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1세기가 시작되었고,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사람들은 참 많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교육 분야일 것이다. 지나치게 부정적 견해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당찮은 기대는 아니더라도 선순환의 고리는 마련되어야 하지 않는가.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들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21세기 타령을 하는 이유는 교육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도 19세기 초 현대 교육이 시작된 시절보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아직도, 19세기 교육환경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유효한가?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교육의 3대 주체로 본다. 그들의 의식, 특히 기성세대인 학부모와 교사의 교육에 대한 입장과 틀이 다를 때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학생은 그 사이에서 훨씬 더 큰 혼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을 고려하여 3자 합의(?)하에 ‘인류대 진학’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로 모두가 일로 매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선행학습이 시작되고 영어와 수학만이 살길이며 문학은 입시 주요 과목으로 떠오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어느 블로그였는지 미니 홈피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이 졸업한 대학보다 당연히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했으면 소박한(?) 바램을 적었고 이웃들은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댓글로 달아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도 교육문제로부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입시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은 잔잔한 파문만을 일으킨다. 그것은 모두가 동참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이제 서서히 그 파문이 물결이 되어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되어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란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실천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정말 어려운 것은 실천의 문제다. 모두가 짐싸들고 시골로 산으로 들어가자는 주장이 아님을 안다.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부터 바꾸자는 이야기다. 사소한 일이다. ‘인류대 강박증’ 벗어나기, ‘옆집 아줌마’ 조심하기, 삶의 목표와 과정을 다시 생각하기.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바꾼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힘이 합해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생태적인 삶을 살며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보다는 노동 생산성의 관점에서 ‘인재’로 육성되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고 좀더 비싼 집과 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인생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바램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어디에도 답이 없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부제처럼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살아요!!’는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교육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삶의 가치관과 태도 지향점이 달라져야 하며, 노동과 환경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내 아이의 문제가 되면 태도가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나는 개인의 자유나 개성이 억압되는 국가 발전이나 민족중흥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는 강교수의 선언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발전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는 노동과 생산수단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발전이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억압되지 않으면서 사회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방법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은 공동체 발전의 전제가 되고 공동체는 개인 발전의 전제가 되는 사회, 이것이 바람직한 미래 사회일 것이다.”라는 말이 꼭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교육을 위해 나는,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수 있는가?

  “당신이 만약 ‘당신은 인재’라는 말을 들으면 모욕인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게 이 책은, 교육문제에 관한 그 많은 선언들과 각론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과 과격한 접근 방법을 선택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질 높은 노동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살아가는 과정의 행복과 삶의 질적인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현실(?)을 핑계로 그렇게 키우지 못하는가? 나로부터의 혁명과 작은 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이렇게 어려운가? 내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 교육도 아이들의 미래도 달라진다. 지금 우리가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인가?


200507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과 결혼에 대한 많은 선언과 이야기들은 이제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히 그 주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것이라고 믿었던 고정관념들을 흔들어대기도 한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랑에 대한 점검이고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도 하지만 작가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무엇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코엘료의 문장이 지닌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것도 떠나버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괴로하는 과정을 통해 참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3류 드라마같은 소설의 기본 골격은 한심스럽다. 물론 그것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하다. “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78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는 신기루처럼 명확하지 않다. 자히르의 존재를 아내 에스테르에게서 발견하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사랑의 전도사 미하일을 매개로 아내의 위치와 아내의 자히르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책임의 부재가 아니라, 나에게 최선인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35페이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선명한 주제도 끓어넘치는 감동도 선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믿는 존재니까.(73페이지)” 나머지는 독자에게 찾으라는 말인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고전적 명제를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오 자히르>는 후자쪽에서 경미한 진동만 남긴채 책장을 덮게했다. 이를 테면,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통제하려 할 때, 그것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두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랑은 우리를 방황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129페이지)

선로는 마치 내 결혼에 대해, 그리고 모든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169페이지)

가난뱅이는 댁이오! 당신은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고,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규칙들을 따라야만 하잖아.(284페이지)

아코모다도르. ‘살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317페이지)

그리하여 지혜로운 페르시아 현자의 말대로, 사랑은 아무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질병이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나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사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439페이지)

  이런 잠언류의 구절들은 평범에 바쳐지고 있다. 구체적 형상화와 주관적 변용은 케케묵은 문학의 이론이 아니라 소설가가 금과옥조로 지녀야할 기본적 소양이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한 사건과 과정의 지루함으로 무려 4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소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황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속적이며 결혼과 아내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는 방식은 지루하다. 소설에서 감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결혼과 상대방에 대한 소홀함,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관계 - 이런 가장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내는 데 코엘료는 일단 성공한듯 보인다. 그것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과 모순에서 비롯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애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어 더욱 애매하다. 전쟁을 이야기하고 사람들 사이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친밀해야할 부부관계에서조차 ‘자히르’가 사라지는 상황.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해 작가는 진지한 고민과 궁극적인 고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저 그런 통속 소설일 뿐이다.

