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의 전범
조지 오웰은 1인 미디어다. 현장 르포에 능한 기자처럼 온몸으로 자신의 글을 밀고 나갔다. 버마, 파리, 카탈로니아의 현실을 묘사했고 20세기 초 그가 살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나는 왜 쓰는가』, 271쪽)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 글쓰기를 정치적 행위의 도구로 삼았다. 피를 토하며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1984』는 소설이라기보다 ‘과두 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보고서다.
모름지기 글쓰기는 현실에서 공중 부양한 채 대증요법으로 실현된 자기만족이나 달콤한 현실 도피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과 원초적 고독에 대한 글들이 넘치는, 자기 삶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 급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금-여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실 너머에 숨은 인간의 욕망, 세계의 본질에 천착한다. 그것은 물론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아쉬울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니 대안과 정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데쓰.
사랑과 이별조차 그 원인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정치 아닌 것이 없다는 정치 만능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할 수 없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정치는 인간의 삶에 투영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과 사유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일기조차 사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또 다른 윈스턴과 줄리아처럼 체제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명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발원지라고 지적한다. 20세기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현대 사회의 가공할 폭력 장치를 작동하는 기원이 되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그림자와 망령은 세상을 떠돌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이중사고doublethink는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배반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는 착각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무의식과 맹목적 팬덤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대한 유혹은 오히려 85% 프롤에게 더 큰 추억으로 남은 게 아닐까.
오세아니아의 내부자와 외부자는 누구일까. 빅브라더보다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따라가 보자. 미셸 푸코가 날카롭게 분석한 『감시와 처벌』을 이 소설에 적용하면 그 대상은 프롤이 아니다. 애정부의 오브라이언 말대로 사상은 통제, 감시,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체주의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과 예속, 복종과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동석에게 수없이 데려갔을 ‘진실의 방’은 ‘101호’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폭력 앞에 굴복한 범죄자들의 자백은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윈스턴의 고백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자신을 잊고 완전히 동화되어 지난 40년간의 투쟁이 부질없었음을 자인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눈물이야말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당대 현실에 대한 환멸을 조지오웰은 이 한 권의 거대한 성인용 우화를 통해 냉정하게 곱씹는다. 애초에 희망 따위를 기대할 수 없으나, 노동자로 대표되는 프롤에게 미래를 엿보는 건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상, 아니 순수한 자연 상태의 동물적 욕망 때문이 아닌가.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상황 혹은 주어진 여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삶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같은 조지 오웰이 다르게 읽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구어와 신어의 대비가 보여주는 언어의 세계는 다소 혼란스럽다. 조지 오웰은 언어 분석철학자가 아니다. 허나, 세계 인식의 도구는 ‘언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명한 순간 철학의 제문제는 모두 해결했다고 선언하며 철학계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어newspeak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다. 마치 영어가 이제 만국 공통어가 되듯이.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영어의 어순, 단어, 표현은 한국어와 다르다. 사물에 대한 인식, 관계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건 개인적 성향과 태도가 아니라 언어일 때가 많다. 사상죄thought-crime, 2분 증오Two Minutes Hate, 표정죄facecrime, 독생ownlife, 선사적goodthinkful, 선사자goodthinker, 범죄 중지cirmestop 등 신어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며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암묵적 질서와 자기검열을 실행한다.
몸은 본능을 번역하고 말은 세계를 인식하며 글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이다. 조지 오웰에게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계 변혁을 위한 무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로 나타나는 개인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방법 또한 타인의 글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좋은 책을 골라 인식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주장을 우리는 매일 확인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글자에 기대 시스템을 바꾸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을 찾아낸다. 누군가는 박수를, 또 누군가는 비난의 화살을 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아이러니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선언 앞에 독자들은 침묵한다. 자신이 이중사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중사고가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신념으로 굳은 생각, 바뀌지 않는 태도가 이중사고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한 확증편향과 내로남불의 확장판이 이중사고다. 언어가 담은 모순과 그 의미를 포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 안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최음제가 바로 이중사고다.
자유와 행복, 그 모순된 양가 감정
이 소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스물네 번 등장한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 노잼 소설에서도 행복은 여전한 키워드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행복과 원시상태의 자유라는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고 자유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안전과 평화를 제공받는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행복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일까.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는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한없는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현대판 빅브라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구글 창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네이버 검색창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인터넷 쇼핑, 교통 카드, 위치 정보, 쿠키 정보 ……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은 모두 빅브라더의 흐믓한 미소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편안한 일상을 즐긴다. 20세기 중반 조지 오웰이 바라본 현실과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니 오히려 빅브라더가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과 일상이 알고리즘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져 자신의 욕망조차 통제받고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유의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이중사고로 무장한 채, 긴 장마와 폭풍 뒤의 고요함과 밝은 햇살을 즐기면 그만이다.