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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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 입학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를 졸라 집에 개를 한 마리 키우기로 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했다. 아버지는 손수 판자를 잘라 개집을 지어 페인트칠까지 해서 멋진 개집도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의 눈에 눈꼽이 끼고 밥도 잘 먹지도 않고 개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안타까움의 크기만 기억한다. 개가 죽고 나서 까만 비닐 봉투에 담아 시냇가에 가 땅을 파고 개를 묻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사진처럼 선명한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론 집에서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다.

  개는 보통 인간과 가장 친근하면서 충직한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주인을 살린 개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배운 기억도 난다. 지금은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아파트에서도 개를 키운다. 오히려 도시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부피가 커진 탓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개발바닥 내발바닥’이다. 신산스런 삶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인간의 발은 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 바로 우리들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힘겹고 고통스런 순간들 너머에도 생은 존재하며 삶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너도 개다!

  이 소설은 청소년을 위한 우화소설로 분류될 만하다. 어른을 위한 소설로도 손색없지만 이제 성인들은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개에 대한 추억이 한 두 가지쯤 있었을 법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유년의 기억으로 안내할 수도 있겠다.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철저히 개의 시선을 빌어 세상을 둘러본다. 배경은 개가 태어난 어느 평범한 농촌과 주인을 만난 어촌이다. 고려의 가전체를 흉내내 어설프게 세태를 비판하거나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을 풍자하지는 않는다.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개의 발바닥을 따라간다. 특별한 사건과 인상적인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암캐인 흰순이와 동네를 지배하는 악돌이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 개들은 소설의 내용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이 아닌 조연에 불과하다.

  이문열의 소설 <오딧세이아 서울>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이런 종류의 소설이 갖는 미덕을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이문열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몽블랑 만년필이다. 사물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 교과서가 되기 쉽다. 가르치려 들거나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기 십상이다. 다만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식상함에서 벗어나 잠시 소설의 문법을 잊고 맑은 샘물을 한 모금 마시는 기분 정도면 되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아쉽다. 억지스런 감동은 없지만 주인의 죽음으로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인 주인공 개의 울부짖음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과정으로 읽기엔 힘이 부족하고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는 모호하다. 내용상 김훈 특유의 문장이나 표현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없다. 자칫 특징 없는 소설로 남겨질 수 있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구나 공감하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즐겁다. 소설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밀한 언어의 정제된 고백보다 편안하게 다가오는 수필처럼 부드러운 문장들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개>는 그렇게 쉽고 편안한 저녁의 대화처럼 일상적인 모습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아 마음 불편하지 않은 것이 커다란 미덕이다.

  과작(寡作)인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대할 때마다 독자들이 느끼는 신선함이나 감동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단 한 편이라도 영원히 각인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고 싶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의 공통된 희망일까?

  소설 외적인 이야기지만 책은 손맛이다. 언제부턴가 ‘민음의 시’가 양장본으로 나오더니 이제 소설들도 걸핏하면 양장본으로 출판된다. 뭔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책장의 부피만 차지한다. 편안하게 접어가며 읽을 수 있고 둥글게 한 손에 말아쥐고 있는 편리함도 사라졌다. 분량과 책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장본의 유행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좀 더 소설다운(?) 표지와 제본이 나는 좋다.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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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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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뿌윰한 안개로 아파트 숲의 하늘이 모호하다. 논리를 넘어선 낯선 곳에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저편을 응시하는 눈을 의식한다. 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그 시선과 마주치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다 그 눈빛과 만나기도 한다. 삶의 곳곳에 숨어 나를 응시하는 눈에 대한 경험은 착각이라고 하기엔 때때로 너무 선명하다.

