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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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맨 왼쪽 위부터 항상 ‘문지시인선’을 꽂아 놓는 버릇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시집들의 위치는 변함없이 가장 윗자리를 내주는 셈이다. 1권 황동규의 <나는 바뀌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며칠 전에 도착한 301권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시집들을 훑어보며 시간의 무게와 변화를 가늠해 본다. 얼마쯤 될까 세어보니 111권이 꽂혀 있으니 세권 중 한권은 사서 읽은 셈이다. 그 뒤에 기대 서있는 창비와 민음사, 세계사의 시집들이 내 청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우고 있다. 내 영혼의 팔할은 시집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첫 데이트 약속 장소는 교보문고 시집 코너였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86권)” 그렇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던 90년에 100권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가 출간되었다.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102권)>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몇 년후 그녀는 내게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119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97년 봄, 책장에는 여러권의 같은 시집들이 나란히 꽂히는 것과 동시에 기념이라도 하듯 200권 <詩야 너 아니냐>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300권 <쨍한 사랑 노래>가 나왔다.

  “모든 사건은 밤에, 안개의 살갗처럼 움직인다. 너는 나의 미로다. …… 지금에 와서, 나는 너를 희망이었다고 되새긴다. (첫밤,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201) 중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시리즈 300권을 기념하여 출간된 <쨍한 사랑 노래>는 황동규의 시를 표제로 해서 201권 채호기의 시집부터 299권 이성미의 시집까지 한 편씩을 고른 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100권, 200권 기념도 마찬 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깊다. 순수 참여 논쟁의 복판에서도 묵묵히 우리 현대시의 무게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며 시의 본령을 지켜온 것이 ‘문지 시인선’이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 김광규, 기형도, 최승자, 김혜순, 장석남, 황인숙, 김준태, 김영태, 이성복, 나희덕,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들을 만났고 그 시인들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삽십대 중반이 되었다.

  문학에 처음 눈뜨고 정호승, 이승훈,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 김용택, 신경림, 곽재구, 조태일, 양성우, 하종오, 임영조, 김남주, 함민복, 최승호, 김정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내 안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던 시절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숱한 불면의 밤들을 함께 한 시인들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그렇게 정신의 두 다리처럼 한발 한발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는 동지와 같다. 그렇게 나를 키운 시와 시인들은 ‘사랑’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둘은 모두 학생들에게 그 때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집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손때 묻은 책들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갈 듯 싶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 (뼈아픈 후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220) 중에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청춘(224) 중에서)”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청춘, 박용하, 영혼의 북쪽(236) 중에서)”고 선언한 시인의 말이 부정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는 지나칠 수 없는 현실들에 딴지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이 말에 소금인형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잃다(258)

  군더더기 없이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선언들과 감성의 떨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영원히 지속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열정이 시와 문학의 힘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275)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훈훈함이 세상에 가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시의 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무인도, 박주택, 카프가와 만나는 잠의 노래(287) 중에서”는 말을 깊이 새겨 둔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당도해 있다. 짧은 생에 대한 소망과 통찰은 모두 다른 형태로 실제 생활에 투영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환희와 고통, 행복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 켜켜이 먼지 앉은 옛날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200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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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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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학년도 대입제도 변경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이제는 냉소만 흘린다. 정치권과 교육부,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들의 태도는 국민 대다수의 희망과 정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듯 보인다. 물론 정서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되겠지만, 교육 문제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것이 그리 힘든가. 정치 논리와 대학들의 안이한 기득권 싸움은 혐오스럽다. 냉소와 비판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지만 사실 제도권 교육의 환경 변화를 공평한 경쟁의 장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부르디외의 이론과 실천은 이런 한국적 현실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림 지식 총서 76권 홍성민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이론과 현실의 비교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와 사상이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비교적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프랑스 사람들조차의 그의 불어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저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저작과 논문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들만을 골라 소개한 책이다. 그것은 아비투스, 상징적 폭력, 장이론으로 요약되어 있다.

  부르디외의 학문과 사상은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권력지배에 대한 저항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치를 지닌다. 모든 이론과 사상은 학문과 이성의 발달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현실의 적용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부르주아 출신의 부르디외가 프랑스 사회에서 느꼈던 모순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며 마르크스의 계급과 베버의 계층의 변증법적 지향점들을 정확히 제안하고 있는 탁월함을 찾아볼 수 있다.

