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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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 방정식의 물리적 측면을 곱씹을수록 혐오감이 커진다네. …… 슈뢰딩거의 글은 도통 이치에 맞지 않아. 개소리라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_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볼프강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 이성적 사고의 결여가 감정적 대응보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물과 사건, 즉 세상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아니 어쩌면 모두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극히 일시적 잠재태에 불과한 현상들을 우리는 세계 이해의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은 초월적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미지의 영역은 늘 불안을 잉태한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가시적인 범주에 머문다. 확정적 사실을 지지하고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아니 그 노력마저 포기할 때 인간은 비루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수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진리의 영역이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적 추론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감’이 휴리스틱에 기반한 블링크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론 가능성을 차단하며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르치려 들거나 삶의 목적과 가치, 윤리적 판단에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항상 고민하고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착각이 불러오는 편견과 오류가 작동하는 방식은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주관적 해석과 가치 판단의 영역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과의 거리두기는 자기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거르고 잘라내야 하는 게 암세포만이 아닐 터. 벵하민 라바투트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 아니 인간에 한발 다가서기를 시도한다. 모두가 거리두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문학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들의 수고는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아주 조금 이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들이 활용하는 도구와 그들의 관점을 잠시 빌릴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몰입의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아니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능력은 자기 삶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애써 노력하고 훌륭한 텍스트를 선별하고 깊이 사유하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이 자길 삶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 생물학, 인류학과 사회학이 동원된다. 그래도 번번이 실패하는 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 비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관찰과 실험이 필요하다. 지식과 관점이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다. 수학과 과학은 물질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단편 「프라시안 블루」는 허구의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다.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는 놀라움을 매일매일 전하고 있지 않은가. 반지하에서 숨진 일가족의 뉴스를 능가하는 픽션이 가능한가. 20세기에 벌어진 인류의 참상과 21세기의 일상이 겹친다. 누군가의 절규는 여전히 누군가의 돈과 권력과 맞바뀐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역사적 진실, 과학적 사실 사이와 사이의 공백을 메운다. 현실을 비틀어 소설을 만드는 대신, 과거를 뒤적여 빈틈을 이어붙이는 과정 또한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와 모치즈키 등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를 기릴 목적의 소설들은 아니다. 인류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건 현재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드라마틱한 과학사가 소설로 읽히는 느낌은 나비가 꿈을 꾸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자의 상상력이 재현되는 듯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현실일 뿐 소설이 아니듯. 그렇다면 현실같은 소설, 소설같은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비극은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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