  오랜만에 하루키를 만났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지나쳤던 그와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다. 신작 <어둠의 저편>은 신선하다. 번역자 임홍빈의 화려한 수사와 거창한 찬사가 오히려 부담스럽지만 딱히 부정할 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할만한 성과를 쌓아왔고 폭넓은 매니아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값싼 감수성이나 자극적인 재미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베스트 셀러 작가는 아니다.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대표되는 소설가 박태원은 3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놓은 듯한 소설을 선보였다. 독특한 그의 ‘考現學’은 청계천변 이발사 소년의 눈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시선이 카메라가 되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의 형식은 이와 다르지 않다. 내용은 형식을 담보로 한다. 하루키는 독자들을 소설 속에 초대하여 동참하게 만든다. ‘우리’라는 말로 동질 의식을 끌어내 영화의 카메라 맨이 되도록 안내한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그가 이끄는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클로즈업 된 에리의 얼굴을 밀착하여 들여다보고 때로는 항공 촬영하듯 하늘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을 내려다 본다. 이런 방식은 낯설고 신선하며 영상 매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소화된다. 소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그렇게 교차 편집되어 장을 넘어간다. 18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읽는 것이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소설의 배경은 밤 11시 56분부터 아침 6시 52분까지.

  열아홉 마리와 언니의 동창생 다카하시는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밤 11시 56분. 두 인물과 주변 인물의 모습을 다음날 아침까지 대략 7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는다. 언니 에리가 잠든 방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우리’는 마리가 부딪히는 낯선 밤의 세계와도 만난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인 ‘알파빌’이라는 호텔방은 에리가 잠든 방과 다름없이 어둡다. 중국인 소녀를 호텔방에서 폭행하고 돌아가 일을 계속하는 회사원의 사무실 또한 엷은 도시의 불빛이 새들어 올듯한 밝기로 느껴진다. 각각의 방에서 벌어지는 단절된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들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피곤하고 느리며 무겁다. 물론 이런 느낌에서 서술자는 한발 물러서 있다. 모든 판단과 느낌은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다. 철저한 ‘보여주기(showing)’기법에 의존하여 소설은 진행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로 생각하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자본의 힘으로 맺어지는 중국인 소녀와 그 배후와 회사원의 관계, 호텔 ‘알파빌’에서 일하는 카오루와 고무기와 고오로기의 관계 그리고 다카하시와 마리의 관계는 모두 메마르고 딱딱한 전형적인 도시의 건조한 인관관계를 보여준다. 대화는 겉돌고 귀가에 맴도는 이명현상처럼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환청으로 치환된다. 의사소통의 부재는 대화의 단절과는 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경우 메마른 대화와 2차적인 관계가 빚어내는 도시의 삶은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다.

  소설의 긍정형 인물로 제시된 다카하시와 마리는 그래서 독자들의 초점이 된다. 작가나 서술자의 의도적으로 설정한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과 삶의 욕망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눈과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두 사람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설픈 몸짓으로 이해된다. 비록 평범하고 힘없는 노력과 몸짓이지만 독자들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그들에게 투영하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밤과 낮, 빛과 어둠은 단순한 시간의 2분법적 분절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삶의 양상을 드러낸다. 사실 2차적이고 간접적인 인간관계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낮의 밝음은 직접적이고 솔직한 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밤의 어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어둠은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거울이 되고 또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넘어 카메라 맨은 에리의 방을 들여다보던 오전 4시 25분에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연동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본문 214페이지)

  그렇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 ‘적어도 지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때, 아니 지금 이 순간 우리들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비친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볼 뿐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속의 내가 아니라 본질적인 나의 모습이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어둠의 저편에, 밝음과 희망 있으라!



200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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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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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꾸는 꿈이 있고 나름의 방식대로 책을 읽고 사거나 빌리며 보관하거나 선물한다. 책을 읽는 목적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고 책을 구하는 방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를 가장 혐오한다. 나름의 이유와 방법이 있겠지만, 또한 목적없는 책읽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작주자의 꿈>의 저자 조희봉은 그런면에서 가장 순수하게 책에 접근하고 있는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있어 아름답다. 오히려 책읽기가 밥벌이 수단과 연결되거나 현학적, 과시적 기타 다양한 불순한(?) 독서와 구별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과 독특한 방식들이 눈길을 끈다.