  “학문의 임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들추어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투쟁의 무기와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점이다. (본문 11페이지)”는 말이 지식인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 현재 우리들 삶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겠다. 우리가 지닌 사상과 계급의식이 현실 정치와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지 아픈 성찰의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상징 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고 말한다. 즉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의 중요성을 일깨워 무의식적 선택과 개인적 취향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상징적 자본의 합법적 독점체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부르디외는 학교 제도를 통해 설명한다. 교사들의 성향과 교육 방법은 그들의 선발과정들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평가하는 또하나의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적 위계를 규정하는 신분적 질서는 학력이나 가정의 배경으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나아가 경제적 잉여의 왜곡된 배분으로 이어진다. (본문 42페이지)”

  대입 제도의 논술 문제에 대한 적확한 답이 여기 있다. 서울대의 사회 경제적 헤게모니는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며 그것은 불공정한 평가 방식으로 문제가 확대된다.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논술 문제를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제도권의 정상적인 학교 교과 교육과정을 통해 해결하기 힘든 방식의 평가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대학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와는 달리 문화 경제 자본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일종의 상징적 폭력인 것이다. 기여입학제의 문제는 수그러들지 않고 입시철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성민의 부르디외의 논의를 받아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는다.

  부르디외가 진단한 프랑스 사회 문제가 학교제도를 통한 신분적 위계질서의 재생산이었다면, 필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 이외에 서구의 문화적 강압효과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다. (본문 55페이지) …… 부르디외의 문화 분석이나 교육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첫째, 교육의 변화가 제도의 개선에만 머물러서는 충분하지 못하며, 학교체제를 둘러싼 기타의 사회적 장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제도의 개선은 언제나 개인적인 심성의 변화와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57페이지)

  논의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교 문제가 단순히 입시제도의 변화 문제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홍성민의 말처럼 학교를 둘러싼 사회적 장과 함께 개인적 심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전체 구성원들의 고민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울림을 가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과 사상은 ‘실천’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탁월한 사상과 관점이라도 발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면 지적 유희나 학문의 영역으로만 남겨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와의 만남은 소중하다. 국가와 교육제도 만큼은 개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게임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리라. 그 의무를 위해 신자유주의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말년의 부르디외는 실천하는 지식인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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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2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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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에 관한 소설을 기대한다면 이 소설은 한 발 비껴 서있다. 책이 주는 의미와 역할들, 상상속의 공간에서 고스란히 작가의 숨결과 육성을 느끼고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책들이 꿈꾸는 도시를 상상했다면 실망하게 된다. 다만 상상속의 동물과 부흐하임의 지하묘지 부흐링에서 펼쳐지는 환상과 모험의 어드벤처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상력의 힘과 살아 숨쉬는 책들이 주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가족 동굴에 들어간 주인공 미텐메츠는 ‘오름’에 취하게 되고 부흐링 족에게 인정 받는다. 부흐링족은 한마디로 인생 자체가 책이다. 책을 읽으면 배가 불러지는 이 종족은 누가 뭐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듯싶다. 결국 책 사냥꾼들과 롱콩코마의 침략으로 미텐메츠는 우여곡절 끝에 그림자의 성에 들어가 그림자 제왕인 ‘호문콜로스’를 만나게 된다. 예정된 만남으로 그림자 제왕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미텐메츠가 모험을 시작하게 된 원고의 작가가 바로 그림자 제왕임을 알게 된다. 미텐메츠는 스마이크의 계략에 하르펜슈톡가 협조했고 부흐하임 전체가 스마이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사정을 듣게 된다.

  지하묘지에서 스마이크 삼촌의 유언장을 발견하고 모든 진실을 파악하게 된 그림자 제왕과 미텐메츠는 키비처와 슈렉스의 도움으로 미로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고 묘지의 모든 책 사냥꾼들과 대결하게 된 순간 부흐링족의 도움으로 롱콩코마까지 죽이고 드디어 스마이크의 고서점까지 올라와 하르펜슈톡과 스마이크에게 복수한다. 주인공 공룡 디노사우루스는 부흐하임에서 오름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겪은 모험을 책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이다.

  책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처럼 책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살아 숨쉬는 책들이 등장하는 책은 없었다. 책에 눈이 달려 독자를 쳐다보고 여섯 개의 다리가 달려 있어 움직이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모든 상상이 실현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숨쉬는 현실의 벗어날 수 있는 상상의 빈 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 상상의 공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책에 대한 환상을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유아기 물활론(物活論)적 사고 방식은 우리에게 신선함과 순수한 동심을 전해준다. 처마 끝에서 땅바닥에 일렬로 불규칙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빗방울이 뛰어간다”고 외치는 꼬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파악하는 것은 상상력의 출발이 된다. 방안 가득 책꽂이의 책들이 나를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을까 싶다. 그 생각은 작가를 움직였고 소설이 되었다. ‘발터 뫼르스가 독자에게 붙이는 말’은 사족으로 느껴져 아쉽다. 다음 소설에 대한 독자의 견해를 묻는 내용과 이메일 주소가 책장을 덮기 직전, 모든 것이 현실속의 상상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림자 제왕과 공룡의 모험담으로 그치지 않고 책들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사건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안의 휴식과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배낭 속에 꽂혀 가기에 적당한 책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 책장을 넘기다 잠들고 싶다면, 잠시 현실을 잊고 싶다면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200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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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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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며 암호를 풀기위한 키워드로 사용된다. 독특한 형식과 맛깔스런 내용의 소설 한편이 내게 왔다. 독일 작가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2>는 추리 소설이자 환타지 소설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삶에 대한 통찰이나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재미가 ‘상상력’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

