분야를 불안의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시한 ‘보헤미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했으나 실패담 위주이고 일반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목 문제나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다.

  보통은 이 책에서 수많은 고전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종합하며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견해가 공존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종합적인 통합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싶다. 철학자가 수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디 있을까.

  몇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온 그의 연구와 일련의 저작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서 다양한 층위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한 것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불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P. 268


200511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은 현재의 의미망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한다. 단절된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고전을 읽고 음미하며 재해석하는 일은 헛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지금 현재를 재발견하는 것이 고전이 주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중엽 근대의 이행기에 두드러진 저작중의 하나가 J. S. 밀의 <자유론On liberty>이다. 인류 문화사에서 근대의 기점론은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를 거쳐 기독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근대의 중심에는 ‘개인’이 서 있다. 독립적 개체로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문화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밀의 자유론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론>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과 사상과 언론의 자유,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과 개인에 대한 사회 권위의 한계 그리고 원리의 적용이다. 각 장에서 밀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유다. 자유가 지니는 의미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은 물론 특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자유’의 본질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헌법과 법률로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서설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지배자가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한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 P. 12

  밀이 생각했던 자유의 본질은 다름 아닌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면 침해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출발하고 있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자유론’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밀은 이어서 얘기한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일은 대중과는 언제나 이해가 상반되는 통치자에 대항하는 수단이었으며, 또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통치자가 국민과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의 이해와 의지는 국민의 이해와 의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 P. 14

  이후 전개되는 언론과 사상의 전개에서 밀은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능히 시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과연 인간이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잘못을 시정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개인의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대립과 갈등이 생기고 통합된 논의나 지향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배치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밀은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지 궁금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책이 있을까? 어떤 논의나 주장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진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상대적 가치 속에서 평가되어야하는 것이 ‘진리’라는 이름의 숙명이다.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자유론’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그렇다면 국가나 사회의 압제와 타인의 관계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해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근본적인 관계 설정과 범위와 한계를 고민하고 싶다면 <자유론>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한 국가의 가치는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인생처럼 책에 나와 있는대로 혹은 보다 가치 있는 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보다 소중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을을 가져볼 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대중은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밀은 이렇게 책을 맺고 있다.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이다. 이들 개개인의 정신적 확대나 향상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것을 뒤로 제쳐두고 세부적이고 사소한 사무상의 행정적 수완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서 그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국가는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어떠한 위대한 일도 결코 이룩하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가 온갖 희생을 다하여 이룩해 놓은 완전한 기구라 할지라도 그것의 원활한 운영을 기한다면 국가가 배제한 구성원의 힘 부족으로 인해 아무러너 도움도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 P. 278



20051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
디팩 초프라 지음, 최승자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의 부록으로 따라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디펙 초프라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곱가지 지혜>라는 짤막한 책은 출판사를 보니 <교양의 즐거움>을 주문할 때 따라온 것 같다. <성공에 이르는 영혼의 일곱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밀리언셀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어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그 일곱가지 법칙을 아이에게 적용시켜 보라는 자녀 양육법 지침서 내지 참고서다. 아주 친절하게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일별로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일곱가지 법칙이 아니라 칠십가지 법칙이 있어도 지침서를 참고해서 아이를 기르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를 진정한 성공으로 이끄는 선물’이라는 부체가 붙어있지만 ‘진정한 성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물질과 명예를 위한 성공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삶의 주체적 리더로서 영혼의 성공을 언급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모호하고 명상적인 언급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고 해서, 혹은 특별한 자녀 양육법을 안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제대로 커간다는 것에 전부 동의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모두 실천하지 않듯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차이가 나고 행한다고 해서 개체로서의 타인인 아이들이 모두 부모의 의도대로 자라주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봐주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아이들을 대하며 ‘권위와 억압’을 배제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모 정도만 돼도 성공한 부모라고 본다. 쉽지 않다. 부모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순간순간 아이에게 쇠뇌되고 반복적으로 주입시켜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길러진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 성공이 주는 삶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아이가 행복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잘 할 수 있고 즐거워하는지 고민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가 우선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아이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법칙(일요일) : 순수 잠재력의 법칙
“넌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해낼 수 있어.”

두 번째 법칙(월요일) : 베풂의 법칙
“뭔가 바란다면, 먼저 그대로 베풀어봐.”

세 번째 법칙(화요일) : 원인과 결과의 법칙
“지금 내리는 선택이 미래를 바꾼단다.”

네 번째 법칙(수요일) : 최소 노력의 법칙
“거부하지 말고 흐름을 따라가렴.”

다섯 번째 법칙(목요일) : 의지와 소망의 법칙
“진정으로 뭔가를 바랄 때마다 씨앗을 한 톨 심는 거야.”

여섯 번째(금요일) : 법칙 초연함의 법칙
“삶을 여행으로 즐겨봐.”

일곱 번째 법칙(토요일) : 목적의식의 법칙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란다.”

  책은 이렇게 일곱 가지 법칙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권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남는 건 별로 없다. 답답할 때 길이 없는 줄 알면서 찾아보기 위한 방법 정도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목이 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내용과 학교와는 무관하다. 뭔가 튀는 제목이어야 팔리나? 학교에서 뭘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