우선 ‘전작주의’는 깊이와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보는 방법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방식은 아니다. 다만 저자처럼 이윤기나 안정효 등 몇 백권에 달하는 번역서와 저작들을 가진 작가일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절판되거나 구하기 헌책방에도 없는 책들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작가에 천착하는 일은 책읽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충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이고 열정으로 개인적 만족감에 머무른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과 소유욕이 되어 책읽기와는 다른 수집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몇몇 작가들의 경우 장르와 내용, 종류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작가들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정호승의 경우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었다. 시에 주력하던 정호승은 1993년 그의 시집과 동명 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3>을 내놓는다. 주저없이 초판을 사 읽었다가 작가에 대한 실망감으로 낭패를 보았다. 범작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작주의는 위험하고 소모적인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물론 저자의 결혼 주례 스토리다. 이윤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1호 제자’로 인정받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부러운 모습이다. 책과 무관한 일을 하며 그만큼 책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진으로 자랑하는 그의 책꽂이가 부럽다. 예전부터 상상만으로 꾸몄던 방식을 실행에 옮긴 모습이 장관이다. 널빤지와 벽돌만으로 낭비되는 공간없이 8단으로 쌓아올린 그의 책꽂이는 저자의 책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명 사진이다. 가구점에서 구입한 90cm 책장 5개가 넘쳐 정기구독하던 <현대문학> 7년치는 책장 위로 올라가 벽돌처럼 쌓여 있다. 누구나 넓고 깨끗한 책장과 여유 있는 공간을 원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저자와 같은 방식은 하나의 모범 사례처럼 보인다. 곧 시도해야겠다.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내게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먼저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책을 읽어 온 역사는 정말 짧다. 달리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하거나 인생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다만 자기만의 독서법과 책에 대한 사랑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에서 책이 주는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고 책을 선택하고 읽고 활용하는 방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가 된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살아지고 우리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두렵기만 한 백지같은 인생을 채워나갈 무엇인가를 바보처럼 아직도 책에서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먼 후일 내 삶의 자세를 뒤돌아 볼 뿐일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읽기 과정과 방법론을 점검하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나름의 방식들을 점검하는 데 요긴한 책이다. <생산적 책읽기 50>처럼 건방지게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항목별로 실용적 책읽기를 강의하는 식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자가 들려주는 수줍은 책에 대한 짝사랑 이야기로 들린다. 사진으로 보이는 넉넉함만큼 여유를 잃지 않는 열정이 되길 소망해 본다. 그래도 나는 책으로 손이 간다. 손을 잡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법 밖에 또 어쩔 것인가.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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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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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은 가끔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미래 지향적 시간이 아니라 현재나 과거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내 안에 나를 가두기 위해 시를 읽는다. 김명인의 <파문>은 시간의 흔적 기관처럼 미래가 아닌 과거를 돌아보고 사물의 현상들을 꼼꼼히 짚어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첫 시집 <동두천(1979)>과 <머나먼 곳 스와니(1988)>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시는 세월과 나이를 입고 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사물에 대한 투명한 시선이 차갑고 선명하다. 표현 미학의 한 정점을 이룬 듯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깔끔한 언어는 단연 돋보인다.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江을 보면 안다, 저기 ”U, 긴 뿌리
골짜기 깊숙이 묻어두고
줄기째, 줄기로만 꿈틀거려 여기 와 닿는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중에서)

누가 순식간에 기웠을까 연두에 회장 둘린
군데군데의 산벚꽃
햇살 옮겨 구름 무늬 펼치는
신록 다채 저 초록 新衣를 보아라
환하게 드러나려다 감춰지는 실밥! (‘봄 산’ 중에서)

  흐르는 시간과 세월을 이겨낸 사물들과 그것들을 읽어내는 시인의 관점은 새롭거나 독자의 시선을 낯설게 하지는 못한다. 모든 시가 즐겁고 신선하게 독자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독자들은 여전히 두근거림과 미묘한 떨림을 기다린다.