  우선 이 책은 주인공인 공룡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모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대부시인인 단첼로트로부터 상속받은 책속에 끼워진 열장의 원고를 읽으면서 그의 모험은 시작된다. 린트부름을 떠나 차모니아 서부 둘스가르트에서 동쪽에 위치한 부흐하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 원고의 작가를 찾아나섰다가 고서점가의 검은 실력자 스마이크의 덫에 걸려 지하묘지에 버려진다. 외눈박이 책벌레들인 부흐링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주인공이 가죽동굴에서 ‘오름’을 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이 1권의 내용이다.

  바야흐로 우주 여행을 시대를 맞이해서 인류는 이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하늘과 바다속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차츰 미지와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19세기에 쥘베른의 <지구속 여행>이 발표된 후 21세기가 되었지만 땅 속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여전히 상상력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물들과 끝없이 펼쳐진 서가들 그리고 그 서가에 꽂혀 살아숨쉬며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공룡 미텐메츠가 아니라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가공의 작가와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부흐링족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책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희귀하고 소중한 책들을 얻기 위해 지하묘지에서 암투를 벌이는 전설적인 책 사냥꾼 레겐샤인과 악의 축(?) 롱콩코마의 역할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조연의 역할을 한다. 선과 악의 축으로 인물 유형이 나뉘는 한계는 모험 소설의 기본 유형으로 단순함의 재미가 시작된다. 어설픈 교훈과 현실과의 연계성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모험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이미 오래된 책들 속에 쓰여 있습니다.”

  무심히 내뱉는 작가의 이 말 한디가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또다른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우리는 거의 무한대로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도서관과 대형 서점에서 책에 대한 중압감에 기가 질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의 총아로 볼 수 있는 책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1차원적인 재미과 흥분, 지적 호기심과 깨달음도 물론 책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까?

  여로형 구조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흥분과 기대, 알수 없는 원고 한편의 의미와 그 작가를 찾아 내는 과정속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상상속의 존재들과 공간들이 서사구조의 축이다. 주인공과 조력자, 악의 무리들과 해결과제가 뚜렷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쉽게 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끝을 보아야 손을 놓게 되는 부류의 책인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분량 때문인지 몰라도 2권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과 하드카바가 주는 부담감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풍스런 느낌과 켜켜이 먼지 앉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책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와 표지는 일체감을 떨어뜨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2권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부흐링들의 ‘오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고 열장짜리 원고의 주인공과 의미를 밝혀내야하며 행방이 묘연한 레겐샤인과 그림자 제왕도 만나야한다. 그리고 지하묘지에서 부흐하임의 지상이나 린트부름으로 주인공이 살아돌아 올 수 있을지는 뻔하면서도 궁금하다. 기대감을 저버릴 수 없고 방법을 알기 위해 2권을 Т?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찬바람이 불 때까지 현실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지? 본격적으로 소설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20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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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99
이성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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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 <전문>

 이성미의 시들은 절제와 이미지의 변형에 대한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언어와 변형된 이미지들이 조화를 이룬다. 표제 시인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는 한 때 유행하던 잠언식 아포리즘이 아니다.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이 내용을 제약한다. 소네트나 시조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정형성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한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름의 미학을 가진다. 그것들은 일종의 기성품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변형의 미학이 없기 때문이다. ‘발부리로 톡톡 차’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길지 않은 진술 속에 담아 낸 시인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하다.

  시에 대한 논란과 애증은 독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고 오래된 문제다. 즉물적인 태도로 시를 대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시가 싫다. 불편하고 어색하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것이다. 무언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특히 이성미의 시처럼 하나의 대상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을 비틀고 변형시킨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표면적인 언술만으로 시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쉽지만 어렵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의 행 배열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나야 할 그는 오지 않았다
  타르 같은 애정을 내게 주던
  여자는 지칠 줄을 몰랐다.

  식물보다 식물을 닮은 단어를 사랑했고
  요리법과 안전 지침은
  아무리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 ‘청춘’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사소함으로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고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시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그것은 시의 본령이 아름다움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만나 변증법적 결합을 이루듯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안에서 재가공 되어 하나의 주관적 객체로 남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인이 말하는 사물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끼리끼리 부대낄 때 즐겁다.

  다만 주관에 매몰되어 언어 유희로 끝나버리는 겨우를 많이 본다. 그것에 대한 기준과 판단, 수용과 배제는 물론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객관적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을 본다. 그녀의 첫시집을 주목한다.

  벽과 못

  녹슬고 굽어 바닥에 뒹굴기 전까지

  그림 하나 걸릴 수 있도록
  벽에 꼭 박혀 있어야겠다 - <전문>



200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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