  고전이 될만큼 좋은 책들만 골라 읽는 것이 반드시 좋은 독서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적 취향과 관심 분야까지 고려해서 선택의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은 없을까?


200507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있다. 죽거나 혹은 다치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존재는 소멸한다고 믿는다. 관계와 접속을 통해서만 인간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김경욱의 소설은 인간의 그 ‘존재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집요하거나 진지하지 않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건조한 문체가 매력적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정현종)”는 짧은 시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관계에 대한 불가해함 때문이다. ‘타인의 취향’을 알 수 없거나 무관심하며, ‘장국영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추억만으로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김경욱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섬’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동년배의 소설가가 쓴 책은 정서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홍콩 느와르를 몰고 온 장국영과 주윤발 오천련과 장만옥, 장학우와 왕조현을 떠올려본다. 80년대와 지금 학생들이 달라진게 있다면 인터넷이다. 거미줄처럼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보이지만 관계는 피상적이다. 표제작인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이혼녀와의 채팅을 통해 같은 날 같은 극장에서 ‘아비정전’을 본 우연을 확인한다. 같은 날 결혼하고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간 것도 일치한다. 독자들이 이혼한 주인공의 전처로 착각할만큼 우연은 일치한다. 하지만 가상 공간의 인연은 현실로 이어질 수 없으며 서로 다른 공간과 존재만을 확인한다. 장국영의 장례식에 검은 양복과 흰 마스크를 한 여러명의 사람들이 극장 앞에 모여 해프닝(?)을 벌이지만 그 행위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익명성을 담보로 한다. 그것이 접속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존재 방식이다.

  이 외에 여덟 편의 단편은 ‘당신의 수상한 근황, 피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타인의 취향,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 나가사키여 안녕’이다.

  ‘당신의 수상한 근황’에서 ‘삶이란 나약하고 낡아가는 일체의 것에 대해 잔혹하고 가차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사람 니체였다. 하지만 나약한 일체의 것에 잔혹하고 가차 없는 삶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는 인용방식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모든 소설의 주제라는 측면에서 김경욱의 소설들은 그 문법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으며 지나친 진지함과 무거움으로 독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영화와 TV, 인터넷은 시대를 반영하는 매체다. 인간의 관계망에 포착된 의미들을 해석하는 데 동원되는 요소들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소통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으며 잔뜩 폼잡지 않고 있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에서 보여주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들, 일테면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여자들은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섹스를 원한다. 남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본론이지만 여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부록이다.”는 대학 동아리 낙서장에서 봤음직한 표현들이 유치하지 않게 느껴진다. 낭만적 서사를 지배하는 표현들이 모두 공감대와 보편성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죄 없이 사랑할 수 없는가”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몰라서 묻고 있겠는가? 아니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마누라와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로맨스와 진지한 대화.”라는 잠언같은 말들을 뱉어내는 상황들이 자조적이다. 경건함은 없지만 냉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닥에서 건져올린 가벼움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지나간 이야기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과 곤혹스러움보다는 앞으로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또 다른 방식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세대를 규정하는 것이 언어와 문화적 환경일 수만은 없지만 젊은 작가의 참신함이라고만 명명할 수 없는 새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독자들의 몫이다.


200508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흐름을 짚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적어도 한 세대가 흘러야 문학사가 정리되고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점에서 벗어나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평가들은 그 흐름을 나름의 잣대로 평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인으로 분류되는 작가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일정 기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스타는 어느 분야에나 있다. 박민규는 그런 소설가인지도 모른다. <지구 영웅 전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민규는 2년만에 첫 단편집 <카스테라>를 선보였다. 전업 작가로서 왕성한 창작욕과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점등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문한 책을 받아보니 열흘만에 2쇄를 찍은 책이 도착했다. 작가로서는 가장 행복한 형태의 진행형이다.