  치열하고 뜨거운 열정을 좋아하거나 투박하고 거친 시선을 즐기거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일 것이다. 시인도 독자를 위해서(?)만 시를 쓰는 법은 없다. 하지만 편안하고 개인적 언어에 함몰된 시어들이 감동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언제나 벗어나지 못하는(?) 서정시의 딜레마! 그래서 혹자들은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의 본질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커다란 규모로 덮치는 해일은 아니지만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한 따스함을 즐기거나 내밀한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거나 영혼의 울림에 동참한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심의 대상과 무관하게 독자들은 ‘감동’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진실을 은폐한 채 덤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혹은 개인적 진실을 외면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 시는 여전히 존재한다. 시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 숱한 논의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시인들은 여전히 시의 의미를 되묻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으로 나는 여전히 시집을 펼쳐 들 것이다.


200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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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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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가치나 사람들의 성향을 바꾸는 일은 무엇보다 힘들다. 오랜 시간동안 몸에 배어버린 관습적 사고와 행동은 타성이 되어 버린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의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종교와 각종 단체 등 수없이 많은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우리와 다른 그들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심각한 민족내의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을 겪었고 그로 인한 분단과 고통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거대 담론으로 통일과 북핵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과 성향,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굳어져버린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그것은 계급을 재생산하고 재생산된 계급은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다. 각종 불법과 유착 관계가 만연하고 부정이 판을 치며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좌와 우의 대립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을 사회 통합과 사회 복지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억눌러 왔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의 저자 하승우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개념이 겉돌고 한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접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처음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들고 우리 사회에 진입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까? 집단간의 이익과 갈등이 봉합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을까? ‘中庸’, ‘和而不同’의 개념조차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좋은 전통과 개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낯설고 어색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실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승우는 이 개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적절하게 수용하고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한계까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탈러런스와 달리 똘레랑스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한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39페이지)


  미국에서 사용되는 탈러런스(tolerance)라는 개념은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유럽 사회의 체제와 틀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똘레랑스’였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또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 처절하고 자생적인 과정에서 사회 체제와 개인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공동선의 개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유행처럼 번지고 지나가버린 쉽게 잊혀져 버리는 특성상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겨레 신문의 ‘왜냐면’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과 대화를 시도하고 공론의 장으로 갈들을 끌어내기 위한 홍세화의 노력은 조금씩이지만 우리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몇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거나 한 사회의 윤리나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작은 노력과 개인적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똘레랑스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평등하지 않은 개인간의 혹은 집단간의 똘레랑스는 의미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차이는 평등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취향으로 변했다. 사회를 바꾸는 참여보다 자기의 취향을 만족시킬 취미가 더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를 침범당하면 간섭이라 여기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96페이지)”는 저자의 지적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는 참여와 실천으로 촉발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어떤 개념이든 용어이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여전히 자발성의 문제로 남는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 개념위에 서게 되는 전제 조건으로 아프게 와 닿는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 이것이 왜 똘레랑스라는 개념에서 중요한가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 (72페이지)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늘 자발적 개인의 참여와 실천, 그리고 연대의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읽은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그렇게 소화되버렸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저자는 그 한계까지 정확하게 짚어낸다. “똘레랑스의 가장 큰 한계로, 체제가 만든 규칙을 깨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83페이지)” 한계라는 표현은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체제가 만든 규칙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큰 틀의 체제까지도 변화가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논의하는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개념적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념을 넘어 현실과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서 맴돌며 이론의 문제로 남겨지는 껍데기 개념은 가라! 학문적 개념보다 논의의 초점과 과정들이 현실에 맞춰지고 그것들이 현실속에 녹아드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를 열고 이기주의를 넘어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 노력하는 사회적 연대만이 살 길이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실천의 문제로 나에게 이 개념은 남겨진다.



200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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