  이런 외적 현상과 흐름은 당연히 내용의 신선함과 뚜렷한 차별성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소설에서 믿어왔던 서사구조의 틀을 뒤흔들고 있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는 한걸음 빗겨 서 있다. 후기구조주의가 국내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90년대 초반의 현상들과 유행들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박민규의 소설 정도는 가볍게 소화할 수도 있겠다. 환상을 소설 속에서 처리하는 방식과 주제는 이미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민규는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다. 신선함과 독특함만이 미덕일 수는 없으나 그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혹은 비평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냉장고가 영국의 유벤투스를 응원하던 유벤투스의 훌리건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카스테라’를 비롯하여 ‘갑을고시원 체류기’까지 공통적인 흐름과 유사성을 읽어내는 것도 또하나의 재미이다. 우선 주인공이 모두 1인칭 남성으로 지칭되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은 내밀한 자기 고백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어렵지 않게 맡길 수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사건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갈등 구조의 팽팽한 긴장감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래서 이내 실망하고 만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환상을 선택한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의 출현과 ‘코리언 스텐더즈’에서 우주선의 출현등이 그것이다. 어차피 소설이 현실을 뛰어넘는 자리의 어디쯤 있다고 믿는 독자들이라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그의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개연성을 미덕으로 소설을 평가하는 전통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독특한 미학 구조는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판단은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일련의 소설들에서 그가 보여준 세상에 대한 태도는 사뭇 진지하거나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촌철살인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가 없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은 그의 문학세계와 앞으로의 행보를 짚어보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가벼움이라고 쉽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언가 결여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접해왔던 소설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편이 지녀야할 미덕과 인간에 대한 정밀한 관심과 진지한 접근이 부족한 이유이다. 이제 시작과 다름없는 그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것은 없다. 독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소설가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저 지켜본다. 다음은 무엇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다음 작품들을 읽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을 갖게 하는 힘만으로도 박민규는 성공적이다. 나만 그런가?

  주목받는 만큼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반응에 값하는 소설들이 지속적으로 나와주길 빈다. 새로움과 낯설음을 문법으로 하는 독특한 박민규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인 발랄함과 참신함이라면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생각보다 독자들은 냉정하고 정확하다.

  1인칭 남성 화자가 보여주는 고백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제 멀리, 그리고 넓은 곳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길 바라며 재미있는 소설집 박민규의 <카스테라>의 책장을 덮는다. 곧이어 다름 장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아’에서 ‘타자’로의 관심을 기대하며.



200508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01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처럼 시집에 서시라 미리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언제나 서시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시집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시에서 이 시집의 낯설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시선의 변화와 이동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시선의 이동과 관점은 변화는 그래서 중요하며 세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것들을 노래한다. 선명하고 분명한 이미지로.

호수와 나무
-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오규원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은 오래된 수첩과 대면하는 기분이다. 일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인적인 경험과 그의 시에 대한 기억들이 시인의 이미지를 만든다. 초기 시집 <분명한 사건>과 <순례>를 제외하고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敍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한 잎의 여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그리고 시선집 <사랑의 기교> 시론 <현대시작법>을 보면서 시간이 흘렀다. 연습장에 삶의 태도와 인식에 관한 짧은 명언들을 적던 무렵 오규원의 시는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젖지 않는다’는 식의 잠언들을 토해냈다. 초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은유는 독특했고 관심의 내용 또한 특별했다. 새로움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해설에서 정과는 ‘은유와 환유라는 지칭의 모호성’, ‘오규원의 후기시에 대한 이해의 세부적 불투명’, ‘초기시와 후기시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이번 시집을 분석하고 있다. 적당한 긴장과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대충(?) 시를 쓰는 시인들과 오규원은 차별화된다. 한국시의 한 기둥으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자리매김이 끝나기 전에 그의 전집이 나왔지만 그의 전작이 수록되려면 아직 기다려야 한다. 그의 시는 초기에 은유에 기초하여 절대 관념에 대한 천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김춘수와 닮아 있다. 다만 절대관념에서 출발한 시의 시방법론이 시점을 달리하여 관심의 폭과 영역을 넓혀 나가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시선의 이동을 경험했다.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발상의 전환과 절대 관념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읽었다. 그의 시는 내 능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과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낯설게 바라보는 색다른 시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현대시 작법>에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책꽂이 한 켠에 꽂혀 지나간 삶에 대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열정은 사라졌지만 추억은 남는다. 오규원의 시들은 초지 일관 변함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시와 구별된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에서 오규원은 ‘사물의 시선’을 차용한다. 인간의 시선과 생각을 외부 세계에 투영하는 대신 사물의 시선으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을 해석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관념화된 이미지를 풀어 놓고 있다.

하늘과 포도 덩굴

뒤뜰 포도나무
덩굴
혼자
하늘을 건너가고 있다
오늘은 반 뼘


서산과 해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고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는 식이다. 그것은 외물에 대한 무심한 태도도 관조적 태도도 아니다. 감정이 배제된 철저한 관념의 세계가 자연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 객관의 자리에서 오히려 익숙한 언어들이 생생한 이미지를 풀어내고 있다. 이제 그의 시세계는 완성(?) 혹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러운 한 생애가 저물어 가면서 토해내는 붉은 언어들이 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그의 전작들을 꼼꼼히 훑어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다만 21세를 향한 그의 언어는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한 독자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그래서 두근거린다.